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라쿤맨 비기닝]
아침 6시 반! 칼기상!
"어우, 어제 너무 많이 먹었나. 아직도 속이 더부룩하네"
"그럴만도 합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습니다"
"왜 일어났어? 더 자지"
"오늘 당신 영국 가는 날 아닙니까? 배웅은 해드릴겁니다"
"집 앞까지?"
"공항까지 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나오네. 솔직히 집 앞까지 나와도 난 불만 없는데.
어제 너무 먹어서 그런지 아침은 대충 차려서 먹었다. 예진이는 어제 노느라고 피곤했는지 아직도 골아 떨어져 있었다. 하기사 일요일인데 학생이라면 일요일 늦잠 정도는 애교다. 저러다가 12시쯤 점심 먹을 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예진이는 자게 두도록 하고......우선 씻을까.
아침 먹고 씻고, 짐이야 그저께 미리 다 챙겨뒀으니 지갑만 챙기면 된다. 영국까지는 시온이 직항 노선을 사줘서 중간에 갈아탈 필요가 없으니 가는데는 시간이 걸려도 번거롭지는 않다.
"아, 그리고 거기 도착하면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을겁니다. 그 사람이 편의를 봐줄거니까 걱정 마십시오"
"사업상 아는 사람이라고 했지? 누구야?"
"제가 말 하는 것보다 만나서 자기 소개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나 비즈니스 관련 이야기 하거든 그냥 그쪽이 해달라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돼? 좀 더 줄다리가 안하고?"
"제가 당신 관련된 일에 손해를 걱정할 것 같습니까?"
하기사, 내가 시온이 걸린 일이라면 무고한 생명 수억, 수조든 신경 안쓰는 것 처럼, 시온도 내가 관련된 일이라면 돈을 얼마나 손해 보든 상관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거 신경 썼으면 내 차도 적당한 거였지 람보르기니 같은거 뽑아주고 그러지 않았다.
씻고 나오니 성장폼의 시온이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마중 나온다는게 성장폼으로 나온다는거였어?
"차 끌고 나가면 며칠동안 공항에 주차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올 때는 제가 운전해서 오겠습니다"
"면허는 있고?"
"저번에 포스 유저 등록하는 김에 땄습니다"
"하긴, 운전같은건 환생해도 기억에 남지. 하물며 넌 그냥 따겠다"
수십번 환생을 한 나와 다르게 시온은 겨우 한번 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케이스다. 이래서 수명 없는 종족은 부럽다.
그래서 그런지 나보다 망각이 더디다. 그게 마냥 좋은 뜻은 아니지만......아무튼 그런 기억도 마모된게 적어서 운전 면허 따는 것도 쉽다.
"면허 딸 때 면접관이 제 얼굴만 봐서 좀 민망했습니다"
"수작은 안부렸고?"
"그랬으면 전봇대에 들이 박았습니다. 멀쩡히 통과해서 면허 있는거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그럼 됐어"
울 마누라 얼굴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봐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맹인에게 미추가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해?
보는 것 정도는 문제 없다. 무슨 생각을 하던 그 생각 자체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나라도 보고 생각하는 정도로 사람 죽이는 수준은 아니다.
단지 그 선을 넘으면 문제지. 얼마나 넘냐도 문제고. 저번에 곱창집 취객처럼 딱 떨어지면 해프닝 정도로 넘겨줄 수 있다.
"예진이는......뭐, 일어나기 전에는 네가 들어가려나?"
"시간이 애매할겁니다"
"그럼 일단 출국하기 전에 문자로라도 남겨둘까"
슬슬 출발할 때가 되었다. 옷가지 등이 주된 내용물인 캐리어를 가지고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아마 주말인데다 시간도 일러서 가는 길이 그리 막히지 않을 것 같다.
"거기서 얼마나 있을것 같습니까?"
"글쎄.....생각보단 오래 있지 않으려나. 못해도 일주일은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단서가 있어도 그걸 기반으로 돌아다니려면 시간이 걸린다. 한국 지부는 운이 좋았지만 놈들의 꼬리를 못잡았다면 찾기 어려웠을게 뻔하다.
내가 전 세계를 기감의 범위 안에 넣을 수 있어도 거기에서 찾는게 뭔지를 알아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스스로도 찾는게 뭔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찾냐.
가서 증거 좀 찾아보고, 범위 좀 좁히고......그러면 일주일은 후딱 갈거다. 운이 좋아도 며칠이고.
"예진이가 말해준 예지는 꽤 증거가 많아. 아마 테러리스트 단체 위주로 찾아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미리 자료 조사 좀 해두겠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간간히 안부 전화는 할텐데 뭘"
아마 비행기안에서는 안되겠지만.
영국행 직항 노선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시간이 길다. 번거롭지 않은만큼 디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아마 미국행 비행기 비슷하게 가겠지. 물론 이번에는 정식으로 허가 받고 들어가는거지만.
차가 막히지 않아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는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새벽 비행기 타는 사람들인가......어디로 갈지는 전부 제각각이라도 제주도로 가는게 아닌 이상 한국을 떠난다는건 나랑 똑같았다.
나도 시온이 귀화만 안했어도 다른 나라로 이민가는건데 말이지. 하다못해 미국이라도 갔으면 대우는 한국보다 나았으려나. 돈 많으면 어디든 살기 좋은건 마찬가지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선물 사와야 합니다"
"뭘로 사올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사오기는 할께. 들어가는 날 전화 할테니까 마중 나올거면 그때 마중 나와주고"
"알겠습니다. 당신 없는 동안은 심심하니 사놓고 못했던 게임 수집 퀘스트나 클리어 하고 있겠습니다"
"세이브 데이터 내거는 지우면 안된다?"
"........."
"말을 해! 내거 세이브 데이터는 멀쩡할거라고!"
문득 어디선가 미래의 내가 STAY! 하고 외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지?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을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시온이랑은 가볍게 키스하고 헤어졌다. 주변 사람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몰리는게 느껴졌다. 주로 남자 쪽의 시선이.
사람을 노려보는걸로 저주해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에 내가 죽.....기는 개뿔이. 저주 같은걸로 죽었으면 옛날 옛적에 죽었지. 직접 죽일 자신도 없어서 저주 같은거 쓰는 놈에게 내가 죽을 것 같냐?
보통 나는 저주 걸면 반동 때문에 건 놈이 죽더라. 애초에 강대한 초월자에게 걸리는 저주는 대부분 그런식이다. 저주를 쓰는 사용자의 역량이 모자라고 격차가 엄청나서 그렇거든.
그러니 노려볼 시간에 좀 더 건실한 일을 해보거라, 바보들아.
"이야, 생각도 안했는데 무슨 1등석으로 뽑아놨냐"
나야 이코노미 좌석이라도 잘 타고 다니지만 시온이 퍼스트 클래스로 자리를 잡아두었다.
하기사, 근처 가는 것도 아니고 열시간 넘게 있어야 하니까 기왕이면 편한 자리로 타고 가는게 좋지. 가는 길은 편하게 갈 것 같긴 하다.
돈을 펑펑 쓰는 스타일의 시온과 다르게 나는 비교적 검소한 삶을 사는 스타일이다. 시온 덕분에 나도 돈을 많이 쓰는것 같지만 솔직히 당장 산에 들어가서 땡전 한푼 없이 살라고 해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시온이 그걸 불편해 하니까 그런거다. 막 문명이 발전 덜된 중세나 그런 시대도 아닌데 일부러 자연인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오, 저건가?"
탑승 시간이 되자 내가 탈 게이트에 연결된 항공기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늘을 난다는건 나한테 있어서 그리 특이할건 없는 일이지만 내 힘이 아니라 다른 물건의 힘으로 하늘을 난다는게 중요하다.
솔직히 재미있잖아. 이상하게도 이런 소소한건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가 않는다. 내 천성이 소박한걸 좋아해서 그런건가.......
게이트 입구에서 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가 탑승했다.
내가 탈 1등석이라 불리는 퍼스트 클래스는 누워서 가도 될 정도로 넓은 자리를 자랑했다. 타본적이 없는건 아닌데 간만이라서 꽤 즐겁다. 저번에 일본으로 갈 때는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라서 이코노미 클래스로 타고 갔고.
화사한 느낌의 스튜어디스가 웃으면서 인사를 건냈다.
"어서오십시오. 편의를 위해 자리를 확인하겠습니다. 표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아, 여기요"
입구에서도 확인했지만 여기서도 따로 확인하는 모양이다. 확인을 받고 그 뒤에 자리로 직접 안내 받았다.
내 자리는 중간 자리의 창가 쪽 자리였다. 2명씩 앉게 되어 있어서 내 옆자리에 누가 앉겠지만.....뭐, 운이 좋으면 혼자서 앉아 갈 수 있으려나? 완전히 풀로 다 차진 않을테니까.
자리에 앉아서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을 무렵. 기장의 방송이 들렸다. 곧 출발한다는 뜻이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다시금 눈을 붙었다. 어제 오늘 일찍 일어났더니 잠이 고프다.
잠깐 자 두도록 하자.
* * * *
내가 자다 일어났을 때는 시간이 벌써 점심 무렵이 됐을 때였다. 몇시간 정도 골아 떨어져서 잔것 같은데 자리가 넓으니까 누워서 자서 그런지 생각보다 꿀잠을 잤다.
문득 옆을 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 옆자리는 빈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퍼스트 클래스 쪽에 앉은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명 조금 안될까. 대부분 어디서 사업하거나 여행 가는 듯한 사람의 인상이였다.
슬슬 밥 때가 되서 그런지 스튜어디스들이 기내식의 종류 여부를 물어보고 있었다.
어제 해산물은 많이 먹어서 그런가, 고기가 땡기네. 이번에는 고기로 하자.
"기내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저는 고기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와인은 어떤걸로 해드릴까요?"
"와인은 됐고 그냥 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이게 일이라서 그런지 나 같이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한테도 웃어준다. 뭐, 미소가 공짜이긴 하니까.
솔직히 내가 퍼스트 클래스 타고 다니면 옆 동네 마피아 조직이랑 협상하러 가는 부두목 같은걸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다 좋은데 이놈의 눈매가 문제다. 화장을 해도 이건 천성이라 어쩔 수 없으니 나원.
일등석이라서 기내식은 밥 때는 다 나올 것이다. 노선이 길어서 저녁까지는 여기 있어야 하니까 저녁은 얄짤없이 기내에서 먹어야겠지.
그래도 일등석이 서비스가 좋다. 호출 하기만 해도 스튜어디스가 두어명은 달려나와서 편의를 봐주니까.
얼마 뒤에 내가 시킨 기내식이 나왔다. 고기라고 했더니 스테이크가 나왔다, 솔직히 함박 스테이크 정도 생각했는데 본격적으로 이렇게 나오니까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퀼리티야 그냥 저냥인 수준이고, 대신 빵이라던가 샐러드라던가 다른 것들도 여러가지 나왔다. 내 입맛에는 그냥 먹을 수준이지만 기내식에서 큰걸 바라는게 양심이 없는거다.
그나마 퍼스트 클래스라서 이렇게 스테이크가 나오지, 보통 이코노미 석으로 들어가면 미리 익힌걸 진공 포장한게 나온다. 그거 생각하면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아침은 대충 먹었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배가 고프다. 그래서 그런지 퀼리티가 그럭저럭힌 요리라도 빠르게 해치웠다. 애초에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남길리 없었다. 요식업 종사자가 먹을걸 남길리 없잖아. 싸가면 또 모를까.
고기에 샐러드까지 해치우고 빵에 버터까지 발라먹었다. 대충 다 먹었을 무렵에 스튜어티스가 어느새 다가와 디저트의 여부를 물었다.
"디저트는 어떤걸로 해드릴까요? 아이스크림과 쿠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으로 주세요. 바닐라 맛 있으면 그걸로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아이스크림 달라고 했더니 비싼 하겐다즈가 나왔다. 물론 큰거는 아니고 작은걸로.
이거 맛있기는 한데 작은 것도 막 몇천원 하고 비싸......아, 그런데 딸기맛 있었으면 그걸로 먹을걸 그랬나. 달덕으로서 딸기맛 하겐다즈는 진리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복숭아지만 그렇다고 딸기를 싫어하는건 아니다. 그리고 그냥 바닐라보다는 딸기맛을 좋아하니까.
근데 왜 하필 딸기맛이냐고?
네 이놈 공의 경계나 보고 와라!
손바닥에 올려도 아담해 보이는 하겐다즈를 따로 준 수저로 조금씩 퍼먹으며 입 안에서 음미하며 먹었다. 그러다가 자느라고 빛 들어오지 말라고 창문에 블라인드를 쳐둔게 생각나서 다시금 올려서 바깥을 보았다.
한창 비행하고 있는 항공기의 날개 아래로 지나가는 모습은 상당히 절경이였다. 이래서 창가 쪽 자리가 좋은건데 보통 이코노미 석은 그런 자리가 빠르게 빠지니까 앉기가 힘들다.
한동안 바깥 경치를 구경하다가 질려서 혹시나 싶어 챙겨온 책을 하나 꺼내 읽었다. 읽는 책의 제목은 '모모'.
라노벨이나 읽을것 같지만 나도 생각보다 다른 책도 읽는다. 물론 주로 판타지 계열이지만......근데 막 이능력도 쓰고 다니는데 판타지를 나누는게 의미가 있냐마는 일단 판타지로 분류되니까 그렇다 치자.
그렇지만 그걸 생각해도 이건 꽤 재미있는 소설이다. 라노벨 밖에 안읽는 시온도 이건 다 읽었을 정도라서 두께 때문에 손이 안가는 처음에 비하면 술술 읽힌다.
개인적으로 로알드 달의 아동 문학 소설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다.
21세기 사림이라면 팀 버튼 감독이 찍은 버전을 생각하겠고, 20세기 사람이라면 1971년에 찍은 뮤지컬 느낌의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나도 책을 먼저 읽고 팀 버튼 버전으로 영화를 접했는데 전에 TV어디에서 70년대 버전을 상영해주더라.
쇼생크 탈출처럼 중간에 봐도 한번 보면 계속 보게되는 마력이 있어서 방영표에 적혀 있길래 처음부터 보려고 기다리다가 뒤통수를 맞았는데 말이지.......그런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내가 아는 원작과 팀 버튼 버전과 비교하면서 보는 맛도 있었고, 중간에 나오는 노래도 좋았고. 그래서 나름 재미있게 봤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외에도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라던가 '마틸다'라던가 '내 친구 꼬마 거인'이라던가......시대가 바뀌면서 좋은게 옛날 명작들을 영화화 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내 친구 꼬마 거인'은 비교적 최근에 영화화 된거라 그때 시설에 있었어도 일부러 보러 갔었다.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난 재미있게 봤다. 간만이 동심 충전하고 왔지.
"아직도 3시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어도 두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할 일도 없으니 그냥 잠이나 더 자야겠다. 영국이랑 시차가 8시간 정도 차이가 나니 일찍 잔다 치면 될거다.
저녁은 거르고 그냥 거기서 아침이나 먹어야겠다.
최소한 영국 아침 식사는 맛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