〈 172화 〉[라쿤맨 비기닝]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아무리 이쪽에는 미녀가 두명인데다 어디까지나 나는 피해자고 정상참작의 여지는 충분히 있는데다 약하긴 해도 폭행 당하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가해자가 될 여지는 없다.
언쟁을 벌인건 어차피 CCTV에도 기록되지 않고 남은건 증인들 뿐인데 사장님이나 손님이나 전부 아군이다. 그 누구도 들으라는 듯이 쌍욕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렸던 노숙자를 편 들어줄 사람은 없다.
밥도 얼추 다 먹었고 기분도 잡쳤으니 나가기로 했다. 계산하면서 내가 아까 망가트렸던 밥공기 값도 같이 계산하려다가 사장님이 손사래를 치면서 오히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취객은 가끔 있는데 저런 손님은 처음이네요"
"뭐,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애초에 돈도 없이 먹는 사람을 손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죠. 저도 자영업 하니까 사장님 심정 이해 갑니다"
"음? 아까 어디 회사 사장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취미로 치킨집이나 하고 있어요. 지금은 아는 사람한테 맡겼지만요"
"아, 그러시군요"
우리 먹은 것도 돈 안받으려고 하는거 억지로 떠맞기듯 해서 겨우 계산했다. 저런 사람이 성공해야 좋은 세상이 되는데......그 반대인 사람이 더 많으니까 세상이 이 모양이다.
마무리가 잡쳤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들어가서 TV나 보면서 하루 마무리하면 그래도 어느정도 기분은 나아지겠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예진이가 슬쩍 말했다.
".......아저씨가 그 사람 죽이는줄 알고 조마조마 했어요"
"설마, 나라고 막 그러지는 않아"
교도소 보낼 생각이지만 죽일 생각을 하지 않은건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환생자다. 즉, 사람은 누구나 사후에 환생을 한다는 소리다.
지금 그놈을 죽인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은 다음 생이 더 나은 삶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개념도 없는 저딴 인간 쓰레기는 다음 생이 적어도 지금보단 나을 가능성이 높다.
거 참 저거 하나만큼은 장점이네. 등신.
"어, 음......그러면 죽은 뒤에 천국 같은거는 없어요? 정말로? 기독교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고 불교가 진짜예요?"
"그렇다고 뭐 하나가 진짜라고 말하긴 그래. 다 보면 지옥만 있는데도 있고, 천국이 있는데도 있거든. 난 예전에 예수님도 직접 봤는데 뭐"
"진짜요?!"
누군가 예수님보다 나자렛의 몽키스패너가 아니냐는 농담이 있었긴 한데. 실제로 그런 별명은 없었다.
대신 예루살렘의 붉은 채찍이라고 불렸지. 신전에서 장사하는 새끼들을 채찍으로 존나 패다가 채찍이 피로 물들어서 붙은 별명이다.
나는 신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지만 신으로서가 아니라 개개인으로서 알고 지내는거라면 친구까지도 허용이 가능하다. 갓-루리루리도 그래서 신인데도 불구하고 나와 친하며 저어기 일본쪽의 신인 스사노오와도 오랜 친구 사이다.
그런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 사람이였......아니, 신? 인간? 음, 이건 애매한 문제인데. 신의 아들인데 인간으로 태어나고 죽었지만 부활하고 그 뒤에는 신으로 모셔지고.
애매한 이야기니까 그 뒤는 신학자들에게 넘기자. 내가 교황님도 아닌데 그거 생각해서 뭐하냐. 아무튼 내가 아는 예수는 인간이였다. 이야기 끝.
"세상마다 달라서 죽지 않으면 어떤 식인지 몰라. 하지만 지옥이나 천국 둘 다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세상 착하게 살아야 하는건 맞지"
"왜요?"
"안그러면 존나 고통 받는 수가 있으니까"
악업을 쌓아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자는, 설령 지옥이 있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 내가 전에 가이아 교단 교주를 처넣었던 심연으로 가게 된다.
거기랑 비교하면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은 좀 뜨거운 사우나에 불과하다. 억겁의 고통을 현실의 시간보다 느린 시간축에서 더욱 오래 견뎌야 하고 결국에는 구원조차 없다.
구원이란 놈은 생각보다 편파적이라서 나쁜놈에게 내밀어줄 손도 없다고.
"......뭔가 세상의 불합리함을 알게 된것 같아요"
"어디가 불합리한데. 사후 시스템? 천국 같은거 없는게?"
"그런 것도 있지만.....그래도 죽은 뒤에는 뭔가 다른게 있을거란 생각도 했거든요"
"착하게 살면 천국 가서 평생 행복하고 그런거?"
"네"
"어떻게 보면 구원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말이야......천국 같은 어설픈게 있는 것보다 환생이 나아. 어지간하면 다음 생으로 넘어갈 때 기억은 사라지니까"
"그 예외가 가끔 희귀하게 있는게 그게 저희 아닙니까?"
"예시가 두명이나 눈앞에 있는건 솔직히 좀 희귀하긴 하지"
환생 다회차인 나와 다르게 시온도 환생자이긴 하지만 이제야 2회차다. 단지 수명이 무한인 종족으로 환생해서 그런거지.
사실상 시온은 운명의 절대자가 만든거나 다름없는 존재다. 전생도 평범한데 오로지 나와 만나기 위해서 인과율을 조작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여태까지 길고 긴 환생도 시온 없었다면 진작에 끝났을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의 태반이 시온 덕분인데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아니면 어린 나이에 사고나 불행으로 죽은 사람들에게는 윤회가 축복이지. 다음 기회가 있다는거니까. 뭐더라......전에 어떤 영화 중에서 사후 세계의 존재를 확인해서 그 여파가 나오는 영화도 있던데. 이번이랑 경우가 다르더라도 한번 찾아봐"
"그런 영화도 있어요?"
"응, 나는 은근히 그런 영화가 좋더라"
나도 나름 철학적인걸 본다. 문과라서 그런지 생각을 많이 해야하는 영화도 좋아한다. 중간에 복선 같은걸 치밀하게 넣는 영화도 그렇지.
아리 애스터의 유전이나 미드소마 같은거 말이다. 그 감독 작품은 기분 나쁨과 호러, 복선이 공존해서 상당히 좋아한다.
"이번에 꽤나 욕보긴 했지만 다음에는 좀 더 무난하게 가자. 영화라도 보러 가던가 말이야"
"아, 그거 괜찮겠네요. 요즘 영화가 뭐가 나왔더라....."
"나는 러브 코미디만 빼면 대부분 좋아하니까 영화 선택은 잘 해두렴"
오늘 자꾸 뭐 같은 경우만 일어나서 트러블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넘어가지 못할 것도 없다.
......저번에 운명의 절대자에게 아랫도리에 거미줄 친 년이라고 해서 꽤나 빡친 모양인데 이 정도로 얼추 화가 풀렸을거다.
그년이랑 내가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 이 정도도 모르겠냐.
"다음 주에 스케쥴 잡을거라면 저한테 미리 말하십시오. 따로 일 있어서 다른 날 일정 잡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할 일 있다고 했지.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닙니다"
"가기 귀찮아 하는 투가 팍팍 나는데 별일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천생 집순이인 시온이지만 그래도 놀러 나가는건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면 그건 사람 만나러 가는 일이 분명하다.
"사업 때문에 그래?"
"요즘 너무 놀아서 일은 대부분 김 변호사님에게 대리 맡겨서 해결하다보니......"
"어지간한 일이라면 네가 그렇게 반응할리 없고. 무슨 일인데?"
"사업적인 일인데.....일 자체는 그리 귀찮은게 아닌데 만나는 대상이 문제입니다"
"누군데?"
"대성 그룹입니다"
".........."
일단은 우리나라 1순위에 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기업이다. 세계로 나간다면 모를까 적어도 이 나라에서 살려면 밉보여서 좋을거 없는 기업이기도 하다.
시온이니까 물론 사업적인 일 때문에 인연을 맺고 있겠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번에 잠실 쪽의 놀이공원 같다가 얽혔던 그 새끼 때문이다.
"제가 따로 반도체 기술 특허낸게 몇개 있어서 그거 때문에 만나봐야 합니다"
"하필이면 또 반도체 특허냐"
"그래서 그렇습니다. 얼굴을 비쳐야 하니 문제입니다"
저번에 버진 그룹이랑 이야기 했던 우주 개발 쪽 특허라면 또 모른다.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주 개발은 아직 크게 돈이 되는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대리인을 보내서 계약을 맺어도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반도체 같은 분야에 들어서면 꽤나 귀찮아진다. 요즘 전자기기에 반도체 안들어가는 물건이 없으니 비중이 다를 수 밖에.
"아무리 미루고 미뤄도 1년에 한번 정도는 만나봐야 하는데......하필이면 이번에 대성 그룹 회장 생일까지 겹쳐 있습니다"
"집순이 특, 집에서 나가야 하는 일은 한번에 해결함"
"생일 축하 대충 해주고, 적당히 로열티 조정하고 계약하면 그만입니다"
"근데 특허 로열티 계약을 매년 갱신해? 네 성격이라면 한번에 몇년 짜리로 해둬서 최대한 귀찮은 일 피하려고 할텐데"
시온에 대해서라면 내가 모르는 일이 없다. 어차피 돈 벌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당장 큰 돈 필요한거 아니라면 분명 나중에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한번에 년 단위의 계약을 맺는게 보통이다.
"대성 그룹이랑 맺은 로열티 계약은 요율실시료.....그러니까 판매가격의 몇 퍼센트를 받는게 아니라 정액기술료입니다. 즉 한번에 돈을 받는 대신에 매출이 얼마다 되던 그 이상의 돈을 받지 않기로 한겁니다"
"왜 그렇게 했어?"
".......엿 좀 먹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트러블이 조금 있어서. 보통 퍼센티지로 받는 식이라면 기업이나 받는 쪽이나 이득이지만 반대로 정액기술료로 받으면 둘 다 손해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더 많은 로열티를 놓치는 셈이고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 운용해야 할 자금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손해를 입히더라도 엿먹여줄 일이 있었나 보구나"
내가 군대 갈 때 쯤 시온이 지구에 도착했으니 대충 2년 정도에 사회에 영향력을 쌓았다는 소리다. 그 사이에 트러블이 없었을리 없으니 뭔가 있었을게 뻔하다.
그러고 보니 2년 내에 그쪽 관련의 큰 사건이라면 대성 그룹 회장이 바뀌긴 했었는데......일단 명목상으로는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한다고 했는데 혹시 모른다.
"혼자 갈 생각은 아니지?"
"당신도 갈겁니까?"
"내가 그런 자리 싫어해도 지옥길은 같이 가야 외롭지 않은 법이지. 게다가 그 새끼도 분명 올게 뻔한데 그 새끼가 너한테 찝쩍거리는 꼴은 못봐"
다른 사람이 지옥 간다면 손이라도 흔들어주겠지만 시온이 간다면 염라대왕 멱살 잡고 탈탈 털어서라도 같은 지옥을 가야하지 않겠냐.
물론 지옥 견학도 해봐서 아는 염라대왕이 있긴 한데 그 새끼 존나 쌔......게다가 나랑 비슷한 타입이라 싸우기도 존나 힘들어. 한번 싸웠다가 무승부 났다. 그나마도 저쪽이 봐준거고.
"근데 내가 그런 파티 갈 수 있으려나"
"원래 그런데는 파트너 동반인 경우가 많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요?"
"예진아, 세상에는 오늘 봤던 사람만 있는건 아니란다"
"무슨 뜻이예요?"
우리가 국밥집에서 봤던 그놈만큼 돈 없고 개념없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다. 돈이 있어도 오히려 추잡스러운 사람도 수없이 많다.
상당수의 기업인들이 거기에 속한다. 만약 정직한 기업인만 고른다 하더라도 그 허들을 상당히 낮추지 않는 이상 한줌도 되지 않을거라는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사람의 본성을 알아보는데는 권력과 돈을 쥐어주면 된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게 오죽할까.
저번에 본 그 재벌 2세 새끼도 그렇다. 임자 있고 충분히 거부 의사를 표하는 사람에게 찝쩍대는 일은 보통 사람은 안한다. 그 예시로 전에 곱창 집 갔을 때 반쯤 꽐라가 되서 시온에게 번호좀 알려달라고 했던 남자가 있다.
그때 그는 취해서 이성이 반쯤 날아갔는데 임자 있다고 하니까 쿨하게 갔다.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통은 그런게 상식이다.
"가지고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야. 너는 되도록이면 그런 새끼들이랑은 인연맺지 말고 살아라. 알고 지내서 이득보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으니까"
"아저씨가 말하는 사회 경험은 안좋은게 태반이네요"
"그런 놈들을 자주 봤거든. 그리고 나도 마냥 그런 놈들만 보고 싶은게 아니야"
직업이 직업인 만큼 그런 놈들이 주로 눈에 띄이기 마련이지.
아무튼 대충 다음주라고 했으니까 적당히 시간 비워둬야겠다. 그런 파티라면 나름의 드레스 코드도 있을텐데.......집에 사뒀던 양복이 어디있더라?
시온이야 뭘 입어도 낫지만 나는 양복을 입어야 그나마 동네 양아치에서 마피아나 야쿠자 정도로 바뀔 뿐이다. 여자로 환생하면 그나마 모델쯤은 될텐데 남자여야 부부생활을 하니까 솔직히 이편이 낫다.
"드디어 도착. 오늘 하루는 한거 별거 없는데 왜 이렇게 기냐"
"트러블이 많아서 그런겁니다"
"그러게. 앞으로는 그런 트러블 없었으면 참 좋겠다"
집에 도착해서 나는 일단 주차부터 한 뒤에 다시금 걸어 들어왔다. 우리 집은 다 좋은데 집에 주차장이 없어서 문제야.
그렇다고 주차장으로 쓰겠다고 상가 건물 하나를 사들인 우리 마누라도 문제지만 말이야.......뭐 어때!
오늘 하루는 대충 TV나 보면서 수다 좀 떨다가 마무리 하면 그만이다. 토요일 저녁에 하는 예능이 뭐가 있더라.
집에 들어가서 보니까 시온이랑 예진이가 먼저 TV를 키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채널이 예능 채널이 아니라 뉴스 채널로 틀어져 있었다.
"왠 뉴스?"
"......보시면 압니다"
뉴스는 막 시작했지만 중요한 소식인지 처음부터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에 비치는 사람은 여성이였다. 개량된 치파오를 입어 단정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상당한 미녀였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여성이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이 아니라 화면 너머에서도 보이는 내면의 힘은 상당하다. 단련된 주먹과 근육들은 단순히 미녀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으로 이루어낸 결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이 들리지만 그것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설명이 화면 아래에 나오고 있었다.
[권룡여제 용화정!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방한 결정!!]
트러블은 만드는게 아니라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