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라쿤맨 비기닝]
한남충이라, 내가 그 단어로 욕을 들어먹는건 처음인데. 애초에 여태까지 시온 외의 젊은 여자하고 이야기 하는건 학창 시절 외에는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나는 바로 군대 가서 더욱 그렇고.
학교 다니던 시절의 여자애들은 그런 편협한 사상에 물들기에는 어렸고, 그나마 고등학생 때나 가능성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그게 얼마나 등신같은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완전히 없다고는 장담 못하지만 최소한 내가 본 적은 없다. 근데 눈앞에 나타나니 새삼 놀랍네.
지금 내가 느끼는 분노는 격렬한 분노가 아니라 어이가 없는 분노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억지를 부리며 떼쓰는 아이를 생각해봐라. 애들에게는 논리라는걸 이해할만한 지성이 있지 않아서 욕구에 충실할 뿐이다.
어린애가 떼쓴다고 화를 내나? 물론 훈육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화를 내야겠지만 그 감정은 불과 같은 분노가 아니다.
이성적으로 판단도 못하고 논리라는 개념 자체도 이해 못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봤자 자기 손해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뭐 틀린말 했습니까? 기자님 말대로 여경은 경찰이라고 해서 경찰 업무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잘못된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의 앞뒤가 안맞는건 제가 아니라 기자님인데요?"
"아까부터 계속 여성 혐오에 성차별 발언을 하시고 계시잖아요!"
"어디가 여성 혐오고 성차별인지 모르겠네요. 사실을 말하는게 혐오고 차별인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아요. 차라리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말지"
만약 당장에 바이러스 같은게 퍼져서 남녀구별 없이 평준화 되면 몰라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있다는건 당연한 사실이다.
단지 그 차이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남자는 남자만의 장점이, 여자는 여자만의 장점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 당장의 문제의 원인인 여경도 여성 용의자를 수색하거나 남자를 무서워 할 강간, 성폭력 피해자의 보호 등을 할 수 있다.
"사장님이랑은 이야기가 안되네요. 인터뷰는 여기까지 할께요"
"그러시죠. 아, 잠깐만요. 전화가 왔네요"
어차피 볼일은 끝났다.
날 도발시켰으니 그 대가를 치루게 해줄 뿐이다.
나는 슬쩍 전화가 온 척 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인사를 건냈다.
"아! 김 변호사님!"
[최사장님?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지난번처럼......?]
"아뇨, 그런건 아니고요"
스피커 상태도 아니니 김 변호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겠지만 대화하는 내 목소리는 충분히 들린다.
일부러 그녀에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나저나 저번에 절 때렸던 고삐리들 사건은 어떻게 되어 가나요?"
[아, 그 사건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저번에 말씀드린대로 천천히 진행시켜서 그들이 성인이 된 다음에 감형 없이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할겁니다. 공문서 위조에 특수 폭행, 미성년자 음주에.....그리고 시온 사장님이 주신 CCTV영상에 그 녀석들이 렌트카로 무면허 음주 운전을 한 정황까지 전부 파악했습니다. 징역은 피할 수 없는게 당연하고 문제는 형이 얼마나 떨어지느냐니까요]
"그래요? 잘 되고 있네요. 고생하십니다. 역시 대형 로펌 출신이라서 그러신지 일처리가 빠르시네요"
내가 노골적으로 칭찬하자 김 변호사가 뭔가 눈치 챘는지 물어왔다.
[혹시 지금 비슷한 상황에 계신겁니까? 누가 옆에 있고?]
"네, 그렇죠"
[소란이 큰건 아니니까 폭력 사건 같은 일은 아닐거고요......]
머리가 좋은 사람은 눈치도 빠른 법이다. 전화 너머에서 옅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변호사라는 소리에 움찔했던 이은정 기자는 대형 로펌 출신이라는 소리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내가 벌써 변호사 구해서 사건을 이렇게까지 처리하고 있을거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하기사 치킨집 사장이 변호사 인맥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겠지. 덕분에 엿 먹이기는 편해졌다.
"김 변호사님. 만약 제가 면전에서 한남충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면 그건 무슨 사유로 고소할 수 있을까요?"
"사, 사장님?!"
나는 소리치는 이은정 기자를 무시하고 김 변호사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요즘 그거 때문에 문제가 많더라고요. 제가 아는 선, 후배들한테서 그 케이스는 들은게 있어서 얼추 압니다]
"막 명예훼손죄 같은걸로 들어가나요?"
[아뇨, 명예훼손은 사회적인 위신이 실추되었을 경우에 해당됩니다. 이 경우에는 모욕죄에 들어가겠죠]
"모욕죄요? 모욕죄는 뭔가요?"
[쉽게 표현하자면 욕을 들어서 경멸감을 느끼셨다면 성립됩니다, 만약 사장님이 그 한남충이란 소리를 들으셨다면 모욕죄, 주변 인물들에게 퍼져서 사회적 평판에 영향이 간다면 명예훼손죄죠]
"아아, 그런 차이구나"
나는 슬쩍 이은정 기자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아까 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태도는 어디 간데 없이 움찔거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즈, 증거는 없잖아요"
"......?"
"마, 맞아요! 제가 한남충이라고 했단 증거가 있어요? 없을텐데요?"
그녀는 무심결에 내뱉었는지 자기가 한 말을 깨닫고 다시 당당해졌다.
나도 모욕죄라는건 몇번 들어본적이 없다. 길에서 시비가 붙어서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쌍욕을 한다 하더라도 그건 모욕죄가 되기 어렵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증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자리에 관계 없는 제 3자가 있을 확률과 있어도 그 사람이 증인이 되어줄 확률은 낮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카페에는 나와 이은정 기자 두명 밖에 없고 그나마 카운터에 카페 주인 아주머니가 있을 뿐. 카운터에서 여기서 했던 이야기가 들릴만한 거리도 아니고 애초에 저분도 우리 가게 운영하면서 알고지내는 지인이다.
나는 테이블 위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녹음한게 있잖아요"
"아!"
이은정 기자는 황급히 녹음기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내용물을 지우는건 당장은 무리고 숨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그것마저 불안했는지 녹음기를 상의 안에 넣었다. 자기 가슴 쪽에 들어간 녹음기를 팔로 감싸 잡아놓고 나를 노려보았다.
"제, 제 몸에 손대면 성추행으로 고소할거예요!"
"아이구, 보는 눈이 높아서 댁 같은 여자한테 눈 안돌아갑니다"
지금 우리 시온의 만분의 일이라도 예쁘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그러냐? 못생긴 외모는 아닌데 시온이랑 비교를 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지.
저 상태에서 녹음기를 뺏기는 무리다. 내가 손대면 확실히 성추행으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주머니에 숨긴 것도 아니고 상의 가슴 부분에 넣어 숨겼는데 그러면 당연히 위치상 그럴 수밖에 없다.
"성 차별이라고 해놓고 정작 그 성을 무기로 쓰고 있는 당신은 뭔데요 기자님?"
"시, 시끄러워요!!"
저걸 빼앗으려면 이 문제의 원인이 된 여경이 와야한다. 성추행 문제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경이 손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이번에는 경찰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제가 녹음한게 있다고 했지. 딱히 그쪽 녹음기라고 말 안했는데요"
나는 내 핸드폰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이야기가 이렇게 번질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리고 언론조작을 할 것을 염두해두고 마찬가지로 녹음 기능을 켜두었다.
[우선 이틀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인데요.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자 그 목소리의 주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리가 아까했던 대화가 그대로 나오다가 이내 문제의 그 대사가 나왔다.
[사장님 혹시 한남충이세요?]
명백한 증거가, 그것도 내 손에 있는 증거가 나오자 그녀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한다. 물론 이 말 하나 가지고 징역을 먹이기는 부족하고 기껏해야 벌금 정도일테지만 이쪽에서 그렇게 끝낼 생각 없이 질질 끈다면 지는건 결국 그녀다.
무엇보다 여기 녹음된 이야기는 퍼졌다간 기자 생활 쫑내기엔 충분하다.
"사, 사장님! 자,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아까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어디 갔어요?"
뭐더라. 자신보다 지적으로 덜된 사람을 보는것 마냥 우월감에 찬듯이 깔보듯 내려보는 '그 표정'이라고 했던가.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런 자신감은 하나도 없었다.
"한번만, 정말로 죄송하니까 한번만 봐주세요!"
"비굴하게 굴지 말고 꺼지세요"
생각해보니 이거 축하할 일이네.
그녀는 남녀의 차이를 극복했다.
지금은 남녀의 구분 없이 그저 궁지에 몰려서 자비를 구하는 사람 하나 있을 뿐이니까.
* * * *
다시 가게로 내려왔을 무렵에는 장사도 거의 끝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래걸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뭐가 그래. 존나 오래 걸렸네.
물론 그런 상황이 된 이유도 있지만......일단 대충 마무리 했다. 손 모아 비는 이은정 기자는 뿌리치고 나왔다. 가게까지 따라와서 그러려고 했지만 그러면 거기에 업무 방해죄까지 더해지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고소장이나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별 일 없이 그녀는 돌아갔다.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아, 형. 이야기 끝났어요?"
"뭐, 대충. 서애씨는 먼저 들어갔어?"
"네, 정리만 하면 되요"
"고생했다. 같히 도와줄께"
요즘 왜 이렇게 트러블이 많이 생길까? 어디 굿이라도 벌여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도 잘 마무리가 되서 다행이다. 나머지는 시간과 김 변호사님이 해결해줄 문제다.
"정리 끝나면 난 후딱 예진이 마중이나 나가줄까? 어제는 놀러가서 못해줬거든"
"저도 얼른 돈 모아서 차 사야겠어요. 적당한걸로 사면 최소한 형이 빌려준다는 람보르기니보단 운전하긴 마음 편할거 아니예요"
"차는 꼭 외제차로 사거라. 우리나라 차는 해외용과 내수용이 따로 있으니까"
"저도 알고 있어요"
"아니면 내가 시온한테 말해서 알아봐 줄 수 있고. 아마 시온이라면 어디 자동차 기업 회장이랑 인맥 있어서 싸게 잘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와, 진짜 형수님은 쩌는 분이네요. 그거 생각하면 형은 전생에 지구라도 구한거 아닌가 싶다니까요"
"그 반대는 해봤는데"
"........?"
가게를 정리하고, 내일 사용할 재료들을 손질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이로서 오늘 할 일은 끝이다.
이번 주말에는 뭘 해야하나 생각해봤더니 형식이네 아저씨 수술이 그날이였다. 가서 인사나 드려야겠다.
"백리 넌 이번 주말에 뭐.....아, 동생이랑 놀러간다고 했지?"
"네, 왜요?"
"아니, 잘 놀다 오라고"
문득 나는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멀리 나가는건 아닐테니까 서울 부근일거고. 산을 가나, 강을 가나 두가지 선택지 중 하나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니 백리가 대답했다.
"아, 여의도 한강 공원이요. 수영장도 있고 좋잖아요"
어쩐지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