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3화 〉[라쿤맨 비기닝] (93/507)



〈 93화 〉[라쿤맨 비기닝]

백리네 집의 아침 기상 시간은 지극히 평범했다.

"오징어 덮밥!"

"아니, 얘는 언제적 드립을 치고 기상하는거야?"


"오빠, 오늘 아침밥 오징어 덮밥이지?"

"아닌데? 된장찌개야"


"아! 엄마! 제발!"

루리만 빼면.


백리네 집의 평범함은 루리가 전부 깍아먹고 있었다.

숫자로 판단하는 성적 같은건 좋았지만 성격이 문제다. 부모님도 그런 루리의 성격에 대해서는 손을 놓은지 오래였다.

분명 가정 교육은 백리와 똑같을텐데 어째서 루리만 저런 성격인지는 미스테리다. 백리나 부모님도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나와서  먹어!  식겠다 얘들아!"

"알았어요!"


부엌에서 그들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충 세수만 하고 나온 루리는 식탁에 앉았다. 메뉴는 된장찌개가 메인에 여러가지 소소한 반찬들 몇개가 올려져 있었다. 거기에 막 부친 계란 후라이를 각자 2개씩 올리자 아침으로는 괜찮은 식사가 되었다.

"찌개에 계란후라이 조합은 사기지. 후라이에 들기름 톡톡 뿌려서 부친거면 더더욱"

"고소한 냄새가 장난 아니네"

딱 오늘은 백리의 아버지 하정욱도 쉬는 날이라서 간만에  가족이 모여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도 오늘 두 사람이 놀러갈거라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오늘 놀러간다고? 돈은 있니?"


"아, 아빠도 참. 저도 월급 꼬박꼬박  받는데 돈 정도는 있어요. 걱정 마세요"


"오빠는 착해 빠져서 안된다니까. 이럴 때는 모자란 척 하고 용돈 받아 쓰는거야"

"양심에 충실했을 뿐이야"

"눈 뜨고 코 베이게 생겼네 우리 오빠"


한창 먹을 때의 애들이 두명이나 있으니까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백리는 먼저 씻었는지 이빨만 마저 닦고 루리는 외출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문득 옷을 벗으려던 찰나, 옆에서 이빨을 닦고 있던 백리에게 루리가 소리쳤다.


"고개 돌려 오빠. 어딜 숙녀의 알몸을 보려고!"


"야, 내가 적성종한테 세뇌당해서 눈에 보이는게 없어도 널 덮칠 일은 없으니까 걱정마. 그리고 숙녀? 숙녀란게 머리가 돈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라면 내가 아는 숙녀는 죄다 얼어 죽은것 같은데?"

"숙녀는 몰라도 오빠 자손들이 다 뒤진건 확실해!"


뻐억! 하고 루리가 백리의 사타구니 사이에 다리를 차올렸다. 묵직한 충격이 와닿는다.

만약 백리가 황급히 특성인 보강을 사용해 방어하지 않았다면 땅을 구르면서 지랄발광을 했을 정도의 일격이였다.


"다짜고짜 급소를 노리다니 비겁하다! 억, 잠깐만 고통이 뒤늦게.....?"


"햣하! 죄다 쥬거랑 조카들아! 조카 좆까!"


"이 또라이 같은 년이 진짜.....! 누가 널 데려갈지 궁금하다 진짜!"


이걸 과연 패륜이라고 봐야할지 아닐지 모를 광경이다.

백리는 이빨만 닦고 머리만 빗어서 대충 마무리 했지만 루리는 씻고 머리 말리고 화장품 바르고 하는데 한시간이 걸렸다.


"아, 여자들은 화장하는데 시간 많이 들여서 좀 그래"

"오빤 평생 여자 못사귀고 모쏠로 살거란 소리 잘 들었어"


"야, 오늘 물주한테 그런 소리 할래?"


"제가 다 죄송합니다 오라버님. 굽신굽신"

"오라버님 소리는 집어치워. 어쩐지 소름 돋는다"

"맛있는거 먹고 싶어. 특히 고기. 욕심  부리자면 소고기"


"삼겹살이나 처먹어"


말은 그렇게 해도 남매 둘이서 외출한다는건 사이가 좋다는 증거다. 나이 차이도 크지 않은 남매 사이에서 오빠가 여동생 챙겨주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이 없다.

자고로 남매 사이는 좋아야 투닥거리며 싸우고 나쁘면 서로 무시하기 일쑤다. 그런 면에서 백리와 루리 두 남매 관계는 지극히 좋았다.


......물론 이상한 의미로 좋다는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남매라는 선에서다. 엄한 부분으로 넘어갈 일은 절대 없다.


"아, 맞다 오빠. 세상에서 짱 귀여운 나랑 같이 외출한다고 데이트라고 생각하지마. 애초에 어떤 미친년놈들이 남매끼리 사랑을 하겠냐마는 모쏠인 오빠한테 여동생이랑 하는게 첫 데이트인건 너무할테니까"

"이게  구라랑 팩트로 후려패고 있지? 사람은 너무 어이 없어도 말이 안나온다더니 진짜네"

"수능  뒤에 내 친구들 좀 소개시켜줄까? 그때 쯤이면 유통기한이 거의 다 되긴 했어도 일단은 고삼이니까 괜찮을거라고 보는데"


"아서라.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꺼"

"솔직히 이대로 가면 오빠는 평생 여자 손도 못잡고 모쏠로 늙을텐데"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

"그럼 최근 한달 사이에 만났던 위아래 3살.....아니, 5살 터울의 여자 한명만 말해봐"

"......예진이?"

"예진이? 아, 사장 오빠가 데리고 있다던 애?"

전에 이야기 하긴 했지만 루리는 자세한 이야기는 모른다. 이름만 알지 예진이가 포스 유저인것 조차도 몰랐다.

루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며 백리에게 계속 꼬치꼬치 물었다.

나이가 걸리긴 해도 그거야 기다리면 되는거고 지금도 나이 차이는 몇살 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5살 정도일까. 그 정도 차이는 요즘 흔하다.

자기 오빠 주변의 여자 관계 파악은 여동생으로서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예뻐? 성격은? 나이는 몇이야? 좋아하는건?"


"왜 그렇게 물어봐? 님 혹시? 내가 그런 쪽으로 편견은 없으니까 예쁜사랑 하렴. 부모님은 내가 설득해줌"


"나도 예쁜 사람 좋아하긴 하지만 레즈는 아니라고! 그리고 나중에 시누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는건 나쁜게 아니잖아!"


"나도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야"


기껏해야 최악이랑 이어져서 알고 지내는 정도. 저번 명동 차원진 사건 이후로 만난 적은 없다. 애초에 그때 예진이는 기절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하다.

만약 개인적으로 만나서 약속을 잡는다면 모를까.....그랬다가 최악이 알면 여러가지로 무섭지 않을까?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최악도 연애 관계에서는 나름 개방적이기에 사귀는것 자체에는 뭐라 하지 않겠지만 미성년자가 넘어서 안될 선을 넘으면 딸 가진 아버지들을 위한 샷건을들고 쫒아올지도 모른다.

특히나 '아직 동정이니 백리야? 좋아, 계속 유지하렴. 뒤지기 싫으면'같은 말을 하면서 말이다.

이야기를 하다 인근 지하철 역에 도착한 그들은 노선을 확인했다.

"여의나루, 여의나루. 아, 여기 있다. 한번 갈아타면 되겠네"

"정거장은 몇개 안되서 금방 가겠다"

"오빠가 차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야. 하다못해 중고차라도 있었으면. 사장 아저씨가 월급은 나름 주잖아?"

".......그렇지 않아도 형이 람보르기니 빌려주겠다고 했었긴 했었어"


"오빠 미쳤어?! 그거 빌려서 탔다가 범퍼 하나라도 긁으면 우리 둘다 죽을 때까지 노예행이야!"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 우린 포스 유저니까 일당이 비싸!"


"아, 맞다 그랬지"


하고자 한다면 돈 벌 방법은 많다. 하다못해 원양어선이라도 타면 아무리 위험해도 포스 유저 앞에서는 큰 위험이 되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은 맨몸으로 수십억 벌기 어렵겠지만 포스 유저도 몸 망가지는거 각오하면 못벌 돈은 아니다. 위험과 고생이 뒤따르고 직업이 안정적이지 못해서 문제지.

"인터넷에서 봤는데. 포스 유저 장기 같은 경우에는 같은 적합자라도 훨씬 더 거부 반응이 좋고 회복이 빠르데. 그래서 콩팥 하나도 일반인 장기 시세에 10배는 가볍게 넘는다나 뭐라나"

"어.....신장 하나가 얼마쯤 하지? 하나 떼도 살 수는 있다고 들었는데"


"보통은 5000만원. 뭐, 보통 시세에 따라 다르긴 하지"


"헐, 그러면 우리건 5억이야? 비싸긴 비싸네. 그렇게 비싼데 수요가 있긴 하려나"

"여고생 팬티라면 100만원 주고 사가는 변태들도 있는데 몸에  좋은 장기 구하는데 돈 같은거 얼마든지 뿌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여고생 팬티를 100만원에 산다는 사람은 좀 과장한거 아닌가 싶다. 어떤 미친놈이 그래?"

"실은 50만원이였어. 솔직히 그땐 나도 좀 혹했고"


"그 새끼 어디있어?!"

농담인줄 알았다가 진담이라는 소리를 듣자 백리가 불같이 화를 냈다.


백리가 원판이 괜찮았고 포스 유저가 된 지금은 종종 번호 물어보는  정도는 들어본만큼, 남매라서 닮은 루리의 외모는 상당히 예뻤다.

단지 그 외모를 성격이 다 잡아먹어서 드러나지 않았을뿐이지. 외모가 예뻐도 행실이 괴상하면 인기가 없는 법이다.

학교에서 나름의 컬트적인 팬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외모에 비하면 적은건 확실하다. 좀 더 평범한 성격이였으면 학교의 아이돌이였을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사장 오빠한테 말해봤어? 나도 수트 좀 줘. 오빤 아이언 라쿤이니까 나는 워라쿤으로 할께"

"야, 그런 이야기를 이런데서 하면......."

백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황급히 놀라 그녀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루리는 그의 손을 치우면서 편하게 말했다.


"뭐?"


"어......?"


시간은 아침이기는 해도 주말이라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겨우 지하철이 비좁지 않을 만큼은 있었다. 바로 옆 사람이 소근거려도 들리는 소리에 비해서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간단한 포스 컨트롤이야. 오빠도 능숙해지면 우리가 하는 이야기 퍼지지 않게 막는 것도 가능해"

"와.....싸우는건 둘째쳐도 이런 세밀한 컨트롤에서 차이가 나는구나. 나도 아직 멀었네"

"결국은 응용 문제니까. 오빠도 좀만 더 고생하면 할 수 있어. 아무튼 나도 라쿤맨 수트 줘!"

"미친소리 그만해. 나도 받은거라서 내가 아니라 형수님이나 형한테 해야지"


"크으, 기자회견에서 아임 라쿤맨 하고 커밍아웃하면 쩔어줄텐데"


"야, 그러면 고생 많이 할것 같은데?"

"폼나는 것도 있지만 그거 기술력이 장난 아니라서 한번 뜯어보고 싶어서 그래. 보이드 블래스터라고 했나? 특히 그거"


"아"


일반적인 물리 공격, 화기가 먹히지 않는 적성종에게 유효한 데미지를 줄  있는 개인 휴대병기. 기껏해야 손바닥에서 나가는 수준으로 단층 건물 정도는 쉽게 박살낼 수 있는 위력을 자랑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기술 자체가 화학 연소 반응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특수 주파수로 공명시켜 울리는 개념 간섭 기술이기 때문에더욱 놀랍다.

"나도 머리가 있으니까  기술 퍼지면 제 3차 세계 대전 같은거 일어날것 같다는 예감이 물씬 들거든. 생각해봐. 그거 수트에 달았는데 그 정도 위력이 나오면 미사일 같은거에 달면 얼마나 범위가 커지겠어? 게다가 핵폭탄처럼 방사능을 뿌리기는 커녕 한번 쏘면 공간이 울리면서 범위 내의 물질이 소멸하고. 얼마나 깔끔하고 좋아? 시체도 안남을테니까"

"으음......."


보이드 블래스터의 원 기술 발상지도 그런 문제에 봉착했었다. 하지만  이전에 보이드 블래스터의 개발 사유가 나라 하나마다 한명씩은 있는 초월자 견제용으로 만들어진거라 그 세계에서는 보이드 블래스터만으로 전쟁을 벌이진 않았다.

그러나  세계는 다르다. 마스터 유저가 아무리 국가전력이라 하더라도 진짜 나라의 총전력을 다하면 죽이지 못할리 없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적성종에게 통해서 유효하고, 포스 유저도 필요없게 만들고, 양산도 가능한 무지막지한 기술이 뿌려진다면......

인간은 공적인 적성종이 아니라 다시금 예전처럼 인간과의 싸움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걸 연구해보고 싶어?"

"정확히는 원리만 알고 싶은거지 기술을  생각은 없어. 난 양심없는 무기상 같은 곳에 취업하고 싶은게 아니야!"

"일단 형수님한텐 말을 해볼께"

"아, 그러고 보니 시온 언니는 나랑 말이  통해서 좋아. 이건 마치 전생에 부모자식 인연이였던  같은 느낌이......!!"

"아니야, 그건 아니야"


백리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단호박인줄.

"아, 저기봐. 한강이다"

"진짜네. 거의 다 왔나보다"


반짝이는 햇살에 비치는 강의 물결들, 그리고 옆에는 약간 정체되는 듯한 느낌의 대교가 강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오가는 차들이 꽤나 많다. 물론 놀러가는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만 저 중에 일부는 주말에도 출근을 하는 슬픈 직장인들이겠지.


"앗! 저기 괴물이다!"


"야, 아빠가 하던 옛날 뻥을 아직도 하고 있냐. 고래에서 왜 괴물로 레파토리가 바뀌었어? 하다못해 돌고래라고 해보던가"

백리는 가족끼리 종종 놀러갈 때 그의 아버지인 하정욱이 한강에 이를 때마다 '앗! 고래다!'같이 애들이 좋아할만한 뻥을 치면서 놀아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이야 진짜 한강에 고래가 사는줄 알고 루리랑 같이 어디? 어디? 하면서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그냥 웃어넘기고 말 우스갯소리지만 그때만큼 순수하고 걱정 없었던 시절이 좋았다.

"농담 아닌데"

"......?"


루리가 정색하면서 말했다.


한강의 강물이 불길하게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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