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우리들은 제일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추대성이라는 책임자가 있는 방을 찾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기감을 넓히기 이전에 큰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었다.
조용히 걸어가서 소리치는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아닙니다! 걱정마십쇼! 그 라쿤인지 너구리인지 하는 놈은 저희가 어떻게든 처리할겁니다! 섣불리 결정했다간 한국 지부도 다 잃어버릴테니 손해가 막심하지 않습니까? 예, 예! 그러니까 잠깐만 시간을 주십시오!"
누군가를 향해서 사정하는 모습은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비굴했다.
더욱 감각을 집중해서 대화하는 상대의 목소리 또한 들어보았다.
[제가 내 줄 수 있는 시간은 10분입니다. 추대성 지부장. 만약 그 안에 처리하지 못한다면......저도 어쩔 수 없이 시설을 폐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 걱정마십시오! 마스터급 실험체는 드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살이던 생포든 해서 더 나은 데이터를 수집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누구 맘대로?
나는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남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 주제에 꽤 시설 좋은 방에서 떵떵거렸을 남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하다 잠깐 시간이 지나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굴맨!!!"
"나는 라쿤이야 등신아!!!"
라쿤이랑 너구리랑 비슷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동물이다. 진돗개랑 치와와 수준의 연관성도 없다. 애초에 과가 다르다.
추대성은 나잇살 먹은 중년의 남성이였는데 그 사이 스트레스가 엄청 쌓였는지 원래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 이야, 이래서 사람은 스트레스 관리 하면서 살아야 한다니까.
"너, 너 이 새끼! 바깥에 있던 포스 유저들은 어쨌어?!"
"전부 죽였어"
"이런 개.....!!"
쌍욕이 나오려던 놈의 몸뚱이를 걷어차고 받고 있던 전화를 대신 받았다.
"여보세요?"
[......그쪽이 라쿤맨인가?]
"오, 넌 그래도 예의가 있구나. 라쿤이랑 너구리랑 구분을 잘 하네?"
상대는 나에게 맞춰서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발음은 조금 어눌했다. 아마 한국인은 아닌듯 하다.
나와 같이 목소리를 변조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였으나.....성별은 대충 알겠다. 남자다. 그리고 그리 나이든 사람은 아니다.
[일이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능동적으로 접근했어야 하는데 말이지. 선택 미스였군]
"인생사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이 뭐가 있겠냐. 그래서 댁은 누구슈? 여기 인간 같지도 않은 실험질이나 하는 곳 대빵이야?"
[찾고 있는게 보스라고 한다면 맞다고 해주지]
아마도 이놈을 찾으면 될 것 같다.
나는 슬쩍 전화기의 전파를 추적했다. 시온보다는 느리고 능숙하지 않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새끼가 어디에 사는 어떤 새끼인지 추적할 수 있다.
"뭐 하는 새끼길래 이런 짓 하고 다니냐?"
[대답해 주기 전에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라쿤걸이라는 웃긴 이름을 쓰는 사람......그쪽과 연관있는 사람이 맞겠지?]
"이 새끼 말돌리는거 봐라. 뭐.....맞긴 하지"
우선 시간을 끄려는건 내 쪽이다. 그렇다면 저쪽의 대화에 응해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한가지 제안을 하지. 그쪽 기술력을 이쪽과 공유할 생각 없나?]
"뭐야, 스카우트 제안이야?"
[그렇다고 해두지. 라쿤걸이란 이름으로 낸 한세대 앞선 차원진 감지기는 정말로 이 분야에 뛰어난 석학이 아니면 발명할 수 없어. 심지어 이미 유명 인사인 알리언 박사도 개발하지 못한 부분이지. 솔직히 그쪽의 기술력은 탐이 나. 숨기고 있는 기술은 차원진 감지기 제작만이 아니겠지?]
시온이 가진 기술력은 그녀가 이곳저곳에서 끌어온 문명의 기술력과 본인 스스로의 능력을 결합한 결정체다. 시대상으로 보자면 지금의 지구의 몇백년 뒤의 기술도 있지만 그거야 아직 못쓰고.
하지만 다운그레이드한 기술도 여기서는 몇세대 앞선 기술이다. 만약 돈이던 권력이던 뭔가를 바란다면 탐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손을 잡겠다면 한국 지부를 포기해도 좋다. 소란스러워지긴 하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꽤나 큰 손해도 감수하려고 하는데? 레버리지 사는 그쪽 주요 위장 기업 아니였나?"
[레버리지 사는 물론 우리 쪽에서도 큰 기업이지. 하지만 그쪽의 기술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버리는 패로 쓸 수 있다]
만약 이 실험실을 들키면 여파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가는 폭락하고 만인의 지탄을 받고, 결국에는 해체 수순을 밟는게 눈에 선하다.
꽤나 큰 기업인만큼 없어지면 저쪽에게도 충분히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걸 감안할만큼 이쪽의 기술을 탐내는 것이다.
[어떻게 할텐가?]
"음......"
시간을 끌겸 생각하는 척을 했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는 상대방이 있는 위치를 파악했다. 대략적인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해 있었다.
"좆까, 씨뱅아"
나한테서 도망가고 싶다면 우선 달로 도망치는게 좋다.
내가 최대로 펼친 역장은 이 별을 감쌀 정도다. 미국에 있다고 한들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
역장(力場)이란 힘이 닿는 넓이. 지구 하나를 범위에 넣는다면 그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건 쉽다.
수화기 너머에서 뿌직, 하고 뭔가 부드러운게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간결하지만 효과는 명확했다.
"어때? 이번에는 경고야"
[........정말 터무니 없는 능력이군.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서 더미가 있는 미국까지 가이아 포스가 닿는다고?]
"물리적인 이유보단 개념적인 이유니까"
내가 추적했는데 쉽게 닿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 이미 회선을 꼬아서 내가 죽인건 실제로 더미다. 진짜 보스는 다른 곳에서 다시금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순수하게 내가 아는 사람을 추적하는건 쉽지만 이런 전화기 같은 통신기기를 매개로 하는 추적은 내가 아니라 시온이 특기다. 만약 시온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같이 능력을 사용해서 진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절의 뜻으로 알지. 잘가게 라쿤맨]
뚝, 하고 전화가 끝기고 수화음만 들렸다. 나는 전화기를 내던지고 옆에 있던 추대성의 멱살을 잡았다.
"야, 새꺄. 보스에 대한거 불어봐라"
"하, 하하. 뭐하러?"
"말하고 곱게 뒈질래, 존나 아프게 뒈질래?"
내 질문에 추대성은 낄낄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하! 하핫! 어차피 죽을거 니 새끼 엿이나 먹이다 죽을란다! 어차피 둘 다 죽을텐데!"
"흠"
콰아앙!
불길한 느낌이 마치 감전되듯 등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바로 뒤에 어디선가 쾅!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소는......상층부와 중층부에서 들렸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진동이 땅을 타고 전해졌다.
"이 연구소는 본사에서 자의적으로 폭탄을 터트릴 수 있게 설계됐지. 그 폭탄은 딱히 자료 폐기용이 아니라 연구소 전체를 날려버리기 위한 용도라고!"
"방금 전 폭탄으로? 겨우?"
"핫! 폭탄은 그냥 시작이야. 그 폭탄이 뭘 부쉈는지 알아?"
밀려오는 소리와 진동은 왜 이 실험실이 강 인근에 만들어졌는지 알려주었다.
여차하면 강물을 들이 부어서 침수시킬 생각이였기 때문이다. 놈들은 위치 선정부터 폐기를 생각하고 증거인멸할 생각 만만이였다.
"5분도 되지 않아서 여긴 전부 침수될거다. 아무리 포스 유저라도 공기 없이 몇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탈출하면 그만이지"
"그래? 이 건물 최하층에서? 복잡한 구조는 괜히 그렇게 만든줄 알아?"
순차대로 내려가지 않으면 내려갈 수 없는 귀찮으면서 복잡한 구조는 침입과 탈출이 불리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여차할 경우 침입자를 시설과 같이 침수시킬 생각으로 만들었다.
솔직히 나는 숨을 안쉬어도 문제는 없다. 애초에 초월자가 되면서 호흡에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예진이는 다르다. 내가 공기를 모아 준다고 하더라도 지상으로 탈출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 보통 사람이 공기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분이다. 포스 유저라도 잘 해야 그 2배쯤 쳐줘서 10분......솔직히 이 시설 구조를 생각하면 간당간당하다.
"아, 아저씨! 물이 흘러들어와요!"
어느새 흘러들어온 물들은 우리 발목을 적셨다. 폭음이 들린지 1분도 되지 않아 이 정도면 전부 침수되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 혼자라면 수중 탐험 느낌으로 다니겠지만 예진이가 있어서.......그러면 다른 방법을 만들면 그만이다.
"길이 없다면 새 길을 만들면 그만이지"
"네?"
우선 방향을 잡았다. 지상까지......아니, 지상으로 바로 뚫으면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서 애꿎은 사람이 죽을 위험이 있다. 특히나 이곳 지상 연구소 직원들은 상당수.
지하에 있는 놈들은 대부분 조졌어도 지상에 있는 위장용 연구소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관계자다. 그러니 일단 보류.
어차피 이 시설은 금새 침수되서 남은 사람도 죄다 죽을테니까 오히려 손 쓰기는 편하겠네.
조금 대각선으로 방향을 잡아서 한강 쪽으로 목표를 정한다. 그러면 물이 완충제 역할을 해서 여파를 최소한으로 만들 수 있다.
"아저씨, 뭘 하려고요?"
"의지근원론(意志根原論)에 의거하여"
나에게는 사촌이 있다. 내 육체적 의미에서의 혈연이 아니라 영혼적인 의미에서의 혈연이다. 물론 그놈도 초월자고.
근데 격 자체는 나보다 높은 초월자다. 재능도 넘치고 성격도 좋은, 팔방미인의 대영웅님이지.
그리고 그놈이 만든 이론이 한가지 있는데. 그게 바로 의지근원론이다.
"천지만물 삼라만상 그 태초에는 뜻으로 존재했으니"
주먹을 쥐고 의지를 담는다.
성경을 살펴보면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도 알만한 유명한 대사가 있다. '빛이 있으라'말이다.
그와 비슷하게, 뜻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면 의지로 천지만물 이루지 못할게 뭐가 있나?
"한 주먹에 별의 무게를 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 오리지널 기술. 한순간이지만 이 작은 주먹에 별의 무게를 깃들인다. 비유가 아니라 내가 담은 의지가 질량이 되어 현현한다.
압도적인 질량은 힘이 되고 내지르는 순간 폭력이 된다.
"성제붕권(星提崩拳)"
콰아아아아아!!!
권격의 여파가 구멍을 뚫는다. 한강까지 일직선으로 모든걸 으깨 부서버리고 길을 만들어냈다.
우르릉, 하는 번개 치는듯한 진동이 울렸다. 아마 지상까지 통로를 만들어내서 이쪽으로도 물이 밀려들거다.
"젖는건 매한가지니까 이쪽으로 가자. 여긴 지상까지 다이렉트로 뚫어놔서 한강 밑바닥으로 나오긴 하겠지만 올라가는데 5분도 안걸려"
"아, 아저씨 지금 도대체........"
예진이의 말을 끊고 옆에서 얼이 빠져 있던 추대성이 실성한듯 중얼거렸다.
"여, 여기서 지상까지 깊이만 100미터가 넘는데 어떻게......!!"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나는 예진이를 등에 업었다. 이곳으로 밀려오는 물살이 강하지만 예진이한테까지 역장 두르고 올라가면 그냥 가벼운 하이킹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빠르게 올라가면 5분 내외로 올라갈테니 예진이가 숨막혀 죽을 염려도 없다.
"자, 잠깐만! 나도 데려가줘! 정보가 필요하잖아? 여기서 오래 일했으니까 살려만 주면 알고 있는거 다 말해줄께!!!"
"안돼"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솔직히 메리트가 있는 제안이긴 했다. .대부분 삭제되서 해킹으로 알 수 없던 기밀 정보도 알테니까 쓸만하긴 하다.
구해준 다음 얻을걸 얻은 뒤에 죽여도 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여기서 피해를 봤던 사람들처럼. 넌 여기서 조금의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뒈져라"
그 말을 하고 나는 추대성을 뒤로하고 물이 쏟아지는 통로 위로 올라갔다.
"으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절망어린 비명소리가 들린다. 차오르는 물 앞에서 사라져가는 공기나 들이쉬며 끝내 질식해 죽겠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건 불에 타 죽는거라고 하지만 가장 공포스럽게 죽는건 질식사다.
숨은 참을 수 있지만 결국은 파국이 다가올걸 알기 때문에 더 공포스럽다. 그러다 발버둥치다 죽는다.
놈들의 시체는 연구소와 함께 사회에 드러날 필요 없이 물고기 밥이 되어서 사라질 것이다.
잘 있어라.
딸을 찾던 아버지만도, 여동생을 그리워하던 오빠만도, 남을 해치기 두려워서 산에 틀어박혀 살던 남자만도, 여우 한마리만도 못한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