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라쿤맨 비기닝]
내가 깜빡 잊고 있었는데. 내가 저번에 미국 갔을 무렵에 형식이네 아저씨가 이식 수술 들어 갔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외국에 있어서 직접 수술 할 때 가지는 못했지만 듣기로는 수술은 잘 끝내서 별 탈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퇴원하는 날. 물론 퇴원해서 집에 가도 된다는거지 다짜고짜 고기 먹고 술 마시고 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라서 거하게 먹지는 못하지만 퇴원 축하 선물 같은건 챙겨드리고 싶다.
"우리 차원항행함에 짱박아둔 술 창고 있잖아. 거기에서 술 몇병만 가져올 수 있어?"
"필요하십니까?"
"솔직히 거기에 모아두기만 하도 마시지도 않았던거 가득하잖아. 생각난 김에 그냥 몇병 선물하려고"
"자고로 좋은 빈티지는 모아둔 다음에 팔면 나름 돈이 되는 법입니다"
"술로 뭔 제테크야. 술은 술이니까 마셔야지. 아무튼 혹시 리스트 같은거 있어?"
"핸드폰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환생자로서 수천년간 살면서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지는 않았지만 술은 조금 달랐다. 나나 시온이나 술은 좋아했고.....부피가 있지만 그거야 차원항행함에 보관해두면 되는 일이니까.
애초에 그거 사둔것도 다 시온이 한거다. 단지 나는 옆에서 '아, 저건 맛있겠다'라고 한 것밖에 없다. 시온은 내 입맛은 절대적으로 신뢰하니까.
"음.....생각보다 많네. 어이쿠, 이거 마실 때가 다 됐네. 이거 초장기 숙성 와인 아니였어?"
"꽤 예전에 사뒀으니 맞을겁니다"
"언제 날 잡고 마셔야겠다"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술들은 냅두면 식초가 되어버릴 평범한 술도 있었지만, 한번 숙성하는데 1,2백년 쯤은 가뿐할 초장기 숙성이 필요한 술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을 특수한 창고에 보관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숙성하는데 딱 좋은 온도로 맞춘 창고에만 보관해 숙성한다.
내가 고르는건 후자 쪽. 초월자용 술은 보통 사람은 마시면 죽는 것이나, 조금만 마실 수 있는 것이나, 평범하게 마실 수 있는 것. 이렇게 3종류로 나뉜다.
마시면 죽는 쪽은......뭐, 다른 첨가물이 1퍼센트밖에 안들어간 나머지 99퍼센트가 알코올인 술이다. 물론 그거 한잔 마셨다고 포스 유저는 죽지 않을테지만......나머지 1퍼센트가 진짜 독을 주재료로 만든 독주라는게 문제지.
저번에 가이아 교 조질 때 봤던 팬텀이 심심풀이 삼아서 그린 드래곤 가지고 통째로 용술을 담갔는데 걔네는 브레스가 포이즌 브레스라서 독이 우러나왔다.
게다가 독하긴 진짜 독하지. 시온도 그건 안마시더라.
"아, 다크 로드 캐슬 산 '팬텀 블러드'랑 네이처 가든산 '요정 눈물'이거 한병씩이면 되겠다"
"하나는 선물용이니 그렇다 쳐도 하나는 뭡니까?"
"백리 먹이려고"
"아, 그러면 어디 가서 쉽게 맞아 죽지는 않을겁니다"
자고로 무기에 의존하는 녀석치고 오래 가는 놈 못봤다. 초월자 중에서 무기에 의존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이 없고.
비슷한 수준의 사람끼리 부딪히면 무기 정도는 쉽게 박살나는게 정상이다. 초반에야 유리하겠지만 무기 박살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싸울건데?
차라리 이능력으로 검강 같은거 만들어서 휘두르는 편이 낫지.
그러니까 내가 해주려는건 좋은거 먹여서 몸빵 좀 할 수 있게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게다가 백리도 맨손 격투 타입이니까 딱 맞다.
"그거 두개면 지금 당장 꺼내올 수 있습니다"
"그래?"
시온이 손짓하자, 뿅, 하고 허공에서 구멍이 만들어지더니 병 두개가 떨어졌다.
나는 재빠르게 잡아채고 내용물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거 빠르네. 내가 직접 화성까지 가야 했을 수도 있는데"
"저랑 연동되어 있어서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애초에 전공이 그쪽이고"
시온이 화성에다 둔 차원항행함은 물리적인 거리가 있지만 그녀한테는 의미가 없다. 물리법칙을 다루는데 공간 조금 비트는것도 못하겠냐. 게다가 차원항행함 내부는 시온이 전부 꿰고 있으니까 문제 없다.
하논은 물리법칙을 가볍게 다루지만 그 중에서 시온은 공간 계통에 능숙하다. 워프 같은건 시온에게 문제도 되지 않는다.
사촌 오빠인 유토피아는 존나 오래 살아서 시간이랑 공간 계통을 전부 다룰 수 있다. 그래서 더 악랄한 놈인거고.
"오, 적당히 숙성 됐구만. 딱 먹기 좋을 때는 아니더라도 나름 맛은 있겠는데"
내용물이 잘 보이지도 않을 검은색의 병과, 그와는 반대로 내용물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하늘색의 수정 같은 병. 검은 쪽이 팬텀 블러드고 하늘색 쪽이 요정 눈물이다.
내가 형식이네 아저씨한테 선물하려는건 요정 눈물 쪽, 백리에게 먹이려는건 팬텀 블러드 쪽이다.
"근데 왜 이건 이름이 팬텀 블러드일까......죠죠가 생각나는데"
"자고로 죠죠러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슈레딩거의 죠죠러입니다"
"만든 사람이 또 흡혈귀잖아"
"앗, 머리만 잘려서 죽거나 상대 빡치게 만들어서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이!"
"뒷배가 무서워서 싫어"
이거 만든 사람의 남편이 바로 지난번에 만난 팬텀 되시겠다. 건들면 나 쥬금.
내 이명은 '최흉의 대마왕'이지만 그는 '최강의 대마왕'이다. 누구 죽이는건 내가 한수 위지만 순수 무력으로는 내가 아래다. 게다가 서로 성격도 비슷해서 서로 싸우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혹시 몰라서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은 뗐다. 그냥 아는 사람한테 받은 좋은 술이라고 하고 선물하면 될거다.
그리고 집에 있는 적당한 상자를 찾아서 거기에 넣고 리본으로 마무리 했다. 나름 선물하는 분위기는 낫다.
"나, 그럼 다녀올께. 저녁은 예진이랑 같이 먹어"
"잘 다녀오십시오"
나는 선물을 들고 슬슬 병원으로 출발했다.
* * * *
병원에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그대로 아저씨의 병실로 올라갔다. 그러던 중에 형식이와 중간에 마주쳤다.
"어! 야, 딱 맞게 잘 왔네. 짐 정리하는 것 좀 도와라"
"이 새끼 배 쨌는데도 멀쩡한가 보구나?"
"나야 아직 팔팔하잖아. 잘 먹고 잘 자니까 며칠이면 다 낫더라. 조금 허한 느낌은 있지만 그래도 버틸만 해"
"아직 무리하지마. 그냥 수술 한 것도 아니고 이식 수술한거잖아. 니 지금 배 안에 간 뚝 떼서 아저씨 준거라고"
"괜찮아, 괜찮아. 겉으로 멀쩡하면 됐지"
"겉으로 멀쩡하면 된다는 놈이 얼굴이 왜 그래?"
"야! 치사하게 얼굴 이야기 꺼내기냐!"
간만에 만나서 낄낄거리다가 병원에서는 정숙하라는 지나가던 간호사의 꾸중을 듣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퇴원할 준비를 하고 있던 형식이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는 지난번에 뵜어도 아주머니는 또 간만이네.
"어머, 악이 왔구나. 저번에 문병 왔었다면서? 그 동안 잘 지냈고?"
"저야 뭐 잘 지냈죠. 한창 신혼이라서 깨가 쏟아지는데요 뭐"
"엄마, 이 자식 살림 폈어요. 막 람보르기니 끌고 다닌다니까요?"
"거 차 같은게 뭐가 어때서"
"야, 다른 차면 별말 안하겠는데 한대에 수십억씩 하는 람보르기니면 이야기가 다르지. 내가 찾아보니까 우리 나라에서 몇대 있는 수준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십수대 있는 수준이더만!"
"그랬어?"
"정작 네가 모르면 어떻해?"
그야 난 차 같은건 별로 신경 안쓰니까. 있으면 있는대로 좋은거고, 없으면 없는데로 사는거고. 필요하다 하더라도 사람들 많이 타고 연비 좋은 차를 끌고다니지 겨우 두명 탈 수 있는 수준의 람보르기니는 안샀을거다.
게다가 솔직히 그런 차는 연비가 똥망이잖아. 엑셀 밟기 무섭다.
"아, 아저씨 이거 퇴원 선물이요"
"뭘 이런걸 다 가져오니? 병원비까지 네가 다 내줬는데 그냥 왔어도 좋았을걸"
"그냥 전에 받은거 하나 가져왔어요. 술이라서 간 수술 한 사람한테 안좋을지 몰라도 몸에 좋은거니까 한두잔 약주 한다 치시고 가끔 마시면 좋은거예요"
"막 인삼주나 그런거냐?"
"비슷해요"
네이처 가든이라는 곳에서 만든 '요정 눈물'은 술이라는 개념보다는 약이라는 개념에 가깝다. 알콜은 부수적인 문제다.
도수도 그리 높지 않아서 그냥 소주 정도고. 대신에 들어간 재료가 만만치 않다.
무림인이라면 이름은 들어본 영약, 인형설삼, 만년하수오, 공청석유......뭐, 그런거나 그 비슷한 수준의 영약이 잔뜩 들어갔다.
어떻게 그런걸로 술을 만드냐고 물으면, 네이처 가든이라는 곳은 자연의 절대자가 관리하는 곳이다. 무림인이라면 길가에 나 있는 잡초 한뿌리만 먹어도 기연이 되고 밭에서 삼 하나만 캐도 내공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게 된다.
손오공이 먹는 천도복숭아의 원산지가 이쪽이라는 설도 있는데 사실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솔직히 하나 먹으면 수명 늘어나는 복숭아 같은게 아무데서나 자릴리는 없고.....아, 그 복숭아로 담근 술도 있는데 내가 다 마셨다. 난 복숭아 좋아하거든.
그런 곳에서 만든 술인만큼 한잔 마시면 그걸로 무병장수한다. 어지간한 중상도 치료가 되면서 언제나 몸에서 활기가 넘치게 된다. 회춘은 덤.
"아는 사람한테 받은거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니라 제 안사람이"
"어이쿠, 비싼거 아니냐? 그런거면 받기 미안해지는데"
"술은 마시라고 있는거잖아요. 신경 쓰지 마시고 드세요. 한번에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고 한잔씩만. 알겠죠?"
"그래, 그러마"
마시면 아저씨의 간암도 한번에 치료가 되겠지만 이걸 왜 진작에 주지 않았냐고?
주는거야 간단하지만 아저씨한테 뭐라 설명하려고? 가이아 포스 때문이예요! 하고 변명해도 아직 현대 의학은 가이아 포스를 응용해서 치료할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포스 유저를 고용해서 응급 상황시에 포스를 불어넣어 명줄 붙들어 매는 정도 밖에 못한다.
이런 쪽 특성 보유자는 없냐고? 재생 특성 보유자도 드문 판에 회복 특성이라도 가지고 있고, 그걸 남에게 적용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보통 사람은 초월자가 아니라면 온전히 외부로 힘을 방출하기 힘든 법이다.
괜히 이기어검술 같은게 초고수의 상징이 아니다. 아......이기어검술에서 이기는 좀 그러니까 어검술이라고 할까. 어차피 별반 차이는 없으니.
"그러고 보니 운전은 누가 하려고요? 애초에 차 가져오셨어요?"
"아, 형식이가 운전 하기로 했다. 면허는 있으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야, 너 지금 내 운전 실력 못믿어서 그래?"
"너 존나 장롱 면허잖아!"
"그렇게 걸고 넘어지면 내가 할 말은 없는데! 할말은 없긴 한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면허는 장롱면허다. 무면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지간해서 무면허인 사람은 운전을 안한다.
하지만 장롱 면허인 사람은 운전 경험은 없으면서도 법적으로는 운전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더 무섭다.
막 나처럼 람보르기니 몰고 다니는데 뒤에 초보운전 붙이고 다녀봐. 뒤에 있는 사람은 공포 영화 본듯 두려움에 떨껄? 사고나면 아주 그냥 아파트가 날아가는거야.
"차는 가져 왔어?"
"주차장에 있어"
"그러면 내가 운전 할께. 나야 뭐 병원에 한번 더 들러서 차 가지고 가면 되겠지. 아저씨 차 아직 안바꿨지?"
"그렇긴 한데......"
"내가 준 돈 남아 있을테니까 그걸로 아저씨 차 좀 바꿔드려. 솔직히 그거 우리 학창 시절 전부터 쓰던거잖아"
2인승인 람보르기니와는 다르게 형식이네 아저씨의 차는 가성비 괜찮은 중형차다. 4인 가족이라도 넉넉하게 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꽤 예전부터 타던 차량이다. 내가 형식이네 처음 놀러 갔을 때도 쓰고 있던거 보면 못해도 10년은 넘게 쓰던 차인게 분명하다.
그 정도쯤 되면 수리해서 쓴다 하더라도 오히려 수리비가 더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바꾸는게 낫지.
"알았어. 일단 생각은 해볼께"
"일단 이건 네가 들어라"
"오, 꽤 묵직한데? 술이라고 하지 않았어?"
"두병 정도 들어가 있어서 그래"
"한병은 내거냐?"
"이 새끼 누가 술고래 아닐까봐. 근데 그건 다른 사람 줄거라서 다른거야. 넌 아저씨 드린거랑 같이 마시기나 해"
"쫌생이"
"........"
"억?! 억?! 야, 내 배 쨌었거든?! 수술 한 부분은 때리지 마라?!"
아저씨네 차를 내가 운전해서 집 까지 태워다 드렸다. 당분간 요양하면서 회복하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내가 형식이한테 준 돈은 아직도 많이 남았을테니까 충분하다.
애초에 내가 시온한테서 받은 돈이 10억이였고 그걸 그대로 형식이한테 줬다. 수술비에 입원비까지 생각해도 많아야 1억 정도 나왔을텐데 나머지 돈으로도 몇년은 놀아도 될 정도다.
아니면 어디 작게 장사하게 가게 알아보시던가. 예전처럼 몸 움직이는 일은 안하시는 편이 좋을텐데......마땅한 직종이 어디 없나.
"그러고 보니까 형식이 너, 어디 취직 할만한데 알아봤냐?"
"아! 좀! 지금 그런거 물어보고 싶어?"
"없구나"
"전역 하자마자 수술 받은 사람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요즘 취직 힘들지?"
문득 나는 하나 생각난게 있어서 형식이에게 물었다.
"혹시 치킨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