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라쿤맨 비기닝]
와, 시발 빨려 뒤지는줄. 복상사 했던 전생이 스쳐지나갔다. 한창 때의 몸뚱이가 아니였으면 진짜 몸 상했을 듯.
나는 초월자이긴 하지만 본질은 영혼쪽이 그렇다. 그리고 정말로 노화가 없으려면 육체와 영혼이 구별 없는 좀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하고.
노화가 있는 이유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태가 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던 시간에 쇠락하기 마련이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고삐리 4인방이 지랄한 사건으로부터 이틀째 되는 날 출근한 나를 보자 백리가 깜짝 놀랐다.
"아니, 형 얼굴이 왜 반쪽이 됐어요?!"
"넌 성욕 적당한 여자랑 결혼해야 한다"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매치가 안되요. 형수님 모습이 좀 그래서요"
"울 마누라가 뭐 어때서!"
"겉보기엔 초등학생이잖아요!"
"아냐! 어제는 멀쩡한 성인 모습이였다고!"
"아......형수님 외견은 바꿀 수 있던 거였다고 했었죠. 거기서 어른이 된 모습이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이 안되네요"
"엄청 예뻐"
"그건 부럽고요. 혹시 형수님한테 언니 같은 친척 없어요?"
"일단 언니가 있어도 외견은 별 차이 없을텐데다. 시온한테 친척은 사촌 오빠 하나 밖에 없어"
시온은 본인 스스로도 부모님 얼굴 본 적 없다고 말했으니 가족이 있을리 없다. 그나마 얼굴을 비친 사람이 사촌 오빠인 유토피아고.
"그러면 다른 예쁜 여자 소개 시켜줄만한 사람 없어요?"
"음......일단 직장 동료 두명이 여자이기는 한데. 한명은 친구 딸이라 소개시켜주기 힘들고, 한명은 친하게 지내기는 하는데......넌 극렬하게 싫어할껄"
"왜요? 일단 예쁘면 좀 모난 정도는 참아줄 수 있는데. 아무리 연애가 외모만 보고 하는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예쁜건 무시 못하잖아요"
"성격이 인성 더러운 루리같아. 아, 정정할께. 그냥 성격 더러운 루리야"
"아, 안사요. 퉤! 퉤!"
백리가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기사, 정상적인 남매라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게 당연하다.
어떤 등신같은 오빠가 여동생한테 꼴리고 여동생이 친오빠한테 꼴리냐? 제정신인 사람이면 그런 생각 못하지.
"그건 됐고요......그러고 보니 어제 가게에 방송사에서 찾아 왔었어요"
"방송사? 뭐야, 또 TV출연 해달라고?"
저번에 VJ 특공부대에 출연한 이후로 손님이 반짝 늘었지만 명동에 차원진이 큰게 난 이후로 그것도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직도 단골인 손님들은 자주 오지만 그래도 방송 탔을 때에 비하면 영 별로다.
여기서 방송 한번 더 타면 장사는 좋겠지만......솔직히 고생하는거 생각하면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거예요. 그저께 고딩들 사고쳤을 때 경찰들 왔던거 있잖아요"
"어, 그런데 그게 왜?"
"그때 여경 한명이 한명도 제대로 제압 못하던거 때문에 목격자 인터뷰 같은거 하려고 왔더라고요"
"그랬어?"
고삐리 4인조의 깽판으로 경찰을 불렀을 때 온 사람은 지구대 소속의 남녀 경찰 2명이였다. 그 중에서 남자 경찰 쪽은 체격이 그리 큰건 아니였는데도 불구하고 고딩들 엎어치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에 비하면 여경은 한명 하나 제압하지 못해서 나한테 대신 수갑 채워달라고 했을 정도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거 때문에 지금 말이 많아요. 이런데도 여경 늘릴거냐. 여혐이냐, 그런 식으로요"
"미친놈들 아니야. 경찰 늘리겠다면 순찰에만 돌려도 범죄율이 낮아질테니 낫지만 고딩 하나 제대로 제압 못하는 여경을 늘려서 뭐하게?"
여혐으로 몰아가는 놈들이 등신이다. 우리는 여자를 혐오하는게 아니라 경찰로서의 직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찰을 혐오하는거다.
만약 여경이 국가대표 격투기 선수 출신이여서 한큐에 제압하고 그랬으면 나도 별 말 없었을거다. 그런데 뭐? 김밥 옆구리 터진 소리 하고 앉았네.
"일단 제가 대응하긴 했어요. 당사자가 형이니까 형은 지금 폭행 치료 때문에 쉬고 있어서 오늘은 쉬니까 내일 오라고요"
"잘 했어. 기자들 앞에서 뭔 말을 하면 수백배 부풀려서 나갈 뿐이야. 차라리 똥물은 내가 뒤집어 쓰는게 낫지"
"형이요? 괜찮겠어요?"
"인간의 악의는 끝이 없다고 하지만 최소한 내가 본게 거의 끝에 이르긴 했다고 자부한다. 고작 언론플레이나 하는 기레기한테 꿈쩍할거 같니?"
"그러다가 힘든 꼴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다른건 몰라도 우리 치킨집 장사 안되면 큰일인데......."
"걱정마. 여차하면 죄다 박살내버리면 돼"
"아! 뭔가 언론 조작 막는 방법이 있어요?"
"아니, 그냥 진짜로 부숴버린다는 소린데"
언론조작(물리).
자고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했다. 부패한 언론 조지는데 라쿤 가면 쓰고 일해도 되겠지.
글 쓰는 놈을 죽이면 글을 못쓸테니 언론조작임. 아무튼 그래.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이번에 놀러갈 때 마음 편하게 가게"
"어? 어디 놀러가?"
"저번에 라쿤맨 2호 때문에 루리가 요즘 심기불편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휴일에 같이 놀러가기로 했어요"
"하긴, 아무리 그래도 지 오빠가 위험한데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는데 걱정되긴 하겠지"
"자기도 수트 달라고 징징대던데요"
"그 걱정이 아니였구나"
과연 사이 좋은 남매사이다.
"이번 일도 있고 너무 공부만 하는 것도 안좋을 것 같아서 데리고 나오려고요. 차가 없어서 멀리는 못나가서 대중교통 이용해서 갈거고요"
"뭐야, 차 빌려줘?"
"......? 저번에 여름 휴가 갈때 탔던 스타렉스 샀어요?"
"나 뭐 타고 다니는지 알잖아"
"그걸 빌려준다고요?!"
아차피 차 같은건 타라고 있는거지 모셔두라고 있는게 아니다. 애초에 나한테 차가 그렇게 중요한건 아니고 시온이 사준데다가 폼나서 타고다니는거지 원래같았으면 가격대비 괜찮은 차 하나 사다가 타고 나겼을 것이다.
놀러가는데 빌려주는 정도는 허용범위 안이다.
".......저 면허 전역한 뒤에 딴거라서 실력 보장 못하거든요. 고맙지만 거절할께요. 사고내면 이만저만이 아니라"
"야, 어지간한 차는 그냥 다 피해다녀. 슬쩍 끼어들어도 깜짝놀라서 양보할껄? 비싼차는 이래서 운전하기 편하다고 한다니까?"
"범퍼 하나만 긁혀도 얼만데요 그게?!"
"일단 본사 보내서 수리해야 할테니까 몇억은 그냥 깨질껄?"
한창 이야기 하다가 서애씨가 출근했다. 슬슬 장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 * * *
오늘도 손님은 그럭저럭, 저번 명동 차원진 사건의 영향이 남아 있는지 단골 외에는 많은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청객은 있었다.
슬슬 해가 기울어질 무렵, 우리 치킨집에 어제 다시 오기로 했다던 기자가 찾아왔다.
"온다던 사람이 여자였어?"
"저 사람 말고 몇명 더 오긴 했는데 질기게 붙던건 저 사람 한명이예요"
"그래?"
생각외로 찾아온 기자는 여성이였다.
나에게 남녀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가끔 가다가 '남자는 박력!'같이 마초스러운 마인드가 튀어나와서 지랄하는 것 뿐이지. 나는 성별보다 개개인을 본다.
두 남녀가 싸우면 보통 남자가 이기는게 당연하다. 신체능력이 다르니까. 하지만 여자쪽이 격투기 선수라면? 신체능력 차이가 있어도 기술이 밀리니 이기는건 보통 여자 쪽이 될거다.
그렇기에 나는 남녀의 차이를 보지 않는다. 단지 사람을 볼뿐.
다만 찾아온 여성 기자는 내가 보기에 좀 거부감이 들었다. 보통 이런 느낌을 받는 사람은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많은데.
물론 내 감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능력도 '감각'으로 각성한 내가 자랑하는 감은 적중률이 99퍼센트다.
1퍼센트 가챠도 공짜 뽑기 한방에 터지는 마당에 그 1퍼센트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안녕하세요? 어제 말씀 드리긴 했는데 혹시 여기 사장님 되시나요?"
"네, 여기 사장인 최악입니다. 누구신가요?"
"KWN 방송국의 이은정 기자라고 하는데요. 혹시 그저께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몇가지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장사 중이라서 힘들 것 같은데요. 나중에는 어떠신가요?"
"어차피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은데도요?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저도 어제 왔다가 사장님이 없다고 해서 오늘 다시 온거거든요.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을거예요 아마"
절박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고. 한창 장사하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쓰나.
그리고 우리 가게가 지금 손님이 별로 없는건 명동 차원진 사건 때문에 그런거다. 그 전에는 훨씬 손님이 많았고 거기에 더불어서 지금은 우리 가게뿐만 아니라 이 주변 다른 가게들도 한산하다.
이런 사람은 원하는걸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포기하게 만드는게 쉽지 않고 은혜는 10분만에 잊어도 원한은 10년이 지나도 잊지 않는다. 적당히 해주고 쫒아내야지.
슬슬 가려운데 긁어주면 알아서 가겠지.
나는 백리에게 주방을 맡기고 잠깐 가게에서 나왔다. 우리 가게 위에 디저트 메인의 커피집이 있어서 거기로 올라가서 커피랑 함께 케익 한조각 사서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수첩과 녹음기를 꺼내서 틀어놓았다.
나는 슬쩍 녹음기에 시선을 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우선 이틀 전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인데요.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부분을 말하시는거죠? 폭력 사건, 아니면......"
"사건에 대한 제압 과정중에 일어난 여경의 대처에 대해서요"
그거라면 내가 할 말이 많지.
뭘 어떻게 이야기 하는게 좋을까......무슨 말을 해줘야 저쪽이 만족하고 돌아갈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대로 말해주기에는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치킨집 사장으로서 손님들에게 맛있는 치킨을 내드리는게 직무다. 그리고 그 직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아, 물론 이건 부업이고 본직도 힘들긴 해도 충실하게 하고 있고.
"제압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 때문에 그 여경은 지금 억울하게 구설수에 오르고 있어요. 사장님의 인터뷰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여경을 변호하는데 도움이 될......"
"잠깐만요, 지금 들어가서는 안되는 단어가 있는것 같은데요. '억울하게'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지만 사실이였다. 이야, 현실은 판타지보다 더하다더니. 현실을 얕보지 마라 판타지!
솔직히 판타지 보다는 사람이 사는데라면 더 그렇지만.
"네, 아무리 학생이라도 남자 네명을 제압하는건 힘들잖아요?"
"그때 같이 왔던 남자 순경은 혼자서도 다 때려 잡던데요. 애초에 걔네들 죄다 취한 상태라서 흉기만 들지 않았으면 큰 문제 없었을 것 같고"
"여경이잖아요"
"여경이 무슨 벼슬입니까?"
남자도 보통 4대 1로 싸우는건 버겁다. 하지만 4명이 흉기도 들지 않은 술취한 고등학생이라 이성적인 판단이 안되는 상황이고, 다른 한쪽은 난이도 높은 경찰 시험을 통과한 경찰이다.
그때 봤던 경찰의 엎어치기 한판이면 멀쩡한 성인 남성도 숨을 제대로 못쉴텐데 아무리 네명이였어도 한명한명 제압할 수는 있다.
"여자도 남자랑 똑같아요, 충분히 같은 일을 할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건 가지고 이렇게 마녀사냥 당해야 하나요? 혹시 사장님 여성 혐오 하세요?"
"아니, 여경이 남경과 똑같은 일을 못해서 이 사단이 난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왜 여성 혐오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하고 계시잖아요"
이은정 기자는 찌푸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이 사람 그건가. 요 몇년 사이에 슬쩍 기승을 부리는 자칭 페미니스트인가 하는 그거.
평등과 자유, 그리고 권리를 바란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법이다. 프랑스 혁명은 피 흘리지 않고 이루어냈으며, 흑인들의 인권은 그냥 얻어냈던가?
그런데도 권리만을 바라면서 책임과 의무에서는 눈을 돌리는 부류는 내가 지극히 혐오하는 자들이다.
"여경은 여자입니까, 경찰입니까?"
"당연히 경찰이죠. 혹시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계세요?"
"왜 자꾸 그런식으로 몰아가요? 그리고 여경도 경찰이면 경찰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나는 열이 올라서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몇년 전에 우리나라 대통령도 자기 직무에 충실하지 못해서 탄핵당해 감옥갔는데. 하물며 경찰이 폭행 가해자를 제압하지 못해서 옆에 있던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으면 그것도 직무유기 아닙니까? 제가 손댄거 가지고 가해자가 절 고소했으면 그건 누가 도와주는데요? 경찰이? 퍽이나!"
그래서 원래 일반인이 경찰 업무에 손대는거 아니다. 가끔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로 가해자 쪽에서 고소를 하게되면 경찰쪽에서는 도와줄 수가 없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치안을 유지하기에 경찰인겁니다. 애초에 체력이나 신체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경찰을 하면 안되죠"
"여자는 경찰을 할 수 없다는건가요? 지금 성차별 하세요?"
"거기서 또 왜 성차별이 나와요? 체력이나 신체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하면 안된다고 했지 여자가 하면 안된다고는 말 안했는데요"
"그게 그 말이잖아요!"
"어라? 아까는 충분히 여자도 남자랑 같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서. 그렇게 말하시는건 남녀간의 차이가 있다는걸 인정 하시는거 아니예요?"
그녀는 방금 전에 여성의 능력에 대해 긍정했다. 하지만 지금 내 말에 태클을 건다는건 아까 했던 말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논리가 약하다. 그리고 필시 그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
그리고 모순이 있는 논리는 통용되지 못한다.
치명타를 하나 먹여줬다고 자신하던 찰나, 논리에서 막힌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장님 혹시 한남충이세요?"
지금 날 도발할 생각이라면 칭찬해주마.
그 도발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