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42/507)



〈 42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최악이, 아니 라쿤맨이 납치범을 때려눕히는 모습을 보자 수정이와 아람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잘한다! 더 조져! 옥수수를 털어버려!"


"와아!"

"......요즘 초등학생들은  이럽니까?"

"내 친구들도 부모님 안부 물어보는게 다반사인데 이건 그나마 낫지 않아?"

"............."


시온이 아는 초등학생은 뭐랄까......머리 한쪽에 노란색 브릿지 염색하고 500원짜리 분식집 컵 떡볶이 먹으면서 친구들이랑 유희왕 카드로 노는 그런 순수한 애들을 생각하는데 요즘은 다른 모양이다.


하기사 급식충이란 신종용어도 생기는 마당에 오죽할까. 정보화 사회의 장점은 여러 정보를 얻기 편하다는 점이지만 단점은 어린 애들이라도 불필요한 정보를 접하는데 용이하다는 점이다.

최악이 마무리를 짓고 다가오면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애들이나 납치하는 못된 납치범은 이 라쿤맨이 조져버렸으니 안심하라구!"

"고마워요 라쿤맨!!"


라쿤맨의 심볼이나 다름없는 캐치프레이즈를 외치자 아람이가 마찬가지로 화답해 주었다.

일이 마무리가 된듯하자 최악은 시온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안부를 물었다.

"어디 다친덴 없어? 긁히거나 까진건 없고? 멀미나거나 그러진 않아?"


"무슨 애 취급입니까"

"솔직히 나보단 애 같은거 맞잖아. 단거 좋아하고 노는거 좋아하고"

"누가 누구보고 애 같다고 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화나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서"

"거 누가 보면 시비걸렸다고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으로 보고 있어. 나도 평범하게 경찰 아저씨부터 찾는다고"

시온과 최악의 대화를 보고 옆에 있던 수정이와 아람이가 눈을 휘둥그래 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기, 언니. 라쿤맨이랑 아는 사이였어?"


"........어떻게 합니까?"

"까발려지면 까발려지는거고. 냅둬. 이런 일로 애한테  쓰고 싶진 않아"


일본에 신혼여행 다녀온 이후로 정체를 숨길 생각은 버렸다. 할 수 있는데까진 숨겨도 애한테 손을 대서 숨길 생각은 없다.


최악 시선이 애들에게 향했다. 여자아이 두명, 건강상태 양호, 크게 다치거나 한 곳은 없음.

"조금만 참아봐라. 경찰한테 전화하면 금방 부모님 만날 수 있을거야"


"솔직히 카톡이나 페북 못해서 그렇지 학원 안가서 좋긴 했는데"


"학원 몇개나 다닌다고 애들이 왜 이렇게 삶에 찌든 말을 하냐?"

"피아노, 수학, 미술, 영어, 중국어, 5개 정도"

".......그럴만 하네"

납치범을 제압하고 아이들과 시온을 찾았다. 남은건 경찰한테 전화해서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라쿤맨 아저씨. 시온 언니랑 무슨 사이예요?"


"부부야"

"부부입니다"

"언니가 아줌마였던거 진짜였어?"


아람은 시온이 결혼했다는걸 조금 놀랐지만 덤덤하게 받아들인 반면에 수정이는 최악을 경멸어린 표정으로 보았다.

초등학생의 경멸의 눈빛.....어느 업계에서는 포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악에게 그런 취미는 없었다.

"야야, 꼬마야.  마누라가 나보다 나이 많아. 내가 연하라고"


"그래도 그렇지 납치범보다 라쿤맨 아저씨가  위험한거 아냐?"


"구해준 사람에게  소리는 아닌데  장래가 유망하구나"

"납치는 했어도 안건드린 사람이랑 구해줬어도 소아성애자는 솔직히 박빙이지"


하지만 애들은 부모님 곁에 있어야 좋은 법이다. 힘들어도 그러는게 제일 좋다. 아이를 가장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 뿐이니까.


"아무튼 얘들아, 경찰 아저씨 보거든 내 이야기는 해도 좋은데 울 마누라 이야긴 하지 마라. 그냥 내가 지나가다가 들러서 구해준걸로 하자. 오케이?"

"뭐 줄건데요?"


"구해줬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경찰 아저씨가 구해줬다고 대가를 받거나 그러진 않는데. 히어로가 구해준거에 대가 받으려고요?"


"그럼 넌 히어로한테서 뜯어내려고 작정했니? 요즘 애들은 영악해서 탈이라니까. 뭘 바라는데?"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나중에 이런일 당하면 전화해서 구조요청하게"


"알려줄 수는 있는데 추적 불가능한거니까 나중에 이상한짓 할 생각 마라"

"......쳇"


시온은 최악이 데려가고 애들은 납치범과 함께 경찰에게 넘겨주면 모든 일은 해결된다.

허나 세상일이 전부 생각대로 흘러가지만 않는다. 최악이 뭔가 기분 나쁜 낌새에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아람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라쿤맨 아저씨, 납치범 아저씨가 좀 이상한것 같은데요......"


납치범의 몸은 꿈틀거리며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비틀려진 다리와 팔은 점차 회복되고도 모자라 훨씬 더 강하게, 훨씬  단단하게 바뀌어간다.

최악은 그런 모습을 본적 있었다. 영등포 백화점 화재 당시 사건의 근원이자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던 남자.


하지만 다른점이 있다면 그때는 그나마 인간의 모습에서 괴물로 변이했다는 것이고 지금은 괴물에서 더욱 더 괴물로 변이해간다는 점이다.


"뭔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변이가 일어나는건가?"

그나마 멀쩡하다가도 일정 이상의 데미지를 입으면 변이하는것 같다. 케이스가 두개밖에 없었지만 어느정도 확신이 들었다.

최악은 애들과 시온을 뒤로 물렸다. 아까보다 더 위험해지고 눈에 보이는게 없을거다. 상대는 아까와 다르게 남아 있는 인간성 하나 없이 괴물이 되어버렸다.

근육이 우락부락해지고 몸에서 기이하게 변이된 등뼈가 튀어나와 날개같이 돋아났다. 그나마 뿔을 제외하면 인간의 얼굴이라 할  있었던 머리는 이빨이 밖으로 돌출되고 뿔이 한층 더 두터워져 인간의 외견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의 머리통을 그대로 쥐어서 으스러트릴 수 있을만큼 커진 주먹이 땅에 내려찍고 흙속으로 파고들어 지지대가 되었다.


우득, 하고 납치범의, 아니 괴물의 다리의 뼈에 힘이 가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동시에 다리 근육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팔로 고정하고, 다리를 추진력 삼은 뒤에 뿔을 무기로 사용해 돌진할 준비를 마쳤다.

같은 포스 유저라도 단련된 사람이 더 강하듯이 괴물의 몸으로 포스 유저가 된다면 그 증폭률은 상상할 수 없다.

"와 봐 등신아"

콰아아앙!!!


최악의 도발과 함께 한순간 괴물의 거체가 음속을 돌파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가까이에 있던 나무들의 가지가 부러질 정도였다.

속도 X 질량 = 파괴력인 만큼 그런 거구가 음속을 뛰어넘어 돌진한다면 충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사람의 몸뚱이는 살점 조각으로 나뉘어 형체도 남지 않을만큼 산산조각이 나겠지만 최악은 괴물의 머리뿔을 붙잡아 돌진을 막아냈다.

"소란 때문에 사람들 몰려오겠구만. 빠르게 끝내자"


말이 안통해도 그나마 인간성이 남아 있었다면 손대중 해줄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이성을 잃고 완전히 괴물이 되었다면 오히려 죽여주는게 편한 선택이다.

발버둥치는 괴물의 뿔을 잡은 상태로 최악은 놈의 몸을 살펴 보았다. 갑자기 얻은 힘에 대가가 있듯이 난데없이 몇배는 강해진 괴물의 몸에 흐르는 힘은 점차 몸이 견딜수 없을 정도에 이른다.


브레이크가 없는 폭주열차와 같았다. 연료가 다하거나 탈선하기 전까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자멸하겠지만 아이들과 시온을 제외하더라도 여긴 문화 유적지 한가운데다. 나가서 날뛴다면 사람들 여럿 죽는건 일도 아니다.

남은건 여기서 죽여주는  밖에.

"잘가라"


최악은 봐줄 여지 없이 손을 들었다. 수도(手刀)로 펼쳐들고 힘을 담아 마치 칼처럼 한번에 머리를 잘라 죽일 생각이였다.

그가 손을 내려치는 순간 괴물의 몸뚱이가 흐려졌다. 마치 액체와 고체의 중간지점, 젤리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최악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영체화? 불완전하긴 하지만 특이한걸 쓰는데?"


최악의 손에서 벗어난 괴물은 다시 형태를 갖추었다.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전투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지만 어차피 불완전한 영체화라도 시전 될때는 어지간한 공격으로 치명상을 줄 수 없다.

다시금 괴물의 몸으로 돌아온 놈은 괴성을 지르며 최악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지극히 간단한 동작이였지만 거대한 고릴라 같은 외견의 괴물이 한다면 사람 한명은 곤죽으로 만들  있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망치처럼 내려찍어지는 괴물의 주먹에 마찬가지로 최악이 주먹을 날려 튕겨냈다. 그리고 배를 걷어차서 넘어트린 다음에 놈의 배 위에 올라가 목을 노려 다리를 찍어내렸다.


괴물의 근육이라도 두부처럼 짓이길 힘이 담겨 있었지만 놈은 다시 한번 영체화를 해서 빠져나갔다.

결정타를 날릴 때마다 도망가니까 최악도 슬슬 빡쳤다. 앉은 자리에서 모기 잡으려고 하다가 안되니까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여 잡을 정도로 화가났다.


살기충천(殺氣充天).

살의만천(殺意滿天).

살신합천(殺身合天).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살기를 벼려내 무기로 만들어낸다. 살기를 끌어올리고, 살의를 응축시킨 다음에 둘을 합쳐 살신을 이룬다.


극한에 이룬 개념은 상위 개념에 간섭이 가능해진다. 마치 블랙홀이 시간과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것처럼 압축된 살기는 '죽음'이란 개념에 가까워진다.

"흉제붕권(凶帝崩拳)"


쩌어어엉!!!

마치 유리가 깨지는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형태도, 기척도 없는 살기에 적중한 괴물의 몸뚱이는 영체화 상태에서 급격하게 원래대로 돌아온다.


"끄아아아아! 크카아아아악!!!!"


최악의 주력기인 흉제붕권(凶帝崩拳)은  그대로 필살기다. 반드시 죽이는 기술이기에 방어하거나 피하는건 가능할지라도 적중했을 때는 상대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더불어서 상대가 허상, 분신, 영체화 등등의 회피 가능한 상태라도 그걸 피하는건 불가능하다. 흉제붕권은 살의는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면  상대에게 전해져서 죽이는게 가능하다.

보기보다 생명력이 강해서인지, 아니면 영체화 덕분에 데미지가 조금이나마 덜 들어가서인지 몰려오는 죽음에 괴성을 지르며 괴물을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내 절명했다. 처음부터 죽어 있었다는 듯이 조용하게 어느순간 비명 소리가 멎었다.


최악은 조용히 괴물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성은 남아 있었던 사람이 괴물이 되었다.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어나거나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다.


찝찝한 느낌이 그의 등을 타고 올랐다.



 * * *

최악은 다시금 시온과 아이들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아까 까지만 하더라도 시온은 데리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시끄럽게 싸워댔으니 분명 들은 사람도 있고 목격자도 있을겁니다. 이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저도 피해자인척 하고 있다가 빠져나가는 편이 의심사지 않고 더 자연스러울 겁니다"

"그렇기도 한데......괜찮겠어? 귀찮은 일 많을텐데"

"애들만 보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소란을 듣고 누군가는 경찰을 부르거나 적성종인가 의심하는 사람들은 KAMU에 연락할 것이다. 그들이 오면 먼저 납치 사건의 피해자인 수정이와 아람이를 데려갈거고 사건에 대해 이래저래 물어보느라 당분간 시달릴게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시온이 같이 가서 상대해주는 편이 낫다. 게다가 섣불리 시온을 데리고 피했다가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테고.


여기서는 철저하게 남으로 행동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편이 낫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하고. 경찰이 애들 너무 다그치게 하지 말고. 선 넘는 새끼 있으면 나 불러. 조져버리게"

"걱정마십시오. 이런일 한두번 해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최악은 이 자리에 없는게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보기 전에 자리를 빠져나갔다.


"고마워요 라쿤맨!"

아람이가 감사 인사를 하며 배웅하자 최악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화답해 주었다. 그에 아람이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시온과 수정이, 그리고 아람만 남자 서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라쿤맨은 지나가다 도와준거고 저랑은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렇게만 입을 맞추면 됩니다. 어차피 경찰도 애들에게는 깊게는 안물어 볼테니까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막나가는데 정작 정체는 숨기려고 하는거 보면 찔리는거라도 있어?"


"찔리는건 없는데 들키면 큰일날까봐 그럽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다릅니다"


최악이 라쿤맨인걸 들켰다고 치자.


처음에는 별 이상 없을거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그 무력 때문에 국가 안보를 위해서 일해달라거나 다른 나라에서 제의가 들어오겠지.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도리어 수작을 거는 사람도 있을거다. 없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세상에는 돈과 권력으로 안되는 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런 사람들이 잘못하다 시온을 건드리면 최악이 빡돌아서 그 사람을 갈아버릴테고, 살인 사건이니 경찰이 오고 또 트러블이 생기고 싸우고........그러다가 군대가 몰려오고 나라 하나를 상대로 다 때려눕히고 최악의 수로 핵폭탄이라도 날리고 소용 없으니까 그제서야 항복하거나 하는 경우가 다섯번 정도 있었다.

최소한 여섯번째는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경찰을 부를겁니다. 이야기는 제가 할테니까 걱정말고 맡겨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라쿤맨 아저씨 다시 만날  있어?"


".......그건 고려해보겠습니다"


조금 영악한 수정이에 반해 아람이는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어서 어른의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순수한 아이의 동심은 지켜주고 싶기에 섣불리 손대기 어렵다.

시온이 경찰에 전화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빠르게 출동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상대가 포스 유저였던걸 감안해서 이미 조사하고 있었던 특수 강력팀도 출동했다. 시온은 그중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고, 상대도 이쪽을 발견했다.

"어.....? 어? 혹시 지난번에......?"


"이유성 경위님. 그저께 봤는데 잊어버린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외견은 어릴지 몰라도 그때 다짜고짜 서장님 면담까지 갔던걸 기억 못할리 없었다. 게다가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고 고작 그저께 이야기다.

세상 사는데 중요한건 인맥과 학벌, 그리고 돈이다. 그중에서 인맥이라고 하면 이미 증명이 된 이상 아무리 상대가 어려보여도 절로 예의를 갖추게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야기를 했었는데, 설마 제가  피해자가 될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데 있으면 병원 부터라도......"


"저는 납치된지 얼마 안되서 괜찮습니다. 저보다 애들부터 병원에 보내는게 좋겠습니다"

수정이는 2주, 아람이는 1주일 동안 납치되어 있었다. 밥은 잘 먹고 지낸듯 하지만 혹시 모르니 병원부터 가는게 좋았다.

"그런데 적성종이라니, 사람을 죽이기만 했지 납치하는 적성종이 있다고는 이야기를 못들었는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KAMU 쪽에서도 관심을 가지는것 같고......"

"처음부터 적성종은 아니였습니다"


"네?"

"처음에는 그나마 인간이였습니다"

아이들을 납치했지만 그저 데리고만 있었고 꼬박꼬박 먹을걸 가져와서 굶지 않도록 해줬다. 도망치려고 한다면 다시 붙잡아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최소한 죽이진 않았다.


인간성이란게 납치범에게 남아 있었다는 증거다.

이유성 경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어 있는 시체는 아무리 봐도 적성종이라고 할만큼 흉악한 외견을 띄고 있었다. 자세한건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섣불리 믿기엔 어려웠다.


"자세한 이야기는 서로 가셔서 하시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진술은 제가 할테니까 애들은 먼저 검사 받고 부모님부터 만나게 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안그러면 또 그때처럼 될겁니다"

"........."

시온이 말한 그때가 뭘 뜻하는건지 이유성 경위는 정말로 잘 알고 있었다.


'나 짤리는 꼴 보고 싶어!'하고 소리치면서 서장이 명패로 패려고 드는걸 겪는건 한번으로 충분했다.

시온을 포함한 세 사람은 경찰의 인도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우선 아이들은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로 하고 시온만 경찰서로 이동해 거기서 진술 뒤에 따로 검진을 받기로 했다.

"나중에 봐, 시온 언니"

"나중에 봐, 아줌마"


아이들은 따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나중에 만나는걸 약속하며 헤어졌다.

경찰서에 도착한 시온은 우선 신상명세부터 확인받았고 몇몇 경찰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외견으로 스물셋?"

"미국에서 살다가 병으로 인해 치료를 위해서 독일로 이주. 그러다가 한국으로 귀화해 결혼......결혼?"


이미 이번 사건에 대해 들은 사람은 납치범이 어린 여자아이만 납치한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중 한명이 사실은 외견면 여자아이고 실제로는 이미 성인에 결혼까지  유부녀라는걸 알자 놀랐다.


"혹시 남편이 소아성애......읍읍! 야, 뭐하는 짓이야!"

"강 경위님.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겁니다. 제가 어제 서장님한테 털린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유성 경위가 강 경위이라 불린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리고 슬쩍 눈짓으로 시온을 가리킨다.


"그제 밤에 이번 사건 범인인줄 알고 저분 남편 수갑 채웠다가 그런겁니다. 그때 거의 자정에 가까웠는데도 서장님이 전화 받은데다가 어제는 그거 때문에 서장님한테 명패같다가 두들겨 맞을뻔 했습니다"


"서장님 지인분이야?"

"그 정도 수준은 아닌  같았습니다"

만약 그냥 아는 사이라면 조용히 처리하라고 했겠지 큰 소리가 오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장의 태도로 보아 단순히 지인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약점을 잡히거나 심기를 거슬리면 안되는 사람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해야 했다. 잘못 건드리면 목 날아가는건 한순간일테니.

"진술은 제가 받겠습니다. 그나마 얼굴 아는 사람이 하는게 더 나을테니까요"

"......그래, 정리 끝나면 나한테도 알려주고. 난 먼저 애들 괜찮은지 부터 확인해볼께"

이유성 경위가 시온의 진술을 받았다. 그리 특이할건 없었다. 솔직히 아침에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납치당한건 사실이고 아무런 인위적인 요소도 들어가지 않은 우연이였으니까.

하지만 라쿤맨이 나타났다는 대목에서는 의심이 일어났다.


"라쿤맨이요?"

"네, 갑자기 나타나서 구해줬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기 마련이고 경찰이라면 그 인과를 확실하게 따진다. 묻지마 살인이 아닌 이상 범행에는 동기와 수단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다짜고짜 라쿤맨이 나타나서 구해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애들이 납치됐을 때는 조용히 있다가 하필이면 지금 등장해서 구해줬을까?

이유성 경위의 의심은 타당했다. 라쿤맨은 일단 대중적인 인식으로는 가면 쓴 괴짜 슈퍼 히어로 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미등록 포스 유저이기에 지금은 따로 대책팀이 만들어질 정도의 범죄자에 불과했다.


팀이 다르더라도 눈앞에 보인다면 잡아야 할 사람인건 맞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나타나서 구해줬을까요?"

"그야 저도 모릅니다. 그냥 구해준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세상사 우연이 겹칠 때도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세상 살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거란 보장은 없다. 시온만 하더라도 오늘 갑자기 납치되지 않았는가?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유성 경위의 진술서를 작성하던 이유성 경위의 손이 멈췄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진술서 작성을 위해 남겨진 자신만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전부 현장 보존이나 증거물 확보를 위해 뛰고 있었다. 그나마 같이 있던 강 경위도 병원쪽으로 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이동했다.

"시온씨"


그의 머릿속에 라쿤맨의 체구와 그저께 만났던 최악의 체구를 비교해 보았다. 겨우 그 정도로 확신을 가지기에는 어렵지만 일단 결론적으로 체구는 비슷했다.

"혹시 라쿤맨은......."

"거기까지 해두십시오"


시온은 이유성 경위의 눈을 똑바로 보며 그의 말을 잘랐다. 무표정한 눈은 마치 생기 없는 인형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불쾌한 골짜기처럼, 인간이 아닌것이 인간을 어설프게 흉내냈을 때 드러나는 불쾌감이 공포로 느껴지는것 같았다.

이유성 경위는 특수 강력팀의 포스 유저다. 기본적으로 포스 유저 범죄자를 잡는 일을 하기 때문에 같은 경찰이라도 훨씬  험한걸 많이 겪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지만 건드리면 부러질것 같은 외견의 시온이 조용히 노려보자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이유성 경위님.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모르는척 시치미 뗐을겁니다. 그이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니 말입니다"


동조할 다수가 있다면 아군으로 만들어서 한명을 바보로 만들면 그만이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두눈박이가 괴물이라고,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는 시온에게 무슨 소리 하냐는 잔소리만 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온과 이유성 경위, 단 두사람 밖에 없다.

그가 시온에게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시온이 그를 입막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시치미를 떼는 것보다 오히려 입막음 쪽이 편하다.

"일단 당신이 생각하는게 맞습니다"

"역시......!"


"그래서  할 생각입니까?"

시온은 좋은 사람이지만 착한 사람은 아니다.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은 지켜도 필요하다면 어기는 사람이다. 단지 그 선이 최악과는 다르게 살인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 잘해야 감옥에 수감 되는게 전부입니다. 아직 적성종만 죽였지 사람에게 해를 끼친적은 없으니 말입니다"

일본에서 난리친건 있지만 사망자는 없다. 죽지만 않았다면 세상만사 돈으로 안되는게 없다. 그리고 시온에게는 그걸 해결할 돈이 썩어넘칠 정도로 있었다.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인 경찰을 제 손으로 보복하게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경찰을 협박 하시는겁니까?"

"협박 당하는 사람이  이상 경찰이 아니게 된거란 소리입니다"

시온은 고개를 까딱이며 이어서 말했다.


"설마 제가 경찰 쪽에 아는 사람이 겨우 그쪽 서장님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시온이 마음만 먹는다면 겨우 경위 하나 자르는 것도 일도 아니다. 단지 포스 유저라서 조금 과정이 귀찮아질 뿐.


"......뭘 원하시는겁니까?"

"입만 다물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와 라쿤맨과의 연관점은 경위님만 입을 다물어 주신다면 사라집니다"

이유성 경위만 아니라면 사람들은 전부 우연으로 치부할거다. 조금 의심하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지금 사람들의 시선은 납치범에게 향해 있었다. 적성종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괴물이기에 오히려 모든 시선을 그쪽으로 모아주고 있다.

"저도 공짜로 해달라는건 아닙니다. 충분히 만족하실 보상을 해드릴겁니다"

"뇌물이라도 주시려고요? 공무원이 뇌물 받았다가 큰일납니다"


"돈이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시온은 책상 위에 있던 종이 한장을 찢어 숫자 여섯개를 적었다.

어디 금고 비밀번호라도 되나 싶었지만 다른 번호였다.


"이번 회차 복권 사시는게 좋을겁니다. 어차피 이번건 세금 떼면 얼마 안되는 적은 돈이니 딱 적당합니다"

".......예?"


지금 이게 복권 당첨번호라도 된다는 소리인가?


그럴리가 없었다. 꿈에서 조상님이 복권 당첨 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별거 아닌 듯이 눈앞에서 슥슥 적어줘서 알려주었다.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설득력이 없다.

애초에 추첨 방식에서 기계를 관리하는건 경찰들이다. 각기 다른 서의 경찰들이 기계를 점검하고 지켜보기까지 한다. 거기에 인위적인 요소가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의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이 번호로 당첨되지 않으면 경위님이 알고 있는 사실을 주변에 알려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첨된다면......경위님은 합법적으로 당첨금을 수령하고 입만 다물어 주시면 됩니다. 뭘 해달라는게 아니라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는 겁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의였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보여주고 편한 길로 가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이유성 경위는 침을 삼켰다. 마음 속에서는 불의에 굴하면 안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저는......"


그의 대답에 시온이 희미하게 웃었다.

 *    *   *

진술을 마치고 시온은 병원으로 이동해 혹시나 모를 검진을 받기로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강 경위와 진술서 작성을 끝낸 이유성 경위가 커피 자판기 앞에서 만났다.


"강 경위님"


"왜? 아, 진술서 작성 끝났어?"

"혹시 이번 복권 당첨금 얼만지 아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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