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라쿤맨 비기닝]
일행 없이 홀로 난간에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시온의 모습은 너무나도 시선을 끌었다. 본인은 평범하게 최악을 기다리는 것 뿐이지만 미녀는 어딜 가던 시선을 끄는게 당연하다.
시온도 그걸 알기에 일부러 다른 곳에 시선을 주지 않고 무관심을 표했지만 그걸 넘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놀이공원에서가 아니라 그 전부터 다가오던 사람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
시온이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낸 남자를 보았다. 일부러 무관심을 표해서 '나 지금 너희들 무시하고 있다'라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고 있는데 그걸 도리어 무시하고 다가온 사람이라면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을게 분명하다.
그녀에게 말을 건 남자는 상당히 괜찮은 외모의 젊은 남성이였다.
나이는 기껏해야 20대 초중반, 아직 젊은 사람이라고 볼만한 나이에 인상도 좋고 살펴보면 옷도 명품으로 입어서 재력을 알만해 보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어디 가서 시선을 끌 훈남이지만 시온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차라리 최악처럼 개성 있는 외모가 좋다.
"아, 그러고보니 아침에 그 사고냈던 차주아닙니까?"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니, 아침에 그렇게 성대하게 박아서 사고를 냈으면 기억하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남자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한건지 환한 표정으로 반겼다.
동상이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법이다.
"전 이상수라고 합니다. 그쪽은요?"
"저는 시온이라고 합니다"
"시온이라, 한국인은 아니줄 알았는데 예쁜 이름이네요"
시온은 이상수의 말을 자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수작 부려오는 사람의 경우에는 논리로 거절하지 않으면 질기게 달라붙는 법이다.
"그런데 평일에 남자 혼자 놀이공원에 놀러오신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볼일입니까? 설마 아침의 사고 때문에 합의금이라도 받으려고 온겁니까?"
"아뇨! 그럴리가요. 겨우 차 한대 좀 부서진거 가지고 그러지 않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대성 그룹 회장이시거든요"
"........"
시온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만 워낙 무표정인 그녀라서 최악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법한 표정 변화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대성 그룹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그쪽에 나름 인맥이 있다. 가정사는 잘 모르지만 현 회장의 자녀 이야기는 들은적 있었다.
아마 아들 둘에 딸 하나. 그 중에서 막내 아들쪽이 눈앞의 청년과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아까 그 람보르기니 타고 다니던 사람은 남자친구인가 봐요?"
"아닙니다, 그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서 말하기에는 쑥쓰러운 말이지만 저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
난데없는 사랑고백은 시온도 징하게 들어봤다. 그나마 디폴트 폼일때는 낫더니 성장폼일 때는 시도때도 없이 꼬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고백 대사는 첫눈에 반했다는 대사다.
아니, 그건 어이가 없다못해 혐오하는 대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악만큼은 심기불편한 시온의 표정변화를 알 수 있을만큼 미묘하게 찌푸려진 얼굴로 이상수를 노려보았다.
"언제 봤다고 첫눈에 반했다고 그러는겁니까? 그 말만큼 설득력 떨어지는 소리도 없는거 아십니까?"
"잘 맞는 사람은 서로 친구가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첫눈에 반했다는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친구랑 연인이랑 같은 선상에 놓는겁니까? 미쳤습니까, 휴먼?"
우정과 사랑은 전혀 다르다. 알만한 사람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하물며 오랜 시간을 살아와서 친구라고 한다면 수천명도 넘는 사람을 사귀어온 시온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더더욱 어이가 없다.
시온에게 여태까지 사귄 친구 전부를 데려온다고 한들, 최악 한명에 비교될 수 없다.
분명 우정은 그녀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지만 사랑에 비교한다면 어림도 없다.
"당신이 저에 대해 뭘 알고 있습니까?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압니까, 아니면 주말에 뭘 하는걸 좋아하는지 압니까? 제 나이가 몇인지 압니까? 하다못해 제 성이 뭔지 압니까?"
"그, 그건 앞으로 알아가면 됩니다!"
"성격이나 취향이 맞을지 맞지 않을지 그걸 둘째 쳐놓고 첫눈에 반했다는 소리가 나옵니까? 앞으로 알아가면 된다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첫눈에 반했다는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미녀에게는 화도 내지 못한다. 더군다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미녀에게라면 더더욱.
시온의 독설을 들으면서 그는 제대로 된 반박 하나 할 수 없었다. 아니, 논리적으로 맞기에 더더욱 하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언성이 높혀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야? 사랑 싸움인가?"
"와.....여자 쪽이 얼굴이 개쩌는데? 남자 쪽도 나름 훈남이기는 하네"
"엄마, 저 누나 왜 싸워?"
"쉿! 이리와!"
시온은 슬슬 자리를 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저 앞에서 마침 츄러스를 사 오는 최악의 모습이 보이자 이상수를 제치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그는 시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덕분에 걸어가다가 난데없이 멈추게된 시온은 이번에는 다른 사람도 알아볼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명백하게 불쾌하다는 신호에 그도 마음 속으로 뜨끔했다.
"지금 어딜 함부로 잡으시는겁니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손 잡을 정도로 스킨십을 허락한 적 없습니다!"
"그, 그게 아니라......당신 같은 분이 왜 저런 남자랑 사귀는 겁니까? 혹시 돈 때문에 그러시는겁니까?"
".........?"
시온은 한층 더 어이가 없어졌다.
.......확실히, 디폴트 폼일 때의 시온이 아니라 성장폼의 시온과 최악이 나란히 서 있다면 그 누구도 부부 관계라고 생각할 수 없다.
환생을 해서 외견이 바뀌어도. 최악의 영혼의 형질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아무리 유전자가 좋아도 눈매가 더러운건 항상 이어진다. 눈을 가리면 잘생긴 외모여도 그 눈매가 다 망쳐서 의미가 없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시온과 최악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최악의 더러운 눈매 때문에 시온이 어딘가 약점 잡히거나 협박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종종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졸부처럼 람보르기니나 몰고 다니는 사람과 사귀고 있다면 돈이 필요해서 그러신거 아닙니까? 저도 돈 많습니다! 얼마가 필요하시든 제가 그 돈 다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람보르기니, 제가 사준겁니다"
"......네?"
그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시온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확인 사살을 날려주었다.
"그 차, 제가 사준거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저희 남편 돈도 없고 가족도 없이 몸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나마 외모도 별로고 성격도 나쁜 면이 있습니다"
"나, 남편?"
사랑이란건 물질적인걸 보는게 아니다. 그런거 보고 한 결혼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온과 최악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를 위하고 이해하기에 결혼한 것이다. 그 덕분에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로 좋아해서 결혼한겁니다. 어울리고 자시고 없이 서로 좋아해서 결혼했는데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고 아까 졸부처럼 람보르기니나 몰고 다닌다고 했습니까? 제가 사준 차에다?"
"죄, 죄송합니다......"
이상수 입장에서는 최악에게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테니 졸부라는 표현을 썼겠지만 정작 그 차를 사준건 시온이였다.
하긴, 어떻게 알았을까. 시온 같은 여자를 사귀고 싶다면 외모가 안되면 돈이라도 많아야 할텐데, 최악을 그런 부류로 착각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인상이 범죄 한두개쯤 저지르고 다닐법한 얼굴이기도 하니까.
"야, 이 새끼 뭐야? 뭔데 남의 마누라 손목 붙잡고 있어?"
그리고 상황을 발견한 최악이 단숨에 달려와서 그를 노려보았다.
참고로 이상수는 아직도 시온의 손목을 잡고 있던 상태였다.
가뜩이나 더러운 눈매에 옅은 살기까지 감돌며 그를 노려보자 움찔거리면서 그가 시온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뭐야, 삼각관계? 치정 싸움이였어?"
"와, 근데 남자랑 여자랑 진짜 안어울린다. 남자가 돈이 많은거 아니야?"
"하긴, 저 얼굴에 저런 여자 사귀려면 돈이라도 많이 있는게 당연하지"
주변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은 이상수는 속으로 소리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반대야! 돈이 많은 쪽은 여자 쪽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얼굴이 팔리고, 슬슬 누군가 핸드폰을 꺼내서 찍으려고 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자리를 빠져나갈 필요성을 느낀 시온은 최악의 팔짱을 끼고 자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여차하면 주먹을 날릴 것 같은 최악을 말리기도 했다.
"멀쩡한 부부 사이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경고 했습니다"
"왜 아까 부부라고 알려주시지 않고......"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말 자른건 당신입니다. 방금 전 대화도 기억 못하십니까?"
"윽.....!"
이상수는 그녀에게서 독설을 들었지만 차마 그녀에게 분노를 쏟아낼 수 없었다.
그 분노는 불이 되어 최악에게 불똥이 튀겼다.
"당신......!"
"뭐 새꺄?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남의 마누라 손목에 자국 남을 정도로 잡았으면 경찰 불러서 성추행으로 고소하고 할말 없을 상황인데 주먹 날아갈거 참고 있는 사람에게 어디서 승질이야?"
으득거리며 이빨을 갈고 있는 최악은 시온의 손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을 힐끔 보고는 위협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그의 성격상 시온이 피해를 봤다면 당장 주먹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시온만 남는다면 쌓아온 모든 인망과 커리어를 싹 다 갖다 버려도 웃어넘기는 최악인데 지금 그가 참는건 시온이 그의 팔에 팔짱끼면서 붙잡아 말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오래 지낸만큼 시온도 최악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팔짱을 빼면 당장 이상수는 얼굴이 곤죽이 될만큼 처맞다가 뒤질거라는거.
"멀쩡하게 임자 있는 여자 건들지 말고 꺼져. 별 개 같지도 않은게 수작질이네"
"......후회하실겁니다. 그리고 당신 같은 남자가 시온씨랑 어울리지 않다는건 본인도 잘 아실텐데요?"
"지랄을 한다. 너나 나나 외모로 시온 앞에서는 도찐개찐 오징어고 돈 같은건 어줍잖은 너보다 시온이 더 많고. 우리 둘다 시온 앞에서는 별 의미 없는데 네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게 뭐냐? 잘난 재벌 아빠한테 굽신거려서 얻은 용돈? 퍽이나!"
"저는 이래보여도 대성 전자 사장직에 앉아 있습니다"
"응, 니 애비 낙하산 빨~. 나도 울 마누라가 회사 하나 사줘서 거기 사장으로 앉아 있는데 그거 생각하면 의미없는 자리인거 알지? 감투 자랑은 조선시대 가서 했어야지. 하다못해 외국 기업이나 자기가 창업한 기업걸로 자랑하던가. 그치?"
"큭.....!"
이상수의 주먹이 쥐어졌다. 한대 칠 기세로 부들거리는 그의 주먹을 보며 최악이 웃었다.
"쳐봐, 근데 그 뒷일은 책임 못진다"
오싹!
이상수의 재벌 2세로서 쌓아온 자존심이 상처 입은것에 분노하여 그를 향해 휘두르려던 주먹을 본능이 막았다.
마치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처넣은 듯한 위기감이 그의 경종을 울렸다. 여기서 주먹을 휘두르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 두고 보죠"
"두고 보자는 놈 중에서 대부분은 쭉쩡이더라. 넌 확실히 쭉쩡이고"
"........"
그는 시온을 힐끗 쳐다보고 이내 자리에서 벗어나 사라졌다. 그에 시온과 최악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경하던 인파를 넘어서 사람이 드문 곳으로 가서야 두 사람은 말문이 트였다.
"잘 참으셨습니다"
"아, 아깝다. 아까 저 새끼 주먹 날렸으면 그대로 죽을 때까지 패줄 생각이였는데"
".......그거 비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말이"
이성수의 판단은 옳았다. 만약 거기서 주먹이 날아왔으면 최악은 정말로 그를 죽을 때까지 패줄 생각이였다.
재벌 2세든. 주변에 보는 눈이 있던, 그런거 전부 신경쓰지 않고 얼굴을 짓뭉게 죽인 다음에 체포하러 오는 경찰을 죄다 갈아버리고 라쿤맨 커밍아웃까지 한 뒤에 몰려오는 군대도 아작내고 국회의사당도 박살내고 청와대도 무너트리고 결국에는 이 나라까지 말아먹을 생각이였다.
어차피 익숙한 과정이라 어렵지도 않다. 그렇게 날려버린 나라가 한두개도 아니니까.
그 귀찮고 손해보는 일을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당연하게도 시온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악으로서 쌓아온 친구 같은 인간관계도, 라쿤맨으로 얻은 명성도 전부 한번에 날려먹어도 상관없다. 마지막에 시온만 남으면 되니까.
"간만에 놀러왔는데 기분 잡쳤네. 얼른 다른 기구나 타러가자. 그게 기분 푸는데 좋아"
"저야 좋습니다"
시온은 한결 더 그의 몸에 기대었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지금은 간만의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사온다던 츄러스는 어떻게 했습니까?"
"........미안"
빡쳐서 아까 박살냈다.
최악은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나중에 그 새끼는 츄러스랑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