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라쿤맨 비기닝]
밥까지 먹어서 배도 부르겠다. 달달한걸 먹어서 입가심도 했으니 남은건 다시금 쇼핑을 하는 것이다.
일단 외출용 옷을 살펴 보았으니 다음은 속옷이나 볼까, 하다가 지나가던 길에 꽤나 비싼 브랜드의 명품관이 눈에 띄었다.
"아, 여기 잠깐 둘러봅시다"
"여기 좀 비싼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저도 나름 필요하기는 합니다"
핸드백 하나에 몇백 만원에서 심하면 몇천 만원까지 나가는 명품관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입장할 수 있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 덕분에 더 고급스런 분위기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입장해 들어간 세사람은 상품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주로 핸드백이나 지갑 등의 큰 부피를 차지하지 않은 가죽 제품들이다.
"우와, 이거 내 손바닥만한 지갑인데 내 용돈 석달을 모아도 못사는거네"
"언니 한달 용돈이 얼만데요?"
"20만원. 요즘 들어서 오빠가 일하니까 용돈이 좀 더 늘어서 그 정도야. 차비랑 참고서 값 빼면 생각외로 많이 안남고. 너는?"
"전 아저씨가 카드 줬어요"
"부럽다!"
두 사람이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시온은 여러 상품들을 둘러보면서 신중하게 골랐다.
"여태까지는 적당히 했는데 이 몸으로 활동하려면 나름 괜찮은 명품을 걸치고 나가야 욕 안먹습니다. 그이는 정장 같은거 입고 나가도 되지만 저는 명품이 칼과 방패나 다름 없습니다"
"무슨 활동이요?"
"주주총회나 기념 파티 같은데 초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핑계를 대서 직접 참가한건 몇번 안되는데 너무 참가 안해서 눈치보입니다"
"안가면 되지 않아요?"
".......무시하기에는 대주주라서 참가해달라고 사정할 때가 있습니다"
우선 이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대기업인 대성 그룹의 지분 3퍼센트를 가지고 있기에 영향력이 크다. 주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겨우 3퍼센트라고 생각할법 하지만 주식의 세계에서 3퍼센트는 대주주 중에서 대주주다.
만약 주주들 의견만 잘 모은다면 큰 어려움 없이 회장을 갈아치우는 것도 가능하다. 이미 해본적도 있고.
"저야 뭘 입어도 예쁘지만 그렇다고 공적인 자리에 동대문에서 산 몇만원짜리 핸드백 매고 갔다가는 웃음거리만 됩니다"
"으음, 무서운 여자들의 세계"
"언니도 여자거든요?"
"난 괜찮아. 명품 같은거 가지고 있어봤자 기능은 평범한거랑 별 차이 없잖아?"
"온 김에 두 사람도 지갑 정도는 하나쯤 골라보십시오. 백 같은거는 너무 노골적이여서 아직은 안됩니다"
"땡큐 썰!"
"명품 별로라고 한게 방금 전인데......"
"인생은 융통성 있게 살아야지! 아무렴!"
다짜고짜 핸드백을 사주지 않는 이유는 아직 학생이라서 핸드백이 크게 필요 없을 시기인데다 그렇게 비싼걸 학교에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갔다가 도둑맞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갑 정도는 상시 가지고 다니는거니까 괜찮다. 좀 더 비싼 물건은 다음을 기약하자.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자택 주소를 적어주시면 오늘 중으로 배달 해드리겠습니다"
"지갑은 따로 가져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단숨에 천 만원이 넘는 수익을 올려준 고객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직원은 정중하게 영수증과 함께 결제했던 카드를 돌려주었다.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풍족해진다. 이게 바로 쇼핑의 묘미다.
물론 지갑이 가벼워져봤자 바닷물에서 한 바가지 퍼낸 격이지만.
"다음은 속옷이나 사러 갑시다. 이 모습으로는 입을 브라도 몇개 없어서 사야합니다"
"......? 그러면 작은 모습일 때 입는건요?"
"반창고 씁니다"
"퍄퍄퍄, 대꼴짤 고마워!"
"어쩐지 빨래할 때 브라가 내 것 밖에 없더라!"
예진이가 집에서 빨래를 할 때 왜 여성은 시온도 있는데 브라는 자기 것 밖에 없는지 의문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 의문이 여기서 풀렸다.
여자 친구랑 같이 오더라도 남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여성용 속옷 코너로 들어서자 주변에서 느껴지던 시선이 확 줄어들었다.
딱히 이런 곳에서 남자에게 제지를 가하는건 아니지만 나름의 분위기와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 때문에 그런 법이다.
"남자 친구는 없지만 섹시 노선으로 사볼까! 앗, 저기 란제리가 보인다"
"루리 언니, 그거 집에서 입었다가는 백리 오빠가 두들겨 팰걸요"
"내가 더 쌔니까 괜찮아"
"보여줄 사람이나 있고요?"
".......아, 자꾸 그럴래? 확 최악 아저씨나 꼬셔볼까보다!"
"제 남편은 안됩니다!"
"농담이야, 농담"
시온은 외출할 때 입을거 몇개랑 나중에 성장 폼으로 할 때 필요한 밤의 속옷 몇개를 샀다.
루리는 언제 누구 앞에서 입을 생각인지 아무리 봐도 남사스런 검은색 란제리를 샀다. 시온이 진짜 살거냐고 물으니까 단호하게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브라도 비싼데 차라리 평범한걸 몇개 사지 그렇습니까?"
"집에 두면 언젠가 쓰겠지! 남친 호강 시켜준다거나!"
"외계인 아니면 언니 데려갈 사람 없다니까요"
"오늘 한번 독립 기념일로 만들어 줘? 내가 전투기 타고 들이 박아서 자폭 하는 꼴 보고 싶어? 왜 자꾸 시비야?"
"언니가 시누이가 되면 인생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요"
"울 오빠는 평생 연애하긴 글렀네"
"백리 오빠도 사람은 좋아서 생각해볼만 한데 언니 때문에 조금......."
"앗, 원인이 나 때문이였나! 이렇게 된 이상 오빠는 내가 책임지고 평생 두들겨 패고 살아야겠다!"
"백리 학생이 불쌍합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그렇지만 현관합체는 안됩니다"
"사랑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
"앗, 농담이야, 나를 그런 경멸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줘!"
시온이 짜게 식은 눈으로 루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은 '근친은 안돼, 미친년아'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살 것도 다 샀겠다 슬슬 돌아가려다가 문득 루리가 깜빡 했던걸 기억해냈다.
"그러고보니 울 아빠 한번 보고 가려고 했는데. 빈손으로 가긴 그러니까 먹을거나 사가지고 가야겠다"
"다른 소방관 동료분들도 먹어야 하니까 양 많은걸로 사가십시오. 아니, 그냥 같이 가서 인사나 드립시다. 고생하시는데 그 정도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스크림 같은거 어때요? 아직 더워서 큰 사이즈로 사가면 괜찮을것 같은데"
"아, 그건 안돼. 나도 저번에 아이스크림 같은거 사갔다가 난데없이 출동하고 오니까 다 녹아서 못먹었데. 장기 보관 가능한걸로 사야할껄"
그게 소방관의 고충이다. 언제 어디서 사건이 터질지 모르니 한창 밥 먹으려고 하다가도 숟가락 하나 뜨기 전에 출동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과연 일분일초라도 빨리 현장으로 나가야 하는 소방관이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둘 시간이 있을까 하는 답변을 되돌려줄 수 있다.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아이스크림을 실온에 냅두고 나갈리가 없지 않은가?
"아까 보니까 지하에 에그타르트 팔더라. 식어도 맛있을테니까 한박스 큰걸로 해서 사가면 다른 아저씨들도 먹고 좋아할듯"
"일하시는 소방관 분들하고 친하신가봐요?"
"종종 놀러가서 그래. 가끔 먹을거 사가면 좋아하더라. 어린애도 아닌데 말이야"
"언니가 더 어린애 같긴 하죠"
"시끄러! 넌 젊어서 좋겠다! 하지만 1년만 지나면 난 대학생이고 넌 고3이야! 햣하! 지옥이 있다면 거기서 보자고!"
"고삼 생활 힘들어요?"
"사탄이 반년쯤 하다가 도망칠 정도야"
"사탄은 생각보다 인내심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석달쯤 버티면 오래 버틴걸겁니다"
"아는 사탄이 있다는 말투인데요"
타임스퀘어에서 루리의 아버지인 하정욱이 근무하는 영등포 소방서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기왕 근처에 와서 쇼핑한 김에 인사도 하고 선물도 드릴겸 지하의 식당가에서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에그타르트를 샀다.
타르트틀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마치 페이스트리 같이 바삭한데다 가운데 들어간 연노란색 필링이 잘 구워진듯 약간 그을린 느낌과 함께 울퉁불퉁한 것으로 보아 포르투갈 식 에그타르트였다.
제일 많이 들어가는 박스로 2개쯤 사고 맛도 좀 볼겸 해서 세사람 각자 하나씩 들고 먹었다. 바삭한 감촉과 달달함, 그리고 고소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음, 존맛탱"
"방금 구운거라서 맛있네요"
"슬슬 문 닫을 때라 싸게 팔아서 이득 봤습니다"
"마감 세일 하는거 샀다고 아빠가 삐지는거 아니겠지?"
"아빠 얼굴 보러온 딸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직 해가 길어서 그런지 아직도 날은 밝았다. 하지만 열은 식어서 걷기에는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건물에서 나와 횡단 보도를 건너서 넘어가니 바로 앞에 소방서가 있었다. 언제든 출동할 수 있게 열려 있는 차고에는 상시 대기하고 있는 소방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라? 차 한대가 없네? 혹시 출동했나?"
"그런것까지 압니까?"
"내가 아빠 보러 온게 몇번인데 겨우 그거 하나 모를라고. 여기 소방서 누가 언제 결혼했고 애가 몇명인지도 다 아는데 뭘"
"그 정도면 거의 직원 수준 아니예요?"
"어떤 아저씨는 사무직으로 들어오라고 꼬시던데. 나는 연구소 들어갈거라서 거절하려고"
"왠 연구소?"
"이과생에게 남은건 박사 학위 따고 연구하는거지 뭐. 으으으윽, 내가 가야 할 길은 대학원생이란 이름의 수라도......"
"루리 학생, 그 앞은 지옥입니다"
"아무튼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 호강 시켜드리고 울 오빠 장가 보낸 다음에 참한 남자 하나 물어다가 결혼해야지"
"일단 연구 소재는 우주 개발로 정해졌네요. 안그러면 외계인은 못 찾을테니까요"
"외계 기술로 먹는 것마다 민트 초코 맛만 나게 해주겠어!"
"전 민트 초코 좋아해요"
"으아아악! 당장 꺼져라 사탄의 자식아!"
이미 루리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소방서 내부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지하지 않았다. 단지 시온의 외모를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짓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무시해, 아직 결혼 못한 오빠들이야"
"익숙하니까 괜찮습니다"
"거기 오빠들! 시온 언니는 유부녀니까 꼬시면 불륜이야! 처맞기 전에 얼굴 치워야 할껄? 언니 남편 성격 장난 아니야!"
"어우, 뭐야. 루리도 있었구나"
"나는 뒷전이였어?! 에잇 쥬거랑!"
자주 놀러왔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였던지 소방서 내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루리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친해 보이는 모습을 보아 잘 알고 있어 보인다.
"아빠는 어디 갔어? 또 출동 나간거야?"
"응, 정욱 형님은 잠깐 나갔어. 큰 사건은 아니고 하수구에 폰 빠트린거 찾아달라고 불렀다나봐"
"요즘도 그런걸로 부르는 사람이 있어?"
"꽤 자주 있어"
소방관은 재난 현장에서 시민을 구해주는 사람이지 자기 편하라고 아무때나 부르는 노예가 아니다.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정작 그런 신고 때문에 인명피해가 발생할지 모르는 사건에 출동하지 못할 때가 있는걸 생각하면 몰상식한 행동이다.
"아빠가 없으면 그냥 돌아가봐야겠네. 아무튼 이거, 오다 주웠어"
"정욱 형님 고향이 경상도는 아니였던걸로 아는데......"
"아저씨들이랑 나눠 먹어. 아빠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일단 갈께. 너무 늦게 집에 가면 엄마가 뭐라 그래"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흑심이 뻔한데 있으라고? 나나 예진이는 미성년이고 시온 언니는 유부녀라서 불법이야. 그러니까 꿈깨셔!"
루리의 어투에도 낄낄거리면서 웃는거 보면 여간 친한 사이는 아닌듯 보인다. 정작 보러 온 사람은 없었지만 줄건 주고 나왔다.
소방서에서 나오니 떠 있던 해도 저물어서 밤이 되었다.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일단 저는 루리 학생부터 집에다 데려다주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차에 자리가 없어서......"
"어차피 여기서 얼마 안멀잖아요?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다녀오세요"
"차 막혀서 조금 걸릴지 모릅니다.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마시면서 기다리십시오"
짐도 있어서 루리를 집까지 태워다 주는 편이 좋을것 같았지만 차에 자리가 없어서 예진이가 함께 타기에는 힘들었다.
어차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터라 일단 먼저 루리를 태운 후에 예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가는게 나을것 같았다.
어둑해진 밤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람보르기니를 타고 주차장에서 나오자, 루리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탑승했다.
"바이바이! 다음에 보자 예진아! 그때 또 외계인 드립치면 너 죽어!"
"그럼 이세계인으로 해줘요?"
"거기서 킹갓세계물이!"
"헤어질 때 악담 퍼붓는거 보면 둘이 어지간히도 친해진 모양입니다"
"뭐, 그렇지"
창문을 열고 루리가 예진이에게 양손을 흔들면서 인사했다.
한살 나이 터울이 있고 루리가 괴상한 성격이여도 붙임성이 있어서 그런지 잘 친해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예진이도 마음 터놓고 친해질 친구하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차가 큰 길로 들어서고, 신호에 걸려 정지했다. 조용한 차 안에서 말이 많은 루리가 기이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구에서 즐기는 쇼핑은 재미는 있었습니까?"
"뭐야, 언제부터 눈치 챘던거야?"
"근친상간 오케이라고 했을 때쯤입니다"
"그런말 안했어. 사랑만 있다면 괜찮다고 말했을 뿐이지"
루리의 머리 위로 희미한 후광이 비친다. 그녀의 눈이 평소와 다르게 모든걸 꿰뚫어 보는듯한 맑은 눈동자로 변했다.
한순간에 달라진 분위기에도 시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만입니다. 갓-루리루리"
전에 최악이 백리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던 존재다.
성교의 신, 갓-루리루리. 그녀가 자신의 정보수집 단말에게 강림해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