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라쿤맨 비기닝]
항상 괴수 영화 같은걸 보면 시도때도 없이 부서지는게 자유의 여신상이다. 하지만 그건 픽션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실제로 그러면 재앙이다.
만약 이게 단순 테러였다면 911 테러 사건처럼 보복이나 받고 끝나겠지만 이건 차원진과 적성종 관련 사건이다.
"일단 예진이 너는 좀 자는게 좋겠다. 집에 수면제 있나?"
"수면제는 있지만 포스 유저한테 듣기나 할지 문제입니다"
"할 수 없네"
나는 예진이를 기절시켰다. 기절시키는게 몸에 안좋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잠을 자는게 훨씬 낫다.
뇌를 혹사시켜서 그런건지 기절시키자 마자 잠에 빠진듯 편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연구실에서 나와서 그녀의 방 침대에 눕히고 시온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할까?"
"여러가지 관점에서 봐야하는 부분입니다"
예지자가 볼 수 있는 미래는, 볼 수 있다는 시점에서 바꿀 수 있는 미래다. 운명이라고 생각되는건 그런것 전부를 포함한 절대적인 기준인거고.
예진이가 본 미래는 분명 근시일 내에 일어날 일이지만 그걸 바꿀지 말지는 우리들 몫이다.
"솔직히 미국이잖아. 냅둬도 알아서 할텐데. 우리가 손 쓸 필요 있을까?"
미국은 강대국이다. 거 왜 외계인 떠도 잡는거 영화에 잘 나오잖아. 그리고 나도 현실에서 몇번 그러는거 본 적 있고.
그렇지만 시온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일단 한가지 논점은, 과연 예진양이 본게 뉴욕 하나만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도 그런건지 불확실합니다. 설령 미국 하나만 그러더라도 뉴욕 한곳인지. 아니면 미국의 다른 도시도 공격받는지 모릅니다"
"확실한건 뉴욕은 공격받는다는 점 하나고"
"냅두면 개판이 될것도 확실합니다"
세상에 8명 밖에 없다는 마스터 유저. 그중에서 한명이 미국에 있다. 가끔 뉴스에서 봤는데 총 쓰던 녀석이다.
더군다나 군사력으로는 세계 1위 국가이니 지원도 충분할테지만......역시 기습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우리가 돕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예진이 생각하면 또 찝찝하고"
나는 대의를 위해 싸울만큼 그릇이 크지 않다. 무력의 그릇은 오랜 시간 억지로 두들겨서 키웠다고 해도 내 심성의 그릇은 조금은 커졌을지 몰라도 대의를 위해 싸울만큼 크진 않다.
기껏해야 내 옆사람 지켜주기 위한 싸움이 전부지 보지도 못한 타인을 지켜주겠다고 싸울 이유는 없다. 숭고한 자기희생 같은걸 나에게 바라면 안된다.
"........"
"왜? 무슨 생각해?"
"아, 별거 아닙니다. 사업 기반이 뉴욕에 있어서 조금"
"어? 그건 좀 걸리는데?"
딱히 돈을 잃는게 싫어서가 아니다.
시온이 손해를 본다는 점이 싫은거다.
"어차피 제가 가진건 대부분 현금 아니면 주식과 채권입니다. 급하게 팔면 손해는 봐도 어느 정도는 건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손해는 본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결해야겠지"
대충 반반의 의견 속에서 참견 안한다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단숨에 추가 참견한다 쪽으로 훅 기울었다.
나에게 있어서 돈이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게 내 돈이 아니라 시온의 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울 마누라가 손해보게 생겼는데 내 귀찮음이 알바냐?
"일단 한번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고......정보를 모은 뒤에 잠깐 미국으로 가야겠다"
"비자 받을겁니까?"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합법적으로 가는건 너무 위험 부담이 커"
일본 정도야 애초에 한국과는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라서 여권만 있으면 충분하지만 미국 같은 경우는 비자 받고 이런저런 절차를 더해서 서류까지 만들텐데 단순한 컴퓨터 기록이라면 시온이 지울 수 있어도 아날로그적인 서류뭉치는 없에버릴 수 없다.
그렇게 쉽게 들키지는 않을것 같지만 최소한의 대비는 생각해야 한다.
"그럼 어쩌실겁니까?"
"날아가야지"
"비행기?"
"비행기 타고 갈 것처럼 보여?"
내가 일본에서 한국까지 헤엄쳐 왔다고 하지만 날 수 없어서 그런게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날 수 있고 미국까지 가는데 천천히 가도 10분이면 간다.
그리고 일단 전화를 해볼 사람이 있다.
* * * *
내가 전화할 사람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다. 아, 대통령 말고.
[......라쿤맨?]
"어, 아저씨 간만"
[직접 전화를 하는건 처음이군. 무슨 일인가?]
천검(千劍) 이경진.
대한민국에 하나 있는 마스터 유저.
저번에 나랑 한판 싸우고 의기투합 비스무리한거 해서 적당히 전화번호 받았다. 연락한다고 했지만 정작 하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판 싸우긴 했어도 나름 사이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저쪽은 성격이 융통성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호하지만 실제로는 나름 말이 통하는 상대다.
.....싸워서 이긴 사람이 나라서 그런 감도 없진 않지만 말이야.
"다른건 아니고. 혹시 위에서 뭐 이야기 들어온건 없어?"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말하는거지?]
"아니 뭐 특이한건 아니고. 차원진이나 적성종 출현 같은거"
[흠.....수도권 지역에서 내가 출동 할만한 일이라면 이미 소식은 전해졌을텐데. 딱히 소식은 없네만]
시온이 만든 차원진 감지기는 거의 한세대 앞의 물건이라 전과 다르게 확실하게 차원진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경보 없이 차원진이 일어나는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그런걸 물어봐?"
[자네 혼자라면 이상할건 없지만, 위에서 라쿤걸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게 있어서 말이야. 뭔가를 알아냈어도 이상할건 아니지]
시온이 뿌린 차원진 감지기는 상당히 뛰어난 기술이다. 다운그레이드 한게 지금 시점에서도 한세대 앞 물건이고 지금 이경진 아저씨 뿐만이 아니라 레버리지 비밀 연구실에서 '아틀라스'의 보스도 탐을 내던 물건이다.
강한 사람 한명이라면 할 수 있는건 한정되지만 뛰어난 서포터가 붙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진장 늘어난다. 그런 논리다.
물론 이번 일은 시온이 한게 아니라 예진이가 한 일이지만......
"확실한건 아니야. 그래서 뭔가 정보가 들어온게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거고"
[그런가?]
저쪽에도 뭔가 이야기가 들려온건 없다라.
그렇다면 예진이가 본건 뉴욕 하나 뿐인가? 생각보다 일이 편해지면 좋겠는데.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칼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데. 수련 중이였어?"
[절차탁마 하는 중이지. 저번에 당한게 생각보다 충격적이여서 말이야]
"에이, 사람이 살면서 처음 지는 것도 아니고 그거 가지고 충격을 먹어?"
[처음일세]
"........."
아 시바 할말을 잃었습니다.
져본적도 없는데 거기까지 올랐다고? 더러운 재능충 같으니라고!
[더군다나 처음 진게 그렇게 압도적인 상황이였지. 다른 마스터 유저들에게 비하면 그리 떨어진다고 생각한적 없는데 그렇게 지면 그런 고정관념이 박살나지 않겠나? 그러니 수련의 필요성이 떠올랐을 뿐이네]
"향상심이란건 좋은거야. 뭘 해도 앞으로 나아가는게 중요하지. 그게 진보고 진화라는거니까"
자고로 노력하는 자는 천재를 이길 수 없으며, 천재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천재가 즐기면서 노력하면 완전체 아니냐?
"아무튼 무슨 소식 들어오면 이 번호로 전화 좀 줘봐. 도청이나 그런건 신경쓰지 말고. 애초에 추적도 안되는 번호니까"
[그 라쿤걸이란 사람이 도와준건가?]
"그렇지 뭐"
우리 마누라 닉네임이 왜 라쿤걸일까......더 귀여운 것도 많은데.
전화를 끊고 곰곰히 생각했다. 근시일 내라고 했지만 1시간 뒤일지, 아니면 하루 뒤일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1주일 뒤의 일은 아니다. 내 감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당분간은 미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 분명 갔다가 경찰한테 걸려서 어디 마약상이냐는 소리 들을것 같습니다"
"아, 진짜. 내가 아무리 인상이 더러워도 그렇지 마약은 좀 너무하지 않아?"
일단 근시일 내에 미국으로 떠나기로 하고 일을 결정지으려던 찰나, 시온이 안색을 굳혔다.
".....왜 그래?"
"지금 뉴스를 틀어보십시오"
나는 그녀의 말에 TV를 켜서 뉴스 채널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정규방송을 중지하고 다른 채널에서도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막 들어온 속보입니다. 미국의 유일한 예지계 포스 유저인 앨리사 니어 양이 대대적인 차원진을 예지했습니다. 이는 근 4년 내로 처음 있는 일이며 그 규모가 발생했던 차원진과는 궤를 달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국내의 차원진 발생 예정지는 서울 일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외에는 일본의 도쿄, 중국의 광저우, 미국의 뉴욕 일대라고 예지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어?"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예진이는 한창 뉴욕 부분을 볼 때 우리들이 일부러 예지를 중지시켰다. 실제로는 그 뒤가 더 있었다는 소리다.
미국에 있는 예지 능력자는 최소한 지금의 예진이보단 더 뛰어난 예지계 능력자인건 확실했다. 예진이는 뉴욕 하나만 보고도 죽을뻔 했지만 그녀는 4개나 되는 미래를 예지했으니까. 당연한 논리다.
한창 뉴스가 방송 중일때, 방금 전화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내쪽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 그래. 아저씨. 뉴스 보고 있어"
[자네가 생각한게 이거였나?]
"내가 생각한건 뉴욕 하나였어. 그나마도 불확실했고"
미국의 예지계 포스 유저, 앨리사 니어.
예지한 사건은 지난 20년동안 열개가 조금 넘는 정도지만 전부 적중했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예지 능력자다. 최근에는 예지하는 일이 뜸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난데없이.....
아니, 예지 능력을 쓴거니까 난데없이는 아닌가?
[뉴욕? 뉴욕이라고? 확실한가?]
"저쪽도 뉴욕이 그렇다고 하고. 우리 쪽도 뉴욕 부분은 봤으니 확신은 두배지. 그런데 뉴욕이 왜?"
[뉴욕에는......내 딸이 있네]
"아저씨 저번에 딸내미 하나 유학 보냈다고 했더니 거기가 뉴욕이였어?!"
전에 이경진 아저씨랑 대판 싸울 때,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서 스쳐 지나갔던 이야기 중 하나가 아저씨네 딸내미가 유학갔다는 소리였다.
[아내가 죽은 뒤로, 나는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걸 다 해주기로 했네. 그리고 그 아이가 유학을 생각해서 보내줬지.....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해야겠군]
"귀국이 무리면 차라리 다른 도시로 피하라고 해. 내가 보기에는 지금 비행기는 못탈게 뻔해"
아마 주요 요인으로 포함되서 따로 보호받지 않는다면 피난은 무리라고 본다.
[한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유학 보낼 때 경호 업체에 연락해서 포스 유저 한명을 개인 보디가드로 붙여뒀네.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을거야]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미국의 예지 능력자가 본건, 차원진이 일어나서 대대적인 적성종의 습격이 일어난다는 사실이였지. 그렇지?"
[뭔가 신경쓰이는게 있나?]
"이쪽에서 알고 있는 사실은 달라"
미국의 예지 능력자가 봤던게 차원진 예보라면, 예진이가 본 것은 이미 일어나고 난 뒤의 처참한 모습의 뉴욕이였다.
일의 경과가 다르다. 예진이가 본건 훨씬 뒤의 미래였다.
"다른 곳은 몰라. 하지만 뉴욕은 지금 냅두면 불바다가 될건 확실해"
본 시점에서 바꿀 수 있는 미래는 맞지만 손을 쓰지 않는다면 거의 그대로 일어날게 뻔한 일이다.
차원진이란 일은 분명 일어날 일이고, 거기서 나올 적성종은 여태까지와는 수준이 다를거다.
미국의 마스터 유저도 대처할 수 없을법한 그런 대참사.....아마 20년 전에 일어난 대공황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난......]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난 뉴욕으로 갈 수 없네]
"왜?"
[난 이 나라의 마스터 유저니까. 내가 사람들을 버리고 간다면 거기서 뉴욕과 딸을 구할 수 있을진 몰라도 이 나라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겠지. 더군다나 지금 간다 하더라도 보내줄지 의문이고]
당연한 소리이긴 하다. 마스터 유저는 비슷한 말로 핵폭탄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나 자유자재로 위력 조절도 가능하고 방사능 피해도 없는 위력만 개쩌는 핵폭탄.
그런 무기가 해외로 가겠다고 하면 곱게 보내줄까? 설령 보내준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을 생각하면 그 뒤는?
설령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하더라도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법이지. 어떻게 할거야?"
[한가지, 부탁해도 괜찮겠나?]
나는 그가 무슨 부탁을 할지 눈치 챘다.
"한국은 어쩌고?"
차원진이 일어난다고 예지된 곳은 뉴욕 한군데만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은 한국의 서울. 그리고 일본과 중국.....대부분 아시아권이다.
만약 뉴욕과 비슷한 수준의 적성종이 나온다면 위험한건 한국도 매한가지다.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네. 적어도.....최소한 그 아이만큼은 지켜주게]
자식이 위험한데 직접 구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나도 잘 안다. 그러다가 구해주지 못할 때의 절망감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대의가 어쩌고 하는건 대놓고 거절하겠지만 이렇게 정에 호소하는건 약하단 말이야.
"어차피 갈 생각이였어. 가는 김에 아저씨네 딸내미도 보호해줄께"
[고맙네. 대신 서울만큼은 반드시 사수할테니 걱정 말게]
"정 힘들면 버티기만 해봐. 내가 다녀 와서 거들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가는게 진작 확정되긴 했지만 할일이 늘어났다.
최대한 피해를 억누르면서 이경진 아저씨 딸내미 구해주는거.
준비할건 많지 않지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
"아까 봤던 지하에 그거 있잖아? 아이언맨 수트 같은거"
"그건 왜 그러십니까?"
"일단 대충 준비는 해둬.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 당신은 딱히 그게 필요한 수준은 아니지 않습니까?"
"잠깐만, 전화 좀 하고"
딱히 내가 필요한게 아니다.
다른 사람한테 필요한거다.
통화음이 두어번 이어지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백리야. 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