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라쿤맨 비기닝]
세계를 구성하는 3대 물질은 에테르, 영자, 파편이며. 그 중에서 영자는 영혼을 이루는 최소 단위다.
영자는 감정에 호응하기에 영혼이 없는 자라도 마음만 있다면 그 마음에 영자가 이끌려 영혼을 만들게 된다. 주로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태어난 존재에게 그런식으로 생기곤 하는데 나도 몇번 본적 있다.
아무튼 백리의 영혼에 새겨진 가이아 포스의 회로를 찾았다. 이 회로 덕분에 백리가 세계 어디에 있던지 그의 몸에서 가이아 포스를 공급받는다.
"어.....말 해도 되요?"
"내가 집중하는거네 네가 집중해야 하는건 아니니까 괜찮아. 내공 불어넣어 주는 것도 아닌데 신경쓸 필요 없어"
"그러면 그거 찾았어요?"
"찾았어"
"근데 왜 포스량 같은게 정해져 있는거예요? 회로가 있으면 무한정 공급되는게 아니예요?"
"바가지에 물 붓는다고 무한정 들어가디?"
"아!"
회로가 있지만 회로의 크기도 있고 몸 자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도 있는 법이다. 물론 이건 영혼에 새겨진 회로라서 영혼 자체가 다듬어지지 않으면 전체적인 용량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이거 생각외로 괜찮네. 디메리트만 있는줄 알았는데 메리트도 있었다.
영혼이 다듬어진다는건 긍정적인 일이다. 영혼의 격이 올라간다는 소리인 만큼 다음 환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물론 마법이나 무공도 경지가 높아지면 그만큼 영혼의 격도 높아지지만, 가이아 포스처럼 쓰면 쓸수록 높아지는 것은 드물다.
"만든 놈이 나름 생각은 있어 보이는데......어디 안으로 들어가볼까"
"아니, 그런말 하지 마요?! 기분 나쁘거든요?!"
"나중에 여자로 환생하거든 가슴 만지게 해줄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그 때 쯤이면 전 죽는다니까요?!"
나는 회로 안쪽으로 실처럼 가늘게 꼬아 만든 의지를 침투시켜서 안으로 들어갔다.
육신의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에 들어선다. 현실의 의미가 없어지고 자아가 확실하지 못하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곳에는 밀도 높은 가이아 포스를 제외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가이아 포스는 한줌으로도 마스터 유저의 포스 총량을 가볍게 넘어섰다. 그런 공간이 드넓게 이어져 있으니 얼마나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
누군가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도 사방에서 넘쳐나는 고밀도의 가이아 포스 때문에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하다못해 회로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지금 백리의 회로에 비집어 넣은 의지의 가닥은 가는 실보다도 얇다. 애초에 의지라는 형태가 없는 것을 뽑아낸거라 두께의 의미도 없었다.
[너는.....]
그 존재는 나를 주시했다.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확실하게 와닿는다. 이런 초월자가 주시한다면 마스터 유저가 선택을 받았다는 느낌이 맞을 것이다.
나는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회로에 들어간 의지의 실의 크기를 좀 더 키웠다.
"으아아아아악?! 형?! 형?! 아파요?! 뭔가 엄청 아파요?!"
"쫌만 참아!! 구멍이 작아서 좀 넓히고 있는거니까!"
"야, 니들 뭔가 소리가 이상한거 알고 있냐? 여기 치킨집이 아니라 홍콩행 게이바였어?"
"넌 닥쳐!"
그리고 뚝, 하고 그 실이 끊겼다.
저쪽에서 선을 차단했다. 정확히는 회로에 락을 걸어둔것 같았다.
상당한 강도와 복잡함의 락이다. 어지간하면 힘으로 뚫어보겠는데 내 몸에 있는 회로도 아니고 백리의 회로로 그런짓을 했다가 영혼에 금이 갈 여지가 있었다.
"뭔가 얻은거 있냐?"
"누군가 있는건 확인 했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못봤지만"
나는 백리의 등에서 손을 땠다. 백리는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가슴팍이 아픈지 명치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로 저쪽에서 일방통행만 가능하게 락을 걸어두었을 것이다. 더 이상 회로를 통해서 역으로 침투하는 방법은 불가능하다.
백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포스 유저들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바보가 아니라면 하나만 막아둘리 없으니까.
"가이아 아니야?"
"가이아는 아니야. 있었으면 진작에 눈치 깠지"
지구의 관리신은 보편적으로 가이아라고 칭한다. 지구에 지성체가 생기기 시작하면 신이란 존재도 태어나니 필연적으로 가이아가 탄생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 지구에 가이아는 없다.
만약 있었다면 루루랑 싸울 때 얼굴이라도 비쳤지. 딴놈도 아니고 블러디어인데.
"하지만 아군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어. 가이아 포스가 적성종에게 특효인만큼 관심 자체가 없다면 이런 이능력을 일부러 만들어줄 필요가 없으니까"
"글쎄다. 난 신이라고 하면 주로 달 떨어트려서 세상 멸망시키려고 드는 놈 밖에 생각 안나는데"
"거 시발 이럴 때는 같은 신살자끼리 입 좀 다뭅시다"
백리는 끙끙거리면서 비틀거렸다. 몸 상태가 안좋아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큰 부상은 없다. 영혼도 멀쩡해서 일시적인 통증에 불과하다.
팬텀의 재생력도 있고, 혹시 모르지만 바로 앞에 팬텀이 있으니 괜찮다. 둘째 형수님이 한번 죽었던 뒤로 주구장창 사람 살리는 방법만 공부했으니까 여차할 때는 살릴 수 있다.
"어우, 엄청 아파요 이거.....윽"
"몸이나 영혼은 문제 없는데.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괜찮은거 맞죠 이거?"
"괜찮다니까 그러네......아마도"
"불안한 대사가 지나갔는데요 방금!!!"
문득 백리가 움켜쥐고 있었던 명치 부근을 두드렸다.
"어? 어? 방금 전만 해도 아팠는데 지금은 안아파요"
"나았나보네"
"큰일났으면 어떻게 했을건데요?"
"옆에 나보다 쌘 초월자가 있어서 괜찮아"
팬텀은 나보가 격이 한참 높다. 나랑 팬텀이 있으면 진짜 어지간한 일은 다 할 수 있다.
지구 정복이 뭐냐. 별 몇개 창조해서 거기서 살 수도 있을껄. 사람 하나 죽은건 큰일도 아니다.
"야, 근데 쟤 괜찮은거냐?"
"멀쩡하면 된거 아냐?"
"그게 아니라 회로가 넓어졌는데? 네가 아까 작은 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쑤셔넣어서 그래"
"비유가 좀 그렇다 야"
"니들 아까 한 대화가 더 그랬어 새꺄"
......하긴 좀 BL스러운 느낌이 나긴 했지. 부녀자들은 좋아했겠네.
기왕이면 나는 공으로 해주라. 수는 영 내 취향이 아니라서.
"어.....형, 근데 이거 괜찮은거 맞아요?"
"왜? 또 문제 있어?"
"포스량이 갑자기 늘었어요"
"........?"
스물스물, 백리의 몸에서 방출되는 가이아 포스의 양은 장난이 아니였다. 딱히 영안을 뜨지 않아도 일반인도 보일만큼 유형화 된 가이아 포스는 거의 마스터 유저에 비견될만큼 방대한 양을 자랑했다.
어쩔줄 몰라하다가 집중해서 가이아 포스를 갈무리하던 백리는 뭔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거나 목을 꺽어 몸을 풀어보기도 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야, 쟤 갑자기 영혼의 격이 올라갔는데"
"머임? 대체 머임??"
가이아 포스에는 영혼의 격을 올려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그게 어느정도 한계가 있겠지만......일정 수준이라면 충분히 단시간 내에 가능하다.
회로 너머에 있던 가이아 포스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쪽도 상당한 초월자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정 수준이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다.
"백리야"
"왜요?"
"마스터 유저 된거 축하한다"
"........?!?!"
나는 백리에게 박수쳐주면서 축하해 주었다.
* * * *
포스 유저의 영혼에 새겨진 가이아 포스의 회로는 내가 억지로 비집어서 넓혀서 그 크기가 넓어졌다. 마스터 유저의 회로를 보지 못해서 그 크기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포스량 자체만 본다면 비슷하니까 아마 얼추 그쯤 될거다.
"마스터 유저요? 제가요? 아니, 그럴리가......"
"영격도 높아지고 포스량도 늘고. 일단 수준만 봐서는 마스터 유저가 맞아"
"근데 저거 두번은 못쓰겠네?"
"그치"
이미 회로에 락이 걸려버렸다.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회로에 다시금 의지의 실을 쑤셔넣어봤자 들어가지 않는다.
락을 풀려고 해도 내가 두뇌파가 아니라서 해석하기 힘들고 힘으로 하기에는 백리의 영혼이 버티질 못한다. 심지어 마스터 유저 수준으로 영격이 오른 지금도.
"이, 이거 막 그거죠? 무협지에서 나오는 기연같은거?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연자여, 내 무공을 이어라! 하고 영단 먹고 무공 배우고 할때 그거?"
"얘 몇살인데 그시절 유행하던 기연을 예시로 드는거냐?"
"대충 맞잖아"
"아싸아아아아!!!!"
백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기뻐할만한 일은 아니다.
단시간에 갑자기 경지가 오른거라 적응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경험도 부족하다. 아마 마스터 유저 중에서 누가 상대던 백리가 질게 뻔한 일이다.
"게다가 갑작스런 성장은 부작용을 등반해"
"그 예시가 눈앞에 있으니까 확실히 와닿네"
".....씨, 갑자기 옛날 생각나서 개빡치네. 운명의 절대자 그 씨발년이"
팬텀은 서른 전에 로드가 될 정도로 미친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그 반동으로 자기 연인 하나 살릴 수 없는 야매 초월자가 되었다.
본디 못해도 수백년을 단련해 올라야 하는 경지를 단숨에 올랐기 때문에 경험과 지식이 미천해서 충분히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 하나 살리지 못했다.
로드는 인과율을 부담할 수 있는 존재다. 겨우 한사람 살린다고 죽을만한 초월자가 아니다. 그 부담을 온전히 질 수 있는데 정작 그 방법을 몰라서 연인을 떠나보냈다.
지금이야 다시 환생한 연인을 찾았다지만 그때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을게 뻔하다. 물어보면 죽은사람 살리는 방법 수십개는 그냥 알고 있을껄.
"백리야. 근데 너 그거 알려지면 골치 아파진다"
".....아, 그러네요"
내가 현실을 마주하게 하자 백리가 흥분이 식어서 대답했다.
일단 알려지면 마스터 유저를 양산할 수 있는건가?! 하고 달려들거나 마스터 유저가 된 백리를 영입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백리가 전장에 나서면 죽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경진 아저씨는 20년 전 대공황 시절부터 충분히 단련해서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 설령 같은 조건에서 싸워도 백리가 이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런 실력으로 나대봤자 닥쳐오는건 죽음 뿐이다. 특히나 인간형 적성종 같은게 튀어나오는 요즘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그걸 빠르게 숙련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노력이지"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네요"
그러다가 문득 팬텀이 옆에서 끼어들어서 말했다.
"근데 쟤 태극나선경 배운거 아니냐? 우리 형이 창안한 무공 맞지?"
"어떻게 알았어?"
"근육 발달이나 어설프게 태극의 묘리가 들어간 발걸음 보면 대충 눈치 까지. 그나저나 천지해경록이나 그런건 가르쳐주지 않고?"
"그건 수포자 못배우잖아"
"거 시발 문과는 나가 죽어야지"
한동안 나와 팬텀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와서 팬텀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태극나선경은 형이 만든 무공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거니까 계속 익히면 힘의 숙련에 큰 도움이 될거야. 태극이란 개념의 이치를 이해한다면 아마 상대가 없을껄?"
"이 나라 마스터 유저는 유색공명검 쓰더라"
"아, 말 좀 바꿀께. 상대가 한명쯤 있네. 근데 무슨색이야?"
"회색"
"시발, 옛날 생각나네"
태극나선경은 태극의 이치를 품은 무공이다. 이미 백리에게는 전부 전수했지만 이해하는건 본인 문제로 넘겨두었다.
하지만 지금같이 경지만 높아진 상태에서 연습하면 이해도가 빨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태극나선경의 이해는 경지의 완숙으로 통할 것이고.
"강해지고 싶다면 죽을 각오로 태극나선경만 파. 딴거 생각하지 말고"
"어.....힌트 같은거 주시면 안될까요?"
"형이 뭐라고 했더라......태초의 일원(一原)은 태극(太極)에 의해 음양(陰陽)으로 나뉜다고 했었나? 태극이란건 극히 유(流)한 힘을 지닌 개념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성질을 나누기도 하지. 그것은 분해에 가깝다고 했을거야. 그래서 그런지 우리 형은 멸룡을 처박아도 분해해서 상쇄하더라"
"백리야. 나보다 높은 초월자의 충고니까 영혼까지 새겨 들어라"
"형님들! 감사의 인사 오지게 박겠습니다!"
"요즘 애들은 인사도 이렇게 하냐?"
"아아, 이건 급식충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는 흔한 것이지"
"이 새끼 말투는 또 왜 그래?"
요즘 이세계물 말투로 해봤더니 이해를 못한다. 정작 당사자는 이고깽 주인공이면서 말이다.
이 새끼 왕년에 겪은 일을 글로 쓰면 아무리 압축해도 8권은 나올꺼야. 길면 그 두배는 나오겠지.
"요즘 이세계물은 대충 이래"
"거 시발 문명 초기화 사안이네"
.......지금 나 폭탄 하나 만든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