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라쿤맨 비기닝]
일이 터지기 전에 이 윤양이 알려주었던 맥시코 요리 전문점은 좀 부서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형태는 남아 있었다. 잠깐 시간이 지나니 가게 주인이 돌아왔다.
"아저씨, 장사 해요?"
"오! 세상에! 당연히 해야죠! 좀 박살나긴 했지만 배고픈 영웅들을 위해서라면 가게가 무너졌어도 열어야죠!"
가게 주인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동안 무너진 가게 일부를 치우는걸 도와주고. 숨 돌리고 앉아서 시원한 콜라 한잔을 들이켰다.
"크으, 본고장 탄산맛은 쥑이네"
"콜라 같은건 전부 규격제품 아니였나? 한국은 다른가?"
"그냥 기분내는거지 뭐. 근데 한국은 원래 수출용과 내수용이 다른 기업도 있어서 모르겠다 야"
콜라가 국내 공장에서 생산하던가? 잘 모르겠네, 마시긴 잘 마셔도 옆에 생산지 같은건 본적 없으니까.
"근데 자네 밥은 어떻게 먹나? 가면이라도 벗으려고?"
"이렇게 먹지"
내가 버튼 하나를 누르자 입 부근의 가면이 스륵, 하고 올라갔다. 시온은 이런거 잘 만들어서 참 좋단 말이야.
주문했던 타코가 나오자 나와 제이콥은 하나씩 들고 베어물었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하드 타코와 안에 있는 살사 소스, 그리고 고기와 야채들은 상당히 조화로웠다.
음, 한 이틀만에 먹는것 같아서 더 좋군. 시온한테도 포장해가서 주고 싶지만 여기서 포장해가면 오래걸릴테니 그냥 내가 따로 만들어주는 편이 나을것 같다.
한창 먹고 있을 무렵, 방공호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게로 몰려들었다. 안까지 들어오진 않지만 창 밖에서 우리들이 밥 먹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들어오려고도 했지만 가게 주인이 직접 나가서 막았다.
"우리들의 히어로가 밥을 먹고 있는데 지금만큼은 내버려 둬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건드린다. 덕분에 식사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본고장 타코답게 하나하나가 묵직했지만 나도 제이콥도 대식가인지, 아니면 이번 싸움으로 고생해서 열량 보충이 시급했는지 한사람에 열댓개씩은 술술 넘어갔다. 덕분에 가게 주인 아저씨만 열일 중이다.
한창 먹던 차에 제이콥이 물었다.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할텐가? 듣자하니 밀입국해서 왔다던데 돌아갈때도?"
"헤엄쳐서 가던지 아니면 따로 밀항을 하던지 나가면 되겠지 뭐"
"미국의 영웅을 밀항하게 둘 수는 없지. 걱정마, 어떻게든 처리 해줄테니까"
"이상한 짓만 안하면 나야 좋지"
일본은 날 억류하려고 했다가 한바탕 일을 벌였다. 근데 미국에서 그러면......일본이야 경제적으로는 몰라도 세계적으로 보면 작은 나라니까 그렇다 쳐도 미국에서 그러면 국제적 범죄자가 되는건 한순간이다.
딱히 되도 상관은 없지만 시온한테 피해가 갈테니까 그건 좀 걱정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한가지 더. 미국으로 올 생각 없나?"
"싫은디"
"왜? 지금 와서 이민 온다고 하면 모두 환영할거라고! 아, 신비주의 때문에 그런가? 그러면 신분은 비밀로 해두고 처리하지"
"한국에 마누라 있는데 왜 일부러 미국까지 와?"
"What?!"
내가 얼굴이 노안이긴 하지만 얼굴 가리고 목소리를 변조하면 청년 정도로 보인다고 내가 라쿤맨인걸 아는 사람들에게 몇몇 들은적 있다. 젊은데 결혼했다고 들으면 조금 놀라긴 하겠지.
그러고 보니 시온이 원래 미국 시민권자였는데 한국으로 이민왔다는 설정이였나?
문득 가족 중에 미국 시민권자가 있으면 배우자도 미국 시민권 따기 쉽다는 말이 스쳐지나갔다. 근데 어차피 시온은 이제 한국인이잖아. 민증에도 최시온으로 되어 있다.
그 이전에 외계인보고 국적 따지는 것도 이상하고. 나야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으니 한국인이지만 시온은 아니잖아.
"더 이해가 안가. 그러면 사이 좋게 이민오면 될텐데 말이야"
"됐어. 집도 한국에 있고 지인도 한국에 있는데 괜히 미국으로 갈 필요는 없지. 아, 슬슬 사람이 오는데?"
바깥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부에서 나온것 같이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이쪽 테이블로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앉아도 될까요?"
나는 대답 대신 발로 의자를 밀어서 자리를 내 주었다. 그는 자리에 앉고 우선 자기 소개부터 했다.
"중앙 정보국 소속의 제이슨 브라이트 요원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제이슨 요원이라고 불러주시죠"
"나는 라쿤맨.....아, 딱히 소개는 필요 없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우선 미국을 구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라쿤맨"
"거 한게 뭐 있다고. 나도 필요에 의해서 했을 뿐인데 감사 인사 들을 필요는 없어"
진짜다. 만약 시온이 손해보는게 없었다면 내가 미국까지 와서 이 지랄을 할 필요는 없었을거다. 설령 예진이가 본 미래가 있고 이경진 아저씨의 부탁이 있었어도 말이다.
내가 이 정도 고생을 감수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은 오직 시온이다.
거기 팔불출이라고 욕한놈들 잠깐 나와봐.
"CIA 소속이지만 저는 지금 정부의 대변인으로서 나왔습니다. 워싱턴에서 결정한 뜻을 전하러 왔지요"
"어이쿠, 저쪽에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이군"
반 남은 타코를 마저 먹고 있던 제이콥이 투덜거렸다. 나는 콜라나 들이키면서 뭐라고 하나 일단 들어주었다.
"우선 라쿤맨, 당신이 저희 미국에 도와주신 일은 겨우 돈 몇푼으로 보상할만한 수준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도 돈 받으려고 한거 아닌데"
"크흠, 하지만 그 전에.....밀입국 문제부터 해결 하도록 하죠"
"아"
그걸 걸고 넘어지면 쪼오끔 내가 걸리는데. 밀항해서 미국 왔는데 가장 민감한 부분을 벅벅 긁으면 어쩌나.
저번에 일본에 간건 그냥 평범하게 여권 들고 입국절차 밟고 들어가서 그나마 변명이라도 있지만 이번건 진짜 아웃이다. 양심상으로도 좀 찔림.
"저희는 라쿤맨 당신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의회에서도 결정난 사안이기 때문에 서류 처리만 마무리 하면 됩니다. 그걸로 밀입국 문제도 해결될겁니다"
"아니,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먹어? 왜 그렇게 빨라?"
일 터지고 끝나는데 기껏해야 1시간 가량이다. 거기서 우리가 밥 먹은 시간도 있으니 플러스 30분. 길어야 2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다. 아직 오늘 해도 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민권이라니......시민권?
게다가 명예 시민권이면 그냥 줄만한 물건은 아닌데?
"근데 난 일단 대한민국 시민권자인데. 우리 나라는 이중국적이 허가가 안돼. 그래서 우리 마누라도 편한 미국 두고 한국으로 이민온거고"
"아, 그거라면 명예 시민권이기 때문에 따로 이중국적에 해당되지 않......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울 마누라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민 왔다고?"
만약 시온을 진작에 만나서 그녀가 미국 시민권자였을 때라면 난 한국에 있던 지인들 다 두고 미국으로 따라갔을 것이다.
나한테 중요한건 시온이지 국적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 사는데는 거기서 거기고.
"이봐! 왜 마누라가 미국 시민권자였다는 소리 안했어?!"
"그런거 말해서 뭐해? 어차피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우리 나라를 도와주러 온건 아내의 조국이여서 그런건가?"
"그건 노 코멘트"
나도 눈치는 있으니 이 자리에서 울 마누라 사업 말아먹으면 안되서 지키러 왔다고 하면 분위기가 뭐가 될지 아니까 말을 줄였다.
자기 나라도 아니고, 아내의 조국을 지키러 왔다는 소리에 제이콥과 제이슨 요원은 감동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 감동을 부술만큼 모질지는 않다.
"이거 아쉽군요. 아내분 따라서 이민 오셨다면 진작에 미국의 품에 안을 수 있었을텐데"
"나도 그 생각 하긴 했는데 마누라가 한국에 이민 절차 밟는걸 먼저 했더라고. 솔직히 난 국적 같은거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언어도 그렇고"
"그러고보니 영어도 잘 하시는군요? 영미권에서 자라셨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비슷하긴 하지"
지구라는 행성은 상당히 특이하다. 창조의 절대자의 사랑을 받는건지 한 차원을 보면 하나쯤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간간히 지구에서 태어난적 있던 나는 지구의 언어 몇가지를 알고 있다.
영어랑, 중국어랑, 일본어랑......러시아어 조금. 그리고 이탈리아어도.
"아무튼 저희 측에서는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여 라쿤맨 당신의 도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앞으로 그 어떤 국제적인 문제에 휘말리시더라도 저희 미국은 당신의 편을 들어드릴겁니다"
"그거 편해서 좋긴 한데 내가 나라는 증거는 어떻게 하게? 다른 사람이 가면 쓰고 나 같이 행동하면 어떻게 하려고?"
가면 쓴 슈퍼히어로가 가장 중요한건 익명성이다. 지인들이 봐도 알아볼 수 없는 그런 익명성은 정체를 숨기고 자신을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반대로 누군가 흉내내서 모함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등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기 쉽다.
나도 마찬가지다. 누가 라쿤 가면 쓰고 사람 죽이면 그게 남이 한건지 내가 한건지 어떻게 알아?
"저희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품으로서 명예 훈장을 하나 수여하기로 했습니다"
"명예 훈장?"
"예, 특별한 소재에 특수한 기술로 만들어서 모조품을 만들 수 없게 만든 유일무이한 훈장입니다. 증거품으로서 제시하기에는 충분하죠"
하기사, 뭘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형태고 어떤 기술로 만들어졌는지 자기만 알고 있으면 증거가 될만하다. 그것도 유사품으로 사기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최소한 아무나 라쿤 가면 쓰고 지랄하는게 나한테 덮어 씌워질 가능성은 낮아졌다.
일 처리 빠르네. 미국이라서 그런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걸까?
"그 외에도 이런저런 특혜나 보상을 준비 해뒀습니다만, 그에 관련해서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지요"
"아, 좀 많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정부 측만이 아니라 다른 연구소, 기업 등에 관련해서 추가로 늘어나는게 많기에 확실한 것만 따로 뽑아 가져왔습니다"
"아니, 이게 확실한 것만이야?"
A4용지 두어장 정도지만 빽빽하게 들어차 적혀 있었다. 기본적으로 명예 시민권자니까 일단 세금의 의무나 그런건 없고......대충 흝어 봤는데 상당히 대우가 좋다. 조금이지만 미국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다음 문제로......두분께서 잡으신 인간형 적성종이 있습니다"
"아, 그놈? 그게 왜?"
"비교적 온전하게 잡았기 때문에 사체와.......가지고 계신 녀석의 코어에 대해서 여타 기업과 연구소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연락 들어오는 이유 중 상당수는 그게 원인입니다"
"이놈 때문에 애먹긴 했지. 나 없었으면 미국까지는 몰라도 뉴욕은 확실히 날아갔을테고"
"이봐, 내가 있단거 잊어먹었어?"
"넌 다른건 둘째치고 상성이 나빠서 안돼"
만약 일본의 히비키나 우리나라의 이경진 아저씨라면 전투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둘 다 근접전으로 먹고 산 사람이니까 피해는 생겨도 상대는 가능할거다.
운이 좋다면 이경진 아저씨는 격퇴도 가능하다. 회색공명검은 나도 무시 못하는 기술이라 카운터로 먹이면 이길것이다.
"일본 쪽은 얼마 전에 상황 종료 됐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쪽도 마찬가지로 인간형 적성종이 나타났더군요"
"아, 그래? 히비키는? 걘 멀쩡하데?"
"현재 의식불명이긴 하지만 인간형 적성종도 격퇴 했다고 합니다"
"뭐야, 가까히 붙어서 맞딜이라도 했나?"
"저희 쪽에 나온 적성종과 달리 무기는 없어서 서로 치고박고 싸웠다고 합니다. 아직 자세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고요"
아무래도 히비키는 진짜 맞딜을 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도 마스터 유저가 막기에는 좀 버거운 위력이 있던 공격인데 무기가 없다고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리 없다. 처맞으면서 때렸겠지. 그러다가 먼저 나가 떨어진게 적성종 쪽이고.
아무튼 목숨이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회복할거다. 몸 하나만은 전생에 쌓은 업 덕분에 징하게 튼튼할테니까.
"중국도 상황이 끝났습니다. 저쪽은 차원진이 3개가 열렸는데 마찬가지로 인간형 적성종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거기 마스터 유저가......권룡여제 용화정이였나?"
TV에 나온다고 내가 마스터 유저 이름을 다 외우고 다니진 않지만 최소한 눈으로 보이는 성별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중국의 마스터 유저는 여성이였다.
이명은 마치 무림의 별호 같은 느낌이다. 뭐, 무림의 발상지가 중국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일단 같은 포스 유저라도 일반적인 신체능력으로는 남성쪽이 위다.
남자가 더 근육을 만들기 쉽고 가이아 포스라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전기(가이아 포스)로 돌리면 하드웨어(몸)이 더 좋은 쪽이 효율적이니까. 하지만 거기서 차이를 만들 수 있는게 소프트웨어(특성)이다.
"고전하기는 했지만 격퇴에는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려왔습니다......피해는 조금 크지만요"
"흠, 아시아에서 평균치가 가장 강한건 용화정인가 그 아가씨일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만난 마스터 유저 중에서 순위를 살펴본다면 순수하게 1대1 대전을 생각했을 때, 1위가 용화정, 2위가 이경진 아저씨, 3위가 히비키, 4위가 제이콥이다.
이경진 아저씨의 회색공명검은 확실히 필살기라 말할만 하지만 용화정이 홀로 인간형 적성종을 상대했다면 전체적인 스펙은 그녀가 위다.
설령 회색공명검으로 카운터 치려고 해도 피하면 그만이다. 지금 그 아저씨 수준으로는 죽을 정도로 쥐어짜야 3번이 한계일테니까.
"그러고보니 한국은 어떻게 됐어? 말 나오지 않는걸 보니까 아직 상황 진행 중인가봐?"
"아, 네. 한국에도 차원진이 2개 가량 동시 발생했습니다"
내 나라라고 제이슨 요원은 다른 나라보다 세세하게 설명했다.
"발생 지역은......용산동과 명동이라는 곳이라고 합니다"
"뭐 시팔?!?"
아이고! 우리 치킨집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