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라쿤맨 비기닝]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악수하는 사진까지 몇방 찍은 다음에 한숨 자고 일어났다. 피곤해서 그런지 푹 잤다.
오늘은 돌아가고.....적당히 버진 그룹에 이야기 한 뒤에 늦은 비행기라도 타서 돌아가야겠다. 영국에 계속 남아 있어봤자 결국에는 내 정체를 들킬 증거를 남길 뿐이다.
슬쩍 몰래 빠져나가려던 찰나, 정원에서 윌과 마주쳤다.
"가시게요?"
"마중 나왔어?"
"그런거죠 뭐, 슬슬 가실거라고 생각은 했거든요. 게다가 집에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다면 더욱 그럴거고요"
"울 마누라 독수공방 시키고 있는건 그렇다 치더라도 애인 한명 없으면서 그 마음은 어떻게 이해해?"
"......그 부분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죠"
"다음에 볼 때는 여친 한명쯤 만들어봐"
"마음 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만들죠"
"저어기 일본의 히비키는 슬슬 갈비탕 한그릇 먹게 생겼더만. 너는 뷔페로 해, 오케이?"
"갈비탕?"
갈비탕 그거 엄청 맛있어. 적당히 끓인 갈비탕의 갈비는 뼈도 쏙 하고 빠지고 질기지도 않고 맛있거든. 거기에 깍두기나 김치 얹어서 밥 말아먹으면 한그릇 뚝딱이다.
내가 아무리 환생을 반복해도 흰 쌀밥에 김치 죽죽 찢어 먹는걸 좋아하는 천생 한국인인지라 입맛은 오이나 고수 같이 선천적인 부분 아니면 크게 바뀌지 않는다.
"가시기 전에 하나 부탁 드려도 될까요?"
"뭔데?"
"잠깐 대련 좀 해주세요"
슬쩍 윌의 눈을 보았다.
이 녀석, 왜 백리 닮았나 했더니 성격 뿐만이 아니라 안에 있는 영웅심 때문이였다. 요컨데 호구스러움이다.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희생정신은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서 나도 그걸 무시하지 않는다.
윌의 눈에서 엿보이는 감정은 약간의 호승심과 대부분의 향상심.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의 눈빛이다. 무림 같은데서 종종 봐서 알고 있다.
"그때 그 적성종으로 변이한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데 저는 아무 도움도 못됐죠. 게다가 나이도 어려서 다른 마스터 유저분들에게 비하면 부족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예요"
"재능은 괜찮아. 게다가 내구력은 내가 봐도 상당하다니까?"
만약 가이아 포스가 아니라 다른 이능력, 예를 들어서 무공같은거 배웠으면 대성했을 것이다. 막 금강불괴 되서 거시기 차여도 멀쩡했을듯.
"그래서 그런데 대련을 통해서 조금 가르쳐주시면 안될까요? 솔직히 마스터 유저란 이름 때문에 어디 가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달라고 하기 힘들거든요"
"하기사 그런 것도 국가 위신에 걸리겠지. 타국의 마스터 유저한테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껄"
마스터 유저가 있는 나라는 그 특성상 이득을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시아는 지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 한국, 일본 이렇게 3개국이서 자존심 싸움 하는게 보일 정도다.
일단 파견은 받고 보내야 하니까 어느정도 우호적인 면은 드러내야 하지만......유럽 쪽에서는 터키랑 영국 밖에 없을텐데 두명이서 커버하기에는 범위가 꽤나 넓다. 러시아는 자기 나라 돌보기도 벅찰거고.
"나야 정체도 드러내지 않으니까 말 하긴 편하겠다. 좋아, 조금 놀아줄까"
"아, 감사합.....흡?!"
파앙! 하고 주먹이 날아가고 윌은 고개를 꺽어 황급히 주먹을 피했다. 난데없는 공격이였지만 피한걸 보면 반사신경이 나쁘진 않은듯 보였다.
"아니, 갑자기 그렇게.....헉?! 으악?!"
"평소에 차원진 경보 울리고 출동하니까 기습 같은거에 익숙하지 않은거잖아. 너 전에 차원진 감지기 신형으로 바꾸기 전에는 좀 얼탔지?"
"그걸 어떻게 알.....왁?!"
"본성이 정직하다는 증거야. 그건 좋은거지만 싸울 때는 나쁘지"
내가 날리는 주먹들을 전부 피하면서 간간히 반격을 날리는걸 보면 육체적인 스펙도 좋았다. 전체적인 순위를 매긴다면.......아마 아래에서 두번째 정도? 제일 아래는 제이콥이다.
아마 제이콥의 공격도 맘 잡은 윌의 방어 앞에서는 통하지 않을테니까 1대 1로 상대한다면 윌이 이긴다. 다만 조금의 지원이라도 있다면 제이콥이 이길거고.
일단 현재 1위는 이경진 아저씨, 2위는 히비키, 3위가 윌에 4위가 제이콥이다.
이러다가 마스터 유저 순위 내가 다 매기겠다. 나중에 이 정보 풀면 다른 나라한테서 고소미가 들어오려나?
"좀 강하게 칠거니까 이건 피하지 말고 막아봐"
나는 그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묵직한 일격은 물리적인 충격 뿐만이 아니라 역장에 힘을 담았기에 가이아 포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충격을 상쇄하기 어려울 것이다.
콰아앙!!!
큰 폭음이 들렸다. 후려친건 명치지만 충격을 지반에 흘리기 위해 무게중심을 잡고 디뎠기 때문에 땅에 크레이터가 생긴다.
"큭....."
"그럭저럭 버틸만 해 보이네. 그래도 부족한건 사실이고"
지구에서는 가이아 포스가 등장한지 20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인간의 문명은 최근 1,200년 사이에 급격히 발전했다고 하지만 이능력 같이 생소한 것이 발전하기에는 더딘 시간이다.
더군다나 윌은 온전하게 대공황 시절을 투쟁으로 보낸게 아니다. 그 20년 중에서도 포스 유저로 있던 시간이 더 짧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까지 실력이 있다는건 칭찬해줄만 하다. 제대로 된 커리큘럼과 지식이 받쳐준다면 초월자 반열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 수준까지 올라왔으면 더 이상 기술을 연마하는건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아. 그것 보다는 포스 운용이 더 중요하지"
"어떤 식으로 운용하면 좋을까요? 따로 노하우가 있나요?"
"네 특기대로 해. 내구와 방어력을 올리는 방식으로. 하지만 한가지 기억해야 할건 네가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거야"
사기꾼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영웅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녀석들에게 종종 보이는 증상이다. 칭송받아 마땅한 일을 했는데 겸손을 넘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는 한다.
윌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도 인간이다. 인간은 의심의 동물이기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특히나 그는 어린 나이에 어께 위에 올려져 있는게 많다. 그걸 생각한다면 백리가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백리는 최소한 나라를 책임진다는 무게감은 없으니까.
"너는 다른 책임감 때문에 자기 능력에 의심이 드는거야. 다시 말해서 잡념이 많다는 소리지.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가이아 포스 운용에 영향을 주고"
순수하게 의지를 사용하는 초월자도 잡념이 들어가면 효과가 떨어지는 판에 가이아 포스 같은 이능력에 잡념이 들어가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손실 없이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의지 뿐이고, 그 다음에 영력이며 그 아래가 죄다 고만고만한 것들이다.
요컨데 나는 100의 의지로 힘을 쓴다면 그대로 의지를 쓰는만큼 100의 힘이 나오지만, 가이아 포스를 쓰는 윌리엄은 나랑 똑같은 100의 의지를 사용하더라도 가이아 포스란 매질을 통해서 10 정도의 효과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자가 강하고 의지를 쓰는 사람이 강한 법이다. 아마 같은 이능력자의 대결이라도 조금의 의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더 강하다. 그래서 나도 이경진 아저씨를 현 마스터 유저 1위로 두고 있는거고.
"......그러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그럴 때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지. 다 조까고 잊어버려"
"네?"
"다 잊어버려. 그냥 싹 다 무시하고 그냥 눈 앞에 있는것만 집중해. 상대 공격을 받아낼거면 그것만 생각하라는거야. 네가 죽으면 나라의 손해니 뭐니, 가족은 어쩌느니 하는 소리들은 싹다 음소거 하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포스만 움직여"
때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가장 좋을 때가 있다.
모든 책임감을 다 내던져 버리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거. 아니,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 뒷처리를 하던가 하지 안그러냐?
"소크라테스가 그랬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주제에 남부터 신경쓰면 죽도 밥도 안돼. 그러니까 일단 너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나 국가를 생각해"
"흠......"
"물론 잘난 영웅심이나 희생정신이 걸리적거리겠지만 우선 자기부터 생각해봐야 할거 아냐?"
최소한 내가 아는 영웅님도 자기 먼저 생각할 때가 있다. 주로 다음을 위해서 힘을 비축하거나 살아남아야 할 때다. 그놈도 그러할진데 아직 부족하기만 한 윌은 안봐도 뻔하다.
"충고는 해줬어. 생각은 네가 해야 할 일이야"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다음에 보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다음에 영국 올 때는 시온이랑 같이 올지도 모르겠다. 밥은 몰라도 디저트는 좋아할테니까.
문득 한가지 생각나서 나는 윌에게 덧붙였다.
"나중에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기자회견 같은거 열어서 도움 요청해"
"그러면 폐가 되지 않을까요? 형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을텐데......"
"그게 신경스이면 대놓고 하지는 마. 암호 같은거 정해서 기자 회견 때 그 암호가 나오면 도와주러 가는건 어때?"
"암호요? 아,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파견이라면 몰라도 타국의 마스터 유저가 대놓고 도움을 요청하면 자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니까 국가적 이미지가 떨어진다.
그러니 윌도 대놓고 도와줘요 라쿤맨! 하고 부르진 못한다는 소리다.
그럼 남들 모르게 암호로 부르면 그만이지 뭐.
"암호는 민트초코로 하자"
"........"
잊지 않겠다. 민트초코.
* * * *
버진 호텔로 돌아온 나는 일단 웬디씨에게 문자를 보내 연락을 했다. 전화를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텔로 찾아온 그녀는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예요, 워스트씨. 테러 소동 때문에 런던 시내도 혼란으로 가득해서 일반인 피해도 있었거든요"
"뭐, 저야 운이 좋았죠."
"그런데 좋은 사람을 만나서 신세를 졌다고요?"
"나이 차이 조금 있는 아이인데. 꽤 마음에 들어서요. 서로 이야기 좀 하고 같이 놀다가 들어온거예요"
"아무튼 어디 다치신 곳은 없는걸 보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나는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 웬디씨에게 말을 돌렸다.
"그건 둘째치고 이번 소동 때문에 집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관광은 끝내고 오늘 저녁에라도 일찍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 그건 안타깝네요. 좀 더 관광할 것들이 많은데. 그런게 겹쳐서......"
"그러니까 비행기 노선 좀 알아봐주시겠어요? 최대한 빠른걸로요"
"알겠습니다. 예약 되면 바로 알려드릴테니까 그동안 쉬고 계세요"
나는 짐을 정리하고 다시금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별 다른 일이 없는 이상 시온이랑 폭풍섹스다.
집에서 홀로 독수공방 하고 있는 우리 마누라 불쌍해서 어떻해......!!
더군다나 남편이 출장간 젊은 아내란 설정은 꽤나 의미심장한 시츄에이션이다.
평소 같았다면 나도 크게 신경쓰진 않았겠지만 시온이 이번에 포스 유저로 등록하면서 성인 폼으로 자주 오갈 수 있게 됐으니까 그거 때문에 스토커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평범한 사람도 스토커가 생길 수 있는 판에 남자 하나 없는 집에서 사는 미모의 여성이라......뭐, 그 전에 몰래 들어오면 그대로 우리집 보안 시스템에 의해서 큰일나겠지만.
......그런데 시온이 침입자를 분자 단위로 분해 해버린다고 했었는데. 그거는 거짓말이겠지?
"6시 비행기로 예약 해뒀습니다. 물론 퍼스트 클래스로요. 영국에 오셔서 좋은건 많이 못보신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워스트씨"
"다음을 기약하죠 뭐. 아무튼 머무르는 동안 감사했습니다 웬디씨"
"그러면 다음에는 기사 서훈이라도 받으시러 오시는건가요?"
"......무슨 기사 서훈이요?"
"TV에서는 라쿤맨에게 기사 칭호를 내려야 한다고 떠들고 있는걸요?"
자연스럽게 별일 아닌듯 물어오는 웬디씨의 말에 나는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무슨 소리시죠? 왜 라쿤맨이 여기서 나오나요?"
"그렇게 노골적이였는데 제가 모를줄 알았나요? 워스트씨가 돌아오신 날 라쿤맨이 모습을 감췄다고 뉴스가 나오던데요?"
"그거야 우연이죠"
"우연도 한두개여야 우연으로 치부하죠. 만약 시치미 떼시는거라면......일단 존중을 해드릴께요. 여왕님을 구해주셨는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무엇보다 그분은 사적으로도 친척 분이신걸요. 좀 멀긴 하지만"
"네? 진짜요?"
잠깐만, 그렇다는건 왕족은 아니더라도 귀족이란 소리일텐데?
영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귀족끼리 결혼하다 보면 왕족이랑 연결되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세다리 건너서 모르는 집안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그렇지 귀족이 이런 경호원 같은 일을 하고 있어?
"딱히 이상한건 아닌데요? 아무리 돈 걱정이 없어도 사회 경험하는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돈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서 취미로 일을 하는 귀족들도 많아요.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그랬던걸요?"
"아, 그분......"
파파라치 때문에 교통 사고로 죽은 전 왕세자비. 나도 옛날에 이야기는 들었다. 젊은 나이로 죽어도 안타까운 일이지.
"회장님도 모르시는 일이예요. 저만 알고 있죠, 그러니까......다음에 오실 때는 저한테 연락 한번만 주세요. 개인적으로 오셔도 관광 안내 정도는 해드릴테니까요"
".......뭐, 일단은 그럴께요"
여태까지 한 말도 거짓말은 없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알렸다면 진작에 알렸겠지만 비밀로 하고 있는거라면......흠, 나름 괜찮은 사람인것 같다.
어차피 숨길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는 길어야 몇년 내로 내 정체는 들킬 것 같다. 이미 미국 쪽에서는 내 신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몰랑, 될대로 되라지. 어차피 내 정체 아는 사람이 한두명도 아니고.
내 짐을 전부 차로 옮기고, 그녀가 예약해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찰나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나 간다는 소식을 들은 시온인줄 알았는데 핸드폰에 떠 있는 수신인을 보니 백리였다.
"여보세요? 어쩐 일로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
[형!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루리가! 루리가 이상해요!]
"원래 그렇잖아"
[......아, 그러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천천히 말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