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라쿤맨 비기닝]
가게로 들어서자 먼저 출근했던 백리가 핸드폰을 들이대면서 한 기사를 보여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형! 형! 형! 이거 보셨어요? 저도 뉴스에 나왔어요!"
"그래, 봤다. 나 없는 동안 장한 일 했네"
"그쵸? 그쵸?"
백리는 마치 큰 일이라도 한 사람처럼 자기 자랑을 했다. 솔직히 큰 일 한건 맞네. 우리 가게 무너질 뻔한거 막았으니까.
초대형 적성종 한마리만 나왔어도 일반 포스 유저로 막기에는 힘들다. 그나마 백리가 있어서 우리 가게가 안무너지고 멀쩡했던거지 아니였으면 이경진 아저씨가 올 때까지 손가락만 빨았어야 할거다.
......아니, 인간형 적성종도 나타났었으니 백리 없었으면 큰일 났을수도 있다. 정말 좋은 일 했네.
"그렇지만 중요한건 그런 영웅적인 일에 치켜 세워주는 소리에 들떠서 초심을 잃어버리는거야. 너는 네 아버지 닮아서 이타적인 사람이지만 그걸로 자만심을 가지거나 그러면 안된다?"
"네, 걱정마세요"
"루리는 뭐라니? 너네 부모님은 몰라도 루리는 눈치 챘을텐데"
"입 다물길 바라면 용돈 좀 더 달라는데요"
"허허허, 남매 사이가 참 좋구나"
가게는 백리가 분주하게 싸운 덕분인지 무사했다. 어디 부서진 곳도 없고 금이 간 곳도 없다. 다행히도 장사는 계속 할 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손님이다. 적성종이 침공한 바로 뒤에 장사를 하면 과연 장사가 될까 싶다.
방송 타서 그 효과를 한창 보는 중이였는데 맥이 끊겨서 상당히 아쉽다. 애초에 취미로 하는 장사고 몸은 편해졌지만 아쉬운건 어쩔 수 없다.
"라쿤맨 2호. 적성종에게 효과적인 특수 병기를 탑재한 영화에서나 볼법한 강화 외골격 수트를 입은 그는 이번 적성종 침공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활약했다. 그 덕분에 명동에서 열린 적성종은 손쉽게 격퇴할 수 있었으며 용산동에서 나타난 유래없는 인간형 적성종 또한 천검 이경진과 협동하여 무사히 쓰러트릴 수 있었다. 미국에서 활동하여 이번에 명예 시민권을 부여받은 원조 라쿤맨의 활약과 더불어서 눈에 띄는 행동이다. 이에 정부는 라쿤맨에게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약속하며, 저질렀던 죄에 대하여 감면할 수 있으니 언제든 정체를 밝히고 자수하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와, 우리 나라 태세전환이 우디르급이네요. 언제는 잡으려고 하더니"
"나 이번에 미국에서 명예 시민권 받았잖냐"
".......? 그런데요?"
"미국 대통령이 직접 주는 명예 시민권은 받은 사람 몇 없는거야. 그걸 밀입국까지 해서 다짜고짜 도와준 사람한테 마스터 유저라도 그냥 줄거 같니? 내가 찜해뒀다는 의미니까 우리나라 정부도 발등에 불 떨어졌을껄?"
내가 받은 명예 시민권에는 여러가지 정치적 기반이 깔려있다.
일단 한국 출신인 내가 미국으로 언제든 이민 갈 수 있고 그로인한 일들에서 발언권을 내세울 명분을 가진다. 게다가 다음에도 밀입국 할 때 보다 쉽게 넘어갈 기반을 마련해서 미국에 자주 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포섭함으로서 시온의로 하여금 지금 문명으로는 꿈도 못꾸는 기술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위와 같지만 라쿤맨 2호인 백리도 끌어들이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할거다.
"솔직히 나보다 적성종에도 통하는 무기 제조 기술을 탐내기도 할거야. 근데 지금 문명으로는 무리지. 인프라가 안돼"
"아, 그건 형수님한테 들었어요. 공간이란 개념을 이용한거라서 안된다고 하죠?"
"보아하니 보이드 블래스터인 모양인데. 그건 꽤 발전된 문명의 기술이거든. 지금 지구 문명으로도 그 기술을 실현시키려면 일단 연구소만한 큰 설비가 필요한데다 범위 제어도 힘들거야"
비슷한 예로, 원자로 같은게 있다. 지금 지구 문명으로는 원자로는 엄청 큰 공장같은 발전소를 떠올리지만 내가 아는 원자로 중에 하나는 손바닥만한 크기에 들어오는 꽤 쓸만한 동력로다.
지구도 한 몇십년 노력하면 원자로 정도는 그만큼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정작 지금 당장은 못하지.
"생각을 해봐. 여기는 마스터 유저 한명에 수트 입은 영화속 수퍼히어로 같은 사람 하나, 거기에 적성종에게도 통하는 기술력을 가진 서포터까지 있어. 이걸 적대해서 미국으로 그냥 넘겨주면 국민들에게 욕을 얼마나 처먹겠니?"
나, 백리, 시온. 이 셋중에 하나만 얻어도 우리 나라는 세계 강국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
물론 한국이 어디가서 무시받을 수준은 아니지만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같이 큰 강대국들 사이에서 비비기에는 작은게 당연하다.
근데 우리 셋중에 한명이라도 얻지? 그럼 칼든거나 다름없다.
자고로 아무리 강한 운동, 격투기 선수도 칼든 사람 한명에게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칼을 빼앗기면 꽤 볼만한 장면이 나오겠지만 말이다.
"오늘 장사는 오후 일찍 끝내볼까? 어차피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테니까 금방 끝날거고. 나도 예진이 하교하는거 좀 보고 싶거든"
"아, 예진이 오늘 학교 갔어요? 안색은 괜찮고요? 저번에 봤을 때는 좀 안좋았던데"
"......네가 예진이를 언제 봤다고?"
"차원진 났던 날 형수님이 힘쓸 사람 필요하다고 해서 갔어요"
나는 백리의 어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슬쩍 힘을 줘서 주무르며 압박했다.
"억?! 아파요! 아프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생은 안된다? 나는 마누라 겉모습이 불법인거지 법적으로는 합법이야. 근데 고등학생은 안된다?"
"아니거든요?! 아니거든요?! 전 여고생에 환상 같은거 싹다 같다 버려서 관심 없어요!"
"대신 성인 되면 연애 해도 좋아"
"예진이가 예쁘긴 한데 생각은 해볼께요"
"우리 예진이가 뭐가 어때서!"
"아! 진짜!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되는건데요?!"
한창 소란을 피우다보니 서애씨가 출근했다.
준비도 다 됐고, 별 다른 특이사항 없이 오늘도 우리 치킨집은 큰 탈 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 * * *
장사하는 동안 우리도 종종 진상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엮이곤 했다. 단순 취객부터 비상식적인 태클을 걸어오는 손님까지.
후자의 경우는 치킨이 맛이 이상하다면서 정작 다 먹은 뼈를 들고 와서는 환불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깔끔하게 경찰을 불렀었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아이들이 자주오는 곳은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에 메뉴가 치킨인데다가 가게 내부의 테이블은 몇개 안되고 주 메뉴가 포장이니까 그렇다. 게다가 우리 가게는 배달도 안해서 배달앱 서비스 가입도 안했다.
먹고 싶으면 지들이 와서 먹으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 중에 지독한 진상은 그리 많지 않다.
취객도 뭐.....도가 지나친 사람도 있지만 술이 깨면 정상인 사람이 다수다. 그렇지 않은 놈은 경찰을 불렀다.
오늘 장사도 진상은 있었다. 다만 꽤나 색다른 진상이다.
"어.....저기, 형"
"왜?"
"저기 안쪽 테이블에 남자 네명. 맥주 달라고 하는데......제가 보기에는 아직 고딩으로 보이거든요?"
슬쩍 안쪽을 살펴보니 남자 넷이서 치킨 세마리 시켜서 뜯어먹고 있었다. 치킨에는 맥주인 만큼 맥주 주문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맥주 마시기에는 액면가가 좀 낮았다.
"한두명 그런거면 저도 넘어갔을지도 모르는데 네명 다 얼굴이 고딩 티가 나거든요. 어떻게 할까요?"
"민증 확인 했냐?"
"확인은 했어요. 민증은 멀쩡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결과는 두가지 중에서 하나다.
막 민증에 잉크 마른 파릇파릇한 새내기들이거나, 민증이 가짜거나.
확실함을 위해서 나는 주방에서 나와서 직접 테이블로 걸어갔다.
백리가 말한대로 겉 보기에는 꽤 앳되어 보인다. 그 중에 덩치가 큰 애도 있었지만 그거야 요즘 애들 발육 보면 덩치 가지고 판단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까 맥주 주문하셨죠?"
"아, 네. 그런데요?"
"잠깐 민증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이 너무 동안이라서 저희도 긴가민가 해서요"
"그럼요. 여기요"
나는 한명이 내미는 민증을 받아 확인을 해봤다. 겉으로 봐서는 일반적인 주민등록증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만큼 정교해서 멋모르고 당하기에는 충분하다.
참 실력도 좋다. 이 정도 능력이나 노력으로 뭐라도 했으면 성공 했을텐데.....쓸데 없는데 기를 쓰는게 참으로 안타깝다.
이런걸 고작 몰래 술 마시려는데 쓰다니.
"정말로 성인 맞아요?"
"저희 성인 맞거든요? 빨리 맥주나 주세요"
거짓말이다.
특기도 아니고 내심을 숨기는데 익숙한 사람이나 초월자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저 정도 거짓말은 간파가 가능하다.
네명을 돌아보니 죄다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이미 술 냄새가 나는걸 보면 이미 어디서 한탕 해먹고 온걸로 보이는데......나한테는 어림없지.
다른건 몰라도 애들이 성인 전에 술 마시는건 안된다. 여기서 나오는 쓸데없는 윤리관!
아마 백리가 들으면 루리는 왜 허락해줬냐고 하겠지만 루리는 루리니까 괜찮아.
"학생들. 어린 나이에 술 마시면 몸에 안좋아요. 내가 콜라 큰걸로 하나 서비스 할테니까 맥주 대신 콜라 마셔요"
"뭐라고요?"
인상을 찌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은 꽤 덩치가 있는지 키가 나보다 한뼘 정도는 컸다.
요즘 애들은 발육이 참 좋단 말이야. 나도 작은 키는 아닌데 나보다도 큰거 보면 말이야.
덩치는 이미 성인이라 봐도 무방하지만 아직 고딩인건 고딩이다. 내 손목 걸고 장담한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위협적으로 물었다.
"민증까지 깠는데 뭐하자는 건데요 대체? 지금 장난해요?"
뒤이어서 나머지 세명도 일어나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다. 하지만 그래봤자 애들 장난이다.
백리가 슬쩍 다가오고 서애씨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 상황을 보고 말릴 생각은 커녕 흥미진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요즘 세상 인심이지. 무슨 일 생기면 도와주는 것보다 핸드폰을 꺼내 촬영을 하거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구경거리가 되는건 상관없는데 이 버릇 없는 새끼들은 교육을 시켜줘야 한다.
"아저씨, 우리가 돈 없는 것도 아니고 민증도 깠는데 왜 술을 안줘요?"
"그 민증 가짜잖아"
"뭐요? 증거 있어요?"
한순간 흠칫했던 그들은 잠깐만 그랬을뿐 뻔뻔하게 그대로 밀고 왔다.
장사 하면서 좋은 손님만 있는건 아니지만 가끔 이런 진상 중에 진상 손님이 있는 법이다.
내가 겪어보기로 여기서 조금만 더 있으면 주먹 날아온다.
어차피 할 일인건 기왕이면 빠르고 확실하게 도발을 하기로 했다.
"그 민증 가짜에 니들 고삐리란거에 내 손목이랑 이 가게 건다, 니들은 뭐 걸래?"
얘들아......인실좆이라고 들어봤니?
"하! 씨발 진짜, 치킨집에서 별거 다 따지네. 우리 성인 맞다니까 왜 자꾸 쓸데없이 막고 지랄이예요?"
"경찰 부르면 내가 아니라 니들이 다칠텐데. 그래도 괜찮겠냐?"
"해봐! 불러봐 씨발! 한두번 간 것도 아닌데!"
덩치큰 애는 툭툭, 손으로 내 어께를 밀쳤다. 밀쳐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가게 내부에는 CCTV가 있다. 지금 이 상황은 전부 다 찍히고 있었다.
자리에서 빠져나온 다른 세명이 나를 둘러싸서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간다. 나는 그런 애새끼들을 보면서 웃었다.
"웃어? 어쭈? 아저씨 웃어?"
"고삐리 새끼들이 할거 없어서 민증 위조하고 참 잘난 꼴이라서 그렇지 뭐"
옆에 있던 한놈이 주먹을 쥐는게 보였다.
"주먹은 쓸줄 아니?"
갑자기 여기서 미국의 엉덩이가 한 대사가 생각났다.
한바탕 하기 전에 내리고 싶은 사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