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라쿤맨 비기닝]
나와 시온은 지하 실험실에서 다시금 차원진 감지기를 가지고 올라왔다.
왜 하필 이게 예진이의 예지와 연결 되어 있는 매개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지난번과 같다면 똑같이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저번에는 저도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제어를 못했던거예요. 이번에는......이번에는 제가 제어하려고 각오 하고 만질거니까 저번과 같은 일은 없을거예요"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99퍼센트 확신하니?"
"......거기까진 아니고요"
이 세상에 절대란 없고 완벽이란 없다. 태초에 이 세상의 창조에 관여한 절대자 중에서 비틀림의 절대자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재미있다. 완벽이란 없기에 100퍼센트는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란 없기에 0퍼센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막 명중률 99퍼센트 앞에서 빗나가는 지구 정예 요원도 있을 수 있고, 겨우 0.1퍼센트 확률인데 공짜 뽑기 한번에 쓰알이 나올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세상이 재미있는거다.
"일단 저도 혹시 모르니 준비 해두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데이터를 수집하지 못했지만 만약 뭔가 일어난다면 그럴만한 반응이 일어날겁니다"
"알겠어요"
"일단 울 마누라는 저번처럼 나랑 합체하자. 혹시나 대비하게"
나는 컴퓨터 수준의 섬세한 컨트롤이 불가능하고, 시온은 생물에 대한 섬세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 두사람이 힘을 합치면 저번처럼 예진이의 예지가 폭주할 때 막을 수 있다.
시온을 내 어께 위에 올라타게 해서 목마를 태운 후에 차원진 감지기를 그녀의 앞에 올려놓았다.
예진이는 심호흡을 몇번 하더니 이윽고 집중한 다음에 조용히 차원진 감지기 위에 손을 올렸다.
".......? 아무 반응도 없는데요"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거 콘센트를 연결 안했습니다"
"전기 먹는거였냐!"
"안그러면 여기 문명으로 무슨 동력원을 씁니까?"
시온이 차원진 감지기에서 청소기 코드마냥 쭉쭉 뽑아서 근처의 콘센트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바로 전기 튀는 느낌과 함께 예진이가 감전된듯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성을 흘렸다.
"윽.....악?!"
"야, 괜찮아?! 시온! 합체! 합체! 저번처럼 폭주하다 열 받으면 좆된다!"
"저, 전 아직 괜찮아요! 저번보단 버틸만해요!"
온몸을 떨던 예진이는 차원진 감지기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열이 끓어오르는 듯한 눈을 주무르며 몸에서 일어나는 열기를 어쩔줄 몰라했다.
시온이 눈치 빠르게도 냉장고에서 얼음을 가져왔다. 근처에 있던 선풍기를 가져오고 찬물로 식힌 수건을 가져와 예진이의 눈가에 얹어 주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열이 좀 가셨는지 예진이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괜찮아, 예진아?"
"네......그럭저럭이요"
"최소한 저번처럼 막 그러진 않네?"
저번에는 열 나는게 장난 아니였다. 본인이 포스 유저가 아니였다면 심각한 후유증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서 이번에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버틸만한듯 의식은 남아 있었다. 저번과는 다르다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저번에는 한 화면에 여러가지 영상을 겹쳐서 보여주는 느낌이였는데......이번에는 하나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담이 덜했어요"
"그래?"
아무래도 예진이가 저번에 본건 미국의 사건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벌어질 일도 예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중간에 나와 시온이 예지를 중단시켜서 미국 쪽만 기억에 남았다고 하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미국의 예지 능력자도 여러 곳을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예진이도 그러는걸 보면......아니, 예진이는 결과도 봤었잖아? 범위가 훨씬 넓은거 아닌가?
예진이의 예지 능력이 생각보다 좋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번에는 뭘 봤는데?"
"그게......잘 모르겠어요. 뭔가 서양식 저택 같은게 폭발하는건 봤는데......."
"서양식 저택?"
딱히 떠오르는 서양식 저택 같은건 생각나지 않는다. 유명한걸 생각해보라고 하더라도 내 기억에 서양식 저택 같은게 있을리가 없었고.
비슷한 비유로 커다란 기왓집 같은게 폭삭 무너졌다고 해서 그게 경복궁인지 덕수궁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소리다.
영국 가는데 서양식 저택이 한두개인줄 알아? 물론 일반적인 건물에 비해서 적긴 하겠지만 그거 다 뒤져볼 시간이 없다고. 영국이 섬나라라도 시골 마을에 있는 곳까지 다 뒤지려면 몸이 두개라도 부족하다.
"게다가 성도 아니고 저택이면 범위가 넓어지는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문득 시온이 핸드폰을 꺼내서 뭔가를 검색했다.
그리고 검색한 목록 중에서 사진 하나를 확대해서 예진이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폭발했다는게 이런 겁니까?"
"아, 네! 맞아요! 딱 이거였어요!"
".........."
나는 뒤에서 시온이 예진이에게 보여준 사진이 뭔지 확인을 해보았다.
확실히, 서양식 저택의 분위기가 나는 건물이였다. 삼각형 형태의 부조가 위에 달린 형태라거나, 아니면 건물 세개를 이어붙인 느낌의 커다란 석재 건축물이라거나 그런걸 보면 말이다.
근데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겠지? 예전에 볼일 있어서 잠입하러 들어가던 곳인데.
아주 옛날에 거기 사는 사람 슬쩍 만나려고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엄청 오래전 일이라서 나도 기억하려면 가물가물하긴 한데.....
"이거 버킹엄 궁전입니다"
".........."
참고로 버킹엄 궁전은 영국 왕족들 사는 곳이다.
영국은 아직도 왕족이 남아 있는 나라다. 그래서 사람들 세금으로 왕족이 사치 부리는 그런 나라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여왕님 집이라고.
* * * *
영국은 아직도 신분제 사회다. 여왕이 있듯이 그 아래에 공작 같은 귀족 계급의 인간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들어서도 다른 계층간의 사람들이 서로 얽히기 힘든 사회다.
다른거 둘째 치고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국민 세금을 써서 사는거 보면 별로 내키지 않는다니까. 그런거 보면 차라리 여러가지로 좆같아도 한국에서 태어난게 낫지.
하지만 신분제는 내가 판단할게 아니다. 내가 판단할것은 어디까지나 '사회'다.
내 본업은 대마왕. 쌓아올린 문명을 심판하는게 일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 판단할 수 없기에 각자 전문 분야로 나누어서 의결을 낸다.
인간의 문명을 판단하고 살피는 항목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금 있는 대마왕 중에서 따지자면.......
도덕과 윤리.
기술과 문화.
사회와 규범.
지배와 계급.
자유와 권리.
대충 이런 부분을 본다.
그 중에서 내가 담당하는건 세번째인 사회와 규범. 그런데 규범까지 보기에는 귀찮아서 사회만 봐준다.
근무 태만하는거 아니냐고 물으면 너도 선생님이 체점할 때 주관식 답이 한글자 틀렸다고 오답으로 체크하면 빡치잖아. 판단하는 쪽의 사람이 융통성 있고 널널해야 아랫사람이 편한 법이다.
전에 봤던 '최강의 대마왕'인 팬텀이 도덕과 윤리를. 그리고 시온의 사촌 오빠이자 내 처남인 유토피아는 기술과 문화를 판단한다.
너무 많이 하는거 아니냐고 묻지만 보통 최소 인원이 3명이기 때문에 다섯명이 다 모일 일은 드물다.
지배와 자유는 상충되는거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민주주의 사회인 지금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란 권력자가 있지 않은가? 다수의 사람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필요한게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자유와 지배는 상충되지만 모순되게도 공존할 수밖에 없다.
정작 당사자인 '지배의 마왕'과 '자유의 마왕'은 연령대가 맞아서 그런지 서로 잘만 놀더만.
잠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는데. 그래도 그렇지 현대까지 신분제가 남아 있는걸 보니까 찝찝하다.
그 버킹엄 궁전도 다 시민 세금으로 지은거 아니야. 하다못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면 국제적 품위도 있으니까 나름 납득하고 호화롭게 짓기도 하겠지만 거긴 내가 뽑지도 않은 왕이 사는데 기분이 좋겠냐.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말이 있다. 귀족이면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소리인데......아, 요즘은 이 말에 비판적인 관점이 나오는건 둘째치자.
지금은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국민 세금으로 사치 부리는 놈들 이야기를 하는거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자수성가한 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런 권력자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나마 인정하는게 민주주의 사회의 투표로 결정된 사람들 정도일까.
게다가 영국은 요리도 맛없어서 더 싫어.
......결코 요리 때문에 다 싫어하는게 아니다.
"버킹엄 궁전이 폭발했다면 이번에도 적성종인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조금 찝찝한 느낌이 있다. 뭔가 빠진게 몇가지 있어 보였다.
나는 예진이에게 몇가지를 더 물어 보았다. 빠진 퍼즐 조각을 맞춰야지 뭔가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다른건 본 것 없어?"
"으음......다시 생각해봐도 특이할 건 없었어요. 그냥 이 궁전이 펑! 하고 날아가는 모습 밖에는......"
"어느 시점에서 본건데? 누군가의 시점이야, 아니면 하늘에서 보는 시점이야?"
"아, 그건 막 건물 정면에서 보는 시점 같았어요"
"이 사진이랑 다른건 없고?"
"어.....네, 똑같아요"
나는 사진을 보고 조금 생각했다.
내가 예진이가 본게 뭔지 그림처럼 알지는 못하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서로 비교를 해보는거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다를 수 있으니 그걸 찾아보는게 좋다.
문득 한가지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있었어? 하다못해 여기 보이는 빨간 옷 입은 성게 모자의 영국 근위병 같은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망했네"
"그게 왜......아!"
예진이도 눈치는 빠른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챘다.
적성종일 가능성도 있지만, 만약 그랬다면 차원진 경보가 사전에 울리는게 당연한 일이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시온이 뿌린 최신형 차원진 감지기는 예전보다도 훨씬 빠르게 감지해낼 정도의 신형이다. 다른 시골이라면 우선도가 낮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왕족의 안위와 관련된 그 인근에 차원진 감지기를 새걸로 바꾸지 않았을리 없다.
차원진 감지기가 제대로 작동 했다면 경보가 울릴테고, 그러면 그 경보를 듣고 사람들은 피신했어야 옳다. 아무리 총 들고 경계 서는 영국 근위대라도 적성종이라면 건물 내부에서 농성해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로 비유하자면 난데없이 국회의사당이 폭발해서(와!)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인위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그런 랜드 마크 같은 건물이 폭발했다면 한가지 결론에 닿는다.
"테러.....!"
이념을, 사상을, 이득을 위해서 저지르는 파괴 행위를 흔히 테러라고 부른다.
목적은 이해하지만 행동은 납득하지 못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신의 뜻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만드는 만행을 내가 용서할거라고 생각하냐?
하지만 한가지 문제점이 여기서 발생한다.
"그 중에서 그런 대형사고를 칠법한 곳은 드물지. 더군다나 미국도 아니고 영국이라면 더욱"
현대 사회에서 테러를 할만한 단체는 상당히 많지만, 그렇다고 그 중에서 이런 대형사고를 칠만한 곳은 또 드물다.
저쪽 중동 어디는 미국이랑 쌈바쌈바 하느라 바쁘고, 그렇다고 다른 단체는 생각날만한게 없고.
그런 와중에 떠오른게 있다면 아틀라스 녀석들이다.
"어? 걔네 비밀 조직 아니였어요? 그런데 막 테러 같은거 해도 되는거예요?"
"테러 자체를 걔들이 계획한게 아니고 다른 놈들이 했겠지. 그리고 그놈들은 아틀라스의 버리는 패일테고"
비밀 조직이 테러 같은 일을 저지를리 없다. 세상 앞에 나설 때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테러리스트와 협조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이비 종교도 이용해먹었는데 하물며 테러 조직은 별 차이 없다.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 그냥 주고 받는 관계라면 뭘 하든 신경쓰지 않거나 오히려 실험 데이터 얻을 기회라고 좋아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에 포스 유저가 관련되지 않았을리 없으니 만약 그 포스 유저를 실험에 사용하는 대가로 가이아 교의 은총 같은 것을 쥐어줬다면......
시온이 찾아도 꼬리나 겨우 잡을 녀석들을 현 지구의 수준으로 추적할 수 있을리 없다. 테러리스트 단체가 잡힐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걸 생각하면 거의 완벽하게 몸을 숨긴거나 다름 없다.
"하여튼 아틀라스 이 새끼들 안끼는 곳이 없어요"
일단 니들 거기 가만히 있어봐라.
내가 가서 아가리를 비틀어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