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38/507)



〈 38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다시 소개해드리지만 서울 중부경찰서 특수강력팀의 이유성 경위입니다. 제가 오해해서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알았다면 됐습니다"


정중하고 진심어린 사과라면 받아줄 가치가 있다. 기분 잡치긴 했지만 상대가 상사한테 갈굼받는 모습을 보니까 어느정도 풀렸다. 거기에 이유도 설명해준다면 납득할 수 있는 문제니까.

"우리 마누라랑 돌아다니다가 경찰 아저씨가 이래저래 물어보는거나 하룻밤 정도 유치장에 신세 져본적은 있어도 수갑까지 차는건 처음이거든요? 왜 그랬는지부터 설명 해주실래요?"

도주 가능성이 없다면 영장도 안나오는데 협조를 해준다면 다짜고짜 수갑을 채우지 않는다. 만약 수갑을 채운다면 현행범, 혹은 용의자에게나 그러겠지.


즉, 뭔가 범죄가 일어났다는 소리다.


나한테 체포  때의 태도를 보면 상당히 중범죄다. 설마 포스 유저 범죄자 잡는팀의 경찰이 사기꾼이나 잡으러 오겠냐.


"납치? 살인? 강간? 절도? 아, 보아하니 절도는 아니고, 그냥 강간이였다면 인상착의 정도는 있었을테니 날 덮치진 않았겠고. 납치랑 살인 반반씩 섞었나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있으면 인상 더러운 남자지만 마누라랑 있으면 초등학생 여자애랑 같이 있는 수상한 남자거든요. 그쪽 관련 범죄라면 그거 밖에 안나오죠"


내가 오해를 받은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니라 시온이 있어서다. 겉보기에는 초등학생인 아이가 이런 야심한 밤에 인상 더러워 보이는 남자와 같이 있다면 누가봐도 수상한 장면이다.

여기에 약간의 범죄를 더해본다. 만약 이유성 경위가 소아 납치, 혹은 살인과 강간 사건을 조사 중이였다면 나는 빼도박도 못하게 용의자로 의심할 확률이 90퍼센트다.

솔직히 대낮에 돌아다녀도 의심쩍은 눈으로  판에 야밤에 이러면 나라도 오해하겠다. 일리가 있네.


"첫 사건은 한달 전의 한 실종 신고였습니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여자아이 한명이 실종되어서 3일동안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일 후에는?"

".......인근 상가 뒷건물에서 상반신만 발견 되었습니다"


부모님 마음이 찢어졌겠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마음에 묻는 법이다. 하물며 초등학생인 여자애가 그렇게 갔는데 얼마나 애통하고 답답할까.


사람이 죽는건 당연하지만 그 끝이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아직 꽃피지도 못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면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다.


"그 뒤로 두건의 실종 사고가 이어졌습니다. 하나는 2주 전. 다른 하나는 1주 전. 각각 다른 학교이긴 하지만 실종된 학생들이 비슷한 또래인걸 생각하면 동일범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범인을 포스 유저로 추정하는 이유는요?"


"처음 발견된 아이의 시신은  힘으로 하반신이 뜯겨나간 듯한 상흔을 띄었습니다. 부검 결과도 그렇게 나왔고요. 보통 인간의 힘으로 그렇게 할  있을리가 없으니 포스 유저가 범인이라고 확신한 상태입니다"

납치 후 살해. 그것도 초등학생 여자애를.


내가 인간말종이여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근처에 거주중인 포스 유저들은 현재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전부 알리바이가 있어서 미등록 포스 유저일 확률을 생각하고 퍼져서 잠복 수사중이였습니다만......."


"날 보고 그놈인줄 알고 덮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까지 90도로 숙여 사과해왔지만 그건 이제 내 관심 밖이였다. 아까 기분 상한 것보다 더 더러운 기분이  등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이런 날 보면 내가 그놈에게 뭐라  수 있는 처지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나도 사람을 죽인적은 수없이 많고 그중에 분명 어린애들이, 심지어 초등학생보다  어린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다 죽인거고. 초등학생만 골라 죽이는 놈하고  죽이는 놈하고 같냐?

 최소한 공평하다. 여자던, 남자던, 노인이던, 젊은이던 그런거 안가리고 죽이지만 초등학생만 죽이는 놈은 생각만 해도 빡친다.


"뭐, 됐습니다. 결국에는 오해한거고 잘 풀렸으니 됐죠. 그리고 수갑이나 풀어주시죠?"


"아! 죄송합니다! 금방 풀어드리겠습니다!"


품에서 수갑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어준다. 열쇠가 뭔가 자석처럼 생겼는데 전자식인 모양이다. 3초 정도 대고 있으니 작은 기계음과 함께 수갑이 풀렸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서 뻐근하던 어께를 풀고 시온의 손을 잡아주었다. 내 손목에 수갑 자국을 매만지더니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괜찮습니까?"


"거꾸로 묶여서 삼일동안 그러고 있어도 멀쩡할텐데 겨우 잠깐 수갑 찬거 가지고 뭘. 쓸데없이 몸 튼튼한거 알잖아"

손목에 남은 자국도 3초만에 사라졌다. 이래서 건강한게 제일이다.


"아까 있었던 일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뭐라 할 면목이 없습니다"

"할일을 하셨던거고 오해할만한 상황이였으니 용서해드릴께요"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안참았다. 오해에서 비롯되고 진심어린 사과까지 받았는데 딱히 더 이상 뭐라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첫 사건이 한달 전이라면 진작에 알려졌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신문에서 그런 소식 들은적 없는데"

"기자들은 이미 냄새를 맡긴 했지만 아마 범인의 실체가 밝혀질 때 까지는 극비 수사로 진행될겁니다. 저도 위쪽에서 지시가 내려온거라 잘은 몰라서......서장님이 아니였다면 두분께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을거고요"

"흠"


여기저기서 수상한 냄새가 난다. 범죄란 측면에서는 확실하게 기능하는 내 코가 그 증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 감이 그렇다고 알려주고 있고. 이래서 두번째 능력을 이걸로 각성하길 잘한것 같다.

"그럼 다음에 보죠, 이 경위님. 그놈 꼭 잡길 바라겠습니다"


"예, 조심히 들어가십쇼!"


나는 시온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 이 경위가 한숨을 쉬고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가는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영 석연치가 않네. 우리 동네 주변에 그런 놈이 있었어?"

"딱히 소문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네가 말하는 소문이란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잖아? 사람들 입에도 안올라간 이야기는 찾을 수 없는게  한계니까 그런 면에서는 헛점이지"

시온은 전자기기에 한정해서 거의 전능한 능력을 보여준다. 미국의 국방부 서버를 해킹해도 아무도 모를만큼 은밀하게 작업할  있고 단숨에 전세계의 은행과 기업을 털어버려서 세계적인 경제 파탄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전자 계통의 이야기. 만약 사람들의 입에조차 오르지 못한 이야기는 시온이 알아낼 수 없다. 설령 CCTV를 해킹해도 한계가 있다. 상대가 포스 유저니까.


경찰도 바보는 아니니까 어느정도 포스 유저 범죄자를 상대하는 노하우가 있을것이다. 그런데도 불과하고 놈의 정체도 못잡는다는건 그에 특화된 특성을 사용하는 녀석이란 소리다.


게다가 시온은 이능력에는 힘을 쓰지 못한다. 상대가 순수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컴퓨터라면 설령 지구를 장악한 스카이넷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한큐에 점령할  있지만 이능력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컴퓨터라면 가정용 컴퓨터라도 애먹는다.

시온의 본래 성이자 종족명인 하논은 물리법칙에는 정점에 이르러서 태어날 때부터 초월자 반열에 드는 사기 종족이지만 이능력 내성만큼은 평범한 인간보다도 없다. 하나에 치우친 대신에 하나에 취약한 밸런스 패치다.

"탐정 만화에서 경찰들이 바보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안그래. CCTV같은건 진작에 뒤졌을테고 잠복수사 기간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길거야. 근데도 못잡았다는건.......상대도 만만치 않다는 소리겠지"

"잡을겁니까?"

"솔직히 잡고자 하면 못잡은거 없지"


놈이 이 근처에서 활동한다고 하니까 의지역장을 넓혀서 찾으면 그만이다. 지구 하나도 기감의 범위에 넣을 수 있는데 겨우 서울시 하나 못넣겠는가? 단지 내 머리가 좀 열받는거 뿐이지.


"별 상관도 없는 일에  쓰지 말자고. 저번에 조팀장 아저씨가 라쿤맨 대책팀인가 뭔가 만들어졌다고 했잖아.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는게 좋지"


"세상사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법입니다"

"아무렴. 그런데 설마 그놈이 널 납치하겠어, 뭘 하겠어? 아니, 납치하는 놈이  불쌍하다"


부부싸움하면 내가 지는데.

내가 봐주기도 하지만 시온이 그만큼 강한 것도 있다. 나는 대인전이라면 설령 나보다 상위 초월자가 와도 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시온은 대인전보단 일대 다수. 광범위 파괴 행위에 특화되어 있다.

비유하자며 내가 권총, 시온이 미사일. 오케이?


시온을 납치한다면 나는 놈의 명복을 빌어줄 생각이다. 설령 상대가 이능력을 사용해서 시온과는 극상성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우리 마누라 납치 대비도 안해뒀을줄 아냐.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뭐 할지나 생각해보자. 나가서 영화볼래?"

"흠, 생각해보겠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들은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30분은 가뿐히 버틸거라고 생각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있었다. 워낙 놀이터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터라 그런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되감아서......!!"

"쓸데없는거에 굉장한 기술 쓰지 마! 낭비 싫어한다는 녀석이!"

"아이스크림은 중대 사안입니다!"


결국 내가 새로 사오는걸로 끝났다.


* *  * *

일주일에 하루, 휴일의 아침이 밝았다. 우리 [닥쳐줄까?]는 매주 토요일이 휴업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늦잠을 잤다.

시온은 평소에는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데 비해 오늘은 나보다 일찍 일어났다. 내가 늦잠 자려는것도 있지만 휴일에도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시온의 성격상 특이한 일이다.


먼저 일어난 시온이 부엌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려가서 도와줄까 하다가 가끔은 시온이 뭔가 할 때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것도 좋을것 같아서 한숨 더 잤다.


느긋하게 자다 일어나니 10시 쯤 되었다. 기지개를 피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시온이 아침밥을 준비해 놓았다.

"주먹밥이네? 안에  들어갔어?"

"볶은 김치랑 스팸 섞은거, 그리고 참치 마요 입니다"

"아, 두개  내가 좋아하는거다"

자고로 참치의 궁합은 간장에 와사비도 좋지만 진리는 마요네즈이며 스팸의 궁합은 볶은 김치다. 나트륨? 난 죽으면 소금 때문에 몸에 안썩을듯.

내 주먹 비슷한 크기로 뭉쳐진 주먹밥 하나를 먹는다. 겉부분에 김가루를 묻혀서 맨손으로 만져도 달라붙지 않았다. 밥과 볶은 김치와 스팸의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지면서 조화를 이룬다.

"아침부터 만드느라 어께가 아픕니다. 어께 좀 주물러 주십시오"

"아이고, 고생 했어. 네가 아침밥 하는건 간만이네"


나는 시온의 어께를 조금 주물러 주었다. 내 손이 그렇게 큰건 아닌데 시온의 어께 위에 올리면 상대적으로 커보인다. 그만큼 그녀가 작다는거겠지.


"그런데 내용물이 짠맛이라서 밥에는 간을 좀  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렇게  짠건 아니지만 많이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걸"


"밥에는  안했습니다"


"..........?"


"밥에는  안했습니다"

시온이 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나는 일단 먹고 있던 주먹밥을 전부 삼킨 후에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있잖아. 한가지 물어보겠는데. 아까 주먹밥 만드느라 어께 아프다고 했지? 팔이나 손이 아니라 하필이면 어께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는 이유는?"

"이래서 눈치빠른 당신을 좋아합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페티쉬들이 있다. 그중에는 겨드랑이로 주먹밥을 쥐어 만드는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나도 겨드랑이 좋아해. 가끔 가다가 밤에 섹스 할때는 시온의 겨드랑이에서부터 옆구리까지 핥아 내려오기도 하는데 뭐.

요식업 종사자로서 먹을거 가지고 장난친다면 화를 내야 정상이겠지만......시온의 남편으로서는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먹을거 남기면 안되겠지? 음, 존맛"

"사실 거짓말입니다. 그건 겨드랑이로 만든거 아닙니다"


".......'그건'? 뭔가 애매한 발언이 끼어있는데?"


"이중에서 딱 하나 그렇게 만든게 있긴 합니다만......."

주먹밥의 갯수 내가 먹은걸 제외해도 10개. 크기는 크지만 나나 시온이나 많이 먹기 때문에 아침에 가볍게 먹어도 이정도 숫자가 적당하다.


확률은 10분의 1! 겨우 10퍼센트의 확률! 보상은 미소녀가 겨드랑이로 만든 주먹밥!

씹혜자 가챠네. 어우, 뭘 이렇게 퍼주지?

"요거다"


"앗, 단번에 정답을! 치사하게 거기서 능력 쓰는겁니까?"


"뭐 어때. 네가 먹을건 아니잖아"

"조금 더럽다고는 생각 안하십니까?"

"난  몸에서 나오는거면 다 먹을  있어"

"큰거 안나오는거 알고 그러는 소리인거 알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시온의 몸은 일반적인 인간의 몸과 다르다. 외견도 같고 땀도 흘리지만 이런저런 면에서 틀리다.


그중 하나가 화장실은 가지만 큰건 보지 않는다는 것. 먹은 것들은 영양분으로 전부 분해되어 낭비 하나 없이 흡수되고, 설령 배출해야 하는 것은 소변이나 땀으로 내보내진다.

그나마도 내가 보기엔 땀이나 소변도 이런저런 플레이를 위해서 일부러 하는것 같은 느낌이 있단 말이야......

"겨드랑이로 만든거 치고는 생각보다 덜짠데?"

"요즘 시험해보고 있는게 있어서 몸의 신진대사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느정도 있으면 재미있는걸 할 수 있을겁니다"


"뭘 하길래 그래? 살짝만 알려주라"

"그건 밤의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요상한 플레이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좋아하니 괜찮아.

밥 먹고 나니 몸이 나른해졌다. TV를 볼까 핸드폰을 만지고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진다.


"아침부터 뭐지? 올거 없을텐데?"

"아마 택배일겁니다"


"왠 택배? 주말에 오는 택배도 있나?"

"할증료 내면 주말에도 배달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정말인가 싶어서 나가보니 진짜 택배였다. 내 허리춤 부근까지 오는 꽤나 묵직한 상자에 담긴 택배는 택배 아저씨가 구르마에 얹어서 옮기는데도 상당히 힘들어 보였다.

내가 받아보니 무게가 상당하다. 보통 사람은 들기는 커녕 끄는게 고작일 정도로 묵직했다. 살짝 흔들어보니 약간 금속음이 났다.

피규어라고 생각해도 보통 피규어 같은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용물이 뭐야?"


"열어보면 압니다"


시온은 기대감 만땅인 눈으로 박스를 올려다 보았다. 시온과 비슷한 크기의 박스는 현관에서도 세워서 들어야  정도로 컸다. 우리집 현관문이 작은건 아닌데 말이지.

집 안으로 들이고, 피규어 같은건 2층에  하나에 따로 보관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올렸다. 피규어만 따로 모아놓는 방 한구석에다 두고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거의 시온만한 정도로 큰 피규어의 정체는......!!

"와! 1/3 헐크버스터 피규어!!!"

"원래 이 사이즈는 안나와서 주문 제작했습니다"


"이 정도 크기면 너도 안에 탈 수 있는거 아니냐"

물론 안에 아이언맨 슈트 입고 타는게 아니라 시온이 그냥 들어가야 할 정도지만 그만큼 피규어가 크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원본이 한 3미터쯤 되니까 거기에 1/3 비율이면 1미터 정도다. 시온의 키가 130cm정도 되는데 실제로 그 비율 크기는 아닐테니 시온이랑 비슷한 키였다.

"등신대 사이즈를 사고 싶었지만 집에 안들어갈것 같아서 조금 양보했습니다"

"그래도 이거 개쩐다. 역시 남자의 로망이야"

자고로 남자의 로망은 로봇, 드릴, 합체, 파워, 그런 부류이기에 거대로봇은 아주 껌뻑 죽는다. 1/3 비율이라도 디테일은 살아 있어서 충분히 멋지다. 시온이 옆에 있으니까 꼭 괴수 대결전 같은 느낌도 들고.

"잠깐 거기 서 있어봐. 사진 한방 찍게"

"포즈 같은거 취하면 됩니까?"


"더블피스 아헤가오만 빼면 아무거나 해도 돼"

"쳇"

뭘 아쉬워 하고 있냐.


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바로 옆에 서서 크기 비교하는 사진이나 시온의 뒤에서 둘이 한판 붙는것 같은 모션으로 사진을 찍거나 하다보니 벌써 점심 때가 되어 있었다.


"이거 백리한테 보여줘야겠다. 이런거 좋아하려나?"


"자고로 남자 중에 로봇 안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백리한테 이미지 첨부 파일로 사진 몇개를 보내니까 1분만에 답장이 왔다.


[와, 형 이거 뭐예요? 피규어 샀어요?]


[마누라가 삼]

[개쩐다. 저거보다 작은것도 막 수십만원에 팔던데 그건 얼마짜리예요?]

"얼마 짜리냐는데?"


"그냥 결제해서 기억 안납니다"

[몰라, 오더메이드야]


[쩐다. 나중에 구경하러 가도 되죠?]

[ㅇㅇ]


[루리한테도 보여줘야지]

점심 때라서 뭘 만들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중국집에 시키고 싶었다. 집에서 짜장, 짬뽕하려면 손이 많이 가니까 기왕이면 시켜먹는게 낫다. 맛있는 집은 오히려 그편이 더 낫기도 하고.


"난 짬뽕, 너는?"

"삼선짜장으로 시켜주십시오"


"거기에 탕수육은 큰걸로 하나 시키고.....다른거 뭐 필요한거 있어?"

"깐풍기 작은걸로 하나 더 시키면 될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 둘이 먹는데 탕수육 큰거 하나가지고 부족한 감이 있지. 알았어"


짜장, 짬뽕, 탕수육으로 승부를 보는 중국집도 있겠지만 유산슬이나 양장피 같이 여럿이서 먹는 요리도 메뉴에 있는 가게는 어쩐지 신뢰도가 올라간다. 적어도 그 정도 실력은 있다는거니까.

나는 우리집 근처 중국집에 전화해서 주문을 했다. 점심 시간이라 배달이 밀려서 조금 걸릴것 같다.


"군만두 서비스 준다고 했습니까?"

"아, 그거 안물어봤네"

요즘은 인심이 박해져서 어지간히 단체 주문이 아니면 군만두 서비스도 안온다. 짜장, 짬뽕에 탕수육, 거기에 깐풍기도 하나 시켰으면 올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피규어 상자를 뜯어서 분리수거를 해두고 정리하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초인종 울리는 소리에 내가 나가려고 했는데 시온이 먼저 나가서 받아왔다.

"내가 나갔어도 됐는데"

"정리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손 노는 사람이 해도 됩니다"

 근처 중국집은 두세군데 시켜서 먹어봤지만 이 집은 처음이다. 맛 괜찮으면 자주 시키는거고 아니면 손절하는거고. 요리의  관련해서는 확고한 기준이 있는게 나다.

일회용 나무 젓가락으로 그릇의 비닐을 비벼 뜯어서 벗겨내고 먼저 국물을 한모금 마셔보았다.


"흠, 짬뽕 국물은 나쁘지 않은데. 근데 저번에 시켜먹었던 곳 보다는 못한걸"

"짜장면은 괜찮습니다"

"그래?"

다음은 탕수육. 양은 합격인데 튀김옷과 소스의 상태는.......약간 애매한데.

나는 탕수육 위에 소스를 부었다. 그러자 시온한테서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  소스를 붓습니까?!"


"너 부먹 좋아하잖아"

"찍먹으로 먹어도 됩니다. 당신은 그쪽을 좋아하잖습니까?"


나는 찍먹, 시온은 부먹파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볶먹이긴 하지만 시켜먹으면 그걸 못한다.

이런면에서 보면 나랑 시온은 취향에서 이런저런게 갈리는 차이가 있지만 오랫동안 크게 싸운적 없이 살아왔다. 아직도 신혼인거 보면 알지.


자고로 부부 생활에 가장 중요한건 존중이다. 서로 그걸 알기에 이해할  있는거고 포용한다.


사랑과 존중만 있다면 어떤 부부도 행복해질 수 있다. 단지 그게 어려울 뿐이지.


한창 짬뽕을 들이키듯 먹다가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형, 루리가 직접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는데 어쩌죠?]


[집 주소 알려줄테니까 밥은 먹고 와라. 우리 중국집 시켜먹어서 밥 안했음]


[괜찮아요? 휴일인데 민폐 끼치는거 아니예요?]


[밤 늦게까지 있을거 아니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 감상도 들어보고 싶어서]

우리 집에 두면 결국 볼 사람은 우리들 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보고 굉장하다고 평가해줘야 사는 보람이 있는 법이다.


취미로 글쓰는 사람도 누군가 봐주고 평가해주길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ㅇㅋ, 한시간 뒤쯤 봐요. 저도 같이 갈께요. 루리 혼자 보내면 사고칠것 같아서]


"백리랑 루리가 온다네"

".......누구 말입니까?"

"루리......아니, 네가 아는 그 루리가 맞아. 정보수집 단말 개체"

"있었습니까?"

"내가 말 안했어?"

"백리 학생한테 여동생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조용하게 살아가는 초월자의 권속 같은 것도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루리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익숙하다고 생각했던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초월자의 권속이라고 딱히 큰 힘을 부여받지는 않는다. 루리도 포스 유저이긴 하지만 마스터급 유저에 비하면 훨씬 약하다. 단, 또래에 비해서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충분한 재능을 받는다.

"처음에 좀 만나고 최근 환생 10회차 전까지는 못봤는데 여기서 또 만나네"


"애초에 만날 확률이 희박하다는거 알지 않습니까? 당신이나 저처럼 특수한 인연으로 맺어진것도 아니고"

"그래도 묘하게 잘 만나긴 한단 말이야"


여러 환생을 거듭하면서 내가 알던 지인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보는건 몇번 없었다. 일본 쪽에 히비키가 그런 케이스였지만 겨우 한번이고.


하지만 루리는 대여섯번 정도 만났다. 좋은 인연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징한 인연이기도 했다. 워낙 성격이 괴팍해서.


"다 먹었으면 상 좀 치울까? 애들 온다니까 정리는 해야지"


그릇은 어차피 가져가서 다시 중국집에서 설거지를 하겠지만 가져가기 편하라고 한번 행군 다음에 바깥에 내놓는다.

밥은 못해줘도 간식 같은건 뭘 주면 좋으려나.....


"냉장고에 초코 오믈렛 있습니다"

"난 그거 너무 달아서 몇개 못먹겠더라"

"저도 40개쯤 먹으면 속이 안좋습니다"


"......."


어떤 간식이던 40개쯤 먹으면 누구나  그렇다. 혈당수치가 폭발하고 혈관이 죽여달라고 소리치겠지.

간단하게 집안을 정리했다. 쓰레기나 어지러진 옷들 같은건 내가 치웠는데 시온은 돌돌이로 바닥 여기저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돌돌이가 뭐냐고? 휴지심 같이 원통형으로 된거에 테이프 달려서 부스러기나 머리카락 같은거 청소하는데 쓰는거 있잖아. 그거.

"딱히 먼지는 없는데? 청소기는 아침에 돌렸잖아"

"슈레딩거의 꼬추털입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분명 팬티 벗고 다니는건 침실만일텐데 거실에서 수북하게 나오는건 뭡니까?"


"너는 나지도 않은걸로 나만 타박하다니 불공평하다!"


"그렇다면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으면 됩니다"


"뭔가 엄청나게 허전한 느낌일것 같아서 됐어"

시온은 외견 그대로다. 아래쪽은 물론이고 겨드랑이에 털도 안났다. 본인은 제모할 필요 없다고 해서 좋아하지만 나는 가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청소가 거의 끝났을 무렵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화면에 백리와 루리가 비쳐보인다.

"문 열렸으니까 들어와"


[형  엄청 좋네요. 마당까지 있고]


"뭘 얼마나 크다고"

우리집을 처음 방문한 백리와 루리는 이리저리 집구경을 했다. 앞마당 딸린 2층짜리 단독주택이라 대부분 아파트 아니면 빌라에서 사는 세상에서 귀농한거 아니면 보기 힘든 집구조이긴 하다.


크기는 뭐.....짱구네 집보단 2배쯤 크지.

"간만에 봅니다. 백리 학생"

"아, 형수님 안녕하세요. 저번에 보고 처음이네요"


"이쪽이 여동생입니까?"

"네,  동생 루리예요"

루리와 시온의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온의 얼굴에는 꽤나 익숙한 사람을 보는듯한 기색이. 루리의 얼굴에는 묘한 친근감이 감돈다.

"엄마? 엄마예요?"

"아니, 루리야 우리 엄마는 멀쩡히 잘 계시는데 무슨 소리 하는거야?!"


"뭔가 이 언니 보니까 예전에 본듯한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게다가 어쩐지 서로 캐미도  맞을 것 같은 이유없는 확신이 들어!"

루리는 다짜고짜 시온에게 영문모를 단어로 말을 걸었다.


"젠카이노?"


"아이마스"

"765?"

"346"

"간바리마스!"

"실망했습니다. 미쿠냥 팬 그만 둡니다"

"이예이이이이이!!!"

시온과 루리가 서로의 손을 잡고 둥기둥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 몬가 일어나고 있음.....!


백리는 그런 두사람을 보고 허탈하게 텅빈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형 은근히 고생 많으시겠네요"

"너도"


괴짜와 괴짜가 만나면 플러스가 아니라 곱셈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뭐야 시발, 살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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