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라쿤맨 비기닝]
한끼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잠깐 소화도 시킬겸 걸었다. 그리고 적당한 디저트를 찾아서 주변을 둘러보는건 덤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앞에서 터키 아이스크림 파는걸 봤습니다"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터키어가 '내 아이스크림 가지고 장난치지마'인데 듣고 싶은거야?"
이런 놀이공원이나 행사장 같은 곳에 가면 종종 있는 외국인 아저씨가 파는 아이스크림. 그 왜 긴 철봉 가지고 퍼주는 그거 있잖아.
줄 때 막 농락하다가 마지막에서 주는 그런 터키 아이스크림 말이야, 나름 재미있기는 한데 아이스크림 가격이 3000원이면 그 중에서 1000원은 그 퍼포먼스 인건비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거 본고장 진짜 맛에 비하면 영 그래"
"그렇습니까?"
"그게 원래 돈두르마라고 하는건데. 본고장 맛은 막 쫀득하고 맛이 진해서 훨씬 더 맛있거든. 비교할게 못되긴 하지"
터키 아이스크림의 원래 이름은 돈두르마라고 한다. 아니, 애초에 이걸 아이스크림으로 분류할 수 있는건가. 얼려먹는다고 학교 앞에서 파는 쥬시쿨이랑 같은건 아니잖아.
내가 예전에 먹어본 본고장 터키의 돈두르마는 진짜 맛있고 떡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쫀득한 맛이 있었다. 우유도 보통 우유가 아니라 다른 동물의 젖을 넣었는지 맛도 진하고.
.......내가 이게 진짜 아이스크림인지 의심스러운건. 마침 터키에 들렀을 때 한창 축제중이여서 봤더니 성인 남자만한 돈두르마 덩어리 가지고 크레인에 달아서 소형차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에이, 구라치지 마십시오. 어떻게 아이스크림으로 차를 들어올립니까?"
"아냐, 진짜야. 그거 점성이 엄청나서 축제 때마다 그렇게 한다고 그러더라고. 나도 내가 정신 나갔는지 의심해봤다니까?"
"그럼 다음에 한번 가보도록 합시다. 직접 가서 보면 되지 않습니까?"
"나중에 해외여행 계획 잡자고"
그러고 보니 터키는 마스터 유저 보유국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터키는 한국과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는 곳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도 사이가 괜찮아서 마스터 유저 파견을 종종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터키에서 파견 온건 몇번 없기는 해도 파견 보낸건 꽤 많았던걸로 기억하는데.
국가관계는 이득과 사상에 민감하지만 터키는 스펙타클한 역사 때문에 주변국에서 외교 왕따다.
세계사 공부 좀 해봤다면 오스만 제국 정도는 들어봤을테고. 그러면 오스만 제국이 뭔짓 했는지 들으면 주변국에서 좋은 소리 들을리 없다는걸 알거다.
"저도 세계사는 관심 많습니다"
"하기사, 역사 호기심은 하논 종족 종특이지......내가 본 하논이 단 둘 밖에 없는건 둘째 치더라도"
아무튼 터키라는 나라는 그 주변에서 그렇게 친한 나라가 많지 않다. 동유럽, 서유럽 가리지 않고 꽤 사이가 나쁘다. 오스만 제국 시절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 문제도 종종 있고.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평범한 지구의 역사였다면 그렇게 돌아갔을 것이다.
마스터 유저의 존재는 그런 모든 관계를 청산시키고도 남을만큼의 이득이 있었다.
애초에 말이야, 지금 아시아만큼 미친 마스터 유저 비율은 없을거다.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일단 터키도 아시아 범위기는 하지만 유럽쪽에 가까우니 빼더라도 자그마치 4명에 달하는 마스터유저가 한곳에 몰려있다. 더군다나 러시아 빼고 나머지 3명은 지도에서 원 하나 적당히 그리면 들어갈 수준이고.
영국에도 마스터 유저가 있으니 그쪽에 붙는 나라도 있지만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마스터 유저가 없다. 그래서 파견을 이유로 여러가지 외교적 우위를 점해서 터키가 못사는 나라라는 인식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고 보면 브렉시트도 그렇습니다. 보통 역사 같으면 영국이 탈퇴 했을텐데 마스터 유저 때문에 EU에서 탈퇴하지 말라고 빌고 있는 수준입니다"
"아, 그랬어? 그건 처음 들었네"
영국도 마스터 유저 보유국이다. 저번에 썬더볼트 제이콥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영국 신사라고 했는데.....킹스맨인가? 아니면 진짜 왕족? 거긴 일단 여왕님이 아직도 있는 곳이니까.
덕분에 영국은 살판 났구만. 안그래도 경제대국인데 거기서 또 마스터 유저 덕분에 꿀 빨고 앉았고. 제 2의 해 지지 않는 제국이라도 만드는거 아닌가 몰라.
영국 니들은 독일한테 세번 절해라. 히틀러 아니였으면 죽창 맞았을 식민지 짱깨놈들이.
"아무튼 터키 아이스크림 먹는 것보다 그냥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나을 것 같은데. 맛은 둘째쳐도 양을 생각하면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훨씬 많고"
"그럼 저기서 삽니까?"
시온은 한 구석에 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매장을 보고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온이 매장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제가 사오겠습니다"
"네가? 왜? 내가 사도 되는데"
"보시면 압니다"
시온은 카운터에서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시온의 외모에 팔린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시온의 주문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바닐라 맛이랑 반반 섞인걸로 두개 주십시오"
"아, 네.....네! 코, 콘으로 드릴까요?"
"네, 콘으로 주십시오"
종업원은 허둥지둥 거리다가 아이스크림 콘을 들고 기계 앞으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부드러운 흰색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쭉 내려오면서 콘에 안착하고 그대로 빙글빙글 돌려 재주 좋게 모양을 만들어냈다.
이윽고 바닐라 뿐만 아니라 초코, 바닐라 반반의 것까지 만들어서 시온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냈다.
"여,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받으면서 그녀와 손이 닿자, 종업원의 얼굴이 천국을 본것 마냥 헤벌레 웃음을 지었다.
뭐, 아까 말했지만 저런 정도의 신체접촉으로 화를 내거나 하지 않는다. 남이랑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할 정도로 질투하면 그게 집착이지, 일상생활도 못하겠다.
왜 시온이 주문을 해서 받았나 생각했는데. 그 해답은 아이스크림에 있었다.
"양이 좀 많네?"
"제가 받길 잘했지 않습니까?"
어차피 만드는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아이스크림 자체는 기계가 다룰지 몰라도 얼마나 줄지는 사람 마음대로다. 물론 가게 내부의 정량의 기준이 있고 사람이 언제나 정확한건 아니니까 사람마다 오차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차이 나지 않을 때의 이야기.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크기가 손가락 두마디 정도로 남들과 차이가 난다면 명백하게 많이 준거다.
"미녀는 뒤로 넘어져도 돈을 줍는다더니"
"저도 이런건 이용해먹을 줄 압니다"
"그래, 너 예쁘다"
시온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잠깐 걸었다. 어트렉션을 타지 않아도 여러가지 구경거리가 넘쳐난다. 특히나 회전목마는 구경하고 있어도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내가 부모님이 제대로 있었도 이렇게 될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저걸 탔던 적이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추억이기도 하고,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여러가지 감정이 든다.
"환상의 숲? 여긴 뭐지?"
주변을 구경하다가 뭔가 꾸며놓은 곳이 있길래 한번 들여다 보았다. 보니까 동물들을 모아놓은 작은 동물원 비슷한 곳으로 보이는데 자유 이용권으로 노는 곳이 아니라 따로 요금을 내고 표를 구입한 뒤에 들어가는 곳이다.
저쪽에 있는 박물관 비슷한 느낌인가 싶었는데, 문득 시온은 동물을 좋아하는게 생각났다.
"들어가볼래?"
"저는 좋습니다"
아이스크림은 금방 다 먹어치우고 표를 산 뒤에 들어가 보았다. 생각외로 모아둔 동물들의 종류는 많았다. 아니, 동물 뿐만이 아니라 곤충 같은 종류도 모아 두었다.
"곤충은 별로입니다"
"하다못해 파충류 종류를 좋아하면 몰라도 곤충은 별로지?"
"전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 같이 멋져보이는 곤충도 별로 안좋아합니다"
동물을 좋아하는 것과는 반대로 시온은 곤충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만약 바퀴벌레가 나오면 시온은 중력자포라도 쏴서 말살시킬거다.
곤충관을 넘어서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동물들이 보인다.
실내에 있는 시설이라 그런지 큰 동물들은 보이지 않고 작은 소동물들, 주로 토끼나 프레리독 같은 애들이 눈에 띈다. 아, 고슴도치도.
"고슴도치는 귀엽습니다"
"냄새가 나는건 좀 그렇지만 말이지. 왜, 키우고 싶어?"
"하지만 소닉은......!!!"
"그만둬! 고인 능욕은 그만하란 말이야!"
"농담입니다. 한번 만져보고는 싶지만 그렇게 절박한건 아닙니다"
고슴도치 하니까 생각나는게 있다. 아니, 소닉 말고.
내 지인 중에서 고슴도치 비슷한걸 키우는 사람이 있는데.....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고슴도치는 아니고. 그 비슷한 생물이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등의 가시가 내가 미국에서 받은 명예 훈장과 같은 아다만티움 재질이라는 것 정도일까.
덕분에 어지간한 적성종은 상대도 안될만큼 짱쌘 동물이다. 음속으로 달리진 못하지만.
"류한 녀석이 고슴도치 키우던데 나중에 한번 말해볼까"
"아, 그 사람 말입니까?"
"상사가 달라도 서로 같은 직장 동료니까 나름 말은 통해"
"라인 좀 잘 타십시오"
"그쪽 라인 타서 내가 널 만난거야"
"라인 잘 타셨습니다"
"태세전환이 빠르구나"
동물들을 넘어서 파충류와 양서류 관도 있었고, 그 다음에는 조류관이였다. 주로 작은 앵무새 같은 종류가 많아서 새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지저귄다.
한바퀴 도는데 얼마 걸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입장료 천 얼마에 비하면 구경은 잘 했다. 무엇보다 시온이 재미있어 했으니까 다행이다.
점심 먹고 두어시간 쯤 지난 뒤인가. 이제 완전히 해가 쬘 때는 벗어난 시간이다. 지금쯤 바깥으로 나가는 편이 좋겠다.
"아, 야외 시설로 가실겁니까?"
"여기서 길 찾아서 슬슬 걸어가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괜찮아?"
"그것보다 더 좋은게 있지 않습니까?"
시온은 슬쩍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올려보았다.
우리들 위에는 뭔가가 지나갈 수 있을법한 레일 하나가 있었다. 실내 시설을 한바퀴 돌 수 있는 레일뿐만이 아니라 바깥의 야외 시설까지도 이어지는 레일이다.
"아, 모노레일! 옛날에 저거 타봤는데!"
"좀 시간이 걸리긴 해도 걷는 것보다는 재미있을겁니다"
"그럼 돌아올 때는 걸어오지 뭐"
우리들은 모노레일 탑승장을 찾아 위로 올라갔다. 타고 싶은 사람은 많고 모노레일 속도가 빠른건 아니라서 로테이션은 좀 늦지만 그래도 많이 기다리지는 않고 탈 수 있었다.
직접 타고 나니 모노레일은 생각보다 속도로 빨랐다. 저 아래에 사람들이 지나가는게 보이고 옆에는 아래에서 보지 못했던 아기자기한 세트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어? 퍼레이드 하는 모양인데? 아깝다. 저거 보고 갈껄 그랬나"
"어차피 저녁에도 할겁니다. 그때 보면 됩니다"
"그런가?"
날씨가 여름이라서 그런지 퍼레이드의 주제는 삼바였다. 화려하게 공작처럼 뒤에 장식을 단 무용수나 퍼레이드 카가 신나는 노래와 함께 실내 시설을 한바퀴 돌며 손님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있어서 그런지 삼바 춤 추는 댄서들의 복장은 그렇게 엄하진 않았다. 막 본고장 삼바처럼 C스트링 같은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리는 속옷 입고 그러진 않는다.
야, 요즘 애들이 아무리 조숙해도 그렇지 그런걸 눈앞에서 보면 못써. 야동 보고 자위는 하더라도 실전은 성인되서 하려무나.
꼰대같은 마인드가 아니라 성인 전에 성교를 하면 몸에 부담이 간다. 주로 여자 쪽이. 남자야 찔러넣으면 되지만 여자는 첫 경험에서 고통을 느낀다.
어릴 때에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성폭행 범죄 대상인 아이들이 종종 죽거나 혹은 평생 가지고 가야할 상처가 생긴다.
시온도 외견은 어린 여자아이지만 일반적인 인간과 달라서 튼튼하니까 괜찮은거고.
그러니 착한 어린이 여러분은 다 큰 후에 연인이랑 순애 섹스를 하세요.
앗, 이야기가 샛다. 뭐 이야기 하다가 이런 등신같은 말을 하게 된거지.
"저녁에는 어두워서 조명이 훨씬 화려해 보일테니까 그때는 더 좋을겁니다"
"나중에 다시 저녁 쯤에 돌아와서 봐야겠다"
실내 시설을 한바퀴 돈 모노레일은 그제서야 루트가 바뀌어서 바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빨라도 이 넓은 실내를 한바퀴 도는데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윽고 실내와 야외를 나누는 게이트를 넘어서자 커다란 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가 햇빛을 반사시키면서 반겨준다. 그리고 저 멀리 동화속에서 나올법한 성이 눈에 띄었다.
만약 밤에 불꽃놀이 펑펑 터지면 딱 어디서 많이 본듯한 로고 비슷하게 되겠다.
그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돼! 미ㅋ.....윽?! 당신 누구야!
"아, 괜찮습니다. 제가 그쪽 주식도 있어서 그 정도로 고소먹진 않을겁니다"
"아니, 거기서 이런 반전이?!"
모노레일이 호수를 건너고 우리들은 본격적으로 야외 시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