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라쿤맨 비기닝]
무너지는 궁전 천장을 통해서 올라가자 주변에서 보이는건 아까 돌입 전에 보았던 빼곡하게 주위를 포위한 경찰, 군 병력들이였다.
다만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건 테러리스트들이니까 전차 같은건 몰고오지 않았다. 단지 지금 주위에는 방송용 헬기 같은게 몇대나 날아다니고 있었다.
난 상관 없는데 인명피해가 걱정이지!!!
"넌 내려가서 사람들 물리고 혹시나 생기는 여파 좀 막아봐! 범위 방어계열 특성 같은건 있지?"
"네!? 그런거 없습니다!"
"아오! 정작 원탁의 기사 이름 달고 로드 카멜롯도 못써? 아, 그건 갤러헤드였나? 쓸모가 없구만!!!"
나는 일단 무너지는 궁전에서 데리고 나온 윌을 지상으로 착지시켜서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키게 했다, 버킹엄 궁전 주변에는 경관상 문제인지 일정 반경 내에 건물은 없었으나 지금 테러리스트를 진압하거나 특종을 잡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서 인구밀도가 높았다.
윌리엄이였던게 에너지 구체 하나만 날려서 그 여파만으로도 사람 수십은 쉽게 죽어나갈께 뻔히 보인다.
"일단 넌 도움 못되니까 잔말말고 내려가 그럼! 돕겠답시고 얼쩡거리면 너 먼저 패준다!"
"알겠습니다! 그럼 몸 조심하십쇼!"
"오냐!"
나는 본격적으로 놈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일단 상식 내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녀석은 이제 미국에서 봤던 인간형 적성종처럼 중력 법칙을 부정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익숙해지지는 않아서 약간 흔들거리는 느낌은 있어보이지만 적응하는건 시간문제다.
"너, 내가 밉지?"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말은 하지 못해도 말은 알아듣는 모양이였다. 내가 한 말에 놈은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아까의 에너지 구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놈의 등 뒤에서 만들어졌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십수개가.
"이 새끼 진화는 속도가......!"
윌리엄이 윌리엄이였던 것으로 바뀐지 기껏해야 10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 정도로 힘을 사용한다면 하루, 아니 하다못해 한시간이라도 지났을 때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어진다.
마치 4대 차원종 중에 블러디어를 보는 느낌인데......! 진짜 비교하면 저놈 쪽이 훨씬 낫지만!!!
쿠우우우우!!!
십수개의 에너지 구체를 나를 향해 쏘아졌다. 이제 속도도 음속을 뛰어넘어서 흡사 기관총마냥 연속으로 날아왔다.
역장을 강화해서 그대로 몸으로 막았다. 피해도 되지만 그랬다간 저 멀리 날아간 에너지 구체가 건물 한두개 무너트리는건 쉬운 일일테니까.
내가 몸으로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가 지상에까지 닿았다. 폭발에서 일어난 충격파가 몰려있던 경찰차 같은 차량의 유리를 박살냈다.
"최대한 단숨에 조져야 할것 같은데......!!!"
이건 시간 싸움이다. 놈을 최대한 빨리 조지지 않으면 뭘로 얼마나 진화할지 모른다.
나는 일단 견제삼아서 주먹을 날렸다. 그로 인해 발생한 권압이 놈의 몸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정도 뿐.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고속으로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오오오오!!! 는 개뿔이!!!"
콰가가가각!!!
괴물은 빠르게 비행하다가 그 가속을 덧붙여서 나에게 강습했다. 외골격으로 이루어져서 새하얗고 뾰족한 손톱이 내 목을 노려왔다. 팔을 들어서 막았지만 놈의 역장과 내 역장이 서로 충돌하면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거리는 가까워졌다.
"기동성 참 귀찮네. 그럼 잡고 때리면 그만이지!"
보통 고정되지 않은 목표라면 후려쳤을 때 뒤로 움직여서 충격량이 감소된다. 다짜고짜 얼굴을 처맞았을 때 뒤로 넘어지거나 고개가 돌아가는것도 다 충격을 줄여서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잡고 때리면 충격은 온전히 들어간다.
우득!!!
녀석의 안면을 손바닥으로 붙잡고 공격하던 손을 뿌리치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차게 펀치!!!
"강권극기(强拳極技)!!"
옛날부터 나랑 같이해온 몇 안되는 기술 중에 하나! 닥치고 잡고 때린다!
콰아아아앙!!!
꽤나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후려치고 충격을 줄이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들어가자 충돌하는 소리가 아니라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빠각, 하고 놈의 안면에 금이 갔다.
아니, 그 정도로 쳤는데 금 간걸로 끝이야? 어중간한 걸로는 이빨도 안들어가겠네.
[오오오!!! 미워! 미워! 너어어어!!!]
"어? 지성이 생기기 시작하네 이 새끼?"
놈은 내 얼굴에 손을 뻗고 라프 에너지를 응집해 방출했다. 에너지 구체가 아니라 분사하는 형태. 위력 자체는 약하지만 시야를 가리키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 가슴팍을 걷어차고 내 손에서 벗어났다.
"지성도 생겨? 아, 인간형 적성종도 나름 지성은 있던거 보니까 너도 생길만 하네. 그런데 걔들은 말을 못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놈이 하는건 언어가 아니라 의지였다. 라프 에너지에 의지를 담아서 의사를 전달하는 쪽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전음보다는 혜광심어에 가까울까. 아, 이건 무림인이 아니면 차이를 못느끼나?
만약 '언어'로 전달한다면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소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의지'로 전한다면 남녀노소, 인종, 동물 가리지 않고 이해시키는게 가능하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아아아아!!!]
녀석은 손톱을 치켜들고 고속으로 비행하며 나를 공격했다. 직선으로 움직이던 아까와는 다르게 제법 변화를 넣어서 곡예비행과 같이 곡선이나 회전을 넣어서 현란하게 손톱을 휘둘렀다.
지성이 생겼다는게 전부 좋은건 아니다. 특히나 태어난지 얼마가 안된 놈에게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더 나빴다.
본능적으로 움직인다면 최소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도주를 선택하겠지만 애매하게 지성이 있다면 목적을 위해 무시하고 돌격한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끝을 내자"
어중간한걸로 안되면 큰걸로 날려주면 된다.
전에 아틀라스 한국지부를 날려버렸을 때 썼던 성제붕권(星帝崩拳).....아니, 그건 물리력 기반이니까 다른게 좋다.
제빠르니까 그걸로 할까.
"의지근원론에 의거하여. 천지만물 삼라만상, 태초에는 뜻으로 존재하였으니"
키이이잉!!!
내 주먹에 묵직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서서히 변화하더니 점차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으, 아아아! 아! 너! 너어어!!]
놈이 불길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쳤어도 잡아 죽였겠지만 덕분에 나는 편하게 되었다.
지성이 있다는건 행운일지 불행일지, 적어도 너에게는 불행이구나.
"이 주먹에 심연을 담지 못할리 없다"
조금 과학적인 이야기지만 광속은 물리법칙 안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
만약 물질이 광속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지 질량이 0이여야지 가능하다. 빛이 광속으로 움직이는 것도 빛을 이루는 광자가 정지 질량이 0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빛이 있다면 어둠이 있는 법.
나는 성격상 빛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둠은 이해했다. 그렇기에 주먹에 어둠을 담았다.
개념적인 것에 질량이 있을것 같니?
물론 로드에 이르지 못한 내가 광속에 도달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아광속 정도는 가능하다.
"암제붕권(暗帝崩拳)"
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아아...........악?]
괴성을 지르던 놈은 그대로 상반신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머리와 하반신만 남은 녀석은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한참 뒤늦게 그 여파가 불어닥쳤다.
쿠과가가가가가가각!!!
폭음과 더불어 공기가 찢겨나가는 소리. 충격파, 그 전부가 뒤섞여서 일어난다. 만약 진짜 물리법칙에 의한 아광속이였다면 그 속도에 의해 핵분열이라도 일어나서 그대로 핵폭탄마냥 터져야 정상이지만 개념적인 공격에는 일반적인 물리법칙이 반영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초월자만 하더라도 금색 전기를 쓰는데, 실제로 전기는 청백색이다. 그런걸 생각하면 물리법칙 어쩌고 하는거 생각하는 것도 좀 웃기다.
이 기술은 시온과 저번에 보았던 팬텀을 참고하여 만들어낸 기술이다. 성제붕권은 시온의 사촌인 유토피아를 참고로 해서 만들었고. 나름의 모티브를 가졌기에 만들기는 쉬웠다.
추락하는 놈의 몸뚱이를 보면서 조용히 지상으로 착지했다.
오늘은 좀 피곤하구만.
* * * *
그 뒤에 일은 내가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특종에 열광하는 기자들이 몰려들기는 했지만......
"라쿤맨! 영국에는 언제 오신겁니까?"
"미국에서처럼 여왕님과 총리님을 구하시고 영웅이 되셨는데 소감 부탁드립니다!"
"방금 전에 싸웠던 인간형 적성종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라쿤맨!"
"라쿤맨! 저기요, 라쿤맨!!"
몰려드는 기자들은 한국이랑 똑같았다.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곳이니 크게 다를건 없는게 맞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간에서 제지한 경찰 병력들이 기자들을 밀어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쉴 수 있었다.
크게 힘을 쓴건 아닌데 충격적인 일이 있어서 조금 피곤했다. 테러는 그렇다 치더라도 라프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부정'의 감정을 품는다면 그 효과가 증폭된다는게 귀찮았다.
......아틀라스 녀석들은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 많은 실험을 했을텐데 아틀라스를 싫어한 실험체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아니, 분명 아틀라스를 미워했던 실험체는 있었겠지만 그 전에 적성종으로 변이했던게 빨랐을 것이다. 이번처럼 융화된 모습으로 변한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일거다. 아니였다면 놈들의 기술력은 좀 더 발전했을테니까.
아마도 도핑약 자체의 성분이 거기에 특화되어서 그런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적성종으로 변이되지 않는 수준에 약물, 감정까지.......아니, 어차피 내가 생각할 분야는 아니지. 그래봤자 나오는거 다 때려부수면 그만이니까.
"고생하셨습니다, 라쿤맨"
"아, 응, 너도 고생 많았다"
윌은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 괴물과 싸울 때는 전부 당신이 했지 저는 도와드리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당연한거야. 아까 그놈이랑 싸울 수 있는 마스터 유저는 애초에 거의 없을껄?"
화력은 제이콥을 능가하고, 속도는 음속으로 날아다니는데다 방어력은 윌보다 튼튼했다. 게다가 점차 시간을 끌어서 제대로 된 지성을 갖추기라도 했다면 마스터 유저 전부가 모여있어도 가지고 놀다가 다 죽여버렸을껄.
윌이 약한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소리다. 밸런스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지구는 이능력이 나타난지 겨우 20년에 불과하다. 그에 비하면 라프 에너지는 얼마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한 문명을 주름잡는 이능력이고. 차이가 있는게 당연했다.
운이 좋다면 지구는 이대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멸망할 뿐이다. 수준의 차이가 너무 나니까.
뭐, 멸망한다면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데리고 화성으로 떠나서 테라포밍 한 뒤에 유유자적하게 살거다. 솔직히 그게 마음 편하다.
지금 라쿤맨 짓을 하는건 어디까지나 취미. 본업인 대마왕은 어디까지나 문명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지켜보다 안되면 심판하는 쪽이다.
물론 난데없이 진짜 초월자가 나타나서 멸망시키려고 들면 그건 막는다. 애가 잘 자라는거 보고 있는데 어른이 와서 다짜고짜 패면 어떻하겠냐, 말리거나 조져야지.
그 외에 지구가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면 저쪽에서 명백하게 침략 의도가 있다는걸 확인한다면 된다. 지금이야 나나 프로메테우스를 상대로 알아낸 심증 밖에 없지만 넘어온 적성종이 '침략하러 왔다!'하고 말하면 그 순간으로 조지러 간다.
지금 당장은 조금 애매해서......억지 부리면 가능하긴 한데 기왕이면 물증 있는 편이 더 좋다.
우리도 나름의 규칙이 있어서 차원 침략은 문명 멸망 사항이다. 경제적 침략도 침략으로 보는 마당에 무력 침공은 안봐도 뻔하지.
문득 나는 윌의 손에 뭔가 들고 있는걸 보았다. 익숙한 아이스크림 가게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근데 그건 뭐야. 아이스크림 사왔어?"
"워낙 번잡해서 멀리는 못나갔습니다. 자주 가는 가게에서 사온건데.....단건 좋아하십니까?"
"제일 좋아하진 않아도 싫어하진 않아. 그리고 피곤할 때는 단게 땡기지"
"잘 됐군요. 같이 드시죠"
내가 겪어봐서 아는건데 외국 애들은 징하게 아이스크림 좋아하더라. 물론 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포스 유저는 먹는 양이 많기에 하프 갤런 사이즈로 2개나 사왔다. 아니, 그래도 한사람이 이정도나 먹으면 좀 물리지 않냐.
"아무튼 잘 먹을께"
나는 그래도 내가 산 것도 아니고 얻어먹는 입장이니 감사히 잘 먹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나는 요식업 종사자인 만큼 어지간해서는 먹을거 안남긴다고. 사람이 먹을게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
"......?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아이스크림 통 뚜껑을 열자 익숙한 초록색 바탕에 검은 알갱이가 박힌 그것이 나를 반겨주었다.
"너.....그런거 먹니?"
"민트초코 싫어하십니까?"
윌에 대한 호감이 싹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