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라쿤맨 비기닝]
당분간은 휴가다. 솔직히 러시아까지 다녀왔겠다 아틀라스를 조졌으니 남은건 중국 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은 생각보다 가기 귀찮단 말이야.
난데없이 하는 말이지만 내 스승님의 출신 국가는 중국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대충 옛날 옛적 스님이 백보신권 쓰고 마교가 흡정대법 쓰던 시대에서 2,3천년 정도 지난 과학 발전도가 거의 전무한 곳이지만 아무튼 일단 중국이기는 하다.
그런 인연도 있고 나도 무림에서 환생한 적도 있어서 중국어는 잘 하기에 가더라도 문제는 없지만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문제다.
아마 스승님도 중국이 이렇게 될걸 알았으면 홍위병인지 뭔지부터 목을 쳐버릴껄. 사람 죽이는 속도는 내가 더 위지만 가차없는데는 스승님이 허들이 낮다.
나야 길에서 죽빵을 맞아도 일단 경찰을 부르지만 스승님이라면 상대 목부터 자르고 본다. 보통은 그 사회의 윤리 질서와 사회 규범을 준수하는데 비해서 스승님은 얄짤 없었다.
그리고 스승님 가슴 존나 커.
아니, 내가 환생하면서 거유란 거유는 다 봤는데 그만한 거유를 넘어선 폭유는 성인용 만화에서 밖에 못봤다니까.
나도 여자로 환생하면 가슴이 아주 그냥 팔짱도 못낄 정도인데 그보다 더크면 어쩌자는거야.
아, 이야기가 딴데로 빠졌네. 아무튼 당분간은 휴가 겸 시온이랑 놀다가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러시아에서 한 일이나 탈모 치료제 때문에 여러가지로 당분간은 시끄러워서 잠자코 있어야 할 판이다.
"10월이 되어서 날씨가 한결 시원합니다"
"그러게. 여름에는 진저리 날 정도로 덥더니 가을 되니까 또 시원해지네"
".....사실 그것도 얼마 못가지 않아요? 금방 겨울이 올텐데. 우리나라는 여름이랑 겨울만 있잖아요"
"하긴, 사계절이 뚜렸하다는거 다 뻥이지"
아마 중국에 가는건 빨라도 다음주, 혹은 다다음주로 보인다. 한달은 외국에 있었는데 그 정도는 있다가 가야지.
평범한 가족처럼 거실에 모여 TV를 보고 있자니 꽤나 화목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요즘 애들은 핸드폰만 붙잡고 있기는 해도 그걸로 정규 프로그램을 보는것 보다 TV로 보는 편이 낫다. 화면도 크잖아.
예능 프로그램이나 보면서 한주 마무리도 하고.....아, 그렇다고 주말의 끝이 아니라 평일의 끝이다. 오늘은 불금이라고.
아무튼 이렇게 앉아서 가끔 이야기도 하면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면 조금씩은 사이가 깊어지는 법이다. 솔직히 내가 돌아다니면서 많이 못챙겨준 것도 있고.
"백리 오빠가 마스터 유저가 됐어요?! 정말?"
"응, 막 된거라 엄청 약하긴 해도 일단은 그럴껄"
"그래도 그게 어디예요. 막 공무원만 되도 연봉 엄청나잖아요"
"연봉은 제가 더 쩝니다"
"앗, 그러네"
이런 세상에서 돈은 우리 마누라에게 의미가 없다. 사실상 정당하게 벌지 않아도 세계의 모든 검은 돈을 빼돌려서 자기 계좌로 넣는다면 끝인데 돈이 그렇게 중요할리가.
물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근데 좀 불편해하긴 하지만.
"전 그래도 돈 많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면 콜라 병뚜껑이라도 모아두던가. 돈이란건 사회의 형태에 따라서 변하는거니까 세상이 멸망하면 그런 것도 돈이 된단다"
"설마 그 정도로 세상이 망하겠어요?"
"그래도 혹시 아니?"
개인적으로 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세상을 좋아한다. 인간성의 끝을 볼 수 있거든.
인간성을 버리고 인육을 먹고 강간을 일삼은 쓰레기 새끼들도 넘쳐나지만, 반대로 그런 세상이더라도 선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런걸 볼 수 있기에 꽤 좋아한다.
시온이랑 종종 그런 세상을 여행하다보면 나름 즐겁다. 가끔 가다가 뮤턴트 비슷한거 잡아서 구워먹으면 추억도 되고 좋다.
"너는 별일 없고? 막 예지 능력이 갑자기 발동한다거나 그런건 없지?"
"네, 괜찮아요. 아무래도 저는 차원진 감지기와 접촉해야 미래를 볼 수 있는 모양이예요. 평소에 그거랑 닿지만 않으면 문제 없어요"
"다행이네"
문득 나는 백리의 영혼의 가이아 포스 회로 너머에 있던 초월자의 존재를 떠올렸다.
갓-루리루리가 시온에게 말한걸 전해 듣기를, 예진이의 예지 능력은 본인이 연산하는게 아니라 수신 받는것에 가깝다고 한다. 그 정보를 처리하는데 연산이 필요한거라 그렇게 정신을 잃는것 같은데 그렇다면 결국 그녀의 예지도 그 초월자가 근원라는 소리가 된다.
그 존재가 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하는 일이 지극히 인간적이다. 적성종에 대응해 이능력 하나 없던 지구에 이능력을 만들어주고, 예진이나 미국의 엘리사 니어 같은 예지 능력자에게 연산 데이터를 보내주고, 그러는걸 생각하면 인간을 생각하는 좋은 초월자다.
보통의 초월자는 냅두거나 직접 도와주니까 아마도 가이아 같은 역할을 하는 관리자 같은 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녀석이라면 딱히 내가 태클 걸 여지가 없다. 오히려 그리스 신 같은 인간적인 면이 너무 넘쳐서 탈인 신이라면 내자 진작에 목을 땄다.
근데 신 같은건 주로 라이트 훅에 약하더라. 선빵 맞아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내일이면 주말인데 어디 놀러가볼까?"
"차에 자리 있어요? 아, 여름 휴가 때 썼던 스타렉스가 있구나?"
"이래서 다인승이 좋다니까. 람보르기니가 폼은 나도 여행 갈 때는 영 좋지 않지"
애초에 람보르기니 탈 정도의 재력이 있다면 차가 그거 한대만 있진 않을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연한걸 이제야 깨달았네.
아무튼 간만에 돌아왔는데 여행이나 가보자. 이번에는 지인들이랑 가는거 말고 우리들끼리만.
시온이랑 단 둘이 가는건 이미 러시아에서 그랬으니까 예진이랑 같이 가서 간만에 노는게 좋을것 같다. 그런데 어디가 좋지?
"여기 어때요?"
"어딘데? 어, 광명동굴? 이런데 좋아해?"
예진이가 핸드폰을 내밀어 보여준 곳은 광명시에 있는 광명동굴이다. 가끔 지나가다가 한국 100대 관광지에 들어갔다느니 어쩌구 하는걸 본적 있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거리는 막 강원도로 놀러가는 것보다 가깝기는 해도 여고생이 놀러갈만한 곳은 아니다. 가족끼리 간다고 하면 나쁘지는 않지만 본인이 직접 가겠다고 하는건 솔직히 의외다.
보통은 좀 더 번화가 같은 곳에 가서 쇼핑같은걸 하지 않나? 하루 정도는 짐꾼이 되어줄 용의는 있었는데.
"딱히 좋아하는건 아닌데 이번에 바비인형 특별전을 연다고 하거든요. 인형 같은거 좋아해서요"
"그래?"
동굴 내부를 꾸며둔 것 외에도 따로 외부에서 지원을 받아서 이벤트나 관광 요소를 추가로 관람할 수 있는 모양이다.
"난 동굴하면 뭐 이상한 귀신이나 요괴 같은거 튀어나오는 것 밖에 생각 안나는데"
"그런데 진짜로 그런게 있어요? 다 뻥 같은거 아니예요?"
"진짜로 귀신이나 요괴는 있어. 다만 현대 사회는 요괴 같은게 살아가기 어렵고. 귀신은 대부분 저승으로 떠나니까 없는거지만"
요괴와 신은 상반되지만 동전의 양면과 비슷하다. 인간의 공포를 먹으면 요괴가, 경외를 얻는다면 신이 된다. 반대로 신이 공포를 먹게 되면 재앙신이나 마신 계열로 빠지면서 심하면 악마 계통으로 떨어지고, 요괴라도 경외를 얻어 신앙이 생기면 신이 될 수 있다.
물론 현대 사회는 대부분 과학적으로 사안이 증명되어서 요괴를 두려워 하는 사람이 없다. 있어도 적성종이 더 무섭기 때문에 생길 건덕지가 없어서 아마 옛날옛적에 멸종했을거다.
애초에 이능력이 20년 전에 처음 생긴 세상에 요괴라는게 생길리가 없다. 있었다면 진작에 있었지.
대신 귀신은 있다. 영력이란건 영혼만 있다면 쓸 수 있는 기본적인 이능력이다. 다만 이건 적성을 타고나서 영혼 있다고 다 쓰진 못한다. 요컨데 누구나 쓸수는 있어도 아무나 못쓰는거라던가.
아마 전 세계를 뒤져보면 어디 흉가라던가 사연 있는 곳에는 영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영안 뜨면 길에서 한둘 쯤은 발견하겠지만......그런짓 하면 식스센스처럼 여러 영혼들이 도와달라고 징징거린다.
"아! 저 그런거 좋아해요. 막 괴물 같은거 나오는거. 그래서 시설 다닐 때도 TV에서 귀신이나 요괴 나오는 만화 자주 봤어요"
"아, 그거 말하는거구나?"
"아저씨도 아세요? 그......"
"학교괴담?"
"신비아파트요"
"............."
세대차이가 진득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2020년이다. 예진이가 고2니까 아마 중학교 쯤에는 그걸 봤겠지.
사실 나도 이번 생에서는 TV에서 못봤다. 그거 방영 년도가 2000년대 초인데 그 시절이면 나는 아직도 전생 기억 각성도 못하고 시설에 맡겨져 있었을때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거 보니까 세대 차이가.......아니, 학교괴담 모르니?
"모르는데요.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요즘 것들이 말이야! 응? 학교괴담도 모르는 것들이 귀신이랑 요괴를 논하고 말이야! 쉬이벌, 마지막 화의 다크시니 보고 질질 짜본적도 없는것들이!"
"왜 갑자기 아재체가 되었어요?!"
"원래 아재입니다"
"아, 그런데 아주머니는 그런 공포물 별로 안좋아해요?"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왜요?"
"냅둬. 시온은 유령이나 귀신을 무서워해"
"......? 아주머니는 엄청 굉장한 과학 기술 같은거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귀신이 무서워요?"
"종특 비슷한거라"
일단 귀신은 간섭 계수가 높아서 일반적으로 접촉은 커녕 볼 수도 없다. 파장이 다르다고 할까......조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물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자. 물은 보이기는 해도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물리 내성이 높다. 의지를 쓸 수 있다면 퇴치는 쉽지만 하논이란 종족은 물리 특화인 대신에 이능력도 못배우고 그쪽 내성이 적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초월자 기준으로. 지나가던 악령이 시온한테 빙의하려고 했다간 오히려 영혼의 무게에 짓눌려 소멸될거다.
그렇기 때문에 시온은 귀신이나 유령을 무서워한다. 이게 의외로 귀여운데 좀비물 같은 게임은 엄청 잘하는 주제에 정작 사일런트 힐이나 령 제로 시리즈 같은걸 하면 감정 변화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겁하며 반응한다.
"그래도 너 학교괴담은 좋아했잖아"
"그거야 그거 만든 회사가 야근병동이랑 같은 회사.....읍읍!!"
"으아아아!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그리고 내 추억을 더럽히지 마!"
"당신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림체만 봐도 같은데!"
"심증만 있는 것과 확인 도장을 찍는건 다르지!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그렇긴 합니다. 그거 생각하면 요즘 공포물은 영....."
"시,신비 아파트도 재미있거든요?"
"머리에 뿔달린게 어딜 봐서 도깨비입니까?"
"응? 도깨비는 원래 뿔달린거 아니예요?"
"꼬비꼬비가 애들 다 망쳐놨구나! 고증이란건 쓸데없이 맛있어 보이는 메밀묵밖에 없더니!"
"꼬비꼬비는 또 뭐예요?"
"으아아아악!"
도깨비라는 종족은 한국 토종 요괴......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요괴는 아니고 정령 비슷한 쪽에 가깝다. 공포를 먹고 사는건 아니니까.
모습은 그때마다 다르기는 해도 보통은 건장한 남성의 형태를 띄고 있다. 하지만 뿔이 돋거나 하는건 일본의 오니의 특징이다. 아마 일제강점기의 영향 때문에 그런 인식이 생긴게 아닐까?
보통은 꼬비꼬비에 나온 오래된 그릇이나 잡기들이 변해서 태어나는걸로 보이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식으로 나오는 도깨비도 있고 때로는 신적인 존재에 가깝거나 자연재해의 의인화에도 태어나기도 한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아는 놈 동료 중에 도깨비도 있고 오니도 있거든. 애초에 히비키의 환생 전 초월자 시절이 귀왕(鬼王)이라 불릴 오니인 슈텐도지였는데 그것도 알고 있는 내가 모를리가 없지.
"아무튼 그럼 내일은 광명동굴로 놀러가볼까. 음, 가는 길은 네비 찍고 가면 될거고. 개장이 몇시야?"
"아, 그건 9시예요"
"기왕이면 일찍 들어가는 편이 낫겠지? 알람은 8시 정도로 맞춰둘까"
어차피 준비하는거 생각해도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다. 고등학생이면 6시 쯤에는 일어나서 준비하고 등교 준비하니까. 애들은 잠을 많이 자야하는데 정작 애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등교 시간을 빡빡하게 잡는단 말이야. 그나마 우리집은 내가 태워다주니까 다행이고.
여기서 동굴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것 같다. 버스는 타고 거기까지 가는 노선이 있는것 같고, 광명역 근처라서 생각외로 가깝다.
주말이라서 차가 막힐걸 생각해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거다. 일단 거기 가서 구경 하고......주변에 따로 식당 같은건 당연히 있을테니까 점심은 거기서 먹을까?
즉석해서 여행 계획을 잡았지만 세세한 것은 지금 여기서 얼추 정했다. 가서 하고 싶은거 하면 되는거고, 이 멤버로 가는건 처음이니까 재미있을것 같다.
"오, 귀신의 집 비스무리한 것도 있네"
"그건 따로 돈 내야 한다던데요?"
"돈도 아까우니 그런데는 들어가지 맙시다. 어차피 그런 장소에 만들어놓은 시설은 생각보다 볼것도 없고 퀼리티도 떨어지니까 괜히 돈만 쓰고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고 무시하는게 답이니까 들어가지 않을겁니다"
"아주머니가 귀신 같은거 무서워 했다는건 생각보다 귀엽네요. 평소 모습 보면 막 흉가 같은데 들어가서 무덤덤하게 한바퀴 돌다 나올것 같은데"
"야, 그랬다면 큰일나"
우리 마누라가 귀신 보고 기겁하는것 까지는 문제가 안된다.
자기 방에서 컴퓨터 하다가 바퀴벌레 보고 기겁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그것도 충분히 공포스럽긴 하지만......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면 집을 태워서라도 박멸해야 하는 법입니다"
귀신 잡으려고 초신성 폭발이나 소형 블랙홀 같은걸 날려댈것 같아서 문제다.
물론 그 정도면 귀신도 죽지. 간섭 계수가 높아서 물리 내성이 강해도 수준이 있는데.
대신 지구도 죽는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