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라쿤맨 비기닝]
이대로 가다간 몇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자자, 팀장님 두분 다 진정하시고"
"어이쿠 깜짝이야?! 누구.......어! 사장님!"
"어,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아까 전부터요. 로리,거유 타령 할 때부터 쯤"
"계속 그래서 언제부터 들어오셨는지 모르겠는데......?!"
아니, 회의 처음부터 그러고 앉았냐. 제대로 미친놈이군.
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들어.
나는 게임에 미쳐서 열정을 퍼붓는 사람이 필요하지 딱딱하게 이득손실만 따지는 사람은 필요 없다. 애초에 단물 다 빠진 게임을 판권까지 사와서 추억 되새겨 보겠다고 게임 회사 차려서 만드는 놈한테 돈 따지면 이상한거다.
"두분 의견 다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재 좀 하자면......일단 1편 설정상 주인공인 이안의 나이는 17살인데. 그런 주인공의 소꿉친구라면 위로는 아니더라도 아래로 1,2살 정도는 연하고 최대여야 동갑입니다. 그러면 나이는 보통 15세에서 17세 정도가 되겠죠"
가상의 세계라고 해도 대충 외견은 서양인이니까 서양인 발육 생각해도 17세에 쭉쭉빵빵 미녀라면 성 조숙증 온거 아닌가 싶을거다.
물론 게임속 세계같은 공상 이야기에서 현실성을 따지면 의미가 없겠지만 하다못해 개연성은 좀 있지 않아야 하겠는가?
초등학생이라 그래놓고 성인 여성을 내놓으면 이상하잖아. 최소한 설정에 맞게끔 넣어야지.
허구적 허용은 그만큼 괴리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 8살짜리 성인보다는 차라리 몇백살짜리 로리 캐릭터가 익숙할테니까. 그런 캐릭터도 꽤나 많고.
"일단 1편에서는 딱 그 나이대에 맞는 외견으로 합시다. 다만 시간이 지난 뒤인 2편 이후에서는 거유 캐릭터로 하죠. 어떻습니까?"
"아! 다른편도 리메이크 하실겁니까?"
"전 시리즈 다 할겁니다. 최소한 저희 집에 돈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요"
회의는 그것으로 대강 마무리가 되었다. 결정된 사안을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오더를 내리면 그에 대한 캐릭터 일러스트를 그리고 거기서 또 수정이 들어가면 된다.
다들 정리를 하고 숨 좀 돌릴겸 커피나 한잔 마시기 위해 따로 정이현 팀장과 함께 나왔다. 시간이 있으면 건물 1층에 카페에 가서 사주겠는데 잠깐 이야기 할거니까 사무실 한 구석에서 인스턴트 커피로 때웠다.
"간만에 왔는데 열정 가득한 모습이여서 좋네요 정 팀장님"
"하하......아무래도 프리랜서 출신인 사람들도 있어서 자유분방하고 개성 있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정 팀장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까 그 모습이 자유분방에 개성 있는 모습같다고는 할 수 있지만......뭐, 좀 이상한건 사실이니까.
"차라리 그게 낫죠.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니까요.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진 게임은 게임성을 둘째 치더라도 많은 노력을 들인 티가 나는 법입니다"
"그렇긴 하죠. 애초에 저번에 사장님이 말씀하신대로 돈 벌려고 만든 게임이 아니니까요"
"거 히로인이 로리면 어떻고 거유면 어떻습니까. 보아하니 아까 싸우던 팀장님들은 꽤 젋던데 그런 부분은 젊은 사람한테 맡기자고요"
"사장님도 충분히 젊으십니다만......?"
그렇긴 하다만 나를 순수하게 외견 나이로 보기에는 좀 그렇지?
가끔 가다가 몸은 멀쩡한데 어구구, 하면서 허리 잡고 일어날 때도 있고. 육체랑 정신은 별개의 문제다. 난 아직 육체가 정신이고 의지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건 로드의 경지라서 눈앞에 두고는 있지만.
"아무튼 잘 돌아가는 것 같아서 마음 편하네요. 한시름 덜었습니다"
".......네? 왜 갑자기 어디 가시는 분처럼 이야기 하십니까?"
"잠깐 볼일이 있어서 당분간 오지 못할것 같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하고 있나 보러 온거고요"
"그러시군요. 다른 사업 때문에 그러십니까?"
"개인 사정 쪽이예요"
인체실험이나 하는 놈들 조지는거면 내 개인 사정이니까 맞는 말이다.
정 팀장이랑 이야기 하고 있을 때, 문득 로비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들렸다. 손님이라도 온건가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이 기척은......?
퍼득 마시던 커피를 한입에 털어넣고 로비 쪽으로 나가보았다.
거기에는 느닺없이 성장 폼의 시온과 그녀를 응대하고 있던 로비 여직원의 모습이 있었다.
"어라? 어쩐 일이야? 난데없이?"
"지나가던 길에 들렀습니다. 지금쯤이면 이쪽에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
이상하다. 우리 마누라가 어지간한 볼일로는 바깥에 나오질 않을텐데.
법적으로 뭔가 해야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김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세워서 하지 직접 현장에서 서명해야 하는 수준의 일이 아니면 나서질 않는다. 요컨데 집순이라는 소리다.
쓰레기 버리는거 외에 개인적인 용무로 바깥에 나가는건 정말 드문 일이라서 조금 궁금해지는데......
"최 사장님? 죄송하지만 이분은......?"
"저희 집사람이요. 그리고 겸사겸사 우리 회사 대주주시고요"
"예?!"
"진짜입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전에 시온이 건내준 서류에서는 시온이 이 회사 주식의 51퍼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머지는 내거고. 아직 본격적으로 게임을 내놓지도 않아서 상장도 안했다.
괜히 우리 회사가 (주)시온이 아니다. 앞에 달린 글자는 주식회사란 뜻이라고.
아마 지금 만들고 있는 게임 1편이 나올 때 쯤에 상장 시작할거다. 그래봤자 시온의 독재나 다름없는 대주주 권한에 비하면 의미 없지만.
"한번 둘러보고 갈래? 혹시 모르니까 얼굴 도장은 찍어야지"
"안그래도 그러려고 온겁니다. 당신이 운영해도 제가 만든 회사인데 한번쯤은 봐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얼굴 도장은 잘 찍겠네. 한번 보면 꿈에서도 나와서 아른거릴 미모인데 기억 못할리 없다.
역시 울 마누라가 짱이야.
일단 명목상 있는 내 사장실로 시온을 데리고 갔다. 지나가면서 웅성거리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여기저기서 듣던 반응이라서 크게 감흥은 없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수작 부릴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미친놈이 사장 마누라를 건드리겠냐? 물론 종종 그런 놈도 있지만 난 직원 뽑을 때 그런 사람은 뽑은 적 없다.
사장실로 들어가서 커피를 탔다. 내 사무실이라서 그런지 탕비실보다 직접 원두로 커피 내리는 기계가 있어서 그걸로 내주려다가 시온이 거절했다.
"아, 저는 인스턴트면 됩니다. 가끔은 그런 커피도 마시고 싶습니다"
"알았어......자, 여기"
나는 사무실 안에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인스턴트 커피를 내주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달달한 커피향이 사무실에 흐른다.
시온이 커피를 한모금 마셨을 때, 나는 그녀가 나온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뭐 신경 써야 할 일이라도 있었어?"
"제가 뭐 일 있어야 나오는 사람입니까?"
"맞잖아. 내가 너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니고"
".........흠"
시온은 반박할 수 없었는지 커피만 마셨다.
"저번에 놀이공원 갔을 때의 일 기억 나십니까?"
"어떤걸 말하는건지 몰라서 좀 헷갈리는데"
저번에 우리가 놀이공원에 갔을 때 생긴 트러블이 좀 많아서 어느걸 말하는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던간에 그게 문제가 됐던걸로 보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사람들은 미녀를 가만두지 않는다니까. 울 마누라가 너무 예뻐서 그런거니까 이해는 해주겠다만.
"그거 때문에 구설수에 올라서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저번에 만난 대성 그룹 차남 있지 않습니까?"
"아, 그 새끼? 대성 그룹 쪽 핏줄인건 들었는데 차남이였어?"
기억을 좀 더듬어 보았다. 한 1년 전쯤에 병 때문에 물러났던 전 회장의 뒤를 이어서 대성 전자 부사장이였던 그의 아들이 새로 회장직에 올랐다.
자식이 아들 둘에 딸이 하나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아마 그놈은 그 중에서 둘째였던 모양이다.
"제가 그쪽 대주주입니다"
"네가 대주주 아닌 기업이 어디있다고"
"그룹 지분 3퍼센트짜리 대주주입니다"
"........내가 등신이라도 그거 많은건 알겠는데 어떻게 모았어?"
고작 3퍼센트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대기업 주식의 3퍼센트면 진짜 장난 아니다. 회장의 핏줄도 많아야 5퍼센트 정도일텐데 3퍼센트면 주주회의 의결의 가부를 결정하기에는 충분한 비중이다.
아마 어지간한 그룹 간부라도 시온 앞에서는 굽신굽신거릴껄. 게다가 회장이라도 함부로 못할거고. 무엇보다 시온은 그룹의 파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순수한 조커다. 얻는 사람이 장땡인 법이라 위치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을거다.
"나도 자세하게 물은 적이 드물어서 그렇긴 한데. 도대체 주식 같은걸 어떻게 모으고 돈을 버는거야?"
"일단 최소한의 자본금을 모으고 그 자본금 대비 가장 많은 주식을 확보할 수 있는 회사의 주식을 삽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맞는 적당히 좋은 기술을 다운그레이드 합니다"
".......?"
"그리고 그걸 그 회사에 몰래 뿌려서......그렇게 주가가 떡상합니다"
"사기잖아!"
아니, 그렇게 치사한 수단을!!!
10년만 작정하고 있어도 지금의 지구를 달 위성기지 개발 시킬 수 있고 30년만 있으면 화성 테라포밍도 가능하게 문명 레벨을 이끌어 올릴 수 있는 시온이 기술을 뿌린다는건 작정하고 치트키를 쓴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 기술 때문에 회사를 통째로 인수하려는 사람이 있어도 값만 맞으면 상관 없이 팝니다. 어차피 거의 공짜니까 어지간하면 이득입니다"
"그렇게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뭐, 솔직히 그건 초반에 큰 자금 모을 때 쓰는 방법입니다. 나중에는 순수한 주식 투자 실력으로 모으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거 괜히 물어봤네. 다음부터는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아, 그런데 논제가 좀 어긋났네. 내가 물어봤던건 왜 간만에 외출했냐다.
"아무튼 제가 대성 그룹의 대주주인만큼 저쪽에 안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디폴트 모습입니다"
"아, 그래?"
"네, 그런데 제가 성인 폼의 모습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아......"
그 누구도 디폴트 폼의 시온과 성인 폼의 시온의 연관성을 의심하지 않을리 없다. 디폴트 폼의 미모도 어려서 약간 빛을 바래긴 해도 어디까지나 성인 폼에 비해서지 인간의 미모를 뛰어넘은건 똑같다.
오히려 시대를 조금만 옛날로 가면 지금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백발도 아니고 선명한 은발이라는게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있는것도 아니고.
시온을 알고 성인 폼의 시온을 본 사람이면 반드시 두사람의 연관성을 생각한다. 그냥 얼굴만 안다면 친척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재벌 회장쯤 되면 시온의 신상 정도는 파악해둬서 서류상으로 고아란 사실도 알 것이다.
고아인데 거의 자매처럼 닮은 사람? 옛날에 헤어진 친자매라는 레파토리를 대기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시온이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도 없으니 더 그렇고.
"그래서 트러블 생기기 전에 포스 유저로 등록했습니다. 덕분에 특별세를 내야 하긴 하지만 나중에 생길 일을 돈으로 해결했다 치면 괜찮은 선택입니다"
"그러면 그 어디더라......KFU였나? 거기 다녀온거야? 예전에 백리가 거기서 기본 교육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허허허, 포스 유저 등록은 정작 내가 안하고 시온이 등록 해버렸네. 거 참 아이러니 하구만.
육체를 변형하는 포스 유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등록만 해두면 나중에 트러블이 생겨도 '포스 유저라서 그래'같은 변명으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가이아 포스는 아직도 미지의 이능력이니까.
"그런데 검사 중간에 포스량 측정도 있을텐데 어떻게 했어? 넌 이능력 못배우는 몸이잖아?"
시온은 물리법칙을 간단하게 주무를 수 있는 하논이라는 종족인만큼 대신 이능력 계통은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초월자 기준으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초월자는 이기지 못한다. 초월자들은 어떤 이능력이던 한가지쯤은 배우고는 하니까 상성이 나쁘다.
"측정하는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입니다"
"아하"
시온이라면 포스량 측정기를 해킹해서 포스가 있다고 나오게 만드는 것쯤이야 간단하겠지.
"외형을 바꾸는거라 이런저런 트러블은 있었지만 주민등록증에 사진 두개 붙이는걸로 해결 했습니다"
"용케도 했다?"
"뭐, 인맥을 동원하면 못할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또 나오는 시온의 인맥! 근데 도대체 돈 버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인맥을 쌓은건지 모르겠다.
본인 입으로는 인맥이란건 서로 얽혀 있어서 위에만 살짝 연을 맺어두면 아래에 있는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하는데......
응? 생각해보니까 대성 그룹 회장 교체된건 1년 전 아니야?
시온이 지구에 온건 내가 군대 입대 할 때 쯤이니까 2년 전이고, 그러면 그 시기 쯤에는 한창 돈 벌고 있었을 텐데다 대성그룹 지분 3퍼센트 가지고 있다.
.......음, 생각하지 말자. 골치 아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