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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라쿤맨 비기닝] (87/507)



〈 87화 〉[라쿤맨 비기닝]

시온의 종족인 하논은 가족 관계가 지극히 담백한 종족이다. 애초에 감정이 희박해서 자기 자식도 사랑을 하는건지 모를 만큼 기계적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라도 학습을 하면 마음이란걸 깨닫기 마련인데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런게 없었다. 그나마 있는 몇 없는 돌연변이가 시온과 그녀의 사촌오빠인 유토피아다.

다만 시온은 전생이 인간이여서 그랬던것에 비하면 유토피아는 순수 하논이다. 단지 태고적부터 살아온 덕분에 다른 하논들보다 많은 것을 보고 겪었고......마음이란게 완성되려던 찰나 친구가 전쟁으로 죽어버렸다.


멀쩡하게 잘 키워도 모자랄판에 우주를 창조하는 힘을 가진 녀석의 마음이 망가지면 뭐가 되겠어. 별을 한큐에 멸망시키는 사이코패스 밖에 더 되겠냐.


덕분에 성격은 내 이름처럼 '최악'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법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없는 하논 중에서도 단 둘밖에 가족애가 없는 사이지만 그의 그런 성격 때문에 시온은 유토피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카메라 치우십시오"


시온은 우리들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맨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잠깐 같이 촬영해주시면 안될까요? 이거 다음주에 나가는 방송이라서 나중에 TV에서 보실 수 있는......."


"카메라 치우라고 했습니다"


진혁, 창혁. 누가 누군지는 이미 까먹었지만 아무튼 두사람은 시온을 달래려고 했지만 시온이 화내는건 내가 말리기 그렇다.

별 이유는 아니고 내가 화내는건 필시 폭력을 불러일으키니까 괜찮지만 시온이 화를 내는건 폭력은 폭력이여도 금전과 인맥에 의한 폭력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적인 영향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냥 처맞거나 죽는게 더 나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전 아까 당신들 PD한테 촬영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다짜고짜 와서 촬영? 미쳤습니까? 제 초상권 문제는 어떻게 하실겁니까?"

"저기, 잠깐 진정하시고......"

"다물고 진용석 PD인지 뭔지 오라고 하십시오. 어디 있습니까?"

시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인파 사이에 섞여서 보고 있던 진용석 PD를 발견했다.

대기줄에서 빠져나간 시온은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갔다. 겉으로는 여리여리해 보여도 아무도 말리지 못할만한 기세가 담겨 있다.


"하하, 아가씨. 기왕 이렇게 된거....."

"입 다무십시오"


"아니, 방송 나가면 서로 좋은거 아닙니까? 아가씨는 유명해질 수 있어요. 장담합니다! 방송 나가서 유명해지면 분명히 저한테 감사하게 될겁니다!"

"그래서 어쩌란겁니까?"


미디어란 사회의 한 단면이다. 방송에는  사회의 한 면을 담기에 충분하고 그 덕분에 우리들도 방송 프로그램을 싫어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송을 보는 것과 출연하는건 다르다.

시온이 성장폼이라서 출연하면 귀찮아지는건 둘째 치더라도 방송에 나가면 분명 수작부리는 새끼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특히나 권력을 가졌던, 재력을 가졌던 미인이라면 자기 옆에 두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놈들이면 더더욱.


그런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도 있고 옅은 대인기피증이 있는 시온 특성상 출연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미 촬영중입니다만? 나중에 편집을 해야하긴 하지만 여태껏 촬영한 필름이 아깝습니다. 저걸 그냥 버릴 수야 없지 않을까요?"


"핑계는 그만 대십시오"

"그러지 마시고 마음을 바꾸시는건 어떻습니까? 아! 출연료를 원하시면 제가 사비를 들여서라도 만족하실만큼 드리겠습니다!"


"........."


아, 한계를 넘어버렸다.


지금 시온의 표정은 한도를 넘어 빡침이 극에 달한 표정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안다.

시온은 당장에 핸드폰을 꺼내서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그런 제의를 내뱉지 못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시온의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아, 예. 사장님. 접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다. 다른건 아니고......여기에 트러블이  있어서 그거 때문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한차례 통화를 마치고 시온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뒤. 누군가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의 주인은 진용석 PD였다. 그는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황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 사장님! 진용석입니다! 무슨일이십......예? 해고라고? 왜 갑자기?! 잠시만요, 사장님!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제가 잘못했........"

전화기에 대고 호소하던 그는 이내 시온을 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당신이......?"

"이제 방송 걱정은 없을겁니다. 이야기를 아주 자알 했으니 동종 업계에서 벌어먹을 생각은 안하시는게 좋을겁니다"

"자, 잠깐만요!"

"자업자득입니다.  분명히 거절도 했고 경고도 했습니다. 그 선을 넘은건 당신입니다"


진용석 PD가 뒤로 돌아서는 시온의 손목을 잡으려던 찰나. 내가 대기줄에서 벗어나서 반대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 새끼가 누구 손목을 함부로 잡으려고 들어? 처맞고 싶냐?"

"당신은 누굽니까? 관계 없으면 빠지십쇼!"


"네가 수작부리던 사람 남편"


"어.....어?"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시온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매치가 되지 않는지 머리에서 합선이 일어난듯 보였다.


"PD님!"

"잠깐만요, 아저씨! 그거 놓고 이야기 하세요!"

연예인 두명이 나를 향해 달려와서 나와 그를 떼어놓았다. 상대가 일반인이였다면 무시했을텐데 포스 유저라서 일부러 그래주지 않으면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다.

나는 두사람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이 쓰레기 데리고 꺼져. 씨발, 놀러와서 이게 뭔 지랄이야. 지들이 연예인이면 사람 무시하고 맘대로 해도 되나보지? 응?"

"그래도 너무하신거 아니예요?"

"그럼 멀쩡하게 남편 있는 여자한테 남편 옆에서 수작부리려고 하는건 잘한거고?"


"나, 남편?"


두사람은 잠깐 당황한듯 싶었지만 이윽고 억울하다는  소리쳤다.

"그, 그래도 몰랐잖아요! 아저씨가 저분 남편인거 몰랐어요! 그리고 이상한 짓 하려는게 아니라 방송 소재 뽑으려고 그런거였다고요!"


"아, 그래? 그러면 일부러 거절까지 한 사람 무시하면서 촬영하러 드는건 니들이 잘한거고?"


"윽......"


나는 시온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대기줄에서도 벗어나 버렸고 여태까지 기다린걸 또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지들이 남들보다 높은줄 아나봐. 딴따라 등신 새끼들아. 방송 몇번 타니까 세상 다 가진듯 보이지?"

나는 기분이 더러워서 바닥에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씨발, 기분  좆같다.


*   * * *


나와 시온은 걸어서 다시 실내 시설로 돌아올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나 시온이나 서로 기분이 너무 상했다.

안에 들어와서도 뭔가 타거나 그럴 기분은 아니였다. 그렇지만 나간 뒤에도 딱히 할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제가 괜히  모습으로 와서 이런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차라리 평소 모습으로 왔다면......"

"됐어. 우리 마누라가 너무 예뻐서 날파리가 꼬이는건데. 그게 날파리의 잘못이니 꽃의 잘못은 아니잖아"


예쁜게 죄는 아니다. 단지 그 예쁜걸 탐하는 놈들이 죄를 저지르는거지.


시온이 따로 처리를 할테니 방송에 나가거나 할 걱정은 없다. 설령 누군가 핸드폰으로 촬영했어도 시온이 전자기기 교란을 걸어서 사진을 지우거나 동영상 파일을 깨지게 만들겠지.

다만 문제는 구설수에 올라간다는 것. 유명 연예인까지 관련됐다면 더더욱 문제다.


아, 몰라. 귀찮은건 다음에 걱정할래. 지금은 이 더러운 기분을 어떻게 풀까 하는 문제다.

"일단 나가자, 더 여기서 놀 기분은 아니니까"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아직 레스토랑 예약 시간은 안됐습니다"

"요 앞에서 아쿠아리움 하나 본게 있어. 거기 아직 운영 할거야"


데이트 코스를 좀 바꾸자. 놀이공원에서 아쿠아리움으로. 처음부터 아쿠아리움인 건물에 비하면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이런데 꾸며놓은걸 대충 해놓진 않았을거다. 최소한 우리가 아까 구경한 환상의 숲보단 낫겠지.

자유이용권이 좀 아깝긴 하지만 우리들은 놀이공원에서 나왔다. 다시금 북적이는 통로를 거닐어 아쿠아리움을 찾았다.

놀이공원보다는 사람이 적을테고, 그러면 자연히 트러블이 생길 가능성이 적다. 여기 손님은 주로 가족이나 어린아이들이 많을테니까 더욱.

다행히도 아직 운영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표를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 나름 잘 꾸민 모양인데?"

"안은 생각보다 깨끗합니다"

".......그건 사망플래그 아니야?"


우리들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아마존 코너의 수중 터널이였다. 유리로 만들어진 통로에 아마존에서 볼법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통로를 지나가면서 우리들은 보인는 물고기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저기 피라냐다. 저거 구워먹으면 생각보다 맛있어"


"누가 요식업 종사자라고 저런거 보고 그런 것부터 생각합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쳐먹을 생각 하면서 뭘"


"그렇긴 합니다"

구경거리가 있고 이야기를 하면서 걸으니 분위기는 한결 나아졌다. 아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도 점차 옅어져갔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눈에 띄고, 정어리 같이 작은 물고기들을 만져볼 수 있는 코너도 있었다.

"저건 됐어?"

"우리야 재미있을지 몰라도 정어리한테는 스트레스가 장난 아닐겁니다"


"하긴"

주인공이 열대어인 만화영화에서 나왔던 장면 보면 코즈믹 호러가 따로 없더만.

우리들은 정어리 코너를 지나서 이번에는 동물 코너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제일 먼저 시온이 달려가  수족관을 보면서 말했다.


"수달! 타-노시! 슷-고이!"


"거 엄청 좋아하네. 차라리 수달을 키우지 그랬냐"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이 나라는 수달이 천연기념물이라 키우는게 불법입니다"

"아, 맞다. 그랬지"


"이렇게 된 이상 동물원을 만들어서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냅둬! 빈대 태우려다 초가삼간 태우겠네!"


들어가는 돈은 그렇다 쳐도 동물들에게는 야생에서 사는게 좋을지 모르겠다. 아는 직장 동료가 그러는데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건 자유라고 했다.


설령 야생에서 배를 굶고 생명의 위기의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게 좋은거다.


수달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던 시온은 30분 가량을 그러고 나서야 겨우 발을 옮겼다.


그래서 도착한게 바로 앞의 벨루가 존이다.

"초음파 발산!"

"......?"

그러고 보니 돌고래는 초음파로 대화한다고 했던가? 시온이 이상한 포즈와 함께 손을 휘젓자, 저 멀리 있던 흰색 돌고래가 헤엄쳐서 이쪽으로 왔다.


시온이 손을 휘젓는 방향대로 헤엄치면서 이런저런 묘기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신기한지 사람들이 사진이나 촬영을 하려고 하자, 시온이 눈치채고 그만뒀다.

"왜? 더 놀지?"

"됐습니다. 괜히 눈에 띄면 안됐는데 너무 흥분 했었습니다"


나는 보기 좋았는데.

 옆으로 조금 더 가니까 이번에는 물범관이 있었다.  속을 헤엄치는 통통한 느낌의 얼룩무늬 동물이 이쪽을 향해 왔다.

"물댕댕이!"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물개가 아니라 물범이지. 귀가 없잖아"

"비슷하게 생겨서 전 구별 못합니다"


"솔직히 그러긴 하지"

호기심이 많은지 물범은 이쪽을 보면서 손짓하는 모양새대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헤엄쳤다.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 몇장 찍었다. 특히나 동물들을 좋아하는 시온이 엄청 좋아했다.

우리들은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우울했던 기분을 날려버리고 본격적으로 아쿠아리움을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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