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라쿤맨 비기닝]
바깥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아침에 비하면 바람도 불었으며 주변이 호수라서 그런지 훨씬 시원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실내보다 더 날씨가 좋았다.
우리가 타이밍 좋게 바깥으로 나온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는 몰라도 진작에 나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후회가 들었다.
모노레일에서 내린 우리들은 다음에 먼저 뭘 타는게 좋을까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바깥 시설이라서 그런지 실내에서는 만들 수 없었던 놀이기구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주로 자이로드롭이나 자이로스윙, 아틀란티스 등등 크기가 크고 스릴 넘치는 재미있는 어트렉션이 많았다.
"뭐 부터 탈까? 어느걸 타던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일단 여기 오면 가장 먼저 타야 하는건 저거 아닙니까?"
시온은 저 쪽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마치 과자로 만든 집 같은 시설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어릴 때 타본거라서 뭔지 나도 잘 안다. 그때는 정말 재미있게 탔는데.
"환타지 드림?!"
"싫습니까?"
"아니, 간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좋지. 그냥 보기에는 좋은거야"
우리들은 과자로 만든 집 같은 출입구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갔다.
환타지 드림은 신밧드의 모험이나 정글탐험 보트 같은 다크라이드 종류의 어트렉션이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앞선 두개는 모험이란 느낌이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환타지 드림은 동심이란 주제에 맞추어져 있다.
출입구 시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과자로 만든 집은 예사고 동화속에서 나올법한 동물이나 사람 얼굴이 달린 과자들, 그런 애니메트로닉스가 주를 차지하고 있다.
"울 마누라 어린애 같은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
"억?! 억?! 아퍼!? 아프다고?! 중력장 두르고 치지마! 그건 진짜 아파!"
내 역장은 시온 한정으로 제로의 방어력을 자랑한다. 그만큼 시온이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뢰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중력장을 두르고 때리면 아무리 나라도 아프다. 으윽, 배가.....
"사람은 생각보다 없네"
"딱 좋은 것 같습니다"
로테이션이 두어번쯤 돌아가자 우리 차례가 왔다. 안으로 들어가서 중간쯤 되는 자리에 탔다. 어차피 이건 속도가 빠르고 막 그런 시설이 아니라서 어디에 타던 상관 없다.
어트렉션이 광대의 입을 통과해 출발하자 본격적으로 환타지 드림의 세트에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통로에 원형으로 만든 전등으로 마치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을 주는 모습에 꽤나 볼만했다.
안에는 여러가지 애니메트로닉스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막대사탕에 얼굴이 달려있는 것은 예사고,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장난감 공장 같은 곳도 있었으며, 숲과 용도 있었다.
"과자로 만들어진 집이라.....옛날에 저런거 한번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마녀 한명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 아, 길현이네 친구? 됐어, 그렇게 좋은 사이도 아닌데 그런 부탁하기 싫어"
"저쪽에서는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까. 친척끼리는 좀 친하게 지내십시오"
"너도 네 사촌 오빠랑 친하게 지내면 그럴께"
"........."
"아, 아, 아?! 아프다고?!"
또 중력장 두른 시온의 손에 얻어 맞았다. 아니, 맞는말 했는데! 아, 처맞는 말이었던가.
속도가 빠른 시설이 아니라서 한바퀴 도는데 10분쯤 걸렸다. 다시 돌아와서 출구로 나가려던 찰나. 시온이 저 아래의 바닥에 깔린 장식용 가짜 금화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왜?"
"옛날에는 저게 금화 초콜릿인줄 알고 하나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하긴, 여기 어트렉션 생각하면 진짜 금화라기 보다는 금화 초콜릿일 가능성이 높았지. 너도 동심충만했던 시절이 있었구나"
"저는 언제나 동심충만합니다"
"침대에서는 안그러던데"
우리들은 출구에 위치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금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타야 할 때다.
뭘 탈까 고민을 해보았다. 아마 너무 늦을 때까지는 레스토랑 예약 한 것 때문에 그 전에 나가야 할거고. 그거 생각하면 전부 타기는 애매하고 잘해야 두개 내지 세개 쯤은 탈 수 있을걸로 보인다.
그렇다면 초이스를 잘해야지.
"일단 자이로드롭은 빼고"
"저건 왜 뺍니까?"
"......아까 중력장으로 때려놓고 그런 말 하기야? 중력으로 스릴을 느끼는건 지긋지긋하니까 딴거 타자. 하다못해 자이로스윙이 낫지"
"그럼 저건 어떻습니까?"
시온이 턱으로 저 끝 부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롤러코스터의 레일과 비슷한 것이 깔려있고 여타 놀이기구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차체에 탑승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틀란티스! 중학교 때 애들이랑 같이 저거 탔다가 진짜 눈물 짤뻔 했지! 아니, 초반부터 막 가속해서 최대속도 밟는 놀이기구가 어디에 있냐!
"저거 재미있지. 근데 좀 오래 걸릴것 같은데 괜찮겠어?"
"상관없습니다. 저런거 한번쯤은 타봐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저런게 낫긴 하지. 재미는 내가 보장할께"
우리들은 아틀란티스 대기줄의 맨 끝 부분을 찾아 걸었다. 어트렉션 앞 뿐만 아니라 다른 어트렉션 앞까지 늘어져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시설이라 그런지 늘어진 사람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저쪽이 좀 소란스럽지 않습니까?"
"뭐가? 저거?"
저어기, 한 구석에서 어트렉션도 아닌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 기다리는 줄이 아니라 둥글게 모여서 구경하는 눈치다.
보통 여기 퍼레이드는 실내에서 해서 바깥에서는 저렇게 구경할만한 것이 없을텐데 뭐지?
"아까 보니까 방송국 쪽일겁니다. 카메라 들고 가는거 봤습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난 못봤는데?"
"가방 안에 넣어둬서 안보였을겁니다"
나도 만능은 아닌지라 투시 능력이 있는건 아니라서 가려져 있는걸 기감을 쓰지 않고 파악하라고 하면 못한다. 그에 비해 시온은 전자기기라면 뭐든 파악 가능하다.
대충 보면 시온은 전자기기 파악에 빠르고, 나는 생물 파악에 빠르다. 시온은 주변에 CCTV하나 없다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나는 반대로 주변에 핸드폰이 몇개가 있는지도 파악 못한다. 생물 감지랑 전자기기 감지는 계통이 다르거든.
뭔 촬영을 하나 구경하다가 저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저기요!!"
".......?"
누구를 부르는건지는 이미 눈치챘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그 정도면 알아 들을만도 하지만 상대는 꽤나 끈질겼다.
"저기요! 잠시만요! 거기 외국인분!"
".......누구십니까?"
시온은 무시하다가 명백하게 자기를 찾는 말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슬쩍, 내 손이 주먹을 쥐었다. 차라리 수작부리는 남자는 쫒아내면 그만이지만 방송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끈질긴 법이다.
안경 쓴 중년 남자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숨을 고르고 겨우 진정했는지 본격적인 잡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 한국말 잘 하시는군요! 더 잘됐네요! 저는 '우리 같이 산다'의 PD를 맡고 있는 진용석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앞에서 촬영중인데 혹시 괜찮으시면......"
"됐습니다"
시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거절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금 치근덕거렸다.
"그러지 마시고 출연하시는게 어떻습니까? 아가씨 정도의 미인이면 한번 TV에 나오는걸로 엄청 유명해지실겁니다. 아, 혹시 어디 모델 소속이셔서 함부로 미디어에 출연하면 안되는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싫습니다"
"저희 프로그램이 막 유명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인지도가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유명해지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제 PD생활 걸고 장담하는데 아가씨는 분명 뜰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온은 싸늘하게 그를 보면서 말했다.
딱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녀의 싸늘한 시선은 알 수 있을 정도로 무뚝뚝하고 차가웠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조용한 분노가 숨어 있었다.
"분명히 거절한다고 했습니다. 이건 마지막 경고입니다"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진용석 PD라고 소개한 사람은 치근덕거리던걸 멈추고 겨우 원래 촬영하던 장소로 돌아갔다.
그나마 말로 떨어져서 다행이다. 간간히 저런 부류 중에는 말로 해도 안통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거 생각하면 생각보다 쉽게 떨쳐냈다.
"분위기 망쳤네. 그래도 쉽게 포기해줘서 다행이다"
"아까보단 그나마 낫습니다. 최소한 이상한 짓 하려고 다가온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까 그놈이나 방송 관련 종사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
우리들은 다시금 잡담이나 나누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앞으로 1시간은 족히 더 있어야 탈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온이랑 이야기 하고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진용석 PD는 포기한게 아니였다.
".....어?"
인파로 둘러쌓인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사람은 남자 두명이였는데 얼굴은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다.
내가 아무리 연예인에 관심 없어도 군대에서 본 사람들은 나름 기억하고 있었다. 저 두명은 2인조 남자 가수 그룹이였는데. 둘 다 포스 유저다.
포스 유저는 가이아 포스가 저절로 신체능력을 보조해주기 때문에 각성하는 순간 천천히 외모에서부터 몸매까지 바뀐다.
백리도 원판은 괜찮은 수준이였는데 포스 유저로 각성한 지금은 종종 여자 손님들에게 전화번호 교환하고 그럴 정도니까 원래 잘 생겼던 사람은 더욱 그렇겠지.
일반인보다 뛰어난 신체 조건에, 얼굴도 잘생기고 그렇다면 인기 있는건 당연하다. 연습만 더 하면 가창력도 커버 가능하니까 남녀 가리지 않고 인기가 꽤 있던 연예인으로 기억한다.
........다른건 아니고 같은 생활관 선임 한명이 아침마다 저 애들 노래 틀고 그랬어.
응? 잠깐만, 그러고 보니 쟤네 그룹 이름이......
"'우리 함께 산다'였나? 그 프로그램은 같은 그룹의 연예인들을 한 숙소에 같이 살게 하면서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사람이 많더라"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방송 찍을거 생각하면 소문내지 않고 몰래 오는 편이 낫기에 난데없이 온건 나름 이해가 가지만 우리들은 타이밍이 안좋았다.
다른건 둘째 치더라도 카메라가 이쪽을 향해 있다는게 더더욱.
"와! 저거 재미있겠다! 아틀란티스! 창혁이 너 저거 타봤어?"
"나 무서운건 못탄단 말이야! 딴거 타자, 딴거!"
"놀이공원 왔으면 저런거 한번쯤은 타봐야지, 저거 재미있어! 같이 타자!"
연예인 중에서도 외모로는 손꼽힐법한 남성 2인조 그룹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이 우릴 발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온을 보았다.
"어, 우와아......."
"야 뭘 보고 그.....어, 어어?"
시온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그들을 무시했다. 나름 잘 처한 대처지만 그들의 관심이 이쪽에게 향해 있다는게 문제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온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찍는 카메라는 본격적으로 우리들을 향해 찍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 헬로우? 외국분이신가요?"
"......."
시온은 일부러 무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무시하는 시온을 앞에 두고 어떻게든 관심을 끌기 위해 말을 걸었다. 일부러 무시하는걸 보면 이야기 할 생각이 없다는걸 모르는건지, 아니면 반대로 저쪽이 그걸 무시하는건지 예의가 없었다.
슬쩍,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아, 저는 이진혁이예요. 얘는 윤창혁이고요. 둘 다 혁자 돌림이라 외우기 쉽죠?"
"........."
"이번에 저희가 놀러와서 촬영 하는데......아, 저희가 '유토피아'란 이름의 2인조 그룹이거든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무시로 일관하며 핸드폰만 보던 시온의 시선이 들어올려졌다.
그들은 시온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게 결코 좋은 방향이라고 할건 못된다.
왜 그룹 이름을 유토피아라고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에게는 불운이였다. 다른 이름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걸까.
"지금 유토피아라고 했습니까?"
유토피아.
그건 시온이 애증하는 그녀의 사촌 오빠의 이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