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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라쿤맨 비기닝] (84/507)



〈 84화 〉[라쿤맨 비기닝]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털어버리기로 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고 그 기분 그대로 가지고 갔다가는 모처럼의 데이트가 엉망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까 그거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으려나 걱정되네"


"일단 동영상이나 사진은 찍지 못하게 처리해서 증거는 없을겁니다. 하지만 인터넷에 썰 올라오는 식으로 퍼지는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증거 자체를 지우는건 가능해도 사람의 입 자체를 막는건 불가능하다. 물론 시온이 글을 올리자마자 지울 수는 있겠지만 그건 너무 노골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누군가 알아챌 확률이 높다.

하지만 증거도 없고 이야기만 나돌 뿐이라면 가라앉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거다.


더군다나 대성 그룹 회장 아들이면 댓글알바 부대 하나쯤 있을테니 회장 아들이 유부녀한테 찝쩍댔다는 소문 퍼져서 이미지 떨어트리기 싫다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본인도 남의 마누라인거 알면 자제하겠지. 그러지 않는 놈들도 종종 있지만 그러면 내가 참을 필요 없는거고"


"일 내면 안됩니다"

"나도 적당히 참는데 그건 못참지. 저놈이 널 계속 탐내면서 선을 넘으면 그 기업째로 갈아버릴거야"


"대성 주식 전부 팔아두겠습니다"


"아직은 안한다고, 아직은"

솔직히 말하자, 어떤 등신 새끼가 자기 마누라가 남한테 찝쩍거리는데 그게 기분 좋을 남자가 있나? 물론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아서 그런 취향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지극히 정상적이여서 그렇지 않다.

십계명에도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 것이 아닌걸 욕심내지 말라는 말인데 그 비슷한 말은 언제고 있었다.


권력이나 돈으로 약탈? 얼씨구? 문명째로 갈려버리고 싶은 모양이지?


여기가 현대 문명 사회인게 서로인게 다행이였다. 만약 중세 시대였으면 강제로 뺏어가느니 하면서 시온을 덮쳤을테고, 그럼 나는 상대를 아주 천천히 갈아줬을테니까.

"아, 진짜. 지금 생각해도 개빡치네. 잠깐만 기다려봐. 그 새끼 기척 마크 했으니 여기서 원거리에서 조진다"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이면 나중에 용의자로 의심받습니다. 집 안에서야 제가 도청장치나 감시용 드론을 해킹해서 어떻게든 해결한다 쳐도 재벌 2세 살해 혐의가 씌워지면 상당히 골아파집니다"

"지금 누굴 걱정하는거야. 나야? 저놈이야?"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연히 당신 걱정입니다. 지금 말고 기억 해뒀다가 나중에 심장 마비 같은 자연스러운걸로 처리하십시오"

"알았어"


역시 울 마누라야. 나 닮아서 가차 없지.

내가 만나서 그 기척을 기억해뒀다면 최소한   어디를 가던 내 능력의 영향 범위에도 도망갈 수 없다.


피하고 싶거든 달로 도망쳐 보라지. 달까지는 애매하게 안닿는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죽이는 방법으로 간단하게 심장 마비가 있다. 별건 아니고 그냥 원거리에서 능력 써서 심장 근육을 살짝 경직시켜주면 끝나는 일이다. 포스 유저도 숙련되면 가능하겠지만.......그 시간 쯤에 나는 집에 있을테니 용의선상에 오를 필요가 없다.

나중에 이번 일 인터넷에서 가라앉거든 보자 그 새끼.......재벌이면 다인줄 아는건가.

기분 나빴던 일을 잊기 위해서 우리들은 빠르게 다른 어트렉션을 찾기로 했다. 일단 실내에서 탈 수 있는 기구 중에서 재미 있을만한거.....


"파라오의 분노 어떻습니까?"

"아, 저거. 옛날에 막 생겼을  워낙 사람 많아서 못탔던 건데"


"그럼 한번 타봅시다"


제일 위에,  뭐시냐 천장에 달라 붙어서 떠다니는 열기구 같은 어트렉션 타는 층과 같은 맨 꼭대기 층에서 마치 이집트 신전과 같은 형태의 입구가 우리를 반겨준다. 저기 옆에는 지프차 같은 기구가 레일을 따라 덜커덩 움직이며 동굴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첫번째로 탔던 신밧드의 모험 같이 이런 종류의 놀이기구를 다크라이드라고 하는데. 이런 어트렉션의 볼거리는 만들어 놓은 세트와 구조, 그리고 애니메트로닉스들이다.

다른건 한번씩 타본적 있어도 이건 나도  기억이 없어서 훨씬 즐길  있을  같다.

"그거 아십니까? 이 나라에서 가장 비싼 놀이기구가 바로 이겁니다"

"어, 진짜?"

"아마 560억인가 들었을겁니다"

"재미는 있어야 할텐데"

근데  많이 든 것 치고는 상당히 불안하단 말이야.


우리들은 이집트 신전 같은 통로를 지나서 기구 탑승대에 올랐다. 네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두줄. 총 여덞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우리가  앞에 앉았고 그런 우리 옆에 다른 남녀 커플 하나가 앉았다.


남자가 시온 옆에 들어와 앉으려던걸 여자 쪽이 잡고 끄집어내서 막는걸 보고 여자가 꽤 야무지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질투가  있거나.

[자, 그러면 파라오의 분노, 출발 하겠습니다]

직원의 목소리에 따라 기구가 출발했다. 그대로 천천히 앞으로 나가면서 레일을 따라 어느 동굴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나름 이집트 분위기를 내겠다고 주변에 그럴싸한 벽화나 장식이 가득했는데 처음 보는 나로서는 꽤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야외로 나온다.  옆에는 천장에 붙어 이동하는 열기구 어트렉션이 눈에 띈다.


"저것도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너무 대기줄이 길더라"

"이번에 타볼겁니까?"


"음......괜찮아 보이긴 한테 저거 타면 오후가 되서 다른거 타기 힘들어질 것 같아"

이내 다시금 동굴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홀로그램 같은 파라오 얼굴이 우리들에게 이곳은 파라오의 무덤이니 더욱 발을 들이면 저주를 받으리란 경고를 해주었다.

에이, 저주같은거야 내성 있으니까 괜찮아.

이윽고 안쪽은 훨씬 본격적이였다. 이런저런 통로에 더불어서 뱀이나 거대한 거미 같은 소름끼치는 세트와 애니메트로닉스가 있었다.


옆에 있던 시온이 슬쩍 위를 보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래?"


"아, 제가 기억하기로 여기서 막 거미줄 같이 위에서 어께에  같은거 내려와서 놀래키고 그랬습니다"

"그런게 있었어? 아마 개장한지 좀 되서 없어진 모양이네"

"안전 문제도 있었을겁니다"

줄이나 끈 같은게 내려와 사람의 어께에 떨어지면 놀라긴 하겠지만 다시 회수하려고 감길  어디에 걸리면 큰일난다. 아마 그런 것 때문에 없어진게 아닐까.

놀이기구도 시설인 만큼 노후되면 없어지는 것도 생긴다. 시온이 놀이공원 온것도 오랜 이야기니 분명 그녀의 기억에는 있던게 없어진 것도 있을터다.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파라오 흉상 같은게 반겨준다. 그 왜 이집트 관에 달려있는 황금색에 근엄 비스무리한 전형적인 얼굴 있잖아. 턱에 길쭉한 구렛나루 같은거 기르고.

자기 무덤에 들어왔으니 저주를 내리겠다느니 어쩌고 그러고 타고 있던 기구가 한층 더 가속했다. 덜컹덜컹거리면서 빠르게 무너지는 듯한 통로를 빠져나오는 긴박한 느낌을 연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자 우리들은 다시 원래 탑승했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음, 나쁘진 않네. 처음 타는거라 신기해서 재미있었어"


"시설 노후화가 이렇게 심각했다니......하긴 수지타산 생각하면 쓸데없는 기구는 그대로 폐기하는게 나을것 같기도 합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할 놀이동산에 제일 꿈과 희망이 없는게 아이러니하네"


슬슬 시간이 점심 때 쯤 되었다. 사람들이 점차 몰려 들어오고 아침보다 훨씬 많아졌다.

 좀 돌릴겸 밥이라도 먹으려고 근처에 괜찮은 집이 있는 살펴 보았지만 대부분 그럭저럭이거나 별로인 집이였다. 메뉴도 고를게 별로 없고.

"아까 올라오다 보니까 여기 아래층에 뷔페집 하나 있던데 거기로 갈까? 멀리 나가서 먹고 들어오는 것보다 훨씬 나을  같은데"


"어차피 저녁은 레스토랑 예약 했으니까 점심까지는 대충 먹어도 됩니다"

"레스토랑?"

"여기 타워에 괜찮은 곳이 있습니다. 아마 나름 만족하실겁니다"


나는 요식업 종사자라서 먹는거에는 까다롭다. 시온 관련된거 빼고 내가 용서 못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먹을걸로 장난치는 놈들이니 말 다했지.

시온도 그걸 알고 있으니 저렇게 장담하는거 보면 어디 호텔 레스토랑이거나 미슐랭 별 받은 그런 수준일지도 모른다. 내가 주로 하는 요리는 가정식이긴 해도......가끔 그런데서 먹으면 맛있지.


양만 좀 많이 나오면 좋을텐데 말이야.


우리들은 점심은 대충 때우기 위해 지하에 위치한 식당 중에서 크게 특이할거 없는 뷔페 하나에 들어갔다. 여기서는 놀이공원 내부와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어서 몰래 들어가는 사람을 대비해서 안쪽 부근에 카운터가 있었다.

"어서오세.....흡?!"

"성인 두명이요"


"아,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두분 자리 안내 해드릴께요"


시온을 보고 경직되었던 종업원이 굳었다가 내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려서 창가 자리로 안내 받았다. 점심때라도 주변에 다른 가게도 있으니까 아직 사람이 별로 없는데.....


"2명이요"


"아, 예!"


"여기 4명이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의 뒤를 이어서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심때라서 우리랑 비슷하게 점심 먹으러  사람이 아닌가 싶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듯 보인다.

일행의 상당수는 남자고 말이야.


"뷔페가 질은 봐줄만은  정도네. 아, 튀김 종류는 먹지마. 냄새가 별로야"


"알겠습니다"


시푸드 뷔페나 한식 뷔페같이 요리 재료나 종류의 뷔페는 아니고 어디에서나 볼법한  특징 없는 뷔페였다. 메뉴도 많지는 않았지만 튀김 종류만 빼면 나름 먹을만한 수준이였다.

시온은 가방이랑 기념품만 놓고 후딱 접시를 들고 먼저 먹을걸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자리에 앉기 전에 마실 것부터 챙겨주려고 음료수를 가져왔다.


원래 뷔페에서 많이 먹으려면 탄산 종류는 건너 뛰어야 하지만 시온은 그런거 신경 안쓴다. 무조건 몸에 안좋은거 좋아하는게 우리 마누라 스타일이다. 다이어트 콜라도 아니고 그냥 생 콜라에 얼음 동동 띄워서 가져가자. 아,  오렌지 주스로 합의 봤다.


우리 자리에 음료수를 먼저 두고 나도 슬슬 접시 들고 먹을걸 고르려던 찰나, 꽤나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뷔페 같은 가게에서 사람이 많으면 한줄로 줄 서서 옆으로 이동하면서 서로 먹고 싶은걸 고르는게 평범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한명도 빠지지 않고 죄다 우리 시온 양 사이드가 있다는거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곳을 둘러보는 사람 한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다. 디저트 코너도 아니고 국수나 만두 같은 코너에 있는 사람 한명도 없이 시온이 둘러보는 곳 양 옆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적이란 생각이 물씬 든다.

"아, 감사합니다"

"아뇨, 뭘요!"


저거구만.

옆에서 먹을걸 고르고 접시에 담은 뒤에 사용한 집게를 시온에게 넘긴다. 그리고 시온이 그걸  사용하면 마찬가지로 옆에 사람에게 넘겨준다.

그러면서 약간의 접촉이 생기고 그걸 노리는 행동양상이 보여 그녀의  사이드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다.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화가 나는 행동은 아니다. 아무리 아까 짜증나는 일이 있었어도 저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아무리 나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 마누라 손에 남의 손이 닿았다고 다짜고짜 화를 내고 분노하는 그런  막힌 성격은 아니다. 단지 선을 넘는 사람을 싫어할 뿐이지.

저건 우리 마누라가 엄청 예뻐서 손이라도 닿아보고 싶다고 하는거니까 나름 귀엽게 봐줄 수 있다. 사귀는 사람 있냐고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자리로 돌아온 시온은 먼저 내가 가져온 음료수부터 마시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내가 말한대로 튀김류는 빼고 가져왔다.


나는 뭐 주로 초밥 종류. 시푸드 뷔페도 아닌데 나름 챙겨놓은 종류가 많았다. 보통 이런 것은 초밥보다 롤의 종류를 늘여서 보여주기 식으로 하기 마련은데 초밥 종류도 꽤 많았다.


가성비는 그럭저럭이네.


"이거 먹고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글쎄, 이거 다 먹었을 때 쯤이면 슬슬 바깥으로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해가 한창 비칠 때는  지나서 괜찮을겁니다"

"그럼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온이 벌써 한그릇을 다 비웠다. 비워낸 접시를 옆으로 밀어두자 종업원이 와서 바로 치워주었다.

"치워드릴께요"

"감사합니다"

시온은 바로 두번째 접시를 채우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자  뒤에서 사람들이 우수수 몰려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두명 정도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는데 대여섯명이 동시에 저러면 너무 노골적이지.

시온은 알고 있지만 무시하는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먹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해 보였다.


이윽고 시온은 나와 같이 초밥과 롤 위주로 가져왔다. 이번에는 접시 한가득, 나나 시온이나 대식가라서 저 수준으로 두어번은 더 다녀와야 배가 좀 찰거다.

"디저트는 어떻게 하실겁니까?"


"아니,  먹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디저트야?"


"여기서 먹기는 좀 그렇습니다"


"하긴, 질이 좀 그렇긴 하지"

그냥 먹는데는 상관 없지만 정말로 입가심 생각하면 여기서 먹는건  그렇다. 대부분 기성품을 그대로 내놓는거기도 하고. 맛도 별로고.

나가서 적당한 디저트, 아이스크림 같은거나 사먹는게 낫다. 하물며 길에서 파는 노점상 아이스크림도 공장에서 대충 찍어 나오는 것보단 나을테니까.


내가 한접시를 겨우 끝낼 무렵에 시온이 한그릇을 벌써 다 비웠다. 아니, 나한테 경쟁심리 있어?


"치워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온이 다 먹은 접시를 옆으로 치우자 마자 또 종업원이 와서 바로 치워준다.


.....한번은 우연이라 치부해도 두번쯤 되면 합리적 의심이 드는 법이다.


 앞에서 남자 종업원 둘이 이야기 하는거에 무슨 소릴하나 살짝 귀를 기울여보았다.

"야, 이번에는 내가 갈께"


합리적 의심이고 뭐고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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