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바베큐 그릴 하나 가지고는 부족해서 가스 버너에 불판 깔아두고 더 굽기 시작했다.
캠퍼스 커플들도 고기 냄새를 맡고 배가 고팠는지 올라와서 저녁 준비를 한다.
"아! 그러니까 햇반 사자고 했잖아! 누가 밥부터 해먹어?"
"여기서 밥 해먹는게 좋긴 좋잖아!"
그런데 우리랑 다르게 밥부터 해먹으려고 생쌀을 가져온듯 싶다. 여행 초보의 티가 팍팍 드러난다. 여행 가면 귀찮은 것도 생각해서 준비해야 하는데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밥까지 해먹을거면 캠핑보다는 자연인이 되야지 않을까?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밥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리 없었다. 으아아아! 바로 불 위에 올리지 말고 일단 쌀부터 씻으라고오오!
두고 볼 수 없어서 나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압력밥솥을 빼앗았다.
"밥 하는 법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조금 도와줄께요"
"아, 감사합니다. 이거 죄송한데......"
"그러면 저기 가서 같이 고기 먹고 좀 굽는거 도와주세요. 굽는 사람이 저 혼자라서 좀 힘드네요"
전부 먹기만 하니까 나만 바쁘다. 시온이 간간히 쌈 싸서 먹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먹진 못하고 있다.
나는 캠퍼스 커플들이 고기를 굽는 사이 다시금 압력 밥솥의 뚜껑을 열고 안쪽을 살펴 보았다.
물이 아주 홍수가 났구만 홍수가. 씻는건 둘째 쳐도 죽 끓이나? 물을 왜 이렇게 많이 부어?
나는 일단 가져온 생수 한병으로 쌀을 씻었다. 밥 지을 때 중요한건 먼저 쌀 씻기.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씻어야 잡내도 안나고 맛도 좋다.
계곡물로 씻어도 좋지만 요즘 환경 문제 생각하면 조금 찝찝하긴 하다. 그래서 생수로 씻는다.
씻은 후에는 적당히 물을 붓는다. 어느 정도냐 하면 쌀에 손바닥을 댔을 때 손몬까지 올 정도로.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
준비가 끝났으니 뚜껑을 덮고 불 위에 올렸다. 시대가 옛날이였으면 이런 압력 밥솥이 아니라 가마솥 같은걸로 밥을 해야 했을텐데 그러면 더 빡세다. 기술 발전 만세.
먹는 사람도, 굽는 사람도 늘어나니 내 일이 한결 편해졌다. 압력 밥솥은 적당히 시간과 불만 맞추면 알아서 되니까 잠깐 냅두도록 하자.
"와, 최 사장님 아이스 박스 한통에는 고기밖에 안들어있네요. 얼마나 쓰셨어요?"
"글쎄요, 영수증을 안봐서"
"쩐다, 이래서 돈이 좋다니까. 예산 걱정 안하고"
"우리도 고기 있잖아"
"시장에서 산 삼겹살? 야, 질도 양도 틀리잖아"
내가 일부러 돌아다니면서 산 고기인데다가 돈 생각 안하고 많이 먹을 생각으로 산거라 학생들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비교가 안되긴 하다.
놀 때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아니면 시온이랑 단 둘이 먹거나. 여행 가서는 시끄러운편이 좋다. 그래서 저 캠퍼스 커플도 받아들인거고.
잠깐 먹은 사이에 시간이 지났다. 슬슬 밥이 다 됐을것 같아서 불을 끄고 김이 빠질 때까지 뜸을 들였다.
그리고 적당히 김이 빠지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갓 지은 맛있는 밥이 완성됐다.
"크으으! 이거 윤기 좀 봐! 우리가 가져온 쌀 맞냐?"
"어지간히 묵은쌀 아니면 보통 잘 짓기만 해도 보통은 가요. 노하우가 없으면 삼층밥이나 죽이 되거나 탄밥이 되지만요"
"우린 최 사장님 만난게 진짜 행운이네. 승진이가 헛다리 안짚었으면 밥도 탄밥 먹었겠네"
"야, 다 내 덕분이다. 그지?"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니까요"
나는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담으며 말했다.
"갓 지은 밥 먹을 사람?"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손들었다.
일회용 그릇에 다시 밥을 나눠주고, 나도 자리에 앉아 밥을 한술 떴다.
뜨끈뜨끈한 밥과 고기의 조합은 환상적이였다. 오히려 소고기보다 좋았다. 생각해보면 소고기는 술 안주로 좋겠지만 밥이랑 먹으려고 한다면 삼겹살이 더 좋다.
우선 방금 지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에다가 기름장을 찍은 삼겹살을 올리고, 거기에 김치, 개인 취향에 따라서는 불판에 한번 볶아서 구운 김치로 만들어 함께 같이 먹으면 크으으으으!!!
맥주가 절로 넘어간다. 아이스 박스에 넣어둔 맥주를 꺼내 어른들은 한잔씩 했다.
"아! 나도 맥주우우우!"
"미성년자는 안돼!"
"마셔도 안취하잖아! 한캔만! 한캔만!"
"걍 쟤도 한캔만 줘라. 어차피 낼모레 민증 나오는 녀석이니까"
"아싸! 사장 오빠는 융통성이 있어서 좋다니까!"
루리에게도 맥주 한캔을 건내주었다. 맥주는 아이스 박스에 넣어둬서 시원했다.
술도 들어가니 한결 분위기가 가벼워진다. 이래저래 서로 이야기를 떠들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물가 근처에 있어서 날씨도 그리 덥지 않고 내 능력 덕분에 잡벌레들은 근처에 오지 못하니 기분 좋게 쉴 수 있었다.
애들은 몸이 노곤노곤한지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배도 부르겠다 몸도 노곤노곤하겠다. 침낭과 담요를 덮고 안에 들어가 있으니 잠 드는건 한순간이다.
나머지는 어른들의 시간이다. 아,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애들 놀거 다 놀았으니 어른들이 놀 차례라는 이야기다.
고기도 좀 더 굽고, 술도 좀 더 꺼내고, 소맥으로 말아서 삽겹살이랑 꽃등심이랑 같이 먹으니 술술 들어간다.
"한바탕 하니까 쓰레기가 장난 아니네요. 치울 때 힘들것 같네....."
"뭐, 손이 많으면 얼마 안걸리지 않을까요?"
"손이 몇갠데, 어차피 쓰레기는 여기서는 버릴데가 없으니까 분리수거만 해서 비닐에다 넣어놓으면 되요"
공기도 좋고, 안주도 좋고, 술도 좋다. 적당히 취하니 기분도 좋아서 그리 웃기지 않은 이야기에도 크게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달이 높게 떠 있다. 시간이 꽤나 흐른 모양이다.
뭐든 적당히 해야 좋은 법이기에 정리를 했다. 그릴이랑 도구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분리수거해서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이런 곳에 와서 쓰레기 함부로 버리면 못쓴다. 가뜩이나 환경 문제도 심각한데 나 하나쯤이야, 하다가 쌓이는게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먼저 들어가서 자세요. 전 조금 더 마시다가 자려고요"
"아, 그러면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시온이랑 같이 둘이서면 술을 마시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백리가 낮에 말했던대로 밖에 나와서 할 생각은 없다. 설령 하더라도 여기서 떨어져서 소리가 안들리는 곳에서 하지. 최소한의 도덕성은 있다.
"이렇게 놀러 나오니 참 좋은거 같습니다"
"나오길 잘했지?"
"특히 애들이 귀여웠습니다"
"......애들이?"
성혜, 수정이, 아람이.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은 귀여운 법이다.
나도 자식을 키워본 적이 있으니 잘 안다. 시온도 자기 자식은 아니라도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수백, 수천년을 같이 살았지만 우리 둘 사이에 친자식은 없었다.
거기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
아, 거기에 종족이 다르다는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아이 가지고 싶어?"
"저는 가지고 싶습니다"
가지고자 한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가능하다.
하지만......거부하는건 나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식을 가지는건 여태까지 여럿 있었으나 시온과의 아이라면 무게가 다르다.
나는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몇배를 속죄해도 모자를 죄를 지었다. 그런 내가 곱게 죽을리 없고 원한을 쌓은 사람도 있으며 앞으로 할 일 또한 문제였다.
만약 아이를 가진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아버지가 필요할 때 있어줄 자신이 없다.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시온 한명 뿐이다. 만약 지금 내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죽는 대신 시온이 살 수 있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온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면, 지켜야 할건 늘어난다. 나는 그 아이를 지켜줄 자신이 없다.
"무서운겁니까?"
".....그렇지 뭐"
"만약 일이 마무리 된다면 어떻습니까?"
내 일이 마무리 된다면?
내 본업이, 그러니까 꽤나 원망받을 본업이 마무리가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한테 구원이란게 내려온다면 말이지.
.....구원이라. 말만 잘 하면 그놈이 해줄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는 나중에 생각하자. 그리고 임신하면 얼마나 아픈데 겪어보지도 않고 쉽게 말해? 특히 너는 더 큰일난다?"
"어차피 한번쯤 해봐야 하는겁니다"
일단 내 문제도 문제지만 시온도 문제다. 임신하는 것까진 문제 없는데 그 다음, 출산이 문제다.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 몸뚱이로 정상적인 출산을 하기에는 빡세다. 내가 보기에는 제왕절개를 해야 겨우 가능할듯 싶다.
"안됩니다"
"뭐가?"
"전 자연분만할겁니다"
"야, 할 수 있고 없고 따지기 전에 쇼크로 죽어"
요즘은 출산이 힘들긴 해도 산모가 죽는 일은 많지 않지만 옛날에는 목숨걸고 애 낳는게 출산이였다.
그 이유의 반은 청결로 인해서 세균 감염 문제도 있지만 조혼 풍습 때문도 있었다.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했는데 몸에 부담이 얼마나 가겠는가.
시온도 마찬가지다. 임신하면 마음대로 육체 변형도 못하고. 그렇다고 10달 내내 변신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아이한테 무슨 영향이 있을까 싶어서 대부분의 힘과 능력도 봉인된다.
진짜 난이도가 하드를 넘어서 불지옥 난이도다. 거기에 자연분만까지 하라고? 차라리 내가 절대자 목을 따오는게 나을듯 하다.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그러니, 좀 더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그래"
밤은 조용히 지나간다.
나는 시온을 끌어안고 맥주를 들이키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 * * *
아침이 되어서 기분 좋게 잠을 깼다. 내가 펼쳐둔 역장......그냥 모기장으로 할까. 모기장은 내가 자고 있을 때도 지속적으로 발동되서 접근하는 모기를 전부 박멸했다.
......진짜 산엔 모기가 많네. 자던 사이에만 여기로 몰려오다가 죽은 모기만 수천마리다.
"점심에는 물놀이 하고 라면을 먹을거니까 아침은 밥을 먹는게 좋겠지?"
"아침은 든든하게 먹는게 좋습니다"
나는 미리 생각해둔 메뉴를 떠올리고 요리할 준비를 했다. 우선 필요한건......베이컨이다.
"베이컨! 짜고 맛있는 베이컨!"
"아침부터 고기입니까?"
"싫어?"
"저는 죠습니다!"
거기다가 국산이 아니라 수입산이다. 우리나라는 삼겹살 때문에 베이컨으로 만들 부위가 없어서 베이컨이 기름만 나오고 썩 좋지 않다. 그에 비해서 해외에서는 아침에 베이컨에 계란 후라이 만들어 먹는게 일상 다반사라서 어디선가 보던 바짝 튀겨진듯한 바삭한 베이컨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건 베이컨이 아니다. 그 베이컨에서 나온 기름이다.
우선 베이컨을 비닐에서 뜯어서 적당한 크기로 썰고 달궈진 후라이팬에 볶는다. 치익! 하고 짭짤한 베이컨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절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라서 아직 자고 있을 텐트 한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마늘 자른거"
"갈릭!"
양파를 갈릭이라고 하는 바보는 없길 바란다. 갈릭은 마늘이다. 양파는 어니언이고.
고기 먹을 때 쌈 싸먹으려고 가져왔던 마늘을 꺼내서 적당히 슬라이스로 자르고 후라이팬 위에 투척한다. 그리고 베이컨 기름에 마늘을 볶는다. 그러면 훌륭한 맛 베이스가 완성된다.
여기에 어제 남은 야채들을 적당히 잘라 투척한다. 주로 감자나 당근 같은거. 한번 먼저 볶아준 다음에 마찬가지로 먹다 남은 찬밥을 투척했다.
슥슥 볶다가 간장을 골고루 뿌려준다. 그리고 다시 볶는다.
적당히 볶아졌다 싶으면 불을 끄고 접시에 옮겨 담는다.
"베이컨 갈릭 볶음밥 완성!"
"아침부터 볶음밥이 과연 들어갈까 싶지만. 냄새만 맞으면 그런 생각이 다 날아갑니다"
"여기에 김치까지 올리면 세그릇은 뚝딱 해치울껄? 아침은 원래 적당히 먹어야 좋은데 애들 과식하겠다"
좋은 냄새에 이끌려 일어난 사람들이 텐트에서 나왔다. 이미 준비된 아침 식사 메뉴를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와! 아침부터 볶음밥! 개존맛탱이겠네!"
"적당히 먹어, 어차피 먹고 물 들어가서 놀거잖아"
"아침이라서 좀 쌀쌀하긴 한데 못들어갈건 아님! 밥 먹고 좀 소화 시키다가 들어가야징!!!"
애들도 일어나서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베이컨 갈릭 볶음밥은 베이컨의 기름이 라드와 같은 역할을 해서 더욱 맛있다. 애초에 라드가 돼지 기름이니까 향신료가 베어나오는거 외에는 성분이 거의 같다.
와구와구, 애들이 밥을 먹는걸 보면 딱 그런 효과음이 어울렸다. 씹기는 씹지만 빨리 씹어서 한숟가락 넘기는데 몇초 걸리지 않는다.
"김치랑 같이 먹으면 더 좋습니다"
"아, 그러네. 땡큐요!"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한다"
"오빠는 느리게 먹다가 오빠 먹을것도 빼앗길껄?"
".......너한테 그렇게 당한게 한두번이 아니였지. 내 먹으려고 아껴둔 돈까스 도로 내놔! 토해내!"
"에베베베, 가져갈 수 있으면 배 째서 가져가던가!"
아침부터 투닥거리면서 백리와 루리가 싸웠다. 남매가 그러니 오히려 보기 좋구만.
캠퍼스 커플들도 일어나서 텐트에서 나왔다. 남남 여여 나눠서 잔 모양이다. 흐음, 젊은 애들이 혈기 넘칠텐데 잘도 그렇게 나눴구만. 손만 잡고 잘께!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아, 좋은 아침이네요. 그쪽도 같이 아침 드세요"
"아우, 최 사장님, 아침까지 챙겨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캠퍼스 커플들은 오늘 돌아가기로 했다고 들었다. 오늘 낮까진 논 다음에 오후 늦게 들어간다고. 그래도 오늘까지는 같이 놀 수 있다는 소리니까 실컷 놀고 좋은 추억 만들고 가면 된다.
아침을 먹던 와중에 캠퍼스 커플 일행 중 헛다리 짚어서 구박받는 손승진이 뭔가를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위로 산길 하나 작게 나 있던데. 등산 코스가 따로 있던가요?"
"등산코스? 잘은 몰라도 캠핑장 하려던 곳이니까 길을 따로 만들어둔 곳도 있지 않을까?"
"하이킹이나 산책로 같이요?"
여기는 원래 캠핑장으로 등록하려던 곳을 시온이 사들여서 우리 휴향지로 바꾼 곳이다. 여기 공터를 만들어 둔것도 그렇고 산책로 하나 만들려고 길을 내놓은 것도 이상할건 아니다.
"아침 먹고 잠깐 걸을까요? 해도 그리 심하진 않아서 물 들어가기엔 차갑고, 산책 하고 돌아와서 더울 때 들어가는 편이 좋을것 같은데요?"
"음....."
나쁘지 않은 의견이다. 루리는 그냥 들어간다고 하지만 아침에는 물이 차가운게 당연하다. 성혜나 수정이, 아람이 같은 애들이 들어가기에는 감기걸리기 쉽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정오에 가까워져야 들어갈만 할 것이다.
그동안 가만히 있기도 그러니 살짝 산책이라도 다녀오는게 재미 있어보인다. 산은 특이한건 없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 투성이다.
"그럼 잠깐 올라갔다 올까요?"
만약 물에만 들어갈거면 바닷가를 갔어야지 산에 와서 계곡에서만 놀고 산에 오르지 않는건 아깝다. 그게 산책에 불과해도 말이다.
어차피 애들도 밥을 방금 먹어서 물에 들어가기에는 좋지 않다. 소화도 시킬겸 잠깐 걷는게 좋으니 애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로 했다.
멀리 가진 않고 2,30분 정도만. 편도로 그쯤 걸으면 돌아올 때도 비슷하게 걸리니 소화도 되고 해도 뜨거워질테지.
"부부가 산을 오르면? 쁏!"
"........"
"악! 오빠가 때린다! 이거 가정 폭력이야! 악악악!"
"이번엔 루리가 잘못한거 맞다. 좀 더 때려라 백리야"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예요"
성혜와 수정이, 아람이는 흙만 있어도 재미있게 놀 나이다. 요즘 세대가 많이 바뀌긴 했어도 새롭고 낯선 것들을 겪어보는게 재미 없을리 없다. 핸드폰 붙잡고 그러는 것보단 훨씬 낫다.
누군가 손봐둔 길을 따라서 조금씩 걸었다. 경사도 완만해서 아이들이 걷기엔 나쁘지 않았다.
"아! 저기봐! 산딸기다!"
"어디? 어디? 아, 진짜다"
"저거 TV에서만 보던건데"
"그런데 좀 멀리 있네....."
"얘들아 잠깐 있어봐. 오빠가 따올께"
꽤 넓은 도랑을 사이에 두고 저 너머 수풀에 뭔가 작은 붉은 과실이 달려있는게 보인다. 백리는 애들의 호기심에 응해서 도랑을 한번에 훌쩍 넘어서 건너가 딸기를 땄다.
"야, 거기 뱀 조심해라. 그런데는 원래 뱀 같은거 잘 나와"
"뱀 없어요. 괜찮아요"
백리가 한줌 가득 따오고 돌아오자 애들이 모여서 작은 산딸기 하나씩 손에 쥐고 구경했다. 시중에서 그냥 딸기는 보기 쉽지만 라즈베리와 비슷하게 생긴 자연에서 금방 따오는 것은 처음 볼테니 호기심이 생길만 하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볼까?"
"와, 예쁘게 생겼다"
"얘들아, 그거 먹지마라, 입맛만 버려"
"이거 산딸기 아니예요?"
"뱀딸기야. 산딸기랑 비슷한건 맞는데 맛은 밍밍해서 별로야"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하게 구분된다. 산딸기는 작은 과실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형태인데 비해서 뱀딸기는 큰 과실에 작은 돌기들이 우둘투둘 튀어나온듯한 외견이다. 사실 뱀딸기는 산딸기보다 그냥 우리가 익히 아는 딸기에 더 가깝다.
오히려 산딸기가 라즈베리나 복분자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러고 보니 산딸기는 몰라도 복분자는 있을것 같은데? 산에는 어지간한 식물은 대부분 있으니까.
"아, 저거 하트모양 잎사귀 보이지? 저거 곰취다"
"곰취요?"
"응, 그냥 생으로 먹어도 되는 풀이야"
"먹어봐도 돼요?"
"씁쓸해서 애들 입맛에는 별로일껄?"
걷다보면 이런저런 식물들이 눈에 띈다.
아이들 눈에는 초록빛 중에서 다른 색이 감도는 열매나 풀만 눈에 띄겠지만 내 눈에는 식용 가능한 풀이 주로 보인다. 이래저래 잡지식만 늘어서 정작 독초 같은건 모르지만.
문득 지나가던 한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 이거 뽕나무다.
"잠깐만 백리야. 이리로 좀 와봐라"
"네? 뭔데요?"
여기가 산이 좋은건지 모르겠다. 아, 사람이 몰려오기 전에 산거라서 그런가? 길에서 가까운 곳에 채취되지 않은 것들이 꽤나 많다.
바닥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오디 자국들이 남아 있다. 지금은 시기가 늦어서 이미 나무에서 떨어진 오디들은 새까만 과실이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하지만 눈여겨 봐야 할건 그게 아니다.
수풀도 우거지고 꽤나 경사가 있어서 오르기 힘들지만 나나 백리에게는 문제가 없다.
뽕나무 뒷편으로 가니 길에서는 나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게 보인다.
"이거 버섯 아니예요?"
"그 중에서 제일 좋다는 뽕나무 상황버섯이지"
성인 남성 손바닥만한 누런 버섯이 서너개 쯤 돋아나 있었다. 그보다 작은 것도 두어개 돋아나 있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큰 것만 가져가자.
"이건 가져가서 너네 부모님 드려라. 몸에 좋은거니까 잘 달여 드시라고 그러고"
"정말요?"
"이거 귀한거야. 양식도 몇만원쯤 하는데 자연산에 제일 좋다는 뽕나무에서 난 자연산 상황버섯이면......내가 요즘 시세는 잘 모르겠는데 최소 50만원은 나가지"
상황버섯 특유의 누런 빛깔과 나무껍질 같은 머리는 확실하게 상황버섯이 맞다. 이래저래 헷갈리는 버섯도 맞지만 이건 진짜다.
산 올라왔다가 심 본 격이다.
"오! 쩐다! 아빠한테 끓여드려야지!"
사람 손이 닿질 않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다. 원래 자연은 내버려 두더라도 그 은혜를 준다. 적당히 욕심을 줄이면 그 은혜로 살아갈 수도 있는데 사람은 과욕을 부리며 그런 자연을 파괴한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말이지......
"어......?"
상황버섯의 향을 즐기고 있을 때, 바람을 타고 내 코에 스쳐 지나가는 냄새가 하나 있었다.
피 냄새, 그리고 야생동물 같은 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의 피 냄새다.
".....백리야, 가만히 있어봐. 지금 피 냄새 난다"
"피 냄새요?"
기감을 펼쳐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지만 저쪽도 눈치 챘는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하나 있었다.
야생동물?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야생동물이 사바나의 치타도 아닌데 우리 나라에 있을까?
부우웅!
그때, 나와 백리의 주머니에서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정말 우연이 아니고서야 문자다 동시에 도착하는 일은 없다.......재난문자 빼고.
백리가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고 말 대신 나에게 온 문자를 보여주었다.
[KFU]
현재 두류산 일대에 여우 원종 출현이 접수 되었습니다.
인근 주민들께서는 외출을 삼가하여 주시고 목격시 KFU 신고 센터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백리는 나에게 물었다.
"여기 무슨 산이라고 했죠?"
".....두류산"
그 순간, 나무 사이를 가르며 금빛으로 빛나는 여우가 마치 화살처럼 우리들에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