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라쿤맨 비기닝]
알리언 박사가 말한 사실은 솔직히 좀 와닿지 않는 사실이였다.
23년전이라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애초에 차원진이 일어나 적성종이 침공한 대공황 시기에도 나는 환생자란걸 자각도 못할 어린애였을 수준인데 그보다도 전이면 말 다했지.
그런데 23년이란 시간을 회상하는데도 저 얼굴이면 얼마나 동안인거야?
"23년 전의 최초의 차원진으로 제가 알고 있던 세계는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정말로 엄청난 사건이였죠. 차원이란 개념을 인지하는 순간이였으니까요. 우주의 신비도 1퍼센트도 벗겨내지 못했는데 다른 차원이라니! 만약 이 우주에 생명체가 인간 하나밖에 없다 하더라도 다른 차원은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당시 저는 반쯤 정신이 나갔었죠. 엄청난 사건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도 제대로 안돌아거더군요. 차원진 자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연구 자료를 모으기에는 충분했고. 최대한 많은 자료와 정보를 수집한 뒤에 혹시나 모를 다음 차원진을 대비했습니다. 한번 일어난 일은 두번도 일어날 수 있었을테니 분명히 일어날걸 생각했죠. 물론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때 당시부터 차원진 감지기를 만들어서 준비했죠"
"혹시 LA...아니, AL리언 박사인가? 왜 그렇게 혓바닥에 모터를 달았어?"
그 이야기를 하려면 LA에서부터 시작해서......대충 그런 레파토리 비슷하게 속사포처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 시절 그때의 흥분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확실히 과학자한테 그건 충분히 놀라울만한 발견이고 나라도 눈앞에서 건담 같은게 움직이면 놀라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해 못하는건 아니데 말이 너무 많아.
"크흠, 아무튼 23년전의 최초의 차원진으로부터 3년이 지난 후. 제가 바라던 반응이 다시 나타났죠"
"이번에는 적성종과 함께 말이지?"
"네, 맞습니다. 당시에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저는 차원진 감지기도 그리 많이 퍼트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범위가 넓지도 않고요. 아마 수십, 수백개를 뿌려서 퀸즈 하나를 겨우 커버 했었을겁니다"
차원진과 함께 나타난 적성종은 대공황이란 사건을 만들어냈다. 일반적인 병기도 통하지 않고 오로지 포스 유저로만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포스 유저는 커녕 이능력이라는 개념 자체도 소설이나 픽션에 나오는 허구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괴물에게 죽어나가고. 그나마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는 민간 피해를 감수하면서 폭격을 지시했다.
나야 그때는 어렸으니 기억에 없지만 현재의 중년의 나이대 이상은 전부 대공황 때의 트라우마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나는 예전에 중학교 다닐 쯤에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독거노인 분들의 집을 방문하는 봉사 활동에 참여 했었다. 어차피 채워야 하는 일이라면 좀 더 보람있는 일이 나으니까.
그때 그 만난 한 할머니는 대공황 당시 자식은 물론 손자까지 전부 잃어서 거의 폐인처럼 살고 계셨다. 20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때는 지옥이였습니다. 저도 당시에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감정이 앞섰죠. 적성종에게서 두려움도 느꼈고, 공포도 느꼈지만 분노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놈들에게 전부 빼앗겼죠. 오랜 친구들, 가족들......남은건 저 혼자입니다"
"......."
"저는 적성종을 박멸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겁니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에 누군가 접선 해왔습니다"
"접선?"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정도죠. 제 컴퓨터는 정부로부터 감시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접선해왔습니다"
알리언 박사는 중요 인물이니 감시 정도는 하고 있을터. 그 중에서 컴퓨터 같은건 해킹의 염려도 있을테니까 훨씬 방비가 잘 되어 있을거다. 여차했다가 적국에 연구 데이터라도 날아가면 큰일이니까.
시온이야 미국 국방부 파이어윌도 우드락 수준이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그건 시온이 원래 전자전 전문에다가 순수하게 물질 문명 컴퓨터라서 그런거다. 게다가 발전도가 좀 떨어지는 것도 있고.
보통 미국 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곳을 해킹해서 연락을 취할 정도라면......지금 이 시대 기술력으로 만든 컴퓨터로는 절대 무리겠지.
"저는 그렇게 접선한 자와 여러가지 기술과 정보를 교환했죠. 안보법 위반이기는 하지만 저쪽도 조심하는지 쉽게 접근하지 않았고요"
"아틀라스라는 놈들이 뭘 하는 곳인지는 알고 있어?"
"잘은 모르지만 숨어서 뭔가를 하는 사람들 치고는 좋은 사람들은 없더군요"
"그런데도 서로 교류하는 이유는?"
알리언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목이 말랐는지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설명을 이었다.
"적성종과 차원진을 막기 위해서 보다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저는 적성종을 박멸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만......그 조직 이름도 알고 있으신걸 보니 정상적인 일을 저지른건 아닌 모양이군요"
"인체실험을 했지"
"......오"
"라프 에너지와 가이아 포스를 융합하는 실험을"
"오, 세상에 맙소사"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리언 박사는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인간을 베이스로 하고 적성종의 인자를 더하는 실험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 아직까지는 실패작 뿐이지만 진행 상황을 보면 앞으로 상당기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 같다.
그동안 피해가 얼마나 나올지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저에게 죄가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방관은 동조와 똑같은 죄나 마찬가지니까요. 지식에 눈이 멀어 내심 짐작하면서도 모르는척 굴었습니다"
"스스로 그걸 깨닫고 있으면 되는거야"
그것조차 모른다면 인간성이 없다는 소리다. 인간성이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가치다.
외견이 괴물이라도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이라 불러줄 수 있지만, 외견이 인간이라도 인간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짐승 새끼만도 못하다.
스스로 깨우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인간성의 반증이다.
세상에는 그것조차 못하는 쓰레기들이 너무나 많다.
"저쪽에서 연락을 취해오는건 종종 있는 일이긴 하지만 최근에는 소식이 없습니다. 만약 다시 연락이 들어온다면 정체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유도 해보도록 하죠"
"꽤 협조적인데? 그 녀석들이 있어서 이득본거 아니였어?"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꼭 그 조직을 잡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데이터가 필요한거지 그런 조직과 손을 잡고 싶은게 아닙니다"
알리언 박사와 인맥을 만들어둔다면 상당히 이득이다. 저번처럼 시온이 라쿤걸이란 이름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그를 통해서 기술을 퍼트리면 되니까.
요컨데 바지사장이다.
"그 전에 한가지.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라쿤걸이란 사람과 연결시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쿤걸은 왜?"
"제가 개발한 차원진 감지기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은 감지기를 만든 실력만 하더라도 저보다 위입니다. 아틀라스란 놈들도 문제긴 하겠지만 인류의 공적은 적성종 아니겠습니까? 놈들을 박멸하려면 협력이 필수죠"
"흠"
설득력은 있었다. 단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신뢰하고 시온을 소개시켜주는게 좀 꺼릴 뿐이다.
"나중에, 만약 그놈들한테서 소식이 오고 놈들을 일망타진 한다면 그때쯤 소개시켜줄께"
"네, 그러도록 하죠"
알리언 박사는 웃으면서 악수를 건냈다. 나도 나름 좋은 관계가 형성된것 같아서 마찬가지로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 그러고 보니 차원진 감지기 하니까 생각난건데, 라쿤걸씨는 차원간의 진동이 만들어내는 여파를 감지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다른 매질을 통해서 파악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감지기를 만들었더군요. 저도 여태까지 그 생각은 못해서 그런데 혹시 라쿤맨씨는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애초에 차원진이란 개념이 차원간의 충돌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차원 자체의 진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견부터 논해보도록 하......."
"도망쳐! AL리언 박사다! 이러다가 20년 전 LA 이야기까지 나올 기세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건 물 만난 과학자 이야기 들어주는거다.
특히 원래부터 수다스러우면 더더욱.
* * * *
알리언 박사의 수다는 장장 2시간이 넘어가서야 끝이 났다. 그나마도 내가 뛰쳐나와서 그 정도지 실제로는 오늘 내내 이야기 할 기세였다.
간간히 아는 이야기 나올때 맞장구 쳐주지 말껄 그랬어....
"오! 이야기 다 끝났어? 오늘은 좀 짧게 끝났는데?"
"너 이 새끼 그거 다 알고 그런거지? 어쩐지 초장에 자리 피하더라"
"알리언 박사가 수다쟁이인건 여기 연구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고. 오죽하면 연구 성과 발표할 때 어지간하면 알아서 하게 냅두는걸 일부러 30분으로 지정하겠어?"
"그래, 냅두면 두세시간은 기본적으로 떠들거 같아서 무섭다"
아는거 많은만큼 말하는 것도 많았다. 다시는 붙잡히기 싫다.
제이콥과 만나서 다시 호텔로 돌아온 나는 겨우 숨을 돌리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워싱턴 쪽에서 연락이 들어왔다.
"훈장 제작이 완료 되었다는군. 간단하게 수여식 할테니까 오라는데?"
"거 난 허례허식 같은거 싫어하는데"
"그래서 대통령이랑 악수만 하고 대강 끝낼거래. 오늘쯤 돌아갈거라고 했더니 저쪽에서 스케쥴 조정까지 하고 급하게 온거니까 좀 참아"
"이동은?"
"전용기를 보내준다더군. 아마 금방 갈 수 있을거야"
문득 비행기 하니까 생각난건데, 난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고민중이다. 그냥 힘 좀 쓰고 차원 찢은 다음에 돌아가면 편하긴 하겠는데. 이건 솔직히 제일 뒤로 밀어두었다.
차원진 감지기가 있는데 내가 함부로 차원 찢고 다녀봐라. 걸어다니는 핵무기 수준으로 위험도가 격상할거다.
남은건 물리적인 방법 뿐인데, 마찬가지로 미국을 횡단해서 태평양 가로지르고 간다거나 반대로 영국에서 중국 방향으로 관통해 일직선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솔직히 이것도 좀 그렇다. 나라 한두개면 모르겠는데 그런식으로 돌아가려면 상당히 많은 나라를 지나가야 한다. 그 와중에 트러블이 없을리 없고.
화이트 하우스에서 보내준 전용기를 타고 워싱턴까지 날아가는 동안 생각을 해봤지만 마땅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전용기에서 내리고, 간지나는 리무진 한대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대우 해주는걸 보면 한국이랑 미국이랑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사실상 국적은 의미 없지만 한국을 고집하는건 일단 거기에 지인들도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시온이 일부러 이민절차까지 밟고 한국으로 이민왔다는게 중요하다.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빡쳐서 한국 갈아엎은 다음에 미국으로 이민 왔겠지.
"드디어 다 왔군.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화이트 하우스지!"
"간만이네"
".........?"
내가 영어를 왜 잘한다고 생각하냐. 환생하면서 지구에서 태어나면 백악관 한번 안가봤을거라고 생각하냐.
지금처럼 좋은 일로 왔던 적도 종종 있지만 나쁜 일로 왔던 적도 있다. 세세한건 몰라도 대체적인 구조는 기억에 남아 있으니까 잠입하고자 하면 꽤 쉽다.
그래도 근 몇백년 내에는 죄다 무너진 백악관 밖에 본적 없어서 멀쩡한걸 보니까 새삼 즐겁다.
안내를 받고 들어가서 정겨운 복도를 거닐며 대통령실로 안내 받았다. 그 왜 영화나 만화 같은데서 잘 나오는 대통령 집무실 있잖아.
집무실로 들어서자 TV에서 자주 본 미국 대통령 아저씨가 환영하며 손을 흔들었다. 솔직히 이 아저씨가 당선 될줄은 몰랐는데.
미국의 45대 대통령, 드레이프 대통령이 악수를 건냈다.
"오! 환영합니다 라쿤맨! 오는 길은 불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런대로요"
한 국가를 책임지는 자리는 쉽게 못하는 법이다. 최소한 그 자리는 오르는 사람마다 나름의 장점은 있다.
......무당한테 나라 팔아먹은 사람은 냅두더라도 말이야. 그건 내가 봐도 욕 처먹을만 하다.
"일단 앉으시죠. 잠깐 쉰 다음에 훈장 수여식을 할겁니다. 뭔가 불편한건 없습니까?"
"아뇨, 편의를 잘 봐줘서.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나도 어지간해서는 나라의 높으신 분들에게는 적당히 예의를 갖추어 주는 법이다. 한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건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명 중에서 '사회'다. 그렇기에 그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조심히 관찰하고 대체적으로 후한 점수를 준다.
자고로 정치인이란 뭘 해도 욕을 처먹는 자리다. 사람의 의견은 통일될 수 없기에 한쪽을 만족 시켜주면 다른 쪽에서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인이라면 업적을 따지고 욕을 안먹으면 최고로 후한 점수는 주지만 설령 욕을 먹어도 나름의 업적이 있다면 점수를 준다.
하지만 잘못한게 너무 크면 아무리 잘한게 있어도 마이너스다. 대표적인 예로 박 대통령이 있다.
......아, 잘못 말했네. 박 대통령'들'이다. 아주 그냥 쌍으로 나라를 해쳐먹는구만.
"우선 저희 미국을 도와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쿤맨. 이건 정부의 대표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사입니다"
"아니, 별 말씀을"
"겸손할 필요 없습니다. 만약 썬더볼트 혼자였다면 그 신형 적성종을 잡지 못하고 큰 피해가 나왔을거란 결과도 있었으니까요"
"그거야 썬더볼트와 놈이 상성이 나빠서 그랬습니다. 다른 녀석이였다면......"
문득 시온이 했던 말이 지나갔다.
한국 쪽은 전화로 들어서 백리와 이경진 아저씨가 협력해 어떻게든 해치웠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이경진 아저씨와 원거리 중점의 인간형 적성종의 상성이 더럽게 나빠서 냅뒀으면 피해가 장난 아니였을 거라고 한다.
하나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어도 둘은 필연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몰라도 중국과 일본의 것도 그렇다면......
아무래도 차원진을 일으키는 저 너머의 상대는 이쪽의 정보도 어느정도 얻은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게 본론이기는 합니다만......미국으로 이민 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라쿤맨?"
"그건 이미 대답 했던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겨우 한번 시도한걸로 넘어갈만큼 간단한 문제도 아니죠. 더군다나 국방과 관련 됐다면 더욱 말입니다"
뭐였더라......대공황 이후로 UN에서 맺은 협약 중에서는 포스 유저의 군대 편입 불가 뿐만이 아니라 포스 유저의 국적 결정의 자유도 보장한다고 했다. 솔직히 이건 그냥 타국의 포스 유저를 데려오기 위한 스카웃 정책에 불가하다.
물론 아프리카 같은 나라의 자기 권리도 보장 받지 못하는 포스 유저들을 데려오기 위한 정책이기도 하지만 좋은 조건만 제시하면 남의 나라의 멀쩡한 포스 유저도 데려올 수 있는 협약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포스 유저들이야 나름 공무원 대우를 해주기도 하고, 평생 우리나라 땅 밟을 생각 하지 않는 이상 그 스카웃 제의를 쉽게 받을리 없겠지. 없다고는 못해도 상당수는 한국에 남는걸 선택할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나는 미등록 포스 유저이기에 넘어가는건 쉽다.
"아내 되시는 분이 미국 시민권자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이민 가는 것보다 차라리 미국으로 이주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딱히 국적에 얽매는건 아닌데 울 마누라가 일부러 한국까지 와서 그런거거든요. 기왕이면 바꾸지 않으려고요"
만약 시온과 만났을 때 한국으로 이민온 시점이 아니라 아직 미국 시민권자였을 때라면 차라리 내가 미국으로 이민가는 편이 빨랐을 것이다.
시온의 인맥을 생각하면 아마 시민권 발급 받는것도 순식간이고 대우도 한국보다 나았을게 분명한 일이다.
근데 어쩌나, 마누라가 이미 한국 사람인걸. 게다가 피자 먹는거 좋아하긴 해도 된장찌개, 김치찌개 끓여먹는걸 더 좋아하는 성격이라 한국이 더 낫다.
자고로 식물은 땅을 가리니까 정말로 맛있는 김치를 먹고 싶다면 국산 배추를 쓰는게 좋다. 된장이야 만들기 마련이라도 김치는 달라.
"그건 좀 아쉽군요. 하지만 미국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원하신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글쎄요"
내가 뭔 일을 저지를줄 알고 그렇게 잘 대해주시나.
수틀리면 가면 벗고 개판을 치는게 내 본성이다. 나라 하나를 작살 내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 있다. 설령 이 별이 적성종 때문에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나서지 않고 지켜본 뒤에 내 일이나 하러 갈게 뻔하다.
뭐, 지구가 멸망해도 아는 사람 몇몇은 데려가서 화성에 테라포밍 장비랑 같이 떨궈줄 용의는 있다. 아는 사람 주 업무가 그거라서 테라포밍 설비는 싸게 들여올 수 있거든.
"알리언 박사는 이미 만나고 오신겁니까?"
"아, 네. 워낙 수다스러워서 한참을 잡혀 있었죠"
"하하, 그 사람은 원래 그럽니다. 그래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만나는걸 꺼려하죠. 약속이 있어도 몇시간 전에 잡고요"
아직 훈장 수여식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니, 그것 자체가 일부러 만든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백악관에 스케쥴 짜는 사람들이 몇인데 시간 관리를 그렇게 못하겠는가.
그리고 본격적인 본론이 나왔다.
"그리고......라쿤걸이란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흠"
드레이프 대통령의 본론은 그거였다. 조금 우회해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성격이 꽤나 노골적이다.
그래서 당선 됐을 때 미국 사람들이 '드레이프 대통령이 미국을 레이프한다!'라는 표어가 나돌기도 했었지. 워낙 재미있는 표어라서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몇달 전, 차원진 경보 없이 일어나는 차원진으로 인해서 여러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만약 새로운 차원진 감지기를 만들지 못했다면 훨씬 더 큰 피해가 발생했겠죠"
"미국에는 앨리사 니어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차원진만 예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 미국 전체의 모든 차원진을 감지하려고 한다면 그녀의 목숨이 위험할겁니다"
그러긴 하겠지. 나도 예진이가 예지 특성을 다룰 수 있게 하려는건 단지 유용해서 뿐만이 아니라 제어가 안되서 마구잡이로 미래를 보면 본인한테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알리언 박사도 차원진 감지기를 개량하기 위해서는 반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측면에서 그랬죠. 그 피해를 어떻게 막아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난데없이 하늘에서 한세대 앞선 최신 차원진 감지기가 뚝 떨어진겁니다"
일본에서 사고친 것 때문에 외교적으로 고생을 많을 우리나라 정부에게 대신이라고는 뭐하지만 시온이 차원진 감지기를 다운그레이드 해서 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에서는 한세대 앞선 물건이고 감지 못하던 차원진도 훨씬 빨리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존나 강한 개인은 나라를 바꿀 수 있지만 지식을 가진 개인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나 같은 것보다 시온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적성종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번에 나타났던 인간형 적성종처럼, 놈들은 분명 다시 올겁니다. 다음에는 무사히 끝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분은 소개시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민 제의도 거절했는데 그거라고 승낙할까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물어보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분명 라쿤걸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저희는 영웅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 해두죠"
귀찮아진다는 문제도 있긴 하지만, 시온은 약간의 대인기피증이 있다.
지인 몇몇은 괜찮아도 모르는 다수의 시선은 피하려고 한다. 원래는 그런거 신경 안썼지만 옛날에 트라우마가 된 일이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 내 생각만으로 그녀를 사람들 앞으로 떠밀고 싶지 않다.
"시간도 됐으니 슬슬 훈장 수여식을 시작하죠"
드레이프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 외에도 몇가지 더 이야기 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짧게 끊었다.
아니, 알리언 박사가 말이 너무 많아서 상대적으로 짧아 보이는건가......
옆에서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훈장이 든 케이스를 들고 왔다. 케이스를 열어 훈장을 꺼내자 별을 기반으로 한 형태의 회색빛 훈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하십시오, 프레지던트. 보기보다 무겁습니다"
"훈장이 무거워봤자 크기가 작으니......음?!"
드레이프 대통령은 훈장을 건내받다가 생각외로 무거운 무게에 놀라는듯 보였다. 훈장의 크기는 기껏해야 손바닥 크기보다 좀 작은 수준이였지만 겉보기의 무게는 아닌듯 보인다.
"이런, 지구에는 없는 금속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무거운 모양이군요"
"네?"
"미국의 영웅에게 평범한 훈장을 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운석에서 얻은 지구에는 없는 금속을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신분 증명도 가능할테고요"
얇은데다 고작해야 손바닥보다 작은 훈장의 무게는 큼직한 맥주캔 하나 정도 되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애가 아닌 이상 누구나 들 수 있는 무게이기는 하지만 생각없이 받았다가는 놓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금속 어디서 본것 같단 말이야.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좋은 의미로 본건 아닌데.
드레이프 대통령은 내 목에 훈장을 걸어주면서 말했다.
"무게 때문에 걸고 돌아다니지는 못하겠군요. 장식용으로 쓰셔야 할겁니다"
"여차할 때는 표창으로 써도 되겠네요"
"......장식용으로만 써주십시오"
난 아닌데 울 마누라 생각은 모르겠다 야.
이런 쪽으로는 어린애 같은 면이 있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