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라쿤맨 비기닝]
그의 이름은......아니, 어떤 이름으로 불러줘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 본명은 류한인데 팬텀이랑 이름도 있고. 팬텀 류한이라고 하면 뭔가 짬뽕이 되서 이상한 이름이고.
"그냥 류한이라고 불러줘? 팬텀으로 불러줘? 왜 이름이 두개라서 헷갈리게 그러는지 모르겠다"
[요즘 시대가 무슨 시대인데. 내 이름 제대로 발음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영어 이름 하나쯤은 있어야지]
"영어도 존재하지 않을 판타지 태생이 그런 소리 하니까 웃긴다 야"
[내 때는 그랬어, 아 그때는 한창 이고깽이 유행이였는데......요즘은 뭐 유행하냐?]
"회귀물"
[하이고, 현재도 충실하게 살지 못해놓고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 지식 치트로 신세를 바꿔보겠다?]
"그런 치트 없으면 빡빡한 현실도 바꿀 수 없으니까 그런거겠지 뭐"
[볼장 다 봤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자]
붉은색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마치 실눈을 뜨고 노려보는 사람처럼 변했다.
얼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팬텀의 저 모습에서는 눈만이 유일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읽을 수 있는 수단이였다.
[너, 저번 소집 때는 왜 안왔냐?]
"그거 처남이 불렀잖아"
시온의 사촌 오빠인 유토피아. 그도 내 직장 동료다.
자세하게 말하면 처남인 유토피아, 눈 앞에 있는 팬텀, 그리고 나, 그 뒤에 또 두명이 있지만 나중에 소개하고 아무튼 그렇게 5명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다.
일은 자주 있지는 않지만 잊을만 할 때쯤 들어온다. 물론 참가는 개인의 자유. 하지만 최소한 세명은 참가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의결을 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공정성을 위해서 반드시 세명이 필요하다. 한명이 있으면 개인 의사로 판단해야 하고, 두명이면 반반으로 의견이 갈릴 수 있으니 반드시 세명이다.
예전에야 세명 밖에 없으니까 소집 나면 자주 튀어나가곤 했는데 지금은 내 뒤에 짬 안되는 두명이 있으니 빠져도 된다.
게다가 부른 사람이 처남이니까 더더욱 안가도 된다.
"처남이 그 부분에서는 양치기 소년인거 알잖아. 지 맘에 안들면 부르고, 솔직히 우리 셋만 있을 때 부른거에 반은 처남이 소집한거였잖아. 그 중에서도 또 반은 커트라인에도 미치지 못하는거"
[요즘엔 그나마 낫잖아]
"도대체 우리들 없던 시절에 처남은 문명 몇개나 지웠는지 궁금하다니까"
예전에 말 한적 있지만 시온의 사촌 오빠이자 내 처남인 유토피아는 나보다도 더한 인성파탄자다.
최소한 나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그러지 않았다면 예진이 같은 애를 거둬서 보호자를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는 남에게 공감 못하는 사이코패스다. 그런데 거기에 별을 지우는 것은 손가락 하나로 간단할 정도의 힘이 주어졌다.
그러면 수틀리면 문명을 태우는 사이코패스 괴물이지 뭐.
내 처남이지만 심한말은 아니다. 오히려 순화시켰지. 그래서 이명도 '최악의 대마왕'이고.
[넌 요즘 어떻게 지내냐?]
"그럭저럭. 이쪽도 마찬가지로 신혼이야. 이야, 옛날에 네가 동정 대마왕이라고 놀림받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거 언제적 이야기 하고 앉았냐. 기억도 안날 정도로 옛날 이야기 하고 있네]
"벌써 치매 온거야? 그러면 큰일인데"
[거 댁은 젊어서 좋겠수다. 근데 나이로 따지면 네가 더 많지 않냐?]
"누구랑 다르게 서른살도 되기 전에 로드에 오를 정도의 미친 재능은 없어서 이 나이 되도록 로드급이올시다. 꼽냐?"
서른살도 되기 전에 로드에 오른다는 소리는 갓난아기가 난데없이 신검을 재련한 뒤에 드래곤을 잡았다는 개소리보다 더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근데 저놈은 했다.
모든 재능을 거기에 몰빵한듯 머리는 나랑 비슷한데 비해서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이야 나랑 비슷한 크기의 외견을 하고 있다지만 마음만 먹으면 행성 단위로 몸을 불릴 수도 있어서 주먹 한방에 별을 부술 수도 있다.
[서로 안부 묻는건 여기까지 하고......그래, 전향할 생각은 아직 없냐?]
"대가로 받은게 만만치 않아서"
[하기사, 나도 네 입장이였다면 그럴만도 하지. 하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야]
팬텀은 꽤나 공명정대하다.
나와 그는 서 있는 파벌이 다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나를 죽이거나 하지 않는다. 그가 목표로 하는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서히 다시금 심연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심연의 군주,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심연 속에서도 자연스레 숨쉬며 존재할 수 있다.
[운명의 절대자에게 전해. 자기 차원에 틀어박혀 있지 않으면 5분안에 내가 찾아서 조져버리겠다고]
"본인도 잘 알고 있을텐데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모습을 감추었다. 바닥에 남아 있었던 검은 그림자도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고 보니 운명의 절대자 하니까 생각나는게 하나 있었다.
나는 다시금 부서진 벽을 통해서 옆 방으로 넘어갔다. 거기에는 방 구석에 웅크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유진이가 있었다. 다행히 팬텀의 모습은 못본것 같다. 봤으면 떠는걸로 끝나진 않았을테니까.
험한 일을 겪어서 두렵고 무섭겠지만 유진이가 공포에 질린 것은 그 이유가 아니였다.
그 아이가 흘리는 눈물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박살났기 때문이다.
"라쿤맨 아저씨......전 못나아요? 여행도 못가는 거예요?"
이 아이의 운명은 거기까지다. 평생을 병원에서 살던가, 아니면 그 빌어먹을 은총인지 뭔지 때문에 언젠가 괴물로 변하거나.
운명의 절대자가 운명을 꼬아서 나와 이 아이의 인연을 만들어서 날 고뇌시키려고 만들었다면 이미 그렇게 당하기만 하는 시절은 옛날 옛적에 갔다고 하고 싶다.
나는 품 속에서 긴 검은색 팔면체의 수정을 꺼내들었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수정은 마치 하나의 보석이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이건 내 직장 동료중 막내의 힘이 깃든 물건이다.
종교 집단이라고 해서 세뇌 같은거 걸린 사람이 있으면 쓰려고 했는데 선동 당한 사람은 있어도 세뇌 당한 사람은 없어서 쓰질 못했다. 세뇌와 선동은 다르니까.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서 용법이 애매해지는게 문제다.
"아니, 넌 여행 갈 수 있어"
나는 수정으로 유진이의 심장을 얕게 찔렀다. 바늘에 살짝 찔린 정도니까 크게 아프지도 않을거다.
그러자 유진이의 심장에 깃들어 있던 라프 에너지가 단숨에 빠져나갔다. 몸에 힘이 풀린 그녀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이런저런 곳에도 여행 가보고, 사람들도 만나고, 커서 나보다 멋진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애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살다가 자식들 보는 앞에서 죽을거야"
이 수정의 주인의 이명은 '자유와 권리의 대마왕'. 인간의 문명 중에서 자유와 권리를 판단하는 녀석이다.
수정에 깃든 힘은 내 능력과 같은 부류의 것이고, 그 능력은 '자유'다.
유진이가 선천적으로 아픈 것이 그녀의 자의와 무관한 것이라면 이 수정으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하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본인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거기에 더불어서 나도 축복을 걸어주었다.
"나는 신은 아니고 신을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네 앞길에 축복 정도는 걸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살면 될거야"
시온이 옆에 있었다면 마법의 주문인 '틀림없이 잘 될거야'같은 말을 해줬겠지만 내가 누구 도발하는게 아니라 위로해주는데는 말재주가 없어서 말이다.
초월자는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특징에 따라 축복을 걸어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나와 같은 3대 차원 명문가 중에 하나인 스토리텔러 가문의 가주는 축복을 걸어주면 어떤 언어든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단지 쓰고 말하는건 안되지만 듣는 것 자체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언어 습득이 큰 도움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
아까와 같이 심연의 군주이자 다크니스 로드(Dakness Lord)인 팬텀은 부정적인 것에 대한 정신 저항력과 밤의 어둠에 눈이 밝아지고 은신할 때는 어둠이 감싸준다. 다루는건 심연인데 왜 어둠까지도 그러는걸까. 애초에 그런 쪽이였나?
나의 경우에는......내가 제일 잘하는건 죽이는거지만 남에게 걸어주는 축복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정 이상의 인과율이 넘지 않는다면, 내가 지정해둔 사인 외에 방법으로 죽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진이에게 노화로 인한 자연사라는 사인을 결정 짓는다면 도로에서 트럭이 들이닥쳐도 눈 앞에서 비껴나가고, 설령 자살을 한다 하더라도 천운으로 실패하게 될 것이다.
죽고 싶은데 죽지 못하는게 지옥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최소한 이 아이한테는 그런 확신이 필요하다.
꽤 축복을 강하게 걸어주었으니까 운석 같은게 떨어져서 세상이 싹다 멸망해도 혼자는 살아남지 않을까.
그 정도의 인과율 수정이라면 운명의 절대자도 유진이의 미래 정도는 다시 계산할 수밖에 없을껄? 설령 한사람 분의 인과라 할지라도 내가 축복을 걸어줬으니 어지간한 계산 수정으로는 안끝날거다.
요컨데 프로그래머한테 여태까지 한 코딩까지는 아니겠지만 어제 한 코딩은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시키는 수준일까. 빡치기는 하겠지만 감당 가능한 범위일 것이다. 하핫, 원래 그게 목적인데!
인과율 수정은 이기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상대방 빡치라고 하는겁니다. 아무렴.
유진이는 충격적인 일을 많이 겪고 몸에 힘이 빠지기도 했는지 서서히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라프 에너지 같은거 없어도 스스로 걷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근처의 이불 하나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이번 일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 * * *
중요한건 뒷처리였다.
일단 변이했어도 사제 50명 가량이 죽었고 명백하게 그걸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라고? 이미 적성종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다가 유전자 레벨로 이리저리 뒤섞여서 본인이라고 파악도 못할텐데? 한두명이면 몰라도 50명이나 되는 사제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도 일일텐데 그게 사람이였다는 물증도 얻어내고 그러려면 꽤나 고생 좀 하겠다?
게다가 윗선과 연결되어 있다면 잘해야 실종 처리가 될 뿐이다.
조사가 들어가면 필시 뒷돈 받은 것도 들킬 수 밖에 없을테고, 그러면 부랴부랴 감추려도 들겠지.
종교 집회중에 차원진이 열렸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라쿤맨이 등장해서 적성종을 쓰러트려 줬다고 하는 레파토리가 그들에게서 이로울 것이다.
시체도 남지 않은 목사? 그거야 실종 처리 하면 되겠네. 어차피 심연에 처박았다면 육체는 진작에 갈기갈기 찢어져 죽었고 영혼은 거기서 고통받을테니 물증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하다못해 CCTV도 없었으니 기록한 것도 없다.
단지 한가지 찝찝한건......조 팀장의 전처는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보세요?"
[아! 최악씨! 어떻게 됐습니까? 아내는요?]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아]
평소에는 반말이지만 이럴 때까지 반말을 깔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다. 부고 소식 앞에서 건들거리는 모습만큼 꼴보기 싫은 것도 없다.
한동안 수화기 너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옅은 눈물 섞인 흐느낌 소리만이 들릴 뿐이였다.
[......혹시 그녀의 시신은 찾았습니까?]
"이미 처리를 해서......불태웠더라고요. 뼛가루도 없습니다"
[그런......]
나는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다짜고짜 댁의 전처는 적성종으로 강제로 변이되서 괴물이 되었어요. 시체는 뒤져보면 나올거예요, 같은 소리를 지껄일만큼 냉혈한이 아니다.
최소한 시체는 온전했었고 곱게 갔다는 말을 해줘야 지금의 그의 마음에 칼질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까?]
"정상적인 종교가 아니란걸 깨닫고 나오려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입니다. 아마 입막음을 당해서......기록만 남아 있던걸 알아낸거라 흔적만 발견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없는건 아니였을터다.
사람의 마음은 꽤나 오묘해서 딱 잘랐다고 생각해도 끝 부분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전처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걸 보면 상당히 정이 깊었던걸로 보인다.
나도 저 고통은 안다. 시온 말고도 전에 연인이였던 사람은 있었으니까. 그 연인을 나보다 먼저 보냈던 적도 있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보냈지만 손꼽힐 정도로 구하지 못했던 적도 있다. 그때의 마음은 찢어질듯이 아프다.
여기서는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백마디 위로를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이건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는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손 쓸 수 없는 부분이다.
조용히, 나는 통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