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라쿤맨 비기닝]
고삐리 4인조는 내 도발에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어디서 한잔 빨고 온건지 이미 얼굴이 빨갛지만 훨씬 더 붉어졌다. 와, 홍익인간인줄.
"아, 씨발! 뭐요?"
"사람이 술을 마셔야지 술이 사람을 먹으면 쓰나. 치킨값 안받을테니까 지금이라도 가게 나가줄래, 얘들아?"
나는 마지막 자비심을 발휘해서 적당히 구슬려주었다. 치킨 세마리 값이면 2만원이 넘는다. 그걸 공짜로 해주겠다는데 재수 옴 붙었다 생각하고 그대로 나가면 나도 편해지고 쟤들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결국 내가 했던 말은 겉치례에 불과하게 되었다. 고삐리 4인조 중에서 내 앞에 있던 제일 키 큰 녀석이 나를 밀쳤기 때문이다.
일부러 나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척 헐리우드 액션으로 뒤로 넘어졌다.
쿵!!
"어이쿠! 이 새끼들이 사람 치고 있네! 야! 백리야! 경찰 불러! 경찰!"
"제가 이미 불렀어요 사장님!"
"그럼 백리는 손님들 밖으로 모셔! 거기 테이블 손님들! 오늘 치킨값 안받을테니까 얼른 나가세요!!"
옆에 있던 테이블 손님들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고 가게에 남은건 우리 가게 직원들과 고삐리 4인조 뿐이였다. 하지만 손님들은 여전히 바깥에서 이쪽을 보며 구경거리 삼고 있었다.
"뭐? 경찰? 씨발 불러봐, 경찰 불러보라고! 개새끼야!"
"억! 억!"
쓰러진 나를 향해서 네명이 달려들어 발로 걷어차 밟으면서 구타하고, 깜짝 놀란 백리가 뒤에서 달려와 4인조를 막았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손님, 정신 나갔어요?!"
"야! 야! 이 새끼 뭐야?! 존나 쌔!"
"포스 유저인가봐! 야! 포스 유저가 민간인 패면 특수폭행 아니냐?"
"씨발! 때려봐! 때려보라고 개새끼야!"
술 취한 고삐리들은 눈에 뵈는게 없었다. 한바탕 난리가 낫지만 백리는 날아오는 놈들의 주먹질을 물러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피했다.
간간히 맞을뻔한 것도 있었지만 백리의 양 손이 태극을 그리면서 슬쩍 비껴냈다. 짜식, 태극나선경이 어느정도 수준에 올랐구나.
아마 수트의 힘을 빌렸어도 저번 실전이 마음가짐을 바로 잡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래서 실전을 한번이라도 겪어본 사람과 한번도 겪어본적 없는 사람의 차이가 드러난다.
몇분간의 실랑이 끝에 인근 순찰을 돌고 있었는지 생각보다 빨리 경찰이 왔다.
.......두명이 온건 그렇다 쳐도 한명은 왜 여경이지?
"거기 멈추세요! 학생! 멈추라고요!!"
"씨발, 경찰이면 뭐 어쩌라고!"
남자 경찰 쪽은 그나마 분주하게 움직이며 취객을 상대한 적이 꽤 되는지 한명을 빠르게 제압해 수갑을 채웠다.
"이런 씨.....컥?!"
그런 그의 등을 노리고 다른 한놈이 덤비다가 엎어치기를 당했다. 그 덕분에 테이블이 쓰러지고 위에 있던 치킨이나 컵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개판이 됐지만 크게 신경쓸건 아니다.
하지만 여경 쪽은 지지부진했다. 키 큰 녀석은 남자 경찰 쪽이 제압해서 남은건 고만고만한 애들인데 한명도 제압 못하고 다른 녀석한테 떠밀려서 손만 동동 굴리다가 두명한테 수갑 채운 남자 경찰이 세명째를 잡자 그나마 나머지 한명을 제압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불안했다. 힘이 딸리는지 저항하는 고삐리의 움직임 때문에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어서 수갑만 꺼내고 정작 채우지는 못하는 상황이였다.
"거기 남자분! 나오세요! 빨리요!"
".......네? 저요?"
내 능력 중 하나는 '감각'이다. 오감이 극대화되고 육감도 비상식적일 정도다. 하지만 그런 감각도 한순간 이해하지 못할만큼 어이가 없는 상황이였다.
"빨리 수갑 채우세요"
"아니, 제가요?"
"빨리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지만 돌아온건 어이가 없는 대답이였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는 수갑을 받아 고삐리의 손에 채웠다.
난 분명히 민중의 지팡이를 불렀는데 말이야.
지팡이가 짚지도 못할만큼 약하면 어쩌자는거야?
* * * *
일단은 오늘 예진이 하교 때 마중 나가주는건 물건너기로 했다. 서애씨한테는 기다리던 손님에게 반값 세일 쿠폰을 주라고 하고 돌려보내게 했다. 일부러 와서 치킨 못먹고 갔으면 최소한 그 정도 도리는 해줘야지.
본의아니게 우리 가게는 일찍 닫게 됐다. 어차피 일찍 닫을 생각이였는데 이렇게 닫으려니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인근 지구대로 피해자 겸 진술을 하기 위해 백리와 같이 온 나는 지랄거리는 고삐리들의 쌍욕이나 들으며 느긋하게 있었다.
"아! 씨발 진짜! 수갑 풀라고! 짭새 주제에 존나 지랄거리네!"
"저 자식 말뽄새 보니까 가정 교육을 퓨전 판타지로 받은게 눈에 훤하다. 아주 그냥 이고깽을 부려라"
"수갑 풀면 넌 뒤졌어 씨발! 겨우 치킨집 꼰대 주제에!"
내가 노안이긴 노안인것 같다. 고삐리한테 꼰대 소리를 듣게.
하기사 저 나이대의 애들이라면 군대 다녀온 이상 죄다 꼰대 취급 하겠지.
고삐리 4인조는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듯 경찰서에 왔어도 주눅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최악씨랑, 그쪽의 학생은 하백리씨죠? 백리씨는 포스 유저고요"
"네, 맞아요"
"이거 좀 꼬이겠는데요. 포스 유저는 폭력 사건에 끼어들면 가중 처벌을 받아요"
"아니, 전 말리기만 했는데요?! 때린적 없어요!"
백리가 손사래를 치면서 결백을 주장했지만 옆에서 수갑을 차고 있던 고삐리 4인조가 동조하면서 소리쳤다.
"저 새끼가 주먹 휘두르는거 봤어요! 맞았으면 아주 그냥 훅 갔을걸요!"
"저런 새끼는 그냥 깜빵에 처넣어요!"
"어허, 학생들 조용히 해!"
조서를 작성하는 중년 남성 경찰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어이없는 그 모습에 일단 지껄일대로 지껄여 보라고 냅두었다.
몇번 타자를 치며 조서를 써내려가던 그는 슬쩍 나에게 말했다.
"골치 아파지기 전에 쌍방으로 하시죠?"
"........?"
세상사 살다보면 참 븅신 같은 새끼들 참 많이 나오는 법이다.
한쪽은 미성년자 폭력 사건, 다른 한쪽은 포스 유저 폭력 사건......그걸 비교하면 누가 더 죄가 큰가 사이에서 끼어 있는 경찰이 할 일이 많다는건 안다.
근데 그러라고 경찰이 있는거 아니냐?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 그쪽 성함이?"
"권순욱 경감입니다"
"권 경감님. 지금 쌍방이라고 했습니까?"
쌍방? 쌍방? 쌍방과실 할 때 그 쌍방? 저 새끼들 쌍방울 털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쌍방과실?
아주 그냥 피콜로 더듬이 빨아처먹는 소리를 오케스트라로 하고 앉았네. 아니, 씨발 그건 차라리 예술적이기라도 하지. 이딴 개소리는 들어주는 것도 못하겠다.
"형, 저 어떻게 해요?! 저 진짜 말리기 밖에 안하고 때리지도 못했는데"
"니가 맘 잡고 때렸으면 저 새끼들 지금 여기 앉아 있지도 못했지. 그거 잘 알아"
아무리 풋내기 포스 유저라도 사람 하나 간단히 목을 비틀어 죽일 수 있는 육체 강화는 할 수 있다. 백리가 처음 각성했을 때도 수십, 수백킬로의 돌덩이 파편정도는 가볍게 들어올렸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고딩 새끼들 대가리 쪼개는건 주먹까지 쓸 필요 없이 그냥 좀 쌔게 밀면 될 정도다.
"그쪽 젊은 친구도 빨간줄 그어지기 싫으면 저쪽 보호자 왔을 때 합의하시면 될겁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포스 유저 중범죄는 여차하면 징역이예요"
"권 경감님. 경감 달 정도면 꽤 경찰 생활 오래 하셨을것 같은데 늘은건 혓바닥 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
그래도 나름의 경찰로서의 자각은 있는건지 욕을 하거나 구타를 하진 않았다. 단지 조용히 째려볼 뿐이였다.
"그렇게 나오시면 저도 최악씨를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애초에 누가 잘못했는지 알면서 쌍방으로 합의나 하자는 소리나 해대는데 도와줄 생각이나 있으셨습니까?"
슬슬 폭발할 정도로 열 받았다. 좀 더 이야기 했다간 터져버릴거다.
그때쯤 고삐리 4인방의 보호자가 나타났다. 가장 키가 컸던 녀석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인지 얼굴부터 꽤 닮아 있었다.
"어이쿠! 권 경감님! 아들 녀석 때문에 수고 많으십니다"
"아, 김 사장님. 이쪽에 앉으시죠"
권 경감과 고삐리쪽 보호자가 아는 사이로 보이자 대충 어떻게 된 레파토리인지 눈치 깠다.
이 새끼들 상습범이구나. 어쩐지 아까 경찰서 한두번 가냐고 지랄을 하더라.
이 세상은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인 만큼 사회 시스템을 절대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돈 받고 쉬쉬 해주는 경찰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지.
특히나 요즘 사회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야, 요즘 진짜 경찰들 왜 그러냐?
"형, 저쪽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인데요"
"넌 물어보는 말만 대답해. 여기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빡침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이러다가 사골처럼 뼛속까지 국물을 우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권 경감과 이야기 하던 김사장이라 불리던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오늘 아들 녀석이 한 일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인사나 하자고 온건 아닐테고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이대로 형사로 넘기면 서로 얼굴 붉히고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합의금은 충분히 챙겨드릴테니 여기서 합의 보시죠"
슬쩍, 김사장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백리에게 향했다.
"그리고 잘못 하면 가게 직원 이름에 빨간줄 그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
아무리 백리가 우리 마누라랑 비교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에게 시온이란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면 함께 화를 내고 도와줄 용의가 충분이 있는 사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애초에 백리 구하러 라쿤 가면쓰고 그 지랄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착해서 탈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좋은 일이지 욕 먹고 부당한 일을 당할 일은 아니다.
"씨발, 아가리에 좆을 물었나. 왜 그렇게 좆같은 소리를 하지? 말린 고사리 무침같이 생겼다고 인간 대우를 해주니까 아주 지들 멋대로구만?"
"뭐요?!"
인상을 찌푸린 김사장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 뭔가 자신 있어하는 눈치다.
그리고 씩 웃으면서 나에게 슬쩍 물어왔다.
"폭행 관계자가 포스 유저라면 무조건 그 상대 쪽이 유리한거 모르십니까? 아마 형사로 넘어가도 돈이랑 시간만 낭비할거고 이겨도 별 의미 없을텐데요?"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고. 누가 좆되는지는 일단 나중에 한번 볼까?"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어차피 내가 싸운 것도 아니고 나는 일단 구타로 얻어 맞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전화 하는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연락처 목록을 뒤지다가 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네, 최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김 변호사님. 여기 경찰서인데 지금 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경찰서요? 무슨 일로 가시게 된거죠?]
"폭력 사건 같은거에 휘말려서요. 그거 때문에 좀"
[일단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 경찰서인지 위치만 좀 찍어주세요]
"정확히는 여기가 지구대인데....."
김변호사에게 경찰서 위치를 찍어 보내주고 나는 이어서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음 하나가 끊어지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 지금 경찰선데"
[김 변호사 데리고 바로 가겠습니다]
"아, 김 변호사님은 내가 먼저 불렀어. 천천히 와"
[알겠습니다]
전화 두 통이면 충분하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의 김 사장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 변호사 앞에서 지껄이시죠"
김 변호사님이랑 시온이 올 때까지 앞으로 수십분.
나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남이 지옥에 떨어지는 시간인데 그거 하나 못 기다려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