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라쿤맨 비기닝]
눈을 뜨자 항공기가 착륙할 시간이 되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달라는 방송이 들려서 주섬주섬 채워 넣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야, 나는 천생 한국인인 모양이다. 아직 착륙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내릴 준비를 하는거 보면 말이다. 빨리빨리가 몸에 붙은 것 같다.
10분 정도 지나자 살짝 부유하는 느낌과 함께 항공기가 착륙했다. 그리고 게이트로 향해 항공기와 게이트가 연결된 뒤에 다시금 기장의 방송이 들렸다. 내려도 된다는 방송이다.
짐을 챙기고 일어나서 출구로 향했다. 바깥으로 나가자 한국과는 비교적 선선한 날씨가 반겨주었다.
영국이 한국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라고 하지만 계절의 차이는 별로 없다. 영국도 여름에는 여름이다.
단지 영국은 주변이 전부 바다인 섬나라기 때문에 좀 더 선선한 날씨인게 좋았다. 한국은 진짜 정도도 모르고 더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쯤에는 열돔 때문에 태풍도 못이길 정도로 엄청 덥더라.
뭐더라. 열돔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어서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지구 온난화 현상 진행중이라 그런거라며?
에이, 환경을 지켜야지. 환경 문제 신경 안쓰다 멸망한 문명이 몇갠데. 내가 과정을 본것만 3개고 결과만 본것만 5개다.
그런거 신경 안쓰고 막 자원 개발 하고 행성 버리고 튀어서 다른 행성에 똑같은 양아치 짓 하려다가 나한테 조져진거? 11개.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애초에 저지르지를 마라.
뭐, 나는 사람 죽이는걸로 책임 질 것도 없지만.
물론 살인은 중죄지만 여기에는 직업적인 대우가 있어서......응?
"환영합니다, 워스트 씨(Wellcome to Britain. Mr. Worst)?"
입국 절차를 거치고 출구로 나서자 보이는 누군가가 들어올린 패널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냥 다른 이름이 쓰여 있었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쓰여 있는 인물의 이름이 다른 것도 아니고 최악(Worst)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쓰는 이름의 최악의 '악'자는 악할 악(惡)자가 아니라 악착할 악(齷)자지만 한국인이 들으면 그런 의미보다는 제일 나쁘다는 의미의 최악을 생각하는게 대부분일 것이다.
나도 그걸 알고 있기에 해외에서 이름은 워스트로 민다. 간간히 내 이름 발음하기 어려운 문화권에서는 워스트라고 부르라고 일부러 먼저 그러기도 하고, 솔직히 개성 있고 어감 자체는 괜찮아서 자주 쓰는 이름이다.
영어로 치면 그 의미 때문에 다른 사람이랑 헷갈릴 염려가 없는 이름이라서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낯선 이국의 땅에서 저 이름을 본다는건......시온이 말했던 마중 나온다고 했던 사람이 저 사람인 모양이지?
패널을 들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여성이였다. 나름 잘 빠진 몸매와 외모, 전형적인 서구인의 외견을 띄고 보기 드문 밝은 금발.....아니, 상아색에 가까운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금발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말로 상상속에서나 나올법한 밝은 금발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 중에서도 거의 색이 없다고 느낄 수준인 상아색의 플래티넘 블론드의 머리칼을 가진 사람은 더 드물고.
인위적인 느낌은 안나는데. 진짜 자연산인가?
눈에 띄는 외모와 다르게 몸에 달라붙는 느낌의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은 나에게 인사를 건냈다.
"워스트 씨?"
"영어로 괜찮아요. 나름 할 줄 알아서"
"아, 한국어 할 줄 아는 직원이 저 하나 밖에 없어서 걱정했는데 한결 덜었네요. 저는 웬디 메이저스라고 합니다, 웬디라고 불러주세요. 버진 그룹의 보안팀 소속입니다"
"최악......아니, 워스트라고 합니다. 발음하기는 그쪽이 편할테니까 그렇게 불러주세요"
버진 그룹? 남사스럽긴 한데 버진이라면 처녀란 뜻 아닌가?
내가 아는 대기업이라고 해봤자 국내에는 진짜로 이름난 대기업 밖에 모르고 해외에서도 애플이나 구글 밖에 모르는 판에 영국의 기업을 알리 없었다. 그런데 진짜 그룹 이름이 버진이야? 진짜로?
"오랜 비행과 시차 때문에 피곤하실텐데 회장님과 약속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호텔로 가셔서 쉬시고 회장님과의 약속은 오후로 잡아드릴까요?"
"회장님이요?"
".......? 네, 리처드 회장님이요"
머임? 대체 머임?
모, 몬가 일어나고 있음.....!
시온한테서 듣기는 했지만 다짜고짜 회장님 만나러 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어안이 벙벙해진다. 아니, 나도 높으신 분들 만나본 적은 많으니까 딱히 긴장된다거나 그런건 아니거든? 근데 그것도 미리 들었을 때의 이야기지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소리를 들으면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선다.
마중 나온다고 했더니 이런 부류였냐......시온이 짬 때린거 아닌가 싶은 의혹이 불쑥불쑥 지나간다.
천생 집순이인 우리 시온이 해외에 나가서 일한다는건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차라리 화상 회의를 하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기왕 영국 가는 김에 나한테 비즈니스를 맡긴거 아닌가? 합리적 의심이 드는데.
"짐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아, 네"
내가 들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그녀에게 캐리어를 넘겼다.
이미 그녀의 연예인 같은 외모를 보고 포스 유저인건 보자마자 눈치 챘다. 더군다나 보안팀 소속이라고 했는데 여성의 몸으로 그런데서 일하려면 포스 유저가 아니고서야 힘들겠지.
그녀를 따라가 공항 바깥으로 나가자 리무진이 마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 하면 흔히 길쭉한 고급 세단을 생각할텐데. 실제로는 짧은 것도 있다. 길쭉한 리무진만 생각한 사람은 나 홀로 집에를 너무 많이 본거고.
짐을 트렁크에 싣고 뒷 좌석에 앉았다. 웬디 씨는 조수석에 앉고 운전사에게 뭐라 말하자 바로 출발했다. 아마 호텔로 가는듯 하다.
나는 그 틈에 시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한번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시온이 전화를 받았다.
[아, 도착하셨습니까?]
"아니, 비즈니스 적인 이야기가 있다고는 들었지 막 회장님 만나러 간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별거 없습니다. 그냥 가서 고개만 끄덕여주시면 됩니다]
"무슨 적당히 규모 있는거면 내가 알아서 손해 안보게 이끌어 보겠는데 이건 내가 상상하던 수준이 아니잖아?!"
나도 적성에는 맞지 않아도 회사 경영을 해본적이 있어서 나름 교섭은 할 수 있다.
다만 훨씬 잘하는게 라이벌 기업을 작살내서 위로 올라가는 쪽이라서 문제지.
내가 기업을 운영하면 말아먹지 않는게 다행이고 현상유지 하는 쪽이 최선이다. 평범한 수준의 비즈니스였다면 나도 납득하고 그냥 넘어갔을테지만 사안이 꽤 크다.
더군다나 내가 손해보는거면 신경 안쓰는데 손해보는건 시온 쪽이라서 문제다. 100원의 10퍼센트라고 해봐야 10원에 불과하지만 100억의 10퍼센트라면 10억이다. 생각했던 범위의 크기가 다르니 나도 마음을 달리 먹을 수밖에 없다.
[거기 그룹의 회장이 나름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걱정마시고 편안하게 일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하면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는데"
[어차피 이득 볼려고 그런거 아닙니다. 게다가 버진 그룹은 나름 영국에서 알아주는 기업이니 제가 손해보는 만큼 당신의 편의를 봐줄겁니다. 그러니 걱정마시고 즐기면서 일 보다 돌아오십시오]
"그렇다면 뭐.....알았어. 나중에 불만 없기다"
[기념품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그거냐.
나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으로 버진 그룹을 검색해 보았다.
내가 생각한대로 버진 그룹의 버진은 처녀란 뜻이였다. 왜 회사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었냐 하냐면 당시 창업자였던 리처드 브랜슨이란 사람이 '어차피 우리들 다 사업 처음이니까 회사 이름은 처녀(버진)으로 간다, 오케이?'라는 느낌으로 가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기업이 아니라 그룹인 만큼 손을 뻗은 분야가 상당히 뒤죽박죽이다. 처음 손댄 분야는 음반 업계지만 지금은 엔터테인먼트, 건강, 레저, 금융, 환경, 여행, 심지어 우주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아니, 일관성이 없는데 얘네 진짜 무슨 기업이야?
정작 창업한 분야인 음반 쪽은 하다가 말아먹어서 딴 기업에 넘겼댄다. 아, 시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
상당히 골때리면서 재미있는 기업이였다. 이런 식인데도 불구하고 사업이 망하기는 커녕 영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거의 무슨 삼성......아, 이 지구에서는 대성인가? 그런 느낌이려나.
오히려 괴짜같은 느낌이라서 마음에 든다. 어쩐지 모를 친근감이 솟아났다.
"오, 빅 벤이네? 그럼 저게 국회의사당인가?"
호텔로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면서 저 쪽에 거대한 시계탑이 눈에 띄었다. 런던에 오면 한번쯤 봐야하는 랜드 마크다.
난 저거 보면 어쩐지 101마리 달마시안 실사판이 생각나더라.
아, 2편이라서 102마리 달마시안이였나? 악역인 크루엘라(흑백 패션은 아직도 생각나더라)가 정신병원 가서 동물 애호가가 됐는데 빅 벤의 종소리를 듣고 치료가 풀려버려서 각성하는 모습이......지금 생각하면 추억꺼리가 엄청 많다. 영화 정주행이라도 해야하나.
다리를 건너고 얼마 지나자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앞에 멋진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분수대가 있는걸로 보아 꽤 돈 좀 쓴 호텔인듯 보인다.
근데 왜 호텔 이름에 버진이라고 쓰여있지? 설마......?
"이 호텔도 저희 그룹의 사업체입니다. 그러니 비용은 걱정하지 마시고 룸 서비스도 마음껏 즐겨주세요"
"고마워요. 아, 그리고 회장님을 뵙는건 오후에 약속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드릴께요"
최상층으로 안내 받아 올라간 스위트 룸은 킹 사이즈의 침대도 놓여 있는데다 화장실 크기만 하더라도 작은 원룸이라고 봐도 될법하고, 저 멀리 템즈 강과 빅 벤이 보이는 경치가 죽이는 이 호텔에서 제일 큰 방이였다. 농담 조금 보태서 화장실에서 이불 깔고 자도 편하겠다 야.
아니, 시온은 도대체 무슨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했길래 나한테까지 이런데를 빌려주는거야. 아무리 같은 그룹 사업체라고 하지만 이런 방이면 1박에 몇백만원은 가뿐하게 나갈텐데.
......아무렴 뭐 어때, 어차피 돈은 여기서 다 낸다니까 즐길거 알뜰하게 들기고 다음을 생각하면 되겠지 뭐.
일단 룸 서비스를 이용할까 하다가 그냥 아침을 먹기로 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조식 뷔페가 있다는데 호텔 뷔페는 먹을게 많으니까 일부러 먹으러 내려갔다.
영국에서는 맛있는 밥을 먹고 싶으면 아침만 3끼 먹으라는 말도 있고 말이야. 솔직히 단품으로 봐도 맛없는 메뉴가 없고.
아침이라서 그런지 뷔페 메뉴에도 무거운 것은 거의 없었다. 막 아침부터 스테이크 나오고 그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와도 먹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고기류라고 해봐야 베이컨이 주됐다. 아니면 치킨 샐러드 용의 닭 가슴살이라던가.
나는 일단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영국식 아침식사 메뉴로 골라 접시에 담았다.
베이컨, 소시지, 베이크드 빈즈, 블랙 푸딩, 계란 후라이, 약간의 샐러드와 방울 토마토까지. 이런 것도 맛없는 곳은 맛없지만 호텔 뷔페니까 기대를 저버리진 않을거다.
맛은.....뭐, 괜찮았다. 애초에 따로 봐도 맛없는건 없다. 블랙 푸딩 정도야 호불호가 갈리려나?
아, 블랙 푸딩은 우리 나라로 치자면 선지 같은 느낌이다. 다만 이쪽은 순대 같이 창자에 넣어 만든거라서 피순대 같은 느낌이 더 강하려나? 맛은 선지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디저트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저쪽에 있는 디저트 코너에 맛있는게 많아 보였다.
파티쉐로 보이는 사람이 즉석해서 수플레 팬케이크나 와플을 구워주고 있었다. 와플은 기계로 구우니 그렇다쳐도 수플레 팬케이크는 손이 꽤 많이 가는건데 역시 비싼 호텔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운드 케이크......살 찌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영국 요리라고 다 맛없지는 않다. 그 중에서 디저트 부류는 발달된 수준에 속한다.
상당수는 알법한 파운드 케이크는 영국이 그 발상지다. 다만 이게 흉악한게 밀가루, 계란, 설탕, 버터를 각각 1파운드씩 넣어서 만드는 디저트다.
1파운드가 대충 500g가 조금 안되니까 만들면 2kg에서 좀 모자라는 정도다. 디저트가 그 무게라고. 구운 다음에 케이스에 담아서 흉기로 써도 되겠다.
거기다가 살 찌는 재료밖에 안들어갔으니 전부 칼로리다. 시온이라면 '살찌는 디저트! 먹지 않고는 못배기겠습니다!'하고 우걱우걱 잘도 먹었겠지만 나는 뭐......그렇게까지 먹지는 않는다.
애초에 파운드 케이크도 한번에 다 먹으라고 만드는 디저트도 아닌데 뭐.
다른 접시에 두 종류가 담겨 있길래 각각 잘라서 접시 위에 올려봤다.
한쪽에는 건포도가 들어 있었다.
"이런 염병할......!"
어떤 개자식이 먹을거에 사탄의 젖꼭지를 넣어놨냐. 내가 먹을걸로 장난 치는 새끼를 가장 싫어한다고 했을텐데?
이 세상에서 저주받아 마땅할 것이 있다면 하나는 민트 초코요, 다른 하나는 건포도다. 세번째를 굳이 꼽으라면 맥콜이다.
건포도 들어간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에 맥콜을 말아먹는거? 시발, 시온 목숨 걸린거 아니면 그런거 내가 입에 대지도 않을거다. 지옥불에 불타 죽을 것들 같으니!
내 사촌 중에 사탄을 동료로 두고 있는 애가 한명 있는데. 걔한테 민트 초코를 보여주니 왜 인간은 스스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건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건포도 들어간 파운드 케이크를 다시 올려놓을까 하다가 위생이랑 민폐일거 생각하면 그냥 책임지고 먹는게 나을것 같아서 그냥 받았다. 대신 입가심을 위해서 즉석 디저트 코너에서 수플레 팬케이크와 와플을 주문했다.
"와플에 아이스크림을 얹어드릴까요?"
"아, 그런 서비스도 있었어요? 그러면 주세요"
"아이스크림은 바닐라와 초코, 그리고 딸기와 민트 초코가 있는데 어떤걸로 얹어드릴........"
"민트 초코만은 안돼요"
절대로 안돼.
시온과 나는 여러가지 성향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서 시온은 짜장면을 좋아하고 나는 짬뽕을 좋아하는 반면에, 탕수육은 시온이 부먹이고 나는 찍먹이다. 이러한 차이점이 있어도 서로 배려해주기 때문에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그 중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나나 시온이나 민트 초코는 극혐한다는 사실이다. 으윽, 그 치약맛 나는거 왜 먹지.
생각해보니 민트 초코의 발상지도 영국이였다.
흉악한건 죄다 빌어먹을 영국놈들이 만들어낸다니까.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