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라쿤맨 비기닝]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 되었지만 몰려든 기자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촬영용 헬기에서 쉬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를 찍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 일단 민트초코는 죄다 윌에게 떠넘겼다. 아무리 그래도 죄다 민트초코 맛으로 퍼오진 않았으니까.
근데 영국인데도 엄마는 외계인 맛이 있네......아니, 난 집에 가면 맨날 외계인 먹는데!
크으, 섹드립 오졌다.
"상황이 정리 되면 나중에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 시간 괜찮십니까?"
"나야 괜......잠깐만. 나 전화 하나만 좀 하고"
다른건 둘째 치고 나는 명목상 비즈니스로 온거라서 버진 그룹에 전화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알리바이 문제도 있고......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알리바이 신경쓸 수 있을리 없다.
시간이 지나면 들킬 거짓말에 불과하지만......적어도 내 보디가드를 맡고 있는 웬디씨만 넘어가 준다면 그나마 상황이 편리하다.
[여보세요? 워스트씨! 지금 어디에 계신건가요?]
"아아, 건물에 있는건 위험할 것 같아서 잠깐 나왔어요. 막 테러 일어나고 장난 아니였잖아요. 큰 건물 같은데는 어쩐지 폭탄 테러가 일어날것 같아서 잠깐 나왔어요. 여기에 꽤 사람 좋은 친구랑 만나서 잠깐 그 할머니 댁에서 신세 좀 지려고요"
[거기가 어딘가요? 제가 갈께요!]
"어차피 지금 교통도 마비되서 움직이는 것도 장난 아닐텐데요 뭐. 일단 오늘은 두고 내일 뵙죠. 내일 정도면 호텔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요"
[.......정말 안전하신거 맞죠?]
"뉴스 보니까 상황은 끝났다고 하던데요? 라쿤맨이 여기에도 나타났다는데 들으셨어요?"
[아, 그 소식은 들었습니다. 아무튼......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우선 거기서 머무르시고 호텔로 돌아오세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전화 하시고요]
"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웬디씨"
[별말씀을요]
적당히 웬디씨를 설득해서 하루 정도 시간을 벌었다. 못해도 내일은 호텔로 돌아가야겠지.
아마 내일 모레쯤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 합쳐도 일주일 조금 안될테니까 일정이 꽤나 빨라졌다.
울 마누라 얼굴을 일찍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따름이다.
"좋은 친구는 부정하지 않겠지만......할머니댁은 뭡니까?"
"맞는 말이잖아?"
윌에게 있어서 엘리자베스 2세는 공적으로는 여왕님이지만 사적으로는 할머니다. 테러 진압 들어가기 전에 물어본거 보면 여타 다른 할머니들이랑 크게 다른건 없었는데 뭐.
애초에 아무리 입헌군주제라도 현대 사회에서 여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건 아니다. 권력 자체는 있긴 할텐데 그게 막 딱딱하고 엄한 그런 느낌은 아니지. 그러면 가정사도 무거운 분위기는 아닐거다.
"진짜 느긋하게 관광이나 하러 왔었다면 마누라랑 왔을텐데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결혼 하셨다고 했죠. 낯 부끄러운 말도 들었습니다"
"너도 여자친구한테 그런 말 한두번쯤은 귓가에 속삭여본적 있지 않아?"
"........."
"님 혹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정도면 여자 한두명쯤은 만나는거 아니니?
내가 강해서 그런건지 몰라도 살다보면 인생에 한두명쯤은 나 같은 것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아, 물론 남자로 환생했을 때의 일이다. 여자로 환생하면 외모는 둘째쳐도 가슴 빵빵하고 골반 라인 개쩌는 퇴폐미 가득한 쭉쭉빵빵 모델이 되어버려서 길 가다가 헌팅 당한 적이 종종 있다. 헌팅(인신매매)도 자주 있었고.
아무튼 나 같은 것도 그러할진데 잘생긴데다 마스터 유저에 왕족이기까지 한 녀석이 여자 하나 못사귀어 봤다고? 따로 사정이 있는거 아니면 그냥 당사자가 숙맥인거다.
......이 녀석 아무리 봐도 백리 같단 말이야. 둘이 죽이 잘 맞을 것 같은데.
"뭐, 네 성격 문제라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법이야. 설마 사지 멀쩡하고 잘생긴 녀석이 연애 한번 못하겠냐? 못생긴 사람이 평생 연애 못하는건 봤어도 잘생긴 사람이 솔로로 죽는건 못봤어"
".......? 그러고 보니 연상이라고 했었지 정확히 몇살인지는 못들었네요. 혹시 제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겁니까? 아, 이런걸 물으면 실례가 되려나요"
아차, 너무 나이 많은 티를 냈다. 얼굴을 가렸으니까 몇살인지 파악도 못하겠지만......설령 까발린다 하더라도 얼굴 자체는 20대 후반, 아니, 여기는 외국이라서 동양인은 대체적으로 어려 보이니까 그걸 생각해도 윌과 비슷한 나잇대로 볼지 모른다.
정작 호적상으로는 내가 아래지만 말이야. 사회 경험 자체는 내가 많지만.
......그런것 치고 너무 어린애 같이 군다고? 자기 좋아하는대로 구는게 뭐 어때서.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되는거지.
울 직장 동료 막내인 '자유의 대마왕'이 말했다.
'자유는 두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해. 하나는 자기가 책임 질 수 있을것,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 이 두가지를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야'라고.
영국이니까 치는 드립이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자유로운 집요정이다. 최소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먼저 갈구진 않았으니까.
사람 죽인거? 그것도 괜찮아. 대마왕은 살인과 파괴 행위에 대해서는 인과율 면제가 특권이야.
"우선 자리를 피할까요. 여기서 계속 있으면 일하는 분들에게 폐를 끼치니까요"
"그런데 여기 말고 어디로 갈거야?"
"버킹엄 궁전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곳입니다. 주말에는 일반 관광객이나 시민들을 위해 공개하는 만큼 그 동안에는 어디에 있을거라고 생각하세요?"
"아, 따로 건물이 있는거구나!"
하기사 생각해보면 청와대도 대통령이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관저랑 집무를 수행하는 본관이 나누어져 있는걸 보면 당연한 일이다. 버킹엄 궁전이 무너졌어도 복구 공사를 할 동안 업무를 진행할 곳은 있었다.
하다못해 별장이라도 있겠지. 설마 왕실인데 별장 하나 없겠어? 어디 기암 절벽 끝 같은 폼나는 곳 위에 큼지막한 고풍스러운 성 같은 별장이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런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성은 없어요"
"정말?"
".......경관이 멋진 절벽 근처에 있는 별장은 있지만요"
있는거냐, 역시나 왕족이구만. 아무리 현 사회에 들어서 그 권한이 축소되었다고 하더라도 돈이 많은건 맞다.
윌도 왕족은 둘째쳐도 마스터 유저니까 돈 벌리는건 보통 사람과 자릿수가 다르겠지. 우리 나라면 해도 이경진 아저씨가 억대로 받고 있다고 어디서 들은것 같은데.
세계에서 몇명 없는 마스터 유저가 고작 몇억 정도 받는거 보면 우리나라도 참 대우 뭐같이 한다고 생각하지만. 몇억이란 돈이 크긴 하겠지만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수지타산이 영 안맞지.
"일단 자리부터 피하자고"
아직도 날아다니는 촬영용 헬기를 보면서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 * * *
우리들이 안내 받은 건물은 버킹엄 궁전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규모를 가진 저택이였다. 예상외의 사태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황급히 움직이고 있었지만.....뭐, 그건 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니까.
시간은 늦어서 슬슬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었다. 하기사 오늘 있었던 일이 일인 만큼 그걸 처리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비교적 건재하단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크던 작던 행사를 수행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권력을 가진 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뉴스에서 영국 총리가 기자 회견을 열고 이런저런 답변을 해주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의 신원은 확인 하셨습니까?]
[신원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 잔당을 비롯한 동조자들을 모두 근절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현장에 라쿤맨이 같이 진입하여 VIP들을 구출했다고 들었습니다. 따로 라쿤맨과 커넥션이 있었던 것입니까?]
[고맙게도 그는 자의로 나서서 이런 국가 중대사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말하는 것이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라쿤맨]
[그런데 테러 현장인 버킹엄 궁전을 반파시킨 인간형 적성종의 모습은 어떻게 된것입니까?]
[그건 저희도 파악하는 도중입니다. 확실하게 파악한 후에 공표할 예정이니 그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총리도 참 못해먹을 짓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테러에서 인질로 잡히고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상황에 혼란스러워 정상도 아닐텐데 정신 치료도 아니고 기자회견부터 하고 있었다.
물론 VIP들이 인질로 잡힌 테러로 인해서 생기는 경제적 여파.....예를 들어서 영국 기업 주가가 떨어진다거나 치안이 불안정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빠르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운이 좋다면 주가가 떨어지기는 커녕 어느 부분에서는 오를지도 모르겠다.
여왕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왕님에게 저녁 만찬에 초대 받았다, 표면상으로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랑 밥 한번 먹자는 것이지만......솔직히 다른 이유가 많겠지. 친분을 다지는건 예사고.
옛날부터 왕관쓰고 있는 사람들이랑은 별로 좋은 추억이 없다. 죄다 내가 목을 따거나 목을 따이거나, 둘 중 하나였지.
.......내 목을 딴 왕이 있냐고? 예전에 대마왕 되기 전에 하나, 존나 쌘 녀석이 있었지. 그놈한테 따였다.
뭐, 그놈은 어느 나라의 왕이라기 보다는 종족의 왕이니까. 시온이랑 같은 4대 차원종에 속해서 가진 무력도 장난 아니다. 로드도 아닌데 최상위 초월자면 말 다했지.
아무튼 나는 한가롭게 방 하나에 틀어박혀서 식전에 스콘이나 먹고 있었다.
"이야, 영국 요리는 별론데 영국 디저트는 괜찮단 말이야. 아, 단건 어지간해서 꽝이 없으니까 그런건가?"
스콘 맛있어, 스콘. 내가 만들어도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 만든 전문가에 비하면 좀 부족하단 말이지.....애초에 내가 요리는 다 잘해도 디저트 부류보다는 가정식 쪽이 특기니까.
나중에 갈 때 싸달라고 하자. 스콘은 보관만 잘 하면 비행기 타는 시간 정도는 버티니까. 아, 근데 음식물 반입이 되던가?
아무튼 스콘에 딸기잼 발라먹으니 끝도 없이 들어갔다. 약간 퍽퍽한 듯한 고소한 맛에 잼의 단맛이 섞이니까 아주 그냥 끝내준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 들어와. 스콘 먹고 있었는데 너도 먹을래?"
"나중에 저녁은 어떻게 하고요?"
"얼마나 먹는다고 고작 그만큼이 안들어가겠어?"
내가 엄밀하게 말해서 포스 유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식가다. 보통 사람이서 두셋은 먹고다 남을 만한 양을 먹을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윌은 상황이 정리 되고 안전이 확보되니 말투가 한결 풀어졌다. 좀 더 붙임성 있는 모습이라서 오히려 지금 모습이 더 낫다.
진짜 백리랑 만나면 한번 볼만 할 것 같은데......
"근데 여왕님도 참 고생이시네. 인질로 잡혔다가 풀렸는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공무를 보시나"
"가진 자의 의무니 어쩔 수 없잖아요"
"노블리스 오블리주? 뭐, 나름 맞는 말이긴 해"
세상에는 지랄 같은 개소리도 많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적인 만큼 옳은 말도 많다. 그 중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 즉 귀족은 의무를 가진다는 뜻인데 그 말은 위정자가 따라야 할 말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 국왕, 귀족 같은 부류는 꼭 지켜야 한다. 그들이 가진 힘은 다수의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국민을 두려워 해야지 국민이 그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물론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은 굳이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도 뭔가 다수를 이용해 돈을 번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우리 모두가 그런 상부상조 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돈 좀 더 벌었다고 딱히 배풀 필요는 없다. 착취해서 번 돈이라면 또 몰라.
단, 그것도 1대까지만. 그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그만한 의무를 행해야 하는 법이다.
책임과 의무. 중요한 단어고 세상이 돌아가는데 필요하지만 정작 그걸 지키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없다. 모두가 공평한 책임과 의무를 질 수 있다면 세상은 한결 좋은 세상이 될텐데 말이지.
그래, 아무것도 안하고 존나 빈둥거리다가 정작 일 터지면 나몰라라 하기 바쁜 정치가 새끼들아, 니들 말하는거야 니들. 세금 처먹고 그런짓 할거면 아예 하질 말던가.
"저는 정치 쪽이랑 연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요"
"아, 마스터 유저는 보통 다 그런가? 성격 탓인지 아니면 그쪽에서 문을 닫고 있는건지는 몰라도 죄다 정치랑은 연이 없어 보이더라고"
"그래요? 제가 아는 마스터 유저는 러시아랑 미국, 터키 쪽인데......형이 아는건 일단 한국이랑 일본이죠?"
"지난번 일도 있으니까 미국도 알아. 중국이랑 호주만 모르네"
"뭐, 애초에 마스터 유저는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어요. 저만 하더라도 간간히 파견 나가서 터키에 있는 에르도안 아저씨랑 만나는 정도인걸요 뭐"
"터키의 마스터 유저는 어떻든?"
"좋은 분이예요. 아이스크림 가지고 장난치시는거 빼면"
"아니, 거기서 돈두르마가?!"
"대공황 전에는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터키어가 '내 아이스크림 가지고 장난치지 마'인데 그거 써먹을 날이 올 것 같기는 하다. 음, 인터레스팅.
일단 내가 만난 마스터 유저는 한국의 이경진 아저씨, 일본의 히에이 히비키, 미국의 제이콥 볼드윈, 그리고 지금 앞에 있는 영국의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아, 씨 기니까 윌리엄으로 퉁쳐. 아무튼 이렇게다.
내가 보지 못한 마스터 유저는 앞으로 넷.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터키와 호주다.
그런데 그 중에서 두명은 나중에 만날것 같긴 하다. 중국과 러시아는 둘 다 가봐야 하는 곳이니까.
음? 그러고 보니 신기하다. 남은 두 나라의 마스터 유저들은 둘 다 여성이다. 여덞명 밖에 없는 사람 중에서 성비가 그 정도인걸 보면 역시 목숨 걸고 하는 직종인것 같다.
"러시아 쪽도 알지? 러시아의 마스터 유저는 어때?"
"......그 누나요?"
"누나? 누나라고 부르냐?"
"막 나이가 열살까지 차이 나진 않으니까요. 결혼도 안해서 아줌마라 부르면 보드카 병 가지고 머리를 후려치더라고요"
"거 누가 불곰 잡는 러시아 여자 아니랄까봐. 호쾌하구만"
내가 보기에 마스터 유저는 그만한 재능이나 성격이 있기에 될 수 있는걸로 보인다. 솔직히 그 중에서 재능만 따지면 최고는 이경진 아저씨다. 그 아저씨가 쓰는 유색공명기는 초월자 사이에서도 자주 쓰이는 기술이거든.
그런데 그건 그만한 기본기가 있어야 가능한데......좀 놀라서 그때는 재능이 개쩔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어떻게 배운거지? 나중에 한국 가면 물어보자.
"한창 놀 때 그러고 다니니까 좀 그러네. 일은 할만 해?"
"나름 괜찮아요. 오늘 같은 일만 없다면 말이죠"
"인생사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법이야. 당장 일반인도 내일 바로 죽을지 모르는게 인생인데 너도 좀 즐기긴 해야지. 뭐 좋아하냐?"
"아, 영화 보는거 좋아해요. 쉴 때는 팝콘 큰거 하나 사고 침대에 누워서 하루 종일 영화만 보거든요"
"무슨 영화 보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시간이 되어 자리를 옮겼다.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린 홀에는 마치 중세 시대에서나 볼법한 길쭉한 테이블 끝에서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미 테이블 위에는 식기 정도가 차려져 있었다.
이윽고 여왕님이 가장 상석에 앉고, 한동안 저녁 식사를 했다. 나름 왕실 요리사라서 그런지 내가 봐도 별 다른 의견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시온이랑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껄. 영국 요리에 트라우마 비슷한거 가지고 있는것 같더만.
"요리는 입에 맛았나요?"
"네, 잘 먹었습니다. 영국 요리가 맛 없다고 하긴 했는데 그게 헛소문으로 생각했을 정도로요"
"어머,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디저트가 남아 있는데 드시겠어요?"
"감사히 먹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할머니는 할머니야. 직원에게 말해서 나는 물론이고 윌에게 계속해서 요리를 가져다 주다가 겨우 디저트까지 왔다.
설마 내가 배 부르게 먹을 줄을 꿈에도 몰랐군......시골 가면 살 5킬로는 쪄서 온다더니.
"디저트도 마음에 들거예요. 제 둘째 딸이 결혼 할 때 콘테스트를 열어 만든 아이스크림이니까요"
"그거 기대되네요"
응? 그 이야기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여왕님 딸이면 공주님이나 마찬가지잖아.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썰 같은건 들어봤다고.
내 감각이 지금 지독하게 불길한 느낌을 예고하고 있었다!!!!
"영국 왕실이 자랑하는 민트 로열 아이스크림입니다. 맛있을거예요"
"........................"
말이 민트 로열이지 민트 초코다. 내 눈 앞에는 익숙한 초록색의 아이스크림이 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것도 큼직하게 퍼서 세덩이 정도. 아마 디저트가 아니라 이것만 먹어도 보통 사람은 배부를 정도로.
여왕님 앞이라 예의를 생각하면 거부할 수도 없고 윌에게 떠넘길 수도 없었다.
"눈물 젖은 민트초코를 억지로 먹는 느낌이란......"
아무도 못듣게 한국어로 중얼거리면서 어거지로 민트초코를 입안에 쑤셔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