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라쿤맨 비기닝]
한 10분쯤 달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까 내가 택시를 잡을 때의 일도 꺼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택시 잡을 때 택시들이 그냥 지나가던데......"
"아, 최근에 한 일 때문에 그럴겁니다. 전에 누가 동양인을 태웠다가 팁 가지고 시비가 붙어서 말이죠. 그거 때문에 최근에는 동양인을 태우는걸 쉬쉬하고 있죠"
"하긴, 아시아에는 팁 문화가 적으니까요"
한국이나 일본, 중국만 가더라도 팁 문화는 거의 없다. 만약 한국 사람이 미국에 와서 가장 생소한 문화가 뭐냐고 하면 일단 집에 들어가는데 신발 신고 들어가는거랑 팁 문화 정도가 있다.
팁이란건 뭔가 값을 치룰 때 자발적으로 주는 돈을 의미한다. 대충 서비스에 감사합니다, 같은 의미로 주는 것인데 이게 당연시 여겨져서 미국 내에서는 상당히 뿌리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컬럼비아 대학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글쎄요, 도로 상태는 그나마 괜찮은데 워낙 먼 거리라,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정도 걸릴겁니다"
생각보다 멀다. 아니, 미국 땅덩어리 생각하고 중간에 센트럴 파크도 끼어 있을 정도면 말 다했지.
아까 페리선 타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가고 싶은데......
"기사님. 한시간 반 내로 끊으면 택시비 더블"
"........"
"한시간 내로 끊으면 거기서 또 더블"
".......!"
이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내려 매고 핸들을 다시 거머쥐었다.
"일단 안전벨트부터 매시는게 좋을겁니다 손님"
그날 나는 미국의 폭주 택시를 보았다.
* * * *
딱 59분. 아까 내가 제안했을 때 시간에서 딱 59분이 흐른 뒤었다. 이곳 토박인지 가장 빠른 루트를 이용하고 때로는 신호도 무시하고 질주하는 모습은 예전에 어디선가 영화에서 본듯한 그 택시의 모습이였다.
"자, 컬럼비아 대학에 도착했습니다. 손님"
"훌륭하네요"
나는 순순히 지갑을 꺼내서 4배에 달하는 택시비를 지급했다. 잔돈은 팁이니까 받지 않는다. 어차피 시온이 환전해온 돈은 대부분 100달러 짜라리 거스름돈 받기도 귀찮다.
"감사합니다. 좋은 관광 되시길 기도 하겠습니다"
"종교 믿으세요?"
"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죠"
개인적으로 신이란 존재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한다.
인간이 발전하는데 필요한건 향상심이지 기댈 곳이 아니다. 백날 천날 기도해봤자 신은 응답해주지 않는다.
신의 존재는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신의 필요성은 부정하고 싶다. 어차피 기도해도 아무것도 안해주는 신이 왜 필요하냐?
사후세계? 윤회사상인거 알면 현대 대부분의 종교는 싹다 갈아 엎어진다. 그나마 불교나 살아남겠네.
"좋은 하루 되세요"
나는 길게 말하지 않고 인사를 건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눈 앞에는 마치 그리스 신전같은 풍의 기둥이 입구에 세워진 큰 건물 하나가 반겨주었다.
역시 돈 많고 유명한 대학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만. 한국에 있을 때는 유명 대학이라고는 연고대 밖에 몰랐는데 여기 시설이랑 비교하면 장난 아니다.
대학이라.....생각해보면 대학 다닌 삶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 의무교육만 받고 사회에 나가거나 했으니까. 몇번 다녀본 뒤로는 대학은 그냥 좀 더 심도깊게 배울 뿐이지 고등학교랑 크게 다를것도 없어서 대학 진학은 접었다.
"어디보자, 집 주소가.....웨스트 113번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나?"
무슨무슨 건물 몇층 몇호, 그런것 까지 다 적혀 있지만 일단 그 거리까지는 가봐야 할것 같다.
흠.....영어의 본고장 미국하니 초딩 때 영어 수업 받던거 기억나는데. 초록 외계인 지토라던가.
아무튼 여기서 먼 곳은 아니였다. 나는 일단 걸어서 그 거리로 간 뒤에 주소에 적힌 건물을 찾았다.
이 건물 5층 502호......흠.
"집에 없는 것 같은데?"
일단 혹시 몰라서 노크를 하고, 기감을 펼쳐서 안을 살펴봤지만 안에 있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집에 없으면.....학교에 있으려나? 엇갈린 모양이다.
나는 다시금 대학을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대학에 들른 후에 집으로 갈걸. 설마 차원진 난다고 예지까지 됐는데 설마 등교한거야? 와, 학점 부족한가 보네.
캠퍼스에는 주변에 청춘 남녀들이 가득했다.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 보이고, 한창 때의 젊은 활기를 곳곳에서 뿌리고 있었다.
그냥 여기 잔디에 앉아 주변 구경만 해도 재미있겠다.
나는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상이 험악할텐데.....미국 사람들이 그런거에 신경 안쓰는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건 이경진 아저씨의 딸내미의 집 주소와 이름이 이 윤이라는 정도다. 어디 학과에서 수업을 받는지도 모른다.
대학의 접수 데스크를 찾아서 그녀가 어디있는지부터 찾기로 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학생 한명을 찾고 싶은데요"
"아, 그러세요? 실례지만 학생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전형적인 금발의 백인 여성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솔직히 필요한 절차고 내가 워낙 인상이 나쁘니까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면 꼭 대답해야 하긴 하다.
"그 학생 아버지랑 지인입니다. 상황이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괜찮은지 한번 보러 왔어요"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학생분 성함은요?"
"이 윤이요. 출신은 한국이고요"
"North? South?"
"......남쪽이요"
미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이 아직도 전쟁하는줄 아는 사람도 있다다니.
.....뭐, 솔직히 그거 생각하면 나도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은 기억 못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은 작은 나라긴 하다.
"이 윤.....아, 여기 있네요. 의과대학원생이네요"
"대학원생이요?"
아니, 잠깐만. 왜 굳이 대학원생을......아, 다른 대학원생인가?
한국에서 보통 대학원생을 말하면 석사 과정 밟고 박사 과정으로 가는 사람을 말하지만 의과 대학이라면 편의상 그렇게 말하는거지 배우는 과정은 대학이랑 비슷할거다.
순간 수라의 길이라도 가는줄 알고 깜짝 놀랐네. 쿠퍼 아저씨가 그럴거야. S.T.A.Y!!!
나는 데스크에서 알려준대로 그쪽 대학원을 찾아갔다. 이야, 명문대라서 그런가? 죄다 전교 1등쯤은 하고 온 사람들 같구만.
건물을 찾는건 쉬웠다. 어차피 이런 대학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알아보기 쉬운 표지판은 있으니까. 장소만 어딘지 알면 찾아가는건 금방이다.
건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근처에 있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딱히 이상해서라거나 그런게 아니다. 포스 유저, 그것도 상당한 수준을 가진 포스 유저였다. 내 주위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을 찾으면......음, 백리 이상 루리 미만? 루리가 원래 나이대보다 쌔니까 그걸 감안하면 나름 손꼽히는 실력으로 보인다.
이곳 학생으로 보이지 않는듯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인데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서 있어서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는 모습이였지만 외모가 다 말아먹고 있었다.
갈색 머리칼의 약간은 아담해 보이는 체구를 가진 그녀는 포스 유저인 덕분인지, 아니면 원판이 좋아서인지 몰라도 상당히 예쁜 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백리도 나름 잘생긴 타입이긴 했다.
그래봐야 울 마누라한테는 못비비지. 초월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외모인데.
일단 나를 주시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뒤따라서 들어오는 그녀의 기척이 느껴진다.
"보디가드로 포스 유저 하나 고용했다고 하더니.....저 사람인가?"
포스 유저가 되면 남녀의 차이가 줄어들긴 해도 없는건 아니다. 기본적인 하드웨어의 문제다. 보통 여성보다 남성이 근육이 생기기 쉽기에 똑같은 양의 포스로 육체를 강화해도 차이점이 생긴다.
하기사 딸내미니까 보디가드가 남자인 것보다 여자인게 낫겠지. 거기다가 실력도 있고.
아직 수업중인것 같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 마시면서 창밖의 대학 정경을 구경하니 상당히 운치 있었다.
멍때리고 있다보니 수업종 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몰려나오는 모습은 딱히 우리 나라랑 다를바가 없었다. 점심 시간 전 4교시에 튀어나와서 급식실 가는 모습이랑 별로 차이도 안나네. 얘들도 사람임갑다.
어느 교실에서 수업받는지는 모르니까 나오는 사람 얼굴을 전부 확인했다. 기껏해야 학생은 백명 조금 넘어가는 수준이고. 그 중에서 동양인은 또 적은데다 여자로 한정되어 있으니 찾기에는 쉽다.
세 명 정도로 범위가 좁혀졌지만.....그 중에서 이경진 아저씨를 닮은 여자애는 한명 뿐이였다.
엄마 안닮고 아빠 닮은 것 같은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낫다. 포스 유저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가 미남 미녀니까 그쪽을 닮았다면 딸도 미녀일게 당연하다.
나름 지적은 분위기에 안경을 써서 '분자'하고 말한다면 안경취향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법한 미녀였다. 조금 앳되어 보인다, 하고 생각했지만 주변에 있는게 대부분 역변을 거치는 서양인이라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것 같다.
"이 윤양 맞으시죠?"
".......맞는데요. 누구시죠?"
슬쩍, 뒤에서 아까 입구에서 봤던 보디가드의 기척이 느껴졌다. 여차할 때는 손을 쓰려는 듯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인데.....싸우러 온거 아니거든.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버님이 걱정하셔서 잠깐 보러 왔어요"
"아빠가요?"
조금 놀란 기색을 띄면서 눈을 휘둥그래 뜨자 상당히 귀여웠다. 그 아저씨가 왜 딸바보가 됐는지 알겠다. 이렇게 예쁜 딸이면 이래저리 걱정하고 어떤 놈팽이 같은 자식이 건들진 않을까 신경쓰이겠지.
우리들은 잠깐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건물 안보단 바깥의 벤치 쪽이 나을것 같아서 1층의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밖으로 나왔다.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들어가니 피로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나는 그녀에게 내 원래 목적을 밝혔다.
"뉴스 보셨죠? 그거 때문에 아버님이 걱정하셔서 대신 좀 봐달라고 부탁해서 어제 비행기로 왔거든요"
"아, 그러신가요? 의외네요"
"뭐가요?"
"아빠가 절 신경쓰는게요"
아, 뭔가 지독하게 오해하고 있는 부녀관계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하기사 그 아저씨. 성격이 사교적인 느낌은 아니였지. 게다가 적성종 때문에 아내를 잃어서 혼자 아이를 키운다면......
"어릴 때 아빠 얼굴을 본 적이 드물었어요. 가끔 운동회를 할 때도 아빠 친구분이 오셨을 뿐이고......워낙 바쁘다는건 알지만 같이 밥 먹은 적도 드물거든요"
"공사다망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죠"
"가족보다 더요?"
그렇게 물으면 내가 할말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였던 적도 있고 어머니였던 적도 있는 나로서는 부모의 사랑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사랑받은적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보다 몇천배는 큰 사랑을 받고 있을거예요. 더군다나 아버지잖아요? 원래 남자는 쪽팔려서 사랑한다는 말 별로 안해요"
남자는 내색하지 않는다. 그게 설령 사랑이라도 말이다.
"그래도 아버지랑 몇번 같이 논적은 있죠?"
"아......가끔요"
그녀는 조금 옛날을 생각하는지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가족 관계에 추억하나 없을리 없다.
"정말로 가끔. 아빠가 쉬는 날에는 반드시 같이 외출하곤 했어요. 외식을 하던 놀이공원을 가던, 그때만큼은 실컷 놀고 들어왔죠"
"거봐요. 사랑하는거 맞다니까. 마스터 유저라서 매일 대기하는 사람이 간신히 받는 휴일에 집에서 쉬지 일부러 애 데리고 나가서 노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힘들걸 내색하지 않는게 가장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에게는 괜찮다고 하면서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은게 그들의 천성이다.
아무리 철없는 남자라도 가족이 생기고 자식이 생긴다면 그렇게 변하게 된다.
가정폭력? 야, 그 새끼들은 사람이 아니고.
"아무튼 아빠가 보내셨다고요? 별일이네요. 유학 갈 때도 그리 큰 말은 안하더니"
"이번 일이 크긴 큰 모양이죠. 아마 일 터질 때까진 여기 있을거예요"
"딱히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이미 그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어서 오히려 여기가 제일 안전하니까요"
"안전이요?"
뉴욕에는 이미 대대적인 차원진 예보가 내려져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비하기 위해 인력을 모으는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맨해튼은 인구가 많아서 저희 학교 지하에 대형 벙커도 만들어 뒀거든요. 여차할 경우에는 거기로 피해서 상황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되니까 오히려 더 안전해요"
"그래도 최소한 다른 곳으로 피난가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뉴욕이 얼마나 넓은데 꼭 여기에서 일이 터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생각해보면 내가 다녀온 길만 하더라도 퀸즈, 브루클린, 맨해튼이다. 뉴욕이 그냥 한 도시인것 같지만 생각보다 넓다. 여기서 지하철타고 배 타고 택시타고 몇시간이더만.
일이 생겨도 이 근처에서 차원진이 일어날 확률은......확률은 낮은데 내 감은 아니라고 하는데?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아까 말한대로 일 터질 때까진 이 근처에 있을거예요. 혹시나 문제 생기면 도와드리러 올테니까 학교 벙커에 숨어 계시고요. 전 배고파서 밥이나 먹으러 갈께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먹었더니 출출해서"
"고생하시겠네요. 아, 이 근처에 멕시코 요리 잘 하는 곳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그럼 저야 고맙죠"
멕시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멕시코 요리는 상당히 맛있다. 특히나 매운 고추 들어간게!
과카몰리에 찍어먹는 나초가 얼마나 맛있는데.....물론 나라 자체는 치안이 별로지만 요리는 맛있다. 신사의 나라인 영국은 반대로 요리는 못하잖아.
일단 한번 만나긴 했으니 밥부터 먹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근처에 호텔 같은 숙박 시설 어디 없나......없으면 센트럴 파크에서 노숙이라도 해보지 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겠다. 밥이나 먹을까"
이 윤양과 헤어지고, 그녀가 알려준 멕시코 요리 전문점을 찾아가려던 찰나, 등줄기에 기분 나쁜 뭔가가 타고 오르는듯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어? 지금? 이렇게 다짜고짜?
나는 불길한 느낌의 근원지를 보았다. 여기서 거리를 타고 몇 블럭 너머의 교차로. 거기가 그 진원지였다.
애애애애앵!!
그리고 뒤이어 차원진 경보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으며 저마다 비명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대피하기 시작했다.
[안심하십쇼 여러분! 아직 차원진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인근 주민 여러분들은 학교 내의 지하 벙커로 피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알려드립니다! 인근 주민 여러분들은......]
학교 쪽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대공황 이후로 20년. 충분히 대비책을 세우기에는 넉넉한 시간이였다. 방금 이 윤양이 말한대로 학교 내에는 지하 벙커가 있어서 여차할 경우에는 인근 주민들까지 벙커에 대피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크고 넓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이윽고 인근 경찰들의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학교로 모이기 시작했다. 중앙 건물에 모여 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모습은 예전부터 종종 그런 훈련을 받아온듯 익숙해 보였다.
여기 인구 밀도가 높다는 말은 장난이 아니였는지 주변 다른 벙커가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학교로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장난 아니였다. 학교 내부의 학생들만 하더라도 1만명은 족히 넘어가는데 인근 주민들만 하더라도 그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두두두,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헬기 몇대가 인근으로 모여들고 뒤이어서 전차가 모여든다. 일사분란하게 모여서 진형을 갖추는 모습이 역시 세계에서 군사력에 돈을 제일 많이 꼬라박는 나라답다고 생각했다.
기감을 넓혀서 다른 곳도 살펴 보았다. 음......일단 맨해튼에 두개. 퀸즈에 하나, 브루클린에 하나, 브롱스에 하나 생겼다. 이렇게나 한 곳에 동시다발적인 차원진은 상식외의 사건이다.
"차원진 발생까지 앞으로 3분 남았다! 긴장 늦추지 말고 전방 주시해!"
나는 우선적으로 라쿤맨 가면을 썼다. 손과 어께를 대충 휘적이면서 풀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눈앞에 차원진을 먼저 처리하고 센트럴 파크 쪽에 있는 차원진을 처리하러 가기로 했다.
"포스 융합 현상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견제! 우선 출현 적성종의 타입부터 파악한 뒤에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도록 한다! 그리고......"
"중령님! 차원진 발생합니다!"
"뭐? 젠장! 아직 1분 정도 남아 있을텐데!"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 준비는 끝마친 느낌이지만 아직 덜 된 모양이다. 차원이 일그러지면서 무색투명한 육각 파편들이 흩날린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조용하게, 마치 폭풍전야처럼.
그 상황에 나는 지켜볼 여유도 없이 튀어나갔다. 차원진 바로 앞에 착지해서 미군을 등지고 섰다.
"뭐지? 더 지원 올 포스 유저가 있었나?"
"가면 쓰는 포스 유저가 있었나......?"
내가 나서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지간하면 싸우는걸 지켜보고 대학 쪽으로 가는 피해는 막으려고 했지만, 지금 나서지 않으면 1분도 안되서 이쪽 군대는 전멸이다.
"야! 니들 일단 뒤로 사람 물려! 큰거 온다!"
"What?"
누군가 되물었지만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차원진 앞에서 거대한 용 한마리가 무서울 정도의 추진력과 함께 아가리를 쳐들며 나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