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라쿤맨 비기닝]
일단 남은 치킨과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아니 정작 이야기 하려고 만든 자리가 백리 마스터 유저 등극 축하 자리가 되었다.
"서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고. 마스터 유저니 해도 내가 보기에는 고만고만해 보이는데"
"뭐야, 나루쩌둥이야?"
"그 정도로 인간성이 날아가진 않았어. 그래도 요즘 대마왕질 하는거 생각하면 옛날부터 인간성이 많아 없어진것 같기는 해도"
"그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 있다는 증거야. 날 봐봐. 난 살인해도 죄책감 없잖아"
"천살성 오졌다"
"응, 내 스승님의 스승님이 느그 형"
"이 새끼가 패드립이라니!"
"그럼 니네 형 정신연령 10살짜리 수인이랑 결혼한 대마법사라고 해주랴?"
"동정 대마법사보단 낫지"
"시바, 그 시절 생각나네. 형제가 차례대로 동정 대마법사, 동정 대마왕, 동정용왕, 동정령왕이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숙맥은 우리집 유전이라 진도가 늦어서 그래"
"백리야. 들었지? 아무리 숙맥인 새끼라도 힘 쌔고 성격 좋으면 여자 사귈 수 있으니까 자신감 가져라!"
"아, 갑자기 왜 뼈를 때리고 그래요?!"
"형이 하는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여자로 환생하면 진짜 니 동정 떼줄께. 물론 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지"
"역시 그거 구라였잖아요!!!"
"그걸 믿었음? 환생자 킥!"
환생자인지라 성 정체성의 구분이 없어져서 딱히 여자로서 남자를 품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내가 박는 쪽도 아니고 박히는 쪽인데 백리 정도면 괜찮은 녀석이니까 성교육 시켜준다는 의미에서 동정 떼줄 용의가 있었다.
근데 백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지! 아무리 내가 일찍 죽어도 백리보단 오래 살껄!!!
낄낄거리면서 웃다보니 어느새 치킨이 다 떨어졌다.
술은 남아 있지만 깡술에 안주 없이 마시기에는 좀 그래서 일찍 자리를 접기로 했다. 백리고 퇴근해야 하니까 정리하는 것도 좀 도와주고.
"야, 팬텀 너는 카드 줄테니까 가서 형수님들 드릴 선물이나 사와. 아직 백화점 연 곳도 많으니까 거기 가는게 좋을거야"
"오, 땡큐. 근데 차는?"
"섀도우 드라이브는 뒀다가 폭폭 삶아서 곰탕 해먹을거야?"
"크으, 거기에 파송송 썰어서 소금 쳐서 먹으면 개쩔지"
"난 곰탕은 군대 곰탕 생각나서 영. 차라리 설렁탕이 낫지"
"난 미필이라 몰라"
"뭐! 대마왕 새끼가 지구에서 살아봤으면서 미필이야? 공익보다도 못한 새끼!! 넌 동사무소에서 잡일하는 공익한테도 사과해야 해!"
"고등학생 때 마계에 떨어져서 군대 못갔다고 새꺄!!!"
"하다못해 우리 백리도 취사병으로 근무했는데! 평범한 지구인보다 못한 새끼!"
"군대 다녀온걸로 군부심 쩌네"
"쨈 안발린 군대리아를 먹어보지 않은자, 군대를 논하지 말라"
"시발 개 좆같은 새끼들이 앞에서 먼저 딸기쨈 다 퍼가서 맨빵에 먹었어요. 양심 없는 새끼들......!"
"우리 백리도 군대 이야기에 화내는거 보면 한국 남자 맞긴 한가보구나. 근데 넌 취사병 아니였니? 따로 뻬둔건?"
"지들이 가져가서 몰래 처먹었더라고요. 그리고 군대 다녀온 한국 남자가 화 안내면 그건 부처님이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죠"
"요즘도 군대에서 사람 죽고 그러디?"
"안그럴때가 있나요?"
조심한다 하더라도 매년 군대에서 사망자는 발생한다. 다만 양지로 나오는게 드물 뿐이지.
근데 그건 사고나 부주의로 발생하는거라 어쩔 수 없다. 기계가 전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사회도 아니고 피해가 없을리 없지.
하지만 좆같은 군대 밥은 참을 수가 없다......생계형 비리 어쩌고 하면서 세금 빼먹는 새끼들은 죄다 뒤져야 해.
"죽여주랴?"
슬쩍 팬텀이 무시무시한 말을 꺼냈다.
아니, 나도 사람 죽이지만 그거야 다음 기회가 있는거고. 팬텀이 죽이겠다는 말은 심연에 처넣어 빨래를 하겠다는 말과 같다. 웃자고 한 일은 죽자고 받아들이네. 식겁했다.
백리도 그걸 깨달았는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대마왕이 뭔짓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 반응이 나오는거다.
"뭐, 농담이야. 옛날에는 자주 그랬는데 본격적으로 대마왕 된 뒤로 그런적 거의 없어"
"있긴 있다는 소리네"
"이런 문명에 소집이 걸린 것도 아닌데 힘 쓸 필요 없지. 솔직이 우주 개발도 못한 문명권에 소집 걸려봐야 국가별로 진행하지 행성 단위로 하진 않을거 아니야"
"유토피아만 귀찮다고 다 날려버리려고 들껄"
"근데 한국은 어때? 탄핵 했냐?"
"했어"
"그러면 나 한표, 너 한표, 우리 딸 한표에 누리 한표 해서 총 4표네. 확실히 넘기겠다"
"안했으면 내가 진작에 조졌지"
"넌 일단 일제강점기에 환생하고 보자. 아니면 임진왜란이던가"
"일제강점기면 각시탈이 될거고 임진왜란이면 왕이 별로라서 싫어"
선조는 전쟁 터지기 전까지는 왕 노릇 잘했지만 왜구가 진격해오니까 수도 버리고 튄건 꼭 뭐시기 대통령이랑 똑같다.
런승만 너 말하는거야, 너. 시발 국가의 대표가 국민을 버리고 튀는게 말이 되냐. 광화문 광장에 끌어내서 목을 쳐도 할말이 없는 일이다.
"세상사 살면 좆같은 놈들 한두놈은 꼭 나오는 법이지. 내 아래에도 그런 놈들 종종 있어"
"하긴, 너네 애들은 마족이라 수명이 길어도 지금쯤이면 세대 바뀔 때가 됐으니까. 개기는 놈들이 좀 있지?"
"죄다 패서 숙청했지만"
"새끼, 독재자 수준하고는"
팬텀은 독재자다. 대마왕이라는 직위는 단순히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기도 해서 마계 하나를 다스리는 지배자다.
아래에 마왕들도 여럿 있지만 결국에는 강자존에 힘의 논리가 아직도 통용되는 곳이다. 실력에 자신 있다면 거기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뒤지지 않을 자신 있다면.
아무튼 마왕들(그 중에 형수님이 있는건 둘째쳐도) 다 모여도 대마왕에게는 쨉도 안되서 거의 일인독재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봤을 때에도 나름 괜찮은 사회라는걸 본다면 능력있는 독재자가 다스리면 그것만큼 좋은 정치도 없다는게 신빙성이 높아진다.
팬텀은 나처럼 빡대가리라 개쩌는 정치 실력을 보여주느니 하는 그런건 모른다. 경제를 힘으로 할 수 있을리 없으니 그걸 처리해야 하는데......팬텀이 독재자로서 가진 재능이 있다면 바로 능력있고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마족같은 성질 더러운 애들 데리고 여태까지 대마왕 해먹지. 아마 상대가 인간이였다면 오히려 반쯤 쓸어버리고 일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두분 진짜 몇살이세요?"
"글쎄, 100살 넘어간 뒤로 안세봤어"
"난 기본적으로 수천살. 몸만 20대지 뭐"
"그래도 20대가 한번씩 찾아온다는게 어디냐?"
"거 참 꼬우면 댁도 환생자 해보시던가요"
"환생한건 우리 일리엘 하나만으로 충분해"
"둘째 형수님 건강은 안녕하신지?"
"패드립 같은데 패드립 아닌 패드립이라. 뭐, 좋은거 많이 먹여서 괜찮아졌어. 아버지가 엘릭서 원액 주더라"
"시이발, 이래서 더러운 금수저 새끼들은 안돼. 울 마누라도 나한테 그거 먹여주겠다고 경매 나올 때마다 입찰하는데 상회입찰 하는 새끼들이 너무 많아"
"하나 구해주랴?"
"됐어. 마누라가 구해주는걸로 먹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
"뭔가 약 같은거예요?"
"게임 한두개쯤 해봤으면 엘릭서라는 포션 정도는 들어봤을거 아니야. 그냥 존나 쩌는 약이야"
엘릭서는 흔히 게임에서 잘 접할 수 있는대로 만병통치약이다. 부가적인 효과로는 한계치 조정. 만약 인간이 육체로 물리적인 한계를 넘을 수 없다면 엘릭서 마신 뒤에는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나는게 가능하다. 즉, 초월자에 도달하기 쉬워진다는 소리다.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창조의 절대자가 유일하고. 재료조차도 절대자의 피가 필요하다. 사실상 누구 조져서 얻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오는 분량도 한정되어 있는데다가 대부분 희석액이며 원액이 나오는건 엄청 드물다. 거기다가 부르는게 값이라서 차원적으로도 돈이 부족하지 않은 시온조차 자금에서 후달릴 수준이다.
"씁, 맥주만 마시니 질리네. 뭐 하나 꺼낼까?"
"뭘 꺼내려고?"
"그린드래곤 250년산"
그린 드래곤 한마리를 통째로 용술로 담가서 만든 그 술을? 말 그대로 독 들어간 독주인 그거를?
보통 사람은 마셔도 뒤지고 어지간한 초월자도 마실 생각 안하는 그거를? 물론 내가 마셔도 죽지는 않겠지만......
"존나 등신같은 생각이네......당장 마시자"
"훗, 그래야 대마왕답지"
"가게에 폐 끼칠만한 일은 하지 말아주세요?!"
쩌적! 하고 허공이 갈라지고 거기서 병 하나가 툭, 하고 떨어진다. 와인병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병인데, 병 자체의 색이 투명한데도 불구하고 소주병처럼 녹색을 띄고 있다. 즉, 내용물이 녹색이라는 뜻이다.
녹색 술도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저건 입맛이 떨어지는 녹색이다. 파릇파릇한 새싹 비빔밥의 녹색과 칙칙한 녹색은 다르잖아?
"마, 마실수는 있는거예요?"
"넌 못마셔. 마시면 죽거든"
"아, 이거 도수만 해도 98도가 넘어가니까 독 아니더라도 마시기 힘들껄. 요즘은 이런거 아니면 취하기도 힘들더라"
"드래곤 하트는 어짼겨?"
"잡것들이 가져갔당께"
"트랜스포머 1편 나온지 좀 되지 않았어요?"
병을 까서 맥주잔에다 싹 다 부었다. 양이 좀 많긴 해도 맥주잔이니까 꽤 많이 들어간다.
나중에 백리한테 이 잔은 버리라고 해야겠다. 씻어도 독기가 남아 있으면 큰일나. 사람 죽어.
"자, 그럼 건배!"
깡! 하고 묵직한 맥주잔이 부딪히면서 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쭉 마셔서 넘긴다.
술인데도 불구하고 쓰고 기름진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마치 걸죽한 사골 국물을 먹는 느낌이다. 아니, 차라리 사골 국물은 구수하기라도 하지.
무엇보다도 독기가 스물스물 올라온다. 나는 다행히도 인피니티 포스 코어를 구성하는 탐심무량기공을 배웠기 때문에 그 독기도 그대로 내공이나 가이아 포스 같은걸로 전환이 가능해서 후딱 바꿨다. 그대로 내 몸에 들어갔으면 결코 좋을일은 없는 수준의 독이였다.
"크으으으, 더럽게 맛없네. 간만에 꺼냈더니 더 그래"
"왜 이딴거 만들고 그래. 좀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잖아"
"그냥 통째로 술 담궈보고 싶어서. 가끔 형제들끼리 벌칙 게임할 때 마시면 좋아"
"다른건 몰라도 셋째가 극혐하겠군. 걔 드래곤이잖아"
"우리 집에서 나 다음으로 드래곤 킬 수 많은게 걘데 뭐"
백리가 슬쩍 내가 마신 맥주잔에 담긴 그린 드래곤 250년산을 보다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독기에 기겁을 하고 물러났다. 일반인이라면 공기를 마시는 것도 위험하지만 백리는 이제 마스터 유저니까 직접 마시지 않는 이상 괜찮다.
"어우, 이런걸 먹어요?"
"좀 삭힌 마유주 비슷한 느낌이야. 자주 마시면 괜찮더라"
"이런걸 자주 마실 수나 있고요?! 우엑, 잠깐 신선한 공기 좀 마시고 올께요!!"
백리가 독기 때문에 정신이 얼얼한지 잠깐 바깥으로 나갔다. 나와 팬텀은 잔에 남은 그린 드래곤 250년산을 마저 털어냈다.
역시 이거 맛 더럽네. 하다못해 좀 다듬고 술로 담그지.
"이 새끼는 우리 딸내미 건든 도마뱀 새끼거든. 그래서 손수 술로 담궈줬지"
"시엔느? 걔는 요즘 잘 지내?"
"우리 딸내미야 똑같지. 슬슬 결혼 생각해보라고 말해두긴 했는데. 언제 할지는 모르겠더라"
"걔 말고 딴 자식 좀 낳아봐. 애초에 시엔느는 친자식도 아니잖아"
"너도 마찬가지면서 뭘 그러냐"
"나야 영 불안해서 말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시온이랑 아직 아이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서다. 적어도 운명의 절대자가 하는 일이 얼추 마무리 되거나 내가 빠져서 안전이 보장되어야 생각해볼 생각이다.
팬텀은 그나마 낫다. 입양한 애지만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까.
......그 애가 4번째 대마왕인 지배의 대마왕인건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야, 그러고 보니까 네이처 가든산 요정눈물에 탈모 치료 효과 있는거 알았냐?"
"뭔소리야. 그거보다 그냥 탈모 치료제 사는편이 더 빠르고 싼데"
"아니, 전에 탈모 있는 아저씨가 그거 마시더니 머리가 확 자라서 그래"
"거 참 탈모 치료제도 없는 차원은 그걸 그런데 쓰냐"
"그래서 기술 좀 뿌렸어"
"올ㅋ"
"도대체 그 올ㅋ를 마지막으로 언제 들어봤지는 모르겠다. 추억 돋네"
이야기 하다가 슬슬 시간이 늦었다. 너무 밤이 깊어지면 돌아갈 때 선물 사갈 곳도 닫아버리니까 대강 마무리 하기로 했다.
백리가 나가 있는 동안에 가게를 정리했다. 어차피 염동력으로 하니까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 아, 그린 드래곤 250년산을 마셨던 맥주잔은 버리고.
"아무튼 난 간다. 다음에 보자. 사촌이랑은 잘 지내고"
"이 새끼 마지막에 폭탄을 집어넣네"
"걔 성격 좋은데 뭐 어때서"
"길현이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꺼려져서 그래"
사람 죽이는 놈하고 사람 구하는 놈하고 같을리가 없다. 명백히 누가 나쁜 놈이고 죽어 마땅한지는 당연한 일이다.
간만에 이야기 하기 편하고 잘 맞는 상대가 있어서 좋았다. 딱 오늘만큼만 같았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지.
"아 근데 한가지 물어보자"
"뭐?"
"저어기, 이 지구 침공하는 새끼들 문명은 어떻게 할거냐?"
이건 나와 팬텀으로서의 대화가 아니라 최흉의 대마왕과 최강의 대마왕으로서의 대화다. 장난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문명 하나와 수십억의 생명이 날아가는 일이다.
확신 자체는 있다. 아틀라스의 보스인 프로메테우스가 그 물증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나는 인간의 악함을 아는만큼 선함도 믿는다. 내가 직접 보고 갱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는 이상 문명의 심판은 없을거다.
"냅둬. 이번 소집은 내가 할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