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라쿤맨 비기닝]
아침 먹고 조금 쉬다가 버진 기업의 회장을 만나기로 했다. 리처드 브랜슨이였나? 그 사람 말이다.
빨리 아틀라스 잡아서 조지고 싶어도 일이 끝나야 저쪽도 도와주고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빠르게 처리한 뒤에 끝내도록 하자.
내가 안내받은 곳은 막 그룹 본사 최상층 같은 곳이 아니라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였다.
물론 회사에서 사먹고 그러니까 규모가 있어서 어지간한 유명 체인점 카페와 비슷할 정도였지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였나? 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로 탁 트이고 요란한 곳이였다.
"오! 안녕하십니까! 제가 리처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쪽이 워스트씨인가요?"
"아, 네. 맞습니다. 편하게 워스트라고 불러주세요"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딱딱하게 회장실에서 이야기 하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이야기 하는 편에 마음이 편해서요"
"이해합니다"
약속 시간에 나타난 사람은 백발의 노년기에 접어드는 남성이였다.
대략 6,70세 정도 되어 보이며 잘생겼다기 보다는 사람 좋아 보이고 후덕한 인상이였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미리 시켜둔 커피를 마시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잡담을 나누었다.
"아, 카페 라떼군요. 누군가가 나이가 들면 점잖아져서 쓴걸 즐기게 된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이 나이가 되도록 달달한게 좋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아메리카노 쪽이 싫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달달한게 낫거든요. 그렇지만 나이가 꽤 있어 보이시는데 건강 생각하시려면 좀 적당히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인거 좋아하는걸 하고 가는게 낫지 않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죠. 그래서 남자의 수명이 짧은 모양입니다"
나는 환생자라서 다음 기회가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인생은 즐기는게 좋다.
보통 사람들에게 다음 기회란 없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게 중요하다.
"그나저나 미스 시온의 대리인으로 오셨다고 해서 조금 놀랐는데. 무슨 관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못들으셨나요?"
"네, 사업 이야기는 대리인이랑 하라고만 전해 들었지 딱히 그 이상 들은건 없습니다. 혹시 교섭인이나 변호사 쪽에서 일하시는 분인가요?"
"아뇨, 시온은 제 안사람 됩니다"
"......오, 미스가 아니라 미세스였군요. 이거 꽤 놀랐습니다. 하기사, 사업에 유리할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민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를 짐작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저도 그건 놀랐죠"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시온이 만약 이민 절차를 먼저 밟지 않았다면 내가 미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게 시온에게 편하니까.
게다가 어느 한쪽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면 배우자도 시민권 얻기는 쉬우니까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사업 몇개 벌이고 있는 시온이라면 미국 정부에서도 며칠만에 시민권을 내주겠지.
"솔직히 말해서 제가 온 이유도 들은게 없습니다. 그냥 다짜고짜 전권을 맡긴 다음에 보낸거나 다름없죠. 혹시 무슨 이유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내분이 짖굳으시군요"
"뭐, 가끔은 그게 귀엽기도 합니다"
"한창 좋을 때죠. 저는 이혼한 적이 있어서........아내와는 화목하게 지내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힘드셨겠네요"
"뭐 그렇죠"
리처드 회장은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온은 원하는대로 해달라고 해주고 넘기라고 했지만 되도록이면 시온의 손해를 보지 않게 만드는게 중요하다.
내가 가진 교섭의 재능이라고는 상대 멱살 잡고 탈탈 털어서 하라고 개판치는게 전부니까 이득은 못보더라도 적성선을 찾아야 한다.
"저희 버진 그룹의 계열사 중에서 버진 갤럭틱이란 이름의 우주 여행 회사가 있습니다"
"우주 여행이요?"
"네, 화성까지 여행을 가고 막 그런건 바라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위성 궤도까지 나가는건 제가 살아 있을 때 한번 해보고 싶거든요"
우주 개발 분야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물론 그만큼 돈이 될 수도 있지만 위험부담이 크다.
하다못해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면 돈을 벌 수 있는게 많다. 보니까 이런저런 사업에 발을 넓히고 있던데 그걸 응용하면 여기서 돈을 더 버는 것도 가능할거다.
그런데 왜 하필 우주 여행 사업을? 아직 달도 제대로 못가는 시대인데?
"왜냐니, 그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
놀랍게도, 리처드 회장의 말에서는 거짓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돈보다 로망을 꿈꾸고 있다는 소리다. 요즘 세상에 물질적인게 아니라 꿈을 쫒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 중에서 현실적인 사람의 대명사인 재벌이 그런다는건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일이다.
덕분에 나는 리처드 회장이라는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물질 사회에서 돈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게 가장 중요한건 아니다.
나는 환생자이기에 나에게 있어서 돈은 중요한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형태가 없는 것들이 주된다. 예를 들어서 추억이나 감정, 인간성 등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좋게 대하거나, 내가 타인에게 좋게 대하면 서로 호감이 남고, 기억에 남아 추억이 된다. 설령 죽어 없어지더라도 나는 그걸 다음 생에까지 기억하고 간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당장 손에 남는 돈을 추구한다.
리처드 회장은 그 돈을 가득 쥐고 있기에 로망을 추구하는게 아니였다. 내가 본 그의 천성은 순수하게 로망을 추구하는 모험자다. 그가 가진 재력은 그에 따라온 들러리에 불과했다.
"미스, 아니 미세스 시온이 가지고 있는 특허가 몇가지 있습니다. 우주 개발 산업에 뛰어드는데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에 그 로열티 조절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겁니다"
"특허? 아, 대충 짐작이 갑니다"
시온은 물질 문명의 화신이나 다름없다. 순수하게 과학 기술력을 따진다면 100년 내로 지구가 블랙홀 축퇴로를 만들어서 우주에 뛰어들게 만들 수 있을 기술을 셀 수 없을만큼 쟁여두고 있다.
게다가 주식 투자하는데 주가 올리려고 기업에 뿌린 기술도 있고 하니 특허를 가지고 있는 기술 몇개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건 없다. 오히려 주식 투자만으로 2년만에 그렇게 돈 벌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한가지 의문이 풀리는 부분이다.
특허 사용료라.......하기사, 주식이나 경영 관련 일이였다면 시온이 나를 보내지는 않았겠지. 시온도 내가 그런 쪽에 영 재능 없다는걸 아니까.
결국은 특허 사용료를 조절하고 받기만 하는 이쪽이 갑인 상태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진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중요한건 신뢰와 호감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신뢰도가 떨어지면 일을 맞길 수 없고 호감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을 맡겨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런면에서 리처드 회장은 좋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보기 드문 사람인데 하물며 재벌 중에서는 오죽할까.
내가 괜히 학창 시절에 친구 몇명만 사귄게 아니다. 기준을 크게 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였다.
......절대 사교성 문제가 아니다. 아무튼 아님.
그렇지만 독점권도 아니고 그냥 사용료라면 이야기가 빨라진다. 솔직히 독점권이였다면 다른 문제 때문에 더 생각해야겠지.
"그쪽에서 생각하신 금액이 있으실텐데 그럼 그걸로 하죠"
"네? 정말입니까?"
"어차피 막 후려치려는 금액도 아닐테고, 만약 그랬다면 계약서 작성할 때 엎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쉽게 가자고요"
"이야기가 빠르시군요. 며칠은 대화를 나눠야 할 줄 알았는데"
"복잡한 이야기는 단숨에 끝내는게 좋아서"
아까 사람 관계에서 중요한건 신뢰와 호감이라고 했지만, 장사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건 그중에 하나인 신뢰다.
만약 대놓고 후려치려고 했다간 까놓고 말해서 손절각이다. 상대도 그걸 아니까 섣부르게 손은 못쓰겠지.
아마 적당한 금액이라고 해봤자, 통이 크면 적정선보다 조금 위, 양심 없어도 적정선보다 조금 아래겠지. 나는 뒷일이 있으니 그거 때문에 빠르게 끝내려고 느낌도 있고.
돈의 액수에 문제가 있으면 정식 계약을 할 때 거부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거 준비하려면 며칠 또 걸리겠지.
"감사합니다, 워스트 씨. 솔직히 이런 사업적인 대화는 별로 익숙하지가 않거든요. 제가 관심 있는 분야라서 나온거지 실제로는 실무진이 다 합니다. 서류도 난독증이 있어서 잘 읽지 못하고요"
"도대체 어떻게 회장님이 되셨어요?"
"그냥 하고 싶은걸 하다보니까 되더군요"
그거 듣도보도 못한 발상이로군.
만약 그렇게 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면 세상 사람들 전부 다 좋아하는것만 하면서 돈을 벌며 살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 됐겠지. 본인은 하고 싶은거 했다지만 결국에는 그것도 사업적으로 연계되서 그런걸거다.
이래서 재능 있는 것들은.......! 부럽다! 나도 재능 같은거 있었으면!
나야 환생자로서 경험치빨로 밀어붙이는거지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면 천재들에게 밀린다.
"일이 성사된 기념으로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저희 집 주방장이 실력이 무척 좋습니다"
"아, 저는 요리에 대해서는 까다로워지는데요"
"기대하셔도 괜찮을겁니다"
나와 리처드 회장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일이 성사되었음을 축하했다.
비즈니스 적인 일이 끝났으니 본업으로 돌아가실까?
* * * *
리처드 회장과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당분간 영국 관광 겸 찾은게 있다고 하니 통 크게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
"오, 그런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쪽에서 사람을 붙여드릴테니 필요하신게 있다면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리처드 회장댁 요리사는 자신할만큼의 실력은 있었다. 전에 시온이랑 놀이공원 갔던 날 먹었던 시그니엘 호텔의 레스토랑과 비슷한 수준이여서 좋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서는 나에게 붙여진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얼굴이였다.
"웬디씨? 회장님이 붙여준다던 사람이 당신입니까?"
"네, 맞아요"
이거 좀 문제인데......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왔던 웬디 메이저스는 포스 유저다. 그때 그녀 한명만 나온걸 보면 나름 실력도 자신 있는 것 같다.
포스 유저는 이렇게 기업에 들어가서 보디가드 역할을 하기도 한다지만.......이럴 때 보면 도움 참 안된단 말이야.
감시라는 명목을 쓰기에는 리처드 회장의 인성이 괜찮았다. 아마도 본인 딴에는 유부남이라도 남자라 미녀를 좋아할테니까 그녀를 붙여준 것 같은데 그녀를 데리고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눈에 띄었다.
포스 유저들은 미남 미녀만 있어서 너무 탈이라니까.......백리도 포스 유저 각성한 뒤로 종종 번호 따가는 여자애들도 있더만. 본인이 숙맥이라서 여친 못만드는거지.
잘생겨도 여친 생기는 애들이 있고, 못생겨도 생기는 애들이 있더라. 가끔 보면 나 같은거 좋아해주는 여자도 있었지.
"회장님께서 모든 편의를 봐달라고 하셨어요. 뭐 부터 하실건가요? 관광?"
"음......일단은 관광으로 하죠"
우선 실마리를 있었다.
찾아보니 영국에 래버리지 사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분명 가이아 교에서 자금을 지원해준 증거가 있으니 래버리지 사가 아니더라도 분명 그 끄나풀 같은 녀석들이 있을거다.
하는 짓이 있을테니 분명 규모가 있겠지. 이름도 없는 소규모 회사로는 그런 실험실 운영같은건 못할테니까.
"어디로 모실까요, 워스트씨?"
"아, 그러면......엘리제 궁전으로 가죠"
"네?! 거기는 프랑스인데요?!"
"아, 잘못 말했다. 버킹엄 궁전이요"
"후우.....깜짝 놀랐네요"
나도 딴 생각 하다가 나온 말이라서 식겁했다. 엘리제 궁전은 프랑스에 있는거니 여행가는 사람들은 잘 생각하고 가라고!
버진 그룹에서 빌려준 리무진을 타고 움직인 우리들은 빅벤을 지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웨스트민스터 시내로 들어섰다. 버킹엄 궁전은 템즈강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도심에 가로막혀 강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워스트씨"
"아, 네"
차에서 일어난 우리들은 거리를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걸어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건 분수대였다. 보통은 볼 수 없는 크기의 원형 분수대와 그 가운데 세워진 조각상은 꽤나 공을 들인 티가 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성 보다는 서양식 저택 같은 느낌의 궁전이 있었다. 다만 건축 쪽에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약간 불균형적인 느낌이 났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의 건물이 좀 더 치중되었다고 할까.......보통 이런 건물은 좌우대칭으로 만들지 않나? 아, 그렇다고 건물 좌우대칭 안맞는다고 폭발시키는 코난에나 나올법한 사람도 아니고 크게 신경쓸건 아니다.
"기본적인 것이지만 설명이 필요하시다면 해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어차피 보려고만 온거거든요"
예진이가 본 예지에는 이곳이 폭발하게 된다고 한다. 다만 그 시간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다.
하지만 짐작가는건 있다. 만약에 놈들이 테러를 저지를거라면 분명 가장 효과적일 때를 노리는게 당연하다.
"저기에 영국 여왕님이 머무르신다죠?"
"아, 네. 보통은 평일에만 그렇죠. 주말에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을 하니까요"
"그럼 오늘은 못보겠네요"
상징적인 의미는 중요하다. 괜히 재난 영화에서 시도때도 없이 자유의 여신상이 날아가는게 아니다.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을 연출하려는 뜻이기 때문에 상징이란게 중요할 때도 있다. 그렇다면 놈들은 일반 시민들이 있을 때보다는 영국 여왕이 있을 때를 노릴거다.
......그렇다고 해도 주로 평일이니까 일주일 중에서 5일이나 그 선상에 오르게 된다. 조금은 나아졌지만 아득한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운이 나쁘다면 이번주 내에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예진이의 예지가 최대 며칠까지 내다볼 수 없으니 날짜를 특정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기감으로 살펴보니 지금 당장은 수상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경복궁 같은거랑은 다른 맛이 있어서 좋네"
거기는 왕이 살았던 곳이지 사는 곳이 아니라서 직접 들어가서 구경할 수도 있지만 말이야. 뭐, 주말에는 구경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테러 저지하려면 들어가야 하니까 구경은 그때 하도록 할까?
대충 둘러보다가 왕실 근위병(그 왜 머리에 성게 같은 털복숭이 검은 모자 쓴 빨간옷 입은 애들)들이 교대식 하는걸 운 좋게 봤는데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쟤들도 군인이지.......니들도 뺑이쳐라. 아, 대우는 우리보다 나으니까 됐나.
슬슬 돌아가려던 찰나 누군가 내 어께를 붙잡았다.
"어이, 중국인!"
"..........?"
뭐지 이 새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