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라쿤맨 비기닝]
내가 아직 밤이 무서울 나이도 아니고 한창 팔팔한데다 초월자라서 정력에 의미가 없는데. 그래도 마누라가 작정하고 덤벼오면 식은땀이 흐르는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평소에도 자주 본 적 없는 성장폼의 시온이라면 더욱.
"저번에 한번 쓰지 않았어?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때는 위급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외견상 어린애인데 어른 한명 없이 비행기 타는건 주의를 너무 끌지 않습니까?"
"그 모습은 덜 튀고?"
"솔직히 그거 생각하면 디폴트 폼이 더 낫긴 합니다"
"하기사, 성장 폼이면 수작 부리는 놈이랑 변태인 놈들이 덤벼들지만, 최소한 디폴트 폼이면 변태인 놈들 밖에 꼬이진 않지"
"그나마 여기가 문명사회라서 낫습니다"
시온은 외모 때문에 트러블이 많다. 특히나 수작 부리거나 변태 같은 녀석들이 대다수......아니, 전부다.
그렇지만 최소한 디폴트 폼의 어린애 모습이라면 변태 같은 놈들만 꼬인다. 어린애한테 욕정하는 변태 새끼들이라서 나도 마음 놓고 사지를 찢을수 있어서 나름 편하다.
이런 지구 같이 문명 사회일 경우에는 성폭행이 중범죄인걸 아는 사람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더라도 정작 실행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성장폼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명백히 성인으로 보이는 외견과 뛰어난 몸매, 그리고 얼굴에서 완성되는 미모는 날파리가 꼬이는게 이만저만 아니다.
그걸 알아서 시온도 성장폼은 자제한다. 누군가 수작질 부리는 것도 싫어하지만 옅은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괜찮겠어? 아무리 평일이라도 놀이공원이라 사람 장난 아닐텐데"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기껏 다 모아봐야 수만명 정도 아닙니까? 그 정도는 참을만 합니다"
"하기사"
나는 말을 줄였다.
그건 시온의 옛날 이야기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녀는 우주를 헤메다 원래 고향이였던 지구를 발견했다. 시온은 나 처럼 환생자라서, 전생에는 지구인이였다. 단지 나는 계속 환생을 하는데 비해 시온은 수명이 없어서 계속 살아가는게 다르다.
지구에 도착한 시온은 비록 거기가 자신이 살다가 죽었던 지구는 아닐지 몰라도 지구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머무르며 처음으로 교감한 외계인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초기에는 괜찮았다. 인간들은 외계인이면서 예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시온을 보고 환영하고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려주는 여러가지 지식들을 흡수하면서 문명을 발전해나갔다.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났다. 한 200년쯤 지났을까. 보통은 무리지만 시온의 도움으로 우주를 항행할 전함까지 만들었던 지구 문명은 그녀를 배신하고 포획했다.
목적은 그녀의 몸......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종족이자 근원을 이루는 '에테르'를 노린 행동이였다.
'에테르'란 세상을 이루는 3대 물질로, 차원을 이루는 '파편'(차원진 일어날 때 보이는 육각 투명 조각 같은거)과 영혼을 이루는 '영자'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물리법칙 위에 놓여 있고, 우주의 비밀까지 품고 있는 그걸 얻는다면 우주를 지배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태양계도 제대로 정복 못한 수준으로 시온을 잡는건 무리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다르게 인간을 해치는걸 꺼려한다. 아무리 나쁘게 대한다고 한들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지구를 날려버릴 수 있으면 뭐하나, 어차피 사람을 해칠 수도 없는데.
"아직도 사람 죽이는게 무서워?"
"그래도 옛날만큼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게 낫지.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니까"
살인이란건 인간성을 깍어먹는 행동이다. 그걸 생각하면 나한테 남아 있는 인간성은......뭐, 그건 접어두자.
아, 그 뒤로 시온이 어떻게 됐냐고?
쟤 사촌 오빠가 달려와서 지구째로 갈아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갈아버렸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덕분에 풀려날 수 있게된 시온이지만 죄없는 사람까지 전부 죽여버린 사촌 오빠와는 친하게 지낼 수 없게 되었다. 만나면 그래도 인사는 하고 지내지만 사이는 썩 좋지 않다. 옛날에 결혼식 할 때도 초대 안할 정도로.
일단 나름 시온의 보호자 역할이기는 하지만 과보호 하는 성향이 있다. 그게 나쁜건 아닌데 그 과보호가 행성 파괴로 이어지는게 무서울 뿐이다.
"아, 씨. 계속 신호 걸리네"
"신호등 해킹 해봅니까?"
"아니, 냅둬. 어차피 좀 지나면 뻥뻥 뚫리겠지. 출근길이라서 막히는거 아니야"
한번 신호 걸리면 계속 걸린다더니 맞는 말 같다. 처음에 한번 걸리니 이어서 두번이나 걸려서 정지했다.
차에 타고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열댓개 가까히 된다.
처음에는 람보르기니 때문에 그런줄 알았지만 그 시선의 끝에 다다르는게 시온이라는걸 알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니, 시온이 예뻐서 관심 받는게 기분 나쁘다는게 아니고, 꼭 선을 넘는 새끼들이 있어서 그렇다.
바로 옆에 있던 차에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이쪽을 보더니 멍 때리다가 황급히 핸드폰을 들어서 이쪽을 향해, 정확히는 시온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아니, 남의 초상권은 어따 팔아치우셨는지? 시온이 모델도 아니고 그거 찍으면 초상권 침해로 고소 당할거 신경 안쓰나?
"저거 냅둬도 돼?"
"저를 찍으려고 드는 전자기기는 죄다 강제로 전원이 꺼지거나, 렉이 먹거나, 사진 파일이 깨지게 해뒀습니다. 이 모습이 SNS 같은데 올라가면 여파가 장난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시온은 국제 미인 대회 나가면 심사위원 싸대기 한대씩 때려도 우승 가능할 정도의 넘사벽 외모라서 인터넷에 퍼지게 둔다면 입소문을 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게 쉽다.
그런 관심은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미녀를 노리는 녀석은 세상천지 어디를 가도 있다. 하다못해 디폴트 폼의 시온을 탐내는 쓰레기들도 있는데 지금 모습이야 오죽하겠냐.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지킬만한 힘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아, 근데 시온이 나보다 쌔잖아.
"아침 뭐 먹을래? 일단 거기 가서 뭐라도 하나 사먹는게 나으려나?"
"그게 좋을겁니다"
"그나저나 잠실은 간만에 가네. 언제 갔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야"
"마지막으로 간게 언제였습니까?"
"정말 옛날이라서 기억도 안난다니까? 아마 환생 초회차일 때 갔었을텐데 그 때는 정말 옛날이라서 잘 기억도 안나거든"
내가 지구에서 환생한건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지만, 딱 운이 좋게 한국에서 태어난 적은 몇번 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태어난 적도 있었고, 미국에서 태어난 적도 있었고. 이미 죄다 멸망해서 태어난 나라를 따지는게 의미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한국까지 온 뒤에 일부러 놀이공원에 올만큼 한가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오랜만이다.
솔직히 여기보다는 용산에 있는 쪽을 가보고 싶었는데. 아직 날씨가 더워서 햇빛 쨍쨍거릴거 생각하면 잠실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끼이이익! 콰앙!!
"아, 저기 사고 났습니다"
"안봐도 알만하다"
아까 시온을 찍으려고 하던 옆에 차의 운전자가 계속 그녀를 보다가 앞차가 정지한걸 못보고 그대로 박아버렸다.
명백하게 저쪽 과실이니 돈이 상당히 깨질거다. 보니까 차도 비싼 외제차더만. 젊은 사람으로 보이는데 집에 어지간히 돈이 많나보다.
그러니까 누가 운전하는데 한눈 팔고 있으래? 나도 운전할 때는 기감 펼쳐두고 운전한다.
또 신호 대기 하고 있는데 마침 구경거리가 생겼다. 피해자인 앞차에서 중년 남성이 내려 화를 내면서 뒷차로 향했다.
"야! 이 씨발 새끼야! 운전 못하냐! 신호도 안보고 달려드네! 아오, 뒷골이야!"
엄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까 뒷차의 속도는 꽤 빨랐다. 그걸 뒤에서 난데없이 박았는데 목이 멀쩡하면 오히려 더 이상한거다.
뒷차에서도 남자가 내려서 사과를 했다. 명백하게 자기 과실이니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블랙박스는 어디에나 있는데다 신호 앞이라 CCTV도 있어서 시치미 떼었다가 역관광 당하는건 한순간이다.
"죄송합니다. 목은 괜찮으세요? 일단 보험부터 부른 다음에 병원부터 가시죠"
"씨발, 목이 삐끗한것 같은데, 이거 어쩔거야?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와서 박았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딴 것 좀 보느라고 그만......."
"뭐? 아니, 정신 나갔어? 사람 치려고? 면허를 어떻게 땄길래 딴거 보느라 앞차 못보고 처박아?"
슬쩍,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시온에게.
앞차의 중년 남성이 그의 시선에 등을 돌려 마찬가지로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시온의 외모를 보더니 헛숨을 들이켰다.
시온은 그들을 보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니, 손은 왜 흔들어줘?"
"저 때문에 사고 났으니 나름의 서비스입니다"
"넌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신호가 바뀔 때까지 시온을 멍하니 보던 두사람은 이윽고 다시 눈앞의 사고로 돌아왔다.
"한눈 팔만 하구만"
"그렇죠? 일단 제 전화번호 드릴테니까 카센터 가셔서 수리 견적 뽑아보시고 병원 가셔서 진단서도 뽑으세요. 제가 지금 바빠서......"
"아, 알았네"
앞차 아저씨는 시온의 얼굴을 보고 화가 가라 앉았는지 뒷목 잡던 것도 잊고 뒷차 남자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다시 서로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상황이 쉽게 끝나서 구경거리가 아쉬웠지만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가기로 했다.
아니, 사고 난게 우리 책임.....아니, 어떻게 보면 맞기는 한데 엄밀하게 말하면 한눈판 당사자 책임이잖아.
"그냥 가도 됩니까?"
"뭐 어때, 우리가 사고 냈어? 그런거 아니잖아, 무시해. 도로 위에서는 한눈 판 놈이 잘못한거지"
"예쁜게 죄입니다"
".....본인 입에서 들으니까 좀 깬다 야"
"지금 제 앞에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을겁니다"
"공주병 말기 아니야? 그거 약도 없는데 어떻하지?"
"........"
"억! 억! 아퍼! 아프다고! 운전하는데 때리지 마! 사고나!"
시온이랑 노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잠실에 도착했다. 저 멀리 사우론의 눈깔이라도 달려 있어야 할것 같은 높은 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것 보다는 죽은 우주의 마커 같이 생겼는데......합일을 하자! 하면서 네크로모프가 덤벼드는거 아닌가 몰라.
이곳 쇼핑몰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했다. 아직 늦게 오진 않아서 그런지 주차장에는 자리가 충분했다.
나는 주차장 한 구석으로 가서 벽이랑 가까운 자리에 주차했다. 아침이라 그런가 비어 있어서 주차하기 좋았다. 운이 좋네.
"왜 여기다 주차합니까? 저기 바로 앞에 자리 있지 않습니까?"
"저런데다 주차하면 우리 양 사이드의 자리에 아무도 주차 안할껄. 긁히면 3대가 노예인데 누가 그래? 나중에 사람들이 많이 올텐데 그러면 솔직히 민폐잖아"
내가 람보르기니 끌고 다른 곳 주차장에 주차해두면 아무리 자리가 없어도 내가 주차 해둔곳 좌우에는 아무도 차를 대지 않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어차피 공간 띄워둘거면 구석에 주차해서 옆에 한자리만 비우는게 낫지. 가뜩이나 사람 몰려오는 곳에 나 혼자 3자리나 차지하고 있으면 그런 민폐도 따로 없다.
주차를 해두고 지갑이랑 핸드폰 같이 챙길건 챙긴 뒤에 차에서 내렸다. 엘레베이터 홀 까지 좀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리 불편한건 아니다.
우리가 막 엘레베이터 홀 자동문 앞에 들어서는 찰나, 주차장으로 앞 범퍼가 심하게 작살난 외제차 한대와 방송국 차가 들어왔다.
"어?"
........어라? 방송국 차는 둘째 쳐도 저거 아까 그 차 아닌가?
심하게 짜증나는 느낌이 등을 타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