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6화 〉[라쿤맨 비기닝] (116/507)



〈 116화 〉[라쿤맨 비기닝]

한참을 들어가고도 모자라서 옆에 있는 옛날 노량진 시장에도 들러보았다.

여기는 새 건물보다 나는 비린내도 더 나고 위생도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나는 이런 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청결만 좀  신경을 쓰면 될텐데 말이야,  애초에 그걸 못하니까 건물을 새로 지은건가.  단위로 썼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이래저래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상품의 질 뿐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의 관상도 조금 봤다. 하나만 좋은 쪽은 종종 보였지만 둘 다 좋은 쪽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30분 가량 돌아다닌 끝에 겨우 발견한 가게가 있었다.

"어서오세요! 뭐 찾으시는거 있습니까?"

"사장님, 굴 있어요?"

"아, 제철이 아니라서 많이 있는건 아닌데. 거기 있는게 전부예요. 10킬로 조금 넘으려나......"

"그럼 이거  주세요"

"어이쿠, 큰 손님이셨네. 잠깐만요"


전에 기분 상했던 가게와는 다르게 여기 사장님은 바가지에 물까지  빼서 저울에 무게를 달았다. 딱히 저울을 속하거나 억지로 눌러서 무게를 더한다는 둥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가게의 물건도 괜찮고, 기왕 살거 여기서 살거 다 사갈까? 어차피 다른데 들르기도 귀찮은데.

다른데  더 물건이 괜찮은 곳이 있다면 몰라도 여기 물건도 신선도가 좋다. 사장님 얼굴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런만큼 좋은 물건을 들여온 모양이다.

"어디보자......요즘은 뭐가 좋아요, 사장님?"


"음, 전복도 있고, 소라도 있고. 아, 성게알도 따로 알만 빼둔게 있으니까 그것도 좋고요. 대하도 큰놈으로 들어온데다 대합도 큼직합니다"

"다주세요"

"예?"


"다 주세요"

이거 더 갖고와.

아니,  갖고와가 아니지.


 가지고 와!


물론 여기 쟁여둔 물량이 있을테니까 전부 들고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문제 없는데 다른 사람들 시선이 문제지. 게다가 수십킬로씩 들고가면 아무리 나랑 시온이라도 하루안에  못먹는다.

다른건 몰라도 해산물은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좀 떨어진다.  얼리면 된다지만 가정에서 그런 기술로 얼릴 수 있을리 없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산날 다 먹는게 제일 좋다.

일단 석화 굴만 있는거 전부 구매해서 12킬로 정도 사고, 전복도 손바닥만한 큰놈으로 30마리 정도, 거기에 소라도 10킬로, 성게알도 따로 알만 빼둔걸로 큰거 한봉지, 대하도 10킬로, 대합도 5킬로 정도 구매했다. 아, 개불, 겉모양이  같아서 조금 그렇지만 개불도 쫄깃해서 맛있지. 이것도 사자.

대충 가격이 수십만원 정도 나왔지만 가격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맛있는건 가격 안보고 먹는게 제일 속이 편해.


"젊은 사장님이 큰손이셨네. 어디 장사하시나보죠?"


"아뇨, 오늘 저희 집에서 요리 해먹으려고요"


"아, 친구 분들이나 손님들 오시나 보구나?"


"그냥 우리 가족끼리 먹으려고요"

"........?"


구매한 분량이 분량인만큼 4인 가정이 먹을만한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댕댕이를 포함해야 겨우 4인 가정......아니, 댕댕이는 마리로 세야 하니까 3인 1마리 가정인가? 아무튼.

"너무 어패류 쪽만 고른거 아닌가 싶어서 고민이네. 아, 요즘 민어 괜찮죠?"


"그럼요, 살이 잘 올라서 회던 매운탕이던 맛있죠"


"그럼 민어 5킬로 정도 회쳐 주시고.....아, 매운탕 용으로는 손질해서 따로 빼주세요. 어? 능성어네? 이놈도 괜찮아보이니까 얘도 5킬로 주세요"

"오늘 장사 다 했네. 서비스로 홍합도 좀 넣어드릴께. 홍합도 살이 잘 올라서 잘 끓여서 홍합탕에다가 파랑 고추 썰어 넣으면 술 안주로 아주 그만입니다"


"아, 서비스라면 감사히 받을께요"


생각해보니까 성게알도 샀는데. 이거 밥에 얹은 다음에 회덮밥 같이 회 몇점 얹어서 비벼 먹으면 맛이 죽일것 같지 않냐? 크으, 먹지도 않았는데 바다 내음이 벌써 여기까지 진동하네.


민어와 능성어까지 추가로 구매하고, 서비스로 홍합까지 받으니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다.

내가 한번 싹 쓸고 지나가니 여기 사장님 가게의 수족관은  비어버렸다. 몇마리 남아 있었지만 기껏해야 두세마리 정도였다. 가판이야 볼것도 없고.

"다음에  올께요"


"안녕히 가세요 손님!"

자고로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많이 사주는 사람이 왕이다. 한번에 백만원 가까히 구매하니까 거의 황제 영접한 대우를 받았다. 하기사 나라도 우리 치킨집에 대량 주문 들어와서 3,40마리 한번에 나가면 그럴만도 하겠다.


양손 가득 들고 나가니 지갑은 가벼워져도 마음은 묵직했다. 그런데 사다보니 너무 많이 샀는데 우리  인원으로 다 먹을 수 없을  같다.


백리랑 루리도 부르자, 한창 먹어도 배가 고플때인 애들에게는 밥을 먹여줘야지.

집으로 돌아가니 벌써 5시가 넘고도 모자라 6시를 향해 시곗바늘이 달리고 있었다. 3시에 일어나서 나갔건만 그거 생각하면 거기서 3시간을 있었다는 소리다. 생각보다 좋은거 찾는데 오래 걸렸다.


"낑! 낑!"

"기왕이면 하티하티 하티호, 하고 울어주지 않을래 댕댕아?"

여우는 뭐라고 울지!


아직 자고 있을 시온과 예진이를 두고 댕댕이가 먼저 마중 나와주었다. 크으, 역시 개과 동물이라서 그런지 주인 사랑이 남다르구나.

나는 댕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완전히 성장하려면 앞으로 몇달은 더 있어야 해서 아직도 새끼의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슬쩍 강아지용 간식을 하나 주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우선  종류는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하고, 나머지들은 손질하기 시작했다.


굴은 석화 상태로 냅둔 다음에 나중에 손질하기로 했다. 껍데기 안에 있는 편이 그나마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

손질할건 소라랑 전복, 소라는 어차피 먹는 방법은 삶아 먹는 편이 대부분이니 나도 삶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푸짐하게 먹을리는 없을테고......."


아무리 좋아도 우리 집에서 아침부터 삼겹살을 구워먹거나 그러지 않는다. 물론 해도 되지만 아침부터 너무 기름진건 좀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짜고짜 매운탕에 뭐에 다 해먹으면 별로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다. 애초에 자고 일어난 뒤에는 위장이  깨서 바로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 것이고.


일단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점심 저녁을 푸짐하게 먹는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간단하게 먹을 메뉴는 당연하게도 죽이지.

소라에 전복까지 있다. 그러면 만들건 뻔하지 않나?

깨끗하게 손질한 소라는 된장과 소주를 섞은 물에 삶았다. 얼마간 삶은 소라를 빼서 이쑤시개로 알맹이를 뽑아 먹으니 쫄깃한 맛의 소라의 살맛이 느껴졌다.


크으, 여기에 초장 찍어서 소주랑 같이 마시면 끝내주겠는데......! 그치만 나중을 위해서 참는다.

삶은 소라는 작게 썰어서 죽에 넣기 좋게 만든다. 전복도 마찬가지, 그렇지만 전복은 내장을 따로 빼낸다.

소라의 내장은 버리지만 전복의 내장은 먹을 수 있다. 이게  별미다.

냄비는 두개를 쓴다. 하나는 소라죽, 하나는 전복죽을 끓일 용도다. 왜 따로 끓이나 싶지만 소라죽이나 전복죽이나 각 풍미가 있는 법이다. 기왕이면 두가지 풍미를 즐기게 해주고 싶어서 따로 만들기로 했다.


어제 남은 찬밥에 물을 붓고 슬슬 끓인다, 그리고 거기에 소라와 전복을 넣고 다시금 끓인다. 그동안 분리한 전복 내장을 으깨고 갈아서 페이스트처럼 만든다.


시간이 지나니 죽처럼 걸죽한 느낌이 됐다. 전복죽 쪽에는 갈은 내장을 넣어서 젓는다. 그러저 전복죽의 색이 내장처럼 연한 갈색을 띄기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식욕을 돋우는 색상이였다.

슬슬 죽이 다 되어가니 귀신같이 시온이 눈을 뜨고 일어났다.

"아,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거 코는 귀신같네. 어떻게 다 된거 알고 내려왔어?"


"맛있는 냄새가 나길래 자동으로 일어났습니다"


"아무튼 앉아봐. 조금 떠줄테니까"


어차피 죽이라서 많이 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몇인분,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점심 저녁을 푸짐하게 먹을 생각이라서 소화가 잘 되는 죽의 특성상 먹어도 허기나 달래는 수준으로 만들었다.

그릇 두개를 꺼내서 시온에게 소라죽과 전복죽을 조금씩 내어 놓았다. 죽이 두개란 것에 시온이 눈을 반짝였다.

"두 종류나 하신겁니까?"

"재료가 많아서 말이야. 아, 백리랑 루리도 부르려는데 괜찮지?"


"괜찮습니다. 같이 먹어야 재미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루리는 저랑 코드도 잘 맞으니까 좋습니다"

"걔랑 코드가 맞는게 아니라 갓-루리루리랑 코드가 맞는게 아닐까"


루리의 야한거 좋아하고 개드립 잘 치는 성격은 본체인 갓-루리루리의 성격을 닮은거니까.


그나마 현대 지구라서 그런가, 기본적인 교육은 받게 되어서 내가 알던 다른 루리들보단 그나마 성격이 괜찮다.


최소한 거리 한가운데서 '섹스! 시바, 아무도 날 막을순 없어! 섹스! 섹! 스! 섹스!'하고 돌아다니진 않으니까.


......구라같지? 진짜야, 시온 걸고 그랬어.


"안녕히 주무셨어요......혹시 새벽에 시장 다녀오신거예요?"

"그래야 좋은 물건 사오지"

"안그러셔도 됐는데......."

예진이도 잠에서 깨어 방에서 나왔다. 자다 일어나서 부스스해도 포스 유저라서 그런지 겉모습은 예쁘다.


아니, 팔불출끼가 벌써부터!


환생자로서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비슷한 또래의 이성이라도 우선 자식같은 느낌으로 본다고 할까......부성애나 모성애로 보고는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 시온 외의 다른 사람이랑 결혼 한적이 없고.

"우선 죽부터 먹을래? 아침에 많이 먹으면 오히려 안좋으니까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점심, 저녁에 많이 먹어. 오늘 사온거 오늘 다 먹어야 하니까 운동삼아 한번 뛰고 오는게 좋을껄?"

"저 의외로 많이 먹는데요?"


"그거 감안하고 말하는거야"


나나 시온이나 대식가고, 포스 유저인 예진이는 말할 것도 없다. 백리나 루리도 마찬가지다.

그거 다 생각해도 사온 양이 장난이 아니다. 여기에 다른 재료들까지 들어가면  자리 인원으로는 도저히 오늘 안에 못먹는다. 그래서 백리랑 루리를 부르는거고.

슬슬 시간이 7시가 넘었다. 나는 백리한테 전화를 걸어서 스케줄이 괜찮은지 한번 연락했다.

[여보세요? 형? 아침부터 어쩐일이세요? 오늘 휴일인데]


"오늘 시간 괜찮아? 나 내일부터 해외로 나가니까  전에 밥 한번 거하게 먹으려고 해산물 잔뜩 사왔거든. 오늘 하루 종일 해산물 풀코스니까 시간 되면 먹으러 와"


[당장 갈께요......아, 잠깐만 루리야! "고기! 누가 고기 소리를 내었는가!" 고기 아니야! "물고기도 고기는 고기야!" 아! 좀!]


수화기 너머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두사람 다 일찍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사이 좋은 모습에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아침도 준비 해뒀으니까 그냥 몸만 와. 아주 그냥 쥐어짜면 몸에서 바닷물 나올 정도로 먹여줄테니까"

[매운탕! 회! 구이!]


"다 있어, 걱정말고 와 루리야"


내가 먹는 것도 좋지만, 애들이 배불리 먹는것 만큼 배가 부른 것도 드물다. 마음씨가 할머니가  됐네.......아, 여자로 환생한 적도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손자 손주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밥솥 밥 벅벅 긁어서 숭늉까지 해줘야 성이 풀릴 때도 있었다.


점심에 먹을걸 재료 손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백리와 루리가 벌써 우리 집에 도착했다.

"안녕하살법!"


"안녕하살법 받아치기!"

"역시 시온 언니야.  개드립을 받아주는 실력이 뛰어나다니까"

"잘 왔습니다, 루리 학생, 백리 학생, 우선 아침부터 먹고 봅시다"


"형이 아침도 먹지 말고 오래서 그냥 왔더니 배고파요"

나는 딱 맞춰서 끓여둔 소라죽과 전복죽을 내어 왔다. 한창 먹을 때의 식욕을 지닌 그들에게 죽의 뜨거움 따위 식욕을 이길 수 없었다. 두어번 불어서 식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물 마시듯 넘긴다.


"전복죽 존맛탱. 내장도 들어가서 그런지 고소한 맛이 장난 아니네. 아, 여기에 김치까지!"

"난 소라죽이 좋은데. 쫄깃한 맛이 더 좋아"


"그럼 전복죽 나 주라"

"싫은데"

"감히 거래를 거절해? 그렇다면 남은건 약탈이다!"

"더 있으니까 싸우지 마!"

내가 먹을 몫까지 내어주어도 두 사람은 금새 그릇을 비웠다. 먹는 속도랑 양을 보니 오늘 사온 재료들 남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걱정해야 하는건 오늘 쓰고 남은 쓰레기들을 처리할 걱정이지. 굴의 껍데기는 그렇다 쳐도 소라나 전복 껍데기도 있으니 무게만도 상당할듯 싶다.

"사장 오빠 요리 실력이 개쩔어서 존맛이기는 한데 양이 적어서 감질나네"

"나중에 점심이랑 저녁 때 본격적으로 먹을거니까 배 비워두는게 좋을껄. 오늘 사온거 다 못먹으면 니들 집에 못간다"

"얼마나 사오셨길래 그래요?"


나는 냉장고를 열어서 3칸을 가득 채우고 있는 회, 어패류들을 보여주었다.

"죄다 굽고 삶고 쪄먹을것들. 아, 성게알도 푸짐하게 사왔으니까 성게알 비빔밥에 성게알이 밥보다 많이 들어간거 먹어볼 수 있어"

"쩐다!"


"와, 얼마나 쓰셨어요? 가격 장난 아닐텐데"

"영수증 봐야 자세한걸 알겠는데. 대충 100만원 안팍?"


나야 카드 내고 결제해서 그만인데 그 비슷하게 나왔을거라고 예상된다. 산게 양이  되니까 일일히 계산하는 것도 일이다. 그거 계산하면서 좋아하는건 거기 수산시장 아저씨 밖에 없을거다.


점심에는  메인으로 할까 생각하다가, 서비스로 챙겨준 홍합이 있다는게 떠올랐다. 산게 아니라 서비스로 받은거라 기억 한쪽에 밀려 있었는데.......


홍합이 푸짐해서 양이  된다. 더군다나 크기도 꽤나 커서 보통 손가락 두개 합친 듯한 크기보다 컸다.

"앗, 홍합이다"

"홍합탕 해먹으면 맛있겠네요"

"홍합탕에서 그냥 홍합 살만 빼먹어도 존맛이고 초장 찍어먹어도 존맛인데. 어패류는 삶아도 맛있썽"


"네가 싫어하는게 뭐가 있겠니"


"민트 초코"


그 때, 나와 루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쳐 하이파이브를 했다.

".......난 민트 초코 좋아하는데"


"썩 꺼져라 사탄의 자식아!!! 아니, 내가 아는 사탄도 요즘 인간들 하는 꼬라지 보고 기겁을 하는데 민트 초코 먹고 기절했다!"

"난  같은 오빠 둔적 없어!! 호적에서 파버린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민트초코 먹는 꼴은 못봐!"

간만에 나와 루리가 합심해서 백리에게 소리쳤다.

민트초코는 죄악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