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라쿤맨 비기닝]
나는 대충 씻고 바깥으로 나왔다. 팬텀도 전신이 칠흑같은 모습에 눈만 붉은색 안광을 뿌려대는 모습은 어지간해서는 직시하기 어렵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니, 사실상 그게 본신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대로 바깥으로 나왔으면 대참사가 일어날껄. 저 모습을 평범한 사람이 보면 미쳐 발광하는게 눈에 선하다.
크툴루 느낌이 물씬 나지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쪽은 영구적인 광증이고 이쪽은 단발성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사회 붕괴가 심각해 보이지만.
"돌아가면 울 마누라들이 삐졌을게 확실한데 뭐라도 하나 사갈까"
"여자가 삐졌을 때는 선물이 확실하긴 한데. 돈은 있고?"
"여기 델타 캐슬 애들 파견 안됐어? 걔들 지원금 받으면 될텐데"
"몰라, 확인한적 없어"
차원간 문명 교류의 중점이나 다름없는 델타 캐슬은 아직 차원 교류 수준에 이르지 않은 문명에는 사람을 파견해서 관측하기도 한다. 개입은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관측만.
대마왕이 적었던 시절에는 차원 침략 같은 행동에 대처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대마왕들이 5명으로 늘어서 관측만 하기로 협약 맺었지만.
"돈 필요하면 빌려줄께. 어차피 돈은 많거든"
"오, 고맙다. 나중에 갚을께"
"고마우면 나중에 한턱 쏴"
팬텀은 가이아 교에서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나랑 비슷하지만 흔한 갈색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청년의 모습이다.
창조의 절대자 핏줄이라서 그런지 외모만 보면 여성스럽지만 남자의 체격이 있는지라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라는건 알 수 있다.
"뭘 사가는게 좋으려나"
"일단 먹을거. 맛있는거 먹으면 일단 화는 풀려. 그리고 꽃도 사가는게 좋고 반지 외의 작은 보석류도 하나쯤. 화려한거 말고 가벼운걸로"
"역시 연애 경험 많은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거 참 내가 연애 하면 척척박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척척석사까지는 되지"
"박사 과정 안밟음?"
"연애대학원생은 너무 끔찍해서....."
"앗, 아앗.....!"
은근 케미가 맞아서 서로 드립이 술술 나온다. 시온이 오로지 주차 용도로 사들인 상가 주차장에 세워둔 람보르기니를 끌고 우리 치킨집. 아니, 이제는 백리에게 다 맡겼으니까 백리네 치킨집으로 향한다.
점심 쯤에 들어와서 시온이랑 섹스하고, 시간이 어느새 오후가 되었지만 도착하면 거의 문 닫을 시간이 될거다. 아마 몇 마리 쯤 치킨이 남아 있을테니 그거 먹고 가게 마무리 하는거 도와주면 된다.
어차피 나도 백리를 만나긴 했어야 하는 일이다. 영국이랑 러시아에서 한 일 때문에 그동안 만나지 못했고, 갓-루리루리를 비롯해서 운명의 절대자까지 경고를 해주고 갔는데 한번 만나봐야지.
게다가 포스 유저로서 만나보야 하기도 하고. 영혼에 새겨진 회로를 탐색하려면 포스 유저가 필수니까.
"야, 차 좋은거 뽑았네. 람보르기니냐?"
"마누라가 뽑아준거야"
"쩐다. 나도 차 한대 살까"
"거 시발 성 있는 새끼가 차 있는 사람한테 할 소리냐. 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회쳐먹었다 새끼야"
"초장? 와사비 간장?"
"쌈장"
"맛잘알이네"
서로 요리 좋아하다보니 운전하면서 레시피 교환하다보니 금방 명동에 도착했다. 보통은 이 시간에도 운영하는 가게가 많지만 우리 가게는 슬슬 문 닫을 시간이다.
"아, 명동이야? 여기도 간만이네. 애초에 지구 와본게 얼마만인지....."
"정겨우면 종종 와보지 그래?"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지구는 그 느낌이 남아있지 않아. 꽤 많이 발전한데다 저지른 일이 있어서 오가기도 좀 그렇거든"
"하기사 맘에 안드는 새끼들 죄다 심연에 끌려가는걸 라이브로 보면 공포 영화가 따로없지. 꺼려지기도 하겠다"
마무리 하고 있는지 슬슬 정리 준비중이던 백리와 형식이가 보인다. 서애씨는 평소처럼 먼저 돌아간 것 같다.
뭐, 백리도 포스 유저도 멀쩡한 성인 남성 두명이면 작은 가게 청소하는건 그리 힘들지 않겠지.
"백리야, 형 왔다"
"어? 어쩐 일이세요? 어.......누구세요?"
백리는 나를 보고 뒤이어 내 옆에 있는 팬텀을 보았다. 일단 외모에는 놀랐지만 그 다음으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는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보통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감탄하는게 대부분이지만 그 외모가 인간에게서 동떨어져 있다면 경외하거나 경계한다. 백리는 그 중에서 후자였다.
내가 종종 해준 말이 있으니까 저래도 이상하진 않지만 실전에서 저럴줄은 몰랐네.
"애 잘 키웠네. 어디 가서 그냥 맞아 죽지는 않겠다"
"니 피 들어간 술도 먹였어"
"그래? 오래 살겠네"
정리를 하던 형식이가 나를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빠져서 일손 부족할까봐 여기에서 일하게 시켜줬는데 일 잘하는 모양이다.
"오, 어쩐 일이야?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고?"
"이쪽은 지인이야. 잠깐 한잔 하려고 왔는데. 가게 닫았어?"
"아직이야, 막 정리하려고 했거든. 잠깐만, 테이블 좀 닦고"
"형, 치킨 몇마리 남은거 있는데 그거 드릴까요?"
"아, 그러면 그거랑 맥주 좀 줘"
준비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직 기름도 식지 않았고 재료도 남아 있었으니 튀기는건 금방이다.
치킨을 손질해서 기름에 넣고 튀기는 동안, 나는 그들에게 팬텀을 소개했다.
"이쪽은 내 지인이야"
"안녕하세요, 류한이라고 합니다"
"아니, 거기서 원래 이름을?!"
"팬텀은 보통 내 이름 발음하기 힘든 문명권에서 쓰는 이름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흑발 흑안이라 동양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골격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남잔데 외모만 여자처럼 생긴거 보면 마크로스 프론티어 생각난다니까.
목소리도 약간 가늘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남자 쪽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착각하는 일 없이 두사람도 남자로 인식했다.
"하백리라고 해요"
"최악이 친구인 강형식입니다. 근데 혹시 여동생 있으세요?"
"막내 여동생이 한명 있는데요"
"소개 좀......"
"형식아, 내가 충고하는데 거기까지 하고 입 다무는게 좋을거야"
"아니 왜! 이런 분 여동생이면 엄청 예쁠거 아니야"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란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란 말을 괜히 했을까?"
팬텀이 말하는 막내 여동생이란, 창조의 절대자와 자연의 절대자 사이에서 나온 쌍둥이 중에 여동생 쪽을 말하는거다. 예쁘기는 엄청 예쁜데 노리면 절대자 상대할 생각으로 와야할거다.
내가 보기에는 평생 노처녀로 살것 같은데.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나이트로드 최길현도 아이돌 느낌으로 좋아하는거지 연애적으로 좋아하는건 아니라서.
아무튼 일단 절대자 두명 앞에서 존재라도 유지하려면 초월자에 들지 않고서 무리다. 상견례도 못버틸텐데 어딜.
"잠깐 이야기 좀 해주려는데 형식이 넌 먼저 퇴근할래?"
"어? 나 가게 청소해야 하는데?"
"내가 대신 할께. 일찍 퇴근해"
"아싸! 칼퇴다!"
일단 평범한 사람인 형식이는 이 이야기에는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감당할 힘이 그에게는 없다. 백리는 그나마 포스 유저고 내가 봐주고 있으니까 약간은 있지만 그마저도 불안정하다.
관계없는 사람은 보내는게 좋겠지. 형식이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면서 퇴근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요? 형식이 형까지 보내고"
"잠깐 좀 할게 있어서. 나는 너한테 볼일도 있고"
"저요?"
백리에게는 러시아에서 소피아에게 들은걸 확인해 볼 것이다. 가이아 포스를 사용할 수 있는 포스 유저에게 영혼에 회로가 새겨져 있는게 맞는지 확신이 선다면 누가 그 회로를 새겨주는지도 알 수 있으니까.
팬텀은.....얘는 그냥 친구끼리 한잔 하려는거고. 간만에 한국 왔는데 치킨 먹고 가야지.
"류한씨도 초월자세요?"
"야, 얘한테 어디까지 이야기 해줬냐?"
"대충 개념 정도만"
"난 니가 먹은 피 주인이야"
"허미 시펄!"
백리는 전에 내가 준 팬텀 블러드를 먹은 적이 있다.
재생력을 늘려주기 위해서 먹인거지만 정작 그 피의 주인인 당사자를 만나니 생각보다 놀란듯 하다.
"보니까 꽤 몸이랑 상성에 잘 맞는것 같은데. 은근 재능 있나?"
"갓-루리루리의 정보 단말이 쟤 여동생인거 보면 나름 그럴것 같은데"
"어, 그래? 난 만난적 없는데 넌 참 신기하다. 어떻게 그렇게 자주 만나냐"
"거 몇회차에 한번씩 만나는거 가지고 자주라고 말하지 맙시다"
"전 차원에서 그 정도면 자주 만나는거지. 새꺄, 잔들어"
백리까지 합세해서 세명이 테이블에 앉아서 치킨 한마리씩 앞에 두고 맥주잔을 들었다. 쨍, 하고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시원한 맥주를 그대로 쭉 들이킨다. 찬 맥주에 탄산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속이 시원해진다.
"아, 좋다. 이 맛 없는 느낌. 역시 한국 맥주야"
"류한씨, 아니 팬텀씨는 한국인이였어요?"
"한국 태생은 아닌데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서. 아마 내가 보낸 시대랑 지금 시대랑 몇년 차이 안날껄?"
"그래봤자 존나 아재잖아"
"뭐래 꼬비꼬비 보던 새끼가"
"너도 마찬가지잖아! 니가 아는 삼천은 삼천만큼 사랑해가 아니라 백두무궁 한라삼천이겠지!!!"
"야! 나도 어벤져스는 봤어!"
이래저래 공통관 관심사가 많다보니까 이야기가 잘 통한다. 만약 파벌만 같았다면 주구장창 얘랑 술 마시러 다니지 않았을까?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 하고 있어도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 들어가면 확실하게 선이 그어지니까.
"그나저나 여기 지구는 어때? 이능력은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발전한건 아닌것 같은데"
"이능력 생긴지 겨우 20년 밖에 안지났어"
"그래? 겨우 그 정도로 발전하기는 글렀으니 한 100년은 더 기다려야겠네"
"보니까 무공이나 마법보다 범용성이 떨어져. 선택받은 소수만 사용하는데다 외부로 방출되면 휘발성도 강해"
"존나 애매한 이능력이네. 내가 잘 쓰는 마력도 인간이 쓰면 보통 미쳐버리기는 하지만 파괴력만큼은 개쩌는데"
"디메리트가 있으면 메리트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능력이 애매해. 그래서 누가 만든건지 확인해보려고"
"어떻게?"
내 시선이 백리에게 향하자 이어서 팬텀도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킨 다리를 뜯고 있던 백리가 영문을 몰라하며 의문을 표했다.
"왜요?"
"등짝! 등짝을 보자!"
"으아아!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어 딜도 망가!"
나는 도망가려던 백리를 잡아 자리에 앉혔다. 버둥거리기는 해도 어차피 백리가 할 수 있는데는 한계가 있다.
"형 이성애자 아니였어요?!"
"환생자에게 뭘 바라니. 내가 남자로만 환생할거라고 생각해?"
"형수님 있잖아요, 형수님!!"
"여자로 환생해도 좋아한단다. 사랑에 정해진 형태는 없는 법이야"
"폼나는 대사 지껄여도 안되거든요?! 남의 등짝은 왜 보려는데요?!"
"확인 좀 해보려고. 내가 궁금해서. 나중에 내가 여자로 환생하거든 너 동정 떼어줄테니까 한번만 해보자"
"으아아아아아!!! 그건 죽은 뒤잖아요?! 제가 형 죽을 때까지 살아 있을줄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그 나이 되면 서지도 않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성적인걸 하려는게 아니고 잠깐 백리의 영혼을 관조해보려고 할 뿐이다.
내가 남자의 몸으로 같은 남자에게 관심 가지는건 시온 뿐이라고. 그나마도 시온이 쇼타 폼으로 변신할 때의 이야기고.
"제수씨는 성별도 바꿀 수 있어서 좋겠다. 우리 루이넬은 신체조절 정도 밖에 못하는데"
"거 3대 음란 종족가지고 비교하지 맙시다"
"뭔데 또 3대 음란 종족까지 되요?!"
"흡혈귀, 에로프, 서큐버스. 자고로 이 셋은 남자 정력 빨아먹기 딱 좋은 종족이지"
"에로프?!"
"엘프가 아니라 에로프다. 일본식이라서 가슴이 커"
".......한번 보고 싶다"
"거유 좋아했니? 이단이다!"
난 빈유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속성은 금발, 빈유, 안대의 여성이다. 크윽, 환생 1회차 때 마누라를 너무 잘 만나서......지금은 그 중에서 하나만 맞아도 좋아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백리는 이상한짓 하려는게 아닌걸 아니까 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기는 해도 순순히 겉옷을 벗었다.
이 새끼 요즘 몸 좀 만들었는지 겉보기와는 다르게 근육이 나름 있구나.
여자 꼬시고 싶거든 일단 바닷가로 가려무.....잠깐 이제 슬슬 가을이라 바다에 사람도 없겠다. 불쌍한 새끼.
나는 백리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마치 무림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격체전력이라도 해주는 모습이지만 목적이 다르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가끔 없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도 마음은 있기에 그 마음에 호응해서 영자가 모이고 영혼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혼이 있다고 다 좋은건 아니다. 전생에 저지른 죄악을 아무것도 모르는 현생에서 갚아야 하는 일도 있기에, 천성에 새겨진 재능 때문에 평생 저주하고 살아야 할 때도 있기에 가끔은 영혼 자체가 없을 때가 나을 수도 있다.
"네 영혼을 들여다 볼거야.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가이아 포스의 근원인 회로를 찾아서 역추적하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확인해볼 생각이야"
"위험한건 아니죠?"
"위험하게 하지 않을께"
"위험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요?!"
나는 백리의 말을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해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보았다.
보통의 영혼의 무색투명한 공 형태다. 하지만 쌓은 업과 개인차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한다. 나의 경우는 둥글둥글하게 말린 고슴도치같이 가시가 돋은 형태의 검붉은색을 띈다.
백리의 영혼은 흰색의 공 형태였다. 영혼의 원형에 가까울수록 순수하다는 의미인데 이런거 보면 백리의 성격이 순한게 이해가 된다. 혈액형 성격설은 미신에 불과하지만 영혼 성격설은 신빙성이 있는 분야다.
조심스럽게 백리의 영혼 안쪽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눈에 잘 띄게도 흰색에 누군가 물감을 칠해 남긴듯한 자국이 있었다.
"역시 회로가 있었네"
가이아 포스를 공급하는 영혼의 회로를 찾았다.
이제 그걸 새겨주는 놈의 얼굴을 확인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