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라쿤맨 비기닝]
백리가 마중 나온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 소방서 쪽에서도 이미 출동하고 돌아온 하정욱이 백리에게 전화를 한데다 오늘은 백리도 휴일이였다.
갈증 나서 아이스크림 사오는 김에 마중나온 그는 익숙한 람보르기니가 보이자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이유는 없었다. 찾아보니 한정판이라서 전세계에 몇대 없다는 차량이 한국에만 두대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으니까.
"........아, 백리 학생"
"형수님? 오늘 루리랑 같이 있으셨어요?"
"잠깐 쇼핑하러 간 김에 데려간겁니다"
"아, 감사해요. 데리고 다니는거 힘드셨을텐데"
"내가 뭐 어린애 같은줄 알아?"
시온은 많은 감정이 섞인 눈으로 그녀와 백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진이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아, 그러면 가봐야겠네. 잘가, 다음에 봐!"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시온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지간하면 말릴텐데 지금은 일이 많아져서......일단 예진이부터 집으로 데려간 뒤에 혹시나 있을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백리야, 동정 지켜라. 알겠지?
떼는건 상관 없는데 그 대상이 문제다.
"오늘 루리 때문에 신세졌어요. 형수님. 안녕히 들어가세요"
"......힘 내십시오 백리 학생. 욕망에 굴하면 안됩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온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도 모른채 백리가 되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조용히 루리(?)를 내려주고 돌아갈 뿐이였다.
시온의 이상한 태도에 백리가 조금 걱정했지만 그래도 별일 아닌듯 싶어서 넘기기로 했다.
"오라방, 나 짐 좀 들어줘. 옷 많이 샀더니 무겁네"
"야, 나보다 쌘 주제에 뭘 그래?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고 하던 년이!"
"여동생보고 년이래!"
"놈이라고 안한걸 고맙게 여겨라"
루리와 백리가 서로 투닥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리는 루리의 짐을 몇개 받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남매 사이다. 아니, 평소에는 그렇긴 하지만......지금은 조금 달랐다. 루리의 내용물이 다르니까.
후광도 없어서 백리로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성격도 평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녀의 윤리관이 좀 더 허들이 낮다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근데 뭐야, 아이스크림 샀어?"
"갈증 나서 먹으려고 샀어"
"뭐 샀는데?"
"엑셀런트"
"요즘 장사가 잘 되나보구나! 그 비싼걸! 금색맛 내꺼 찜!"
"비싼거 사고 싶었으면 하겐다즈를 사왔겠지"
"사온다면 난 딸기맛. 크큭, 선이 보인다......아, 그 시키가 아니네"
"그런데 아빠 한테서 전화 왔었는데. 거기로 쇼핑 갔었어?"
"응, 가서 옷이랑 속옷 같은거 좀 샀어. 돌아갈 때 쯤 선물 좀 사서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출동 하셨다지 뭐야"
"타이밍이 안좋았네. 아무튼 들어가서 빨래나 하자. 엄마가 세탁기 돌려놓고 나갔데"
"어? 어디 가셨는데?"
"기억 안나? 오늘 모임 가신다고 하셨잖아"
"오홍홍, 조와용"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는게 그렇게도 좋냐?"
그녀가 좋아하는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애초에 공부 하라는 잔소리 같은게 그녀에게 통할리 없었다. 딱 타이밍 좋게 집에는 두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늘 일교차가 커서 땀 흘린 것 때문에 찝찝해. 오빠는 씻을거야?"
"아, 나도 씻을건데"
"그럼 먼저 씻어, 난 옷 정리부터 한 다음에 씻을께"
"네가 어쩐일로 이런걸 양보 다 해주냐? 평소 같았다면 내 뚝배기를 깨서라도 먼저 들어가서 씻었을텐데"
"오늘 기분이 좋아서 변덕 때문에 그런거라고 생각해"
"형수님이 얼마나 사줬길래 그래?"
"명품 지갑 하나 사줌. 내 용돈 석달치 짜리"
"비싸! 그거 괜찮은거야? 폐 끼치는거 아니지?"
"사장 오빠는 오빠한테 가게 하나 통째로 줬잖아. 이미 더 큰거 받아놓고 뭘 그래?"
"아, 그러긴 하지. 아무튼 먼저 씻는다"
백리가 먼저 욕실로 들어가고, 루리가 씨익, 웃었다. 누군가 봤다가 소름끼쳐했을 법한 느낌의 흑심이 있어 보이는 미소다.
이윽고 10분쯤 지나서 백리가 목욕을 끝마치고 나왔다. 욕실에서는 모락모락 수증기가 열린 문을 통해서 빠져나온다. 시원하게 땀을 씻어낸 백리는 개운한 모습으로 욕실 문 옆에 있던 상자를 뒤져서 속옷을 입었다.
"아, 오빠. 그거 좀 치우라니까. 속옷 개어놓은거 거기다가 짱박아둘꺼야?"
"서랍장에 넣어두기 귀찮은데 여기 두는게 어때서?"
"그리고 이 더운 날에 뜨거운 물로 샤워했어? 마치 한여름에 뜨신 아메리카노 마시는 느낌인데!"
"난 쪄죽어도 샤워는 뜨거운 물 파야. 아무튼 난 다 썼으니까 씻어"
"여자는 한번 씻으면 못해도 20분은 기본인데 남자들은 어떻게 10분만에 다 씻고 나오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샤워하고 머리 감고 세수하고, 그렇게만 해서 나오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
"씨, 여자는 그게 오래걸리니까 그러지"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오빠는 여자의 마음을 몰라"
그리고 교대. 욕실에서 백리가 나오자 다음에는 루리가 들어갔다.
백리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후끈한 몸을 식히기 위해 물 부터 마시고 선풍기를 틀었다. 가장 센 바람으로 틀자 뜨거었던 몸이 단숨에 식혀진다.
아까 사온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하다가 루리가 다 씻으면 그때쯤 먹자고 생각한 백리는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몸이 노곤노곤하고, 핸드폰 만지고 있기도 그렇고 시원한 바람까지 쐬고 있으니 저절로 졸음이 몰려온다. 이대로 잘 것 같아서 백리는 그대로 누웠다.
잠깐 눈 감았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얕은 잠에서 깨었다. 루리가 다 씻은 모양이다.
다른건 둘째치더라도 아이스크림은 먹고 자야한다. 아이스크림이 중대문제라서 그런게 아니라 자기가 먹으려고 사왔는데 냅두면 루리가 혼자 홀라당 다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아, 개운하다. 집에 커피 우유 같은거 없나. 아니면 에어컨이라도 틀어놓지"
"전기세 많이 나와서 에어컨은 무.......야! 옷은 좀 입고 나와!"
백리는 일어나다가 욕실에서 나온 그녀를 보고 격하게 사레가 들렸다.
수건 하나 걸치지 않고 완전히 알몸으로 나왔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그녀의 몸매가 다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매라도 최소한의 선은 있다. 집에서 팬티 한장 차림으로 돌아다니긴 해도 어디까지나 중요 부위는 가리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남은 물기가 떨어지는 가슴과 그 아래의 단정하게 정리된 검은 음모도 전부 보였다. 입만 다물면 미녀이기에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성적으로 반응하고도 남을 모습이였지만 백리는 전혀 아니였다.
"오빤 나와서 입으면서 뭘 그래?"
"최소한 난 수건으로 아래는 가리거든?!"
"뭐 어때, 닳는 것도 아니고"
"내 인간성이 닳아!"
"SAN치 체크 해봐야 하는거 아니야? 아니면 계몽?"
"일단 뭐든지 좀 걸쳐라! 내가 꼰대 마인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고생이 알몸으로 다니는건 아니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는 사람이 어디있어?"
"여기있다!"
"참 자랑이다!"
백리는 신경질적으로 옆에 있던 옷 상자에서 루리의 옷을 꺼내 냅다 던졌다. 속옷은 알아서 입으라고 하고 그가 던져준건 집에서 더울 때 편하게 입던 돌핀 팬츠와 반팔 셔츠였다.
노출도가 많은 옷이지만 백리는 하늘에 맹세코 조금의 흑심도 없다. 루리가 코찔찔이 시절부터 손잡고 다니던 여동생인데 성적으로 볼 수 있을리가?
남매 관계에서는 그게 정상인 법이다. 그걸 생각하면 투닥거리긴 하더라도 두사람의 남매 관계는 지극히 좋은 편에 속했다.
.......백리와 '루리'관계에서는 말이다.
"아이스크림 먹어야징"
"그러려고 나도 아직 안먹었.....야! 옷 제대로 입으라고! 바지 어디갔어?"
"더운데 적당히 하자 오빠"
"아오, 진짜 얘가 왜 이래? 날씨도 슬슬 시원해지던데 어디서 더위먹고 왔어?"
루리는 백리가 던져준 옷을 입긴 입었지만 반만 입었다. 셔츠만 입어서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의 실종 패션이였다. 단지 셔츠가 사이즈가 커서 전부 가려진다는게 다행이였다.
난데없이 치녀가 되어버린 루리를 보면서 백리는 어이터진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평소에도 이상했으니 조금 찝찝해도 일단 넘길 수 있었다.
"아, 아, 아이스크림. 금색은 내꺼 찜"
"내가 사왔거든?"
"그럼 3개 줄께. 파란색 3개랑 트레이드, 오케이?"
"야, 내가 사왔다고!"
"오케이, 사딸라!"
"그래, 니 맘대로 처먹어라 돼지야"
"날 돼지라고 욕하는건 참을 수 있어도 날 돼지라고 부르는건 참을 수 없다!"
"개소리하지마!"
냉장고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벗겼다. 상자 안에는 3X3들이의 네모낳고 포장지에 쌓인 작은 아이스크림들이 들어 있었다.
파란색과 금색이 반반씩 섞여서 어느 맛을 좋아하는지 취향이 갈린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백리는 파란색을, 루리는 금색을 더 좋아해서 크게 싸우는 경우는 없었다.
"이건 다 좋은데 빨리 녹아서 문제야"
"그러긴 하더라. 성분이 달라서 그런가?"
"찾아보니까 지방분이 많아서 빨리 녹는다고 하더라. 어차피 우리집은 그 쯤에 거의 다 먹지만"
백리가 포스 유저로 각성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한창 잘 먹을 때의 두사람이 먹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오히려 평소 먹는 정도를 생각하면 부족한 감이 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하프 갤런 사이즈로 사온 아이스크림을 그 자리에서 거덜낼 수 있는데 작은 상자에 든 아이스크림 쯤이야 가뿐하다.
"오늘 쇼핑은 어땠어?"
"그냥저냥. 근데 예진이가 나보고 자꾸 니 남편 외계인 드립 치더라"
"아, 저번에 형이 영국 가기 전에 밥 먹을 때 알려준 보람이 있었네"
"야! 이렇게 예쁜 여동생한테 외계인하고 결혼하라는건 또 뭐야?"
"이 세상에 널 데려갈만한 사람은 외계인 정도밖에 없을테니까 그렇지"
"찾아보면 그래도 있지 않을까?"
"웃기시네. 그런 성격에 시집 어떻게 가려고?"
"못가면 오빠한테 시집가야지 뭐"
루리의 말에 백리가 기겁을 하면서 소름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와, 지금 소름 돋았어. 너 나한테 시원하게 해줄려고 무서운 이야기 해준거면 진짜 성공한거야. 내가 10년동안 들어본 공포 이야기 중에서 제일 무서웠어"
"농담 아닌데"
"어우, 몇초 사이에 그 기록을 또 갱신해? 야,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다. 그만해"
그쯤 되니 백리가 아무리 바보라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루리랑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뭔가 이상하다고 알아차리는건 당연했다.
백리가 포스 유저로 각성하기 전에는 그가 접할 수 있었던 가장 예쁜 미인이 루리였지만 백리는 조금의 성적인 감정을 느껴본적 없었다. 집에서 벗어던진 루리의 팬티를 본다면 더럽다면서 세탁기에 처넣는게 일상이다.
그는 지금 루리에게 이질적인 느낌을 받고 있었다. 조용히 루리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묻어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러내렸다. 그걸 혀를 내밀어 요염하게 핥아먹자 식은땀이 절로 흐른다.
"너.....누구야?"
"뭔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는거 보니까 혹시 아이스크림이 상했나?"
"우리 루리가 그렇게 색기 넘칠리가 없잖아"
백리는 거의 평생을 루리랑 같이 한 집에서 살아왔다. 루리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 관해서도 상당수 알고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그런 루리에게 남을 유혹할만한 색기 따위는 없다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본인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더라면 진작에 남자 친구 한둘쯤은 만들었을 것이다.
"사랑 많이 받는 모양이네. 벌써 눈치 채는거 보면"
"너 누구야!!!"
방금 전과는 다르게 확신이 든 백리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루리의 눈에서는 깊은 심연이 느껴질 정도로 아득했다. 겉모습은 아무리 봐도 백리가 잘 아는 루리지만 내용물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빠 동정 따먹을사람. 아, 처녀랑 동정의 교환식이니까 내가 좀 손해보는거긴 하지만"
"개소리 작작해 미친년아!"
백리의 매도에 루리가 방긋 웃었다. 그런 취급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루리의 모습에 백리가 뭔가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느꼈다.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정조의 위협을 말이다.
"나도 오빠가 있어서 그런 느낌 잘 알지. 솔직히 남매간에 성욕을 느끼는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그럼......"
"근데 내 오빠만 아니면 꼴리더라!"
"으아아아!!!"
도망쳐! 백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