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일행이 하나 늘었지만 딱히 지장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예전에 납치 사건 때 시온에게 해주었던 것을 그녀에게도 해줬다. 물론 시온보다는 약하게.
내가 펼쳐주는 역장은 타인에게도 걸어줄 수 있지만 힘의 소모가 다르다. 시온에게는 거의 절반의 힘을 써서 설령 지구가 날아가도 멀쩡할 정도지만......지금은 막 처음 본 남에게 그정도로 낭비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충분했다. 눈 앞에서 폭탄이 터져도 멀쩡할테니까 딱히 내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
"더 아래쪽에 대한 정보 같은거 있어? 흘려 들은거라도"
"음.....약에 취해서 많이 들은건 없는데. 누구 욕하는 소리는 들었어요. 하는 일도 없으면서 너무 갈군다나 뭐라나......한두번 들은거면 몰라도 꽤 많이 들었는데 그 사람 별명이 추돼지였어요"
"추돼지?"
"이름은 잘 기억 안나지만 성이 추씨인건 기억 나요"
욕을 많이 들어처먹는 사람......보통 이런 조직 사회에서 그런 사람은 윗대가리가 분명하다. 군대에서도 관심병사는 어지간히 빡대가리가 아니고서야 같은 소대끼리나 욕하는데 좆같은 간부는 다같이 욕하거든.
"일단 내려가자. 컴퓨터를 찾아야 해. 거기서 정보를 얻고.......그 뒤엔 남은 놈들 다 조지고 죽이면 돼"
"주, 죽여요?"
"너 다른 사람들 못봤어? 너도 여기 오래 있었으면 다 저 사람들처럼 될텐데 여기서 양심 타령이야?"
나는 슬쩍 문에 달린 창문이 열린 방 몇개를 가리켰다. 내가 예진이를 구해줬어도 딱히 아무런 반응 없이 허공만 바라보며 침만 흘리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살 의지도 없는 것들을 살려줄만큼 나는 자비롭지 않다. 하다못해 구해달라고 소리치면 또 몰라.
"그, 그렇지만 라쿤맨은 이상하긴 해도 사람들 구해주는 히어로 아니였어요?"
"나는 배트맨이 아니라서 불살주의가 아니란다. 나쁜 놈들은 뒈져야 한다는게 지론이야. 여기 있는 놈들은 싹다 죽어야지"
"그래도......"
"여기서 실험받던 사람들을 밖에서 봤는데 딸 이름 부르다 죽거나 자기 여동생을 실수로 죽이거나 했지. 그렇게 만든 놈들을 살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
나는 연좌제를 들이밀 생각은 없다. 군대에서도 지랄하던게 그런 븅신같은 연좌제다. 하지만 이런 시설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죄가 있다는 증거다. 설마 모르고서 여기서 일할리는 없겠지. 이렇게 대놓고 감금실이 있는 마당에.
우리들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예진이도 나름 포스 유저라서 내 움직임에 잘 따라왔다. 특성은 강화 밖에 없어 보여도 그것만 쓰는데 집중해서 신체능력은 나쁘지 않다.
"여기다. 하층부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이거 타고 내려가면 제가 실험 받던 곳이 있어요. 거기서 이상한 주사 같은거 맞고......"
"그럼 일단 내려가볼까"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걷어차 박살내고 그 안쪽의 통로로 몸을 던졌다. 여기는 하층부의 제일 아래가 아니라 하층부의 첫번째 층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참 복잡하게도 만들어 놨네 개새끼들.
무슨 게임 속 던전도 아니고 이렇게 꼬아놓으면 들어가는 사람만 속터진다. 아, 그러려고 이렇게 만들었나?
하층부로 들어서자 상층부와 중층부와는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위에는 그나마 온기가 있다면 여기는......싸늘한 느낌만 감돌았다.
사람들이 죽으면 싸늘하다는 표현은 단순히 시체를 은유하는 표현이 아니다.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을씨년스러운 곳 특유의 분위기는 차갑다 못해 시리다.
"여, 여기는 어쩐지 좀....."
"실험 할 때 와봤다며?"
"그렇지만 그때는 반쯤 약에 취했거든요? 아까 그 방에서 나올 때는 항상 약을 뿌려서 몽롱할 때만 끌고 나갔어요"
포스 유저를 무력화시키고 실험하려면 당연한 절차였겠지.
하층부의 복도에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핏자국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게 여기가 얼마나 참혹한 일에 썼는지 알만한 곳이다.
그리고 우리들 앞을 가로막는 새 포스 유저팀이 있었다. 복잡한 구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는 애들은 아직 쫒아오고 있지만 원래 시설에 있던 놈들은 여기서 진을 치고 기다린듯 보였다.
"죽여!!!"
"더 이상 뒤로 못가게 막아!!!"
딱히 별 다른 말은 없었다. 무기를 든 포스 유저들이 거의 발광하듯이 달려들었고 나는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난전이 벌어진다. 복도가 좁은건 아니였지만 3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업치락 뒤치락 하기에는 좁았다. 누군가는 내 팔을 붙잡고 누군가는 내 다리를 이빨로 잘근잘근 찝어 막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한놈 한놈 정성스럽게 죽였다. 장비가 좋고 사람이 많으면 뭐해. 어차피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한 절반쯤 죽였을 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라쿤맨!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이 여자애의 목숨은 보장 못한다!!!"
"아, 아저씨.....!"
뒤로 빠졌던 인원이 뒤에서 예진이를 붙잡고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날카로운 군용 단검이라서 잘 들게 생겼다.
그렇지만 이미 대비는 해놨다.
"해봐, 등신아"
"뭐......?"
"내가 니들 편하게 인질 잡으라고 걔를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았냐? 이미 대비는 다 했거든?"
그 말에 남자는 예진이의 목에 들이댄 군용 단검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강인한 포스 유저의 근력으로도 칼날 하나 들어가지 않아서 피는 커녕 피부 한꺼풀 벨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런......!"
"세상사 이럴 수도 있는 법이지"
인질이란건 목숨과 안전을 위협하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질에게 손톱만큼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면 인질의 가치는 죽은 인질만큼 없다.
내가 다가가자 예진이를 인질로 잡았던 남자는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하지만 놓아줄 생각은 없었기에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그의 몸이 땅에서 떠올라 내 쪽으로 날아왔다.
"으, 으윽......"
"내가 무섭지?"
사람의 공포어린 시선은 많이 받아봐서 안다.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를 보면 두려워 하고 경외하지만 그 존재가 적대만 할 뿐이고 자비 따위 한조각도 없다면 남는건 공포 뿐이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이런 일을 한두번 겪는게 아니니까 지금 상황에 떠오르는 심리는 뻔하다.
"전부 니들 자업자득이야. 그러니까 누가 이런 사람 새끼들도 아닌 놈들이랑 협조하래?"
"우, 우린 그냥 고용된....."
"핑계는 핑계고"
이런 놈들 레파토리는 항상 같다.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지 않고 남탓, 아니면 사회탓을 할 뿐이다.
정말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궁지에 몰려도 범죄를 저지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설령 하더라도 그건 살아남기 위한 생계형 범죄지 남의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 뭐더라.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게 세상 이치라더라. 지금부터 내가 벌을 줄테니 달게 받아라"
영화 해바라기의 주인공 오태식의 명대사가 슬쩍 떠올라서 내뱉어 주었다. 슬쩍 손아귀를 쥐자 보이지 않은 힘이 남자의 목을 조른다.
"컥, 커컥! 커억!! 사, 살려......"
몇번 꺽꺽 거리던 남자는 이내 숨이 막혀 질식사했다. 남자의 시체를 대충 내던지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다.
"아저씨, 방금 그거 다스베이더 같았어요"
"요즘 애들이 스타워즈도 알고 그러냐?"
유명한 장르이긴 해도 최신작이 패망해서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는데 알고 있는게 신기하다.
하기자 이제는 반전 같지도 않은 반전으로 대부분 누구나 알고 있는 '내가 니 아빠다'같은 대사의 주인공이라면 알고 있겠지. 솔직히 덜 유명하긴 하지만 그분 주특기인 포스 그립도.
하층부에는 본격적인 연구 시설들이 가득했다. 한쪽 방을 살펴보면 중앙에 수술용 테이블과 그 주위에 어디에 쓰일지 모르는 섬뜩한 원형 톱, 각양각색의 수술 도구들이 놓여 있다.
방 한구석에는 살점 조각이나 핏자국이 남아 있는걸 보면 최근까지도 써본 것 같다.
그리고 더 안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곳이 있었다. 상당수의 연구원들은 그 방에 모여 있었다.
제일 큰 공간인거 보면 여기가 무슨 중앙 통제실이라도 되나보지?
"빨리 자료 폐기해! 외부로 유출되면 안돼!"
"씨발, 라쿤맨 새끼.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 지랄이야!"
"메인 서버에 데이터 삭제 얼마나 남았냐!"
"거의 다 됐어요! 95퍼센트요!"
"아, 그건 안돼!"
"라쿤맨!!!"
느긋하게 움직이다가 손해봤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이야.
보아하니 접근 권한은 이미 데이터 삭제 중이라서 그냥 접속하면 될걸로 보인다. 나는 곧바로 연구원 몇놈을 밀어 내던지고 왼쪽 귀의 USB를 뽑아 제일 가까운 USB 단자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안들어간다. 아, 좀! 한번에 들어가라!
USB 특유의 징크스 때문인지 한번 뒤집었다가 다시 꽂으니 들어갔다. 접속 됬다는 표시인지 옅은 빛이 돈다.
"니들 뭐하나 했더니 여기서 증거 인멸이나 하고 있었구나?"
"씨발! 라쿤맨이 왜 여기있어! 연구소에 잔류중인 팀 죄다 나간거 아니였어?!"
"그놈들 다 뒈졌다"
바깥에 있던 포스 유저는 이제 거의 전멸이다. 기껏해야 몇명 정도 남아 있겠지.
나는 근처에 있던 연구원 멱살을 잡아 올리며 슬슬 협박했다.
"곱게 뒈지고 싶으면 데이터 삭제 중지해. 어차피 지옥 갈거 협조해서 덜 뜨거운 지옥으로 가는게 낫잖아?"
"모, 못해! 데이터 삭제는 본사의 메인 컴퓨터에서 진행하게 되서 한번 시작하면 이쪽에서 멈출 수 없어!"
제일 귀찮은 방법이네. 이래서 컴퓨터 같은 정밀기기 다루는건 별로라니까.
나는 USB 연결도 했겠다 시온에게 연락했다.
"그쪽은 어때? 데이터 받은건 있어?"
[상당수 삭제되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습니다만......그래도 없는 것 보단 낫습니다]
"역으로 저쪽 메인 컴퓨터에 해킹은?"
[저쪽 메인 컴퓨터는 영자 컴퓨터입니다. 지금 그쪽 연구실 컴퓨터로 메인 서버 접속은 가능하지만 사용 권한도 폐기된데다 그쪽 컴퓨터도 일반적인 컴퓨터라 무리입니다]
"에이, 개고생했네"
문득 이 시설의 책임자라면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금 연구원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다.
"야, 니들 책임자 어디있어? 그 추씨 성을 가진 녀석 말이야"
"추, 추대성 말하는거야?"
"추씨가 두명 있니? 아니면 맞겠지. 그놈 어딨어?"
"최하층 개인실에......"
기감을 펼쳐서 아랫층에 있는 사람을 찾는다.
대부분 자료 폐기를 위해서 분주하게 뛰는 가운데 한놈만 방 한구석이 있는 녀석이 있다.
자고로 책임자란 이름과는 다르게 책임이라고는 쥐뿔도 안가지고 그냥 위에서 놀고 먹다가 일 생기면 남에게 책임을 떠밀기에 책임자다. '책임을 떠미는 자'라고 해서 줄여서 책임자지.
이 난장판에, 내가 난장판으로 만들긴 했어도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일단 이놈 조지러 가볼까?
나는 연구원들을 냅두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차피 시온이 해킹할건 다 했고 죽이는데는 직접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원거리에서 할 방법은 충분하다.
.....뭔가 좀 찜찜하다.
"아, 아저씨.....뭔가 불길해요"
"야, 너두?"
"아저씨도 그래요?"
찜찜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애초에 여기 처음 들어올 때부터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데 나보단 반응이 늦지만 뭔가를 알아챈 예진이에게서 비범함이 느껴진다.
내 능력인 '감각'은 오감 뿐만이 아니라 육감마저 극대화시키고 희미하지만 미래예지도 가능하다. 하지만 먼 미래는 볼 수 없다. 너무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호불호 정도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내 능력보단 떨어져도 그걸 눈치 챘다고?
"너, 강화 특성 말고 다른 특성 있어?"
"네? 아, 아뇨.....납치된 뒤로 그런거 생각할 사이도 없었는데요"
"여기 온 뒤로 뭔가 특이해진건?"
"어, 음......"
"사소한 거라도 괜찮아"
"그, 일주일 전부터 자다가도 실험 때문에 끌려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잠에서 깨요. 그런데 이건 그냥 스트레스나 잠을 옅게 자서 그런 것 같은데....."
잠깐 실험할게 있어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예진이에게 살짝 주먹을 휘둘렀다.
"꺅!!"
그녀는 눈 앞의 주먹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뒷통수를 감싸고 머리를 숙였다.
공격은 정면에서 했지만 방어는 머리, 주로 뒤쪽을 방어했다.
"감각 특성 같은건 아닌데. 훨씬 더 앞을 보고 있어"
"어, 어? 방금 뒤통수 때리려던거 아니였어요?"
"뒤통수 때리려고 했어. 주먹은 페이크고"
반약 단순히 감이 좋은거였다면 반사적으로 팔로 가드를 올려 막았을 것이다. 훈련을 받고 안받고 이전에 그건 당연한 본능이다.
하지만 예진이는 뒤통수를 방어했다. 사실 나는 주먹은 그저 시늉만 한거고 능력으로 뒤통수를 때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걸 꿰뚫어 보았다. 내 '감각'을 속이고 그 정도로 반응하려면 똑같은 감각 특성으로는 어림도 없다.
"너 설마....."
"뭐, 뭔데요?"
"됐다. 나중에 이야기 하자. 지금 할건 아니야"
우선 내 일부터 끝내고 탈출한 뒤에 예진이의 거처를 논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