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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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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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일주일이 지나가는건 금방이였다. 금요일 저녁, 시온과 함께 과자 몇개를 들고 TV 앞에 앉은 우리들은 광고나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잘 나왔으면 좋겠다. 그치?"
"잘 나올겁니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데?"
"아무튼 잘 나올겁니다"
시온이 뒤에서 뭔가 손을 쓴 기색이 있어보인다. 도대체 내가 군대갔던 2년동안 어떻게 했길래 그런 인맥을 손에 넣은걸까?
"인맥이란건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적당히 위에 있는 거미줄을 들어올리면 아래에 있는 거미줄은 끌려오기 마련입니다"
"나야 사람 인맥은 좋은것 보다 나쁜게 더 많으니까 신경 안쓰지. 없는편이 더 나으니까"
워낙 저지른 일이 커서 인맥중에서 나한테 이 갈고 있는 사람이 수두룩이다. 단지 무시할만큼 약해 빠져서 신경을 안쓴다 뿐이고 나랑 같은 초월자 부류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의 인맥은 있다. 직장 동료 같은것도 있고, 친척들도 있고, 뭐 그렇지.
아, 방송 시작한다.
"맛집 방송이니까 두번째, 아니면 세번째 쯤에 방송하려나?"
"아마 그럴겁니다"
자주 봐서 레파토리는 대충 다 파악하고 있다. 한편이 4개의 소재로 나뉘어 방송하고 그중에 맛집 방송 같은건 한번쯤은 들어간다. 맨 처음과 마지막으로 방송하는 경우는 드무니 중간에 방송하면 두번째, 아니면 세번째다.
시온은 방송을 보면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아, 우리 마누라 발 귀여워. 뭘 해도 작아서 귀여워 보이긴 하지만.
"방송 끝나면 잘거야? 내일 쉬는 날이니까 일찍 일어나서 놀거 생각하면 일찍 자는게 좋을것 같은데"
"자기 전에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자고 싶습니다. 감자칩 때문에 입안이 텁텁합니다"
"살쪄"
"살찐 쪽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니, 니가 살쪄봐야 포동포동이잖아. 안그래?"
시온은 작은 몸에 약간 마른 스타일이라 살이 쪄도 피둥피둥보단 포동포동한 느낌이다. 어린애가 살쪄보이면 못생겼다기 보다는 잘 먹고 컸다는 느낌이라 보기 좋다. 할머니들이 손자들 많이 먹이는거랑 비슷한 느낌일까.
"냉장고에 둔게 없는데.......방송 끝날 때 쯤에는 연 가게는 편의점 밖에 없을테고. 뭐, 괜찮으려나, 방송 끝나면 나가서 사올께"
"저도 같이 갈겁니다"
"따라오게?"
"당신만 보냈다가는 흉기로 쓸 수 있는 팥 아이스크림을 사올거 아닙니까"
"나라고 비비빅만 사오는줄 아나. 딴것도 사온다고"
"바밤바?"
".........."
아재 입맛이라서 정말 미안하다아아아!!!
대놓고 초코 아이스크림이나 그런것도 좋아하긴 하지만 좀 더 얌전한 맛의 아이스크림을 선호하는 편이긴 하다.
내가 좋아하는건 주로 과일을 베이스로 한 아이스크림, 혹은 바닐라 정도인데 반해 시온이 좋아하는건 초코가 잔뜩 들어간 아이스크림이다. 나도 단건 좋아하는데 통짜로 초코맛 나는 아이스크림은 두세입 먹고나면 물리더라.
"알았어, 나중에 같이 가자.......아, 시작한다. 처음부터 우리 가게네?"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첫번째 코너가 넘어가고 두번째 코너로 넘어갔다. 처음부터 우리 가게가 나와서 조금 놀랐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관광온 일본인, 중국인 입맛까지 사로잡은 치킨이 있다? 한번도 안가본 사람은 있지만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그 치킨집을 찾아왔다!]
익숙한 남성 나레이션의 목소리와 함께 우리 가게 모습을 내보내고 있었다. 단지 가게 간판은 모자이크로 가렸지만 솔직히 저정도는 요즘 세상에 검색 몇번만 하면 다 찾을 수 있다.
레파토리는 비슷했다. 단지 손님들의 반응과 가격을 강조해서 맛집이라는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방송이였다.
그리 오래 나오지는 않았다. 한 2분 정도? 애초에 한 소재에 대해서 여러집을 촬영하고 내보내서 한 소재에 15분 정도만 방송하는거라 우리집만 오래 방송할 수는 없었다.
길게 나온건 아니더라도 방송 탄걸로 만족했으니 됐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 특집으로 내보내고 싶었습니다"
"됐어, 어차피 지금보다 손님 더 몰려오면 힘들어"
지금만 해도 알바 한명 더 늘려야 하나 생각중인데 손님이 늘면 정성이 부족해지는 법이다. 보통 맛집이라는 집들은 거기서 품질을 유지하지 못하다 망하게 된다.
문득 나는 진 PD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한번 말해 보았다.
"그거 알아? 이 방송 늦어도 다음달 쯤에는 종영한데"
"아, 그렇습니까?"
"조금 아쉽네. 예전부터 잘 보던 프로그램이였는데"
별볼일 없는 물건도 10년을 쓰면 애착이 가는 법이다. 10년 넘게 봐오던 프로그램이 이제는 사라진다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것 같다.
".......종영하는게 싫습니까?"
시온이 슬쩍 내 의중을 물어왔다. 이리저리 인맥 있다고 한다면 방송 프로그램 하나 계속 연장시키는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구차하게 잡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생자필멸 흥망성쇠야. 박수칠 때 떠나야지 갈 때 됐는데 붙잡고 싶지는 않아. 뭐든 끝이 있기에 좋은 법이라고"
행복도 끝이 있겠지만 반대로 절망도 끝이 있는 법이다. 세상에 절대란 것은 없고 그렇기에 영원도 없으니 모든지 끝이 있어서 세상은 돌아가는 법이다.
이 프로그램이 종영하면 다음에는 다른 방송 프로그램이 나온다. 그 프로그램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끝은 다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갈때가 됐다면 놓아주는게 도리이자 예의다.
"나이 먹고 시간 흐르는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데 이럴 때마다 생각난단 말이야"
나는 환생자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 그러나 딱 한가지 유일하게 시온만큼은 다음 생에도 볼 수 있다. 그거 하나면 족하다.
내가 바라는건 큰게 아니라 내 품안에 들어오는 이 작은 여자아이 한명이면 된다.
저울 한쪽에 시온이 올려져 있다면 그 반대쪽에 뭘 올려놓던 한치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설령 수억명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백리나 내 친구들을 올려놔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TV를 보다보니 어느새 방송이 끝났다. 시간도 11시를 조금 넘었다.
"아이스크림 사러 갑시다!"
나는 웃으면서 시온과 함께 집 밖으로 나섰다.
* * * *
우리 집 주변은 나름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덕분에 평소에는 시끄럽거나 불편하다는 기색은 없었다.
단지 편의점 같은 곳을 가려면 조금 걸어가야 한다는 정도일까. 애초에 11시에 문을 연 마트가 어디 있겠는가. 24시간 하는 편의점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밤 공기가 나쁘진 않네"
"습해서 조금 덥긴 하지만 해가 없어서 괜찮습니다"
"그러긴 하다. 얼른 여름 지나가고 가을이 왔으면 좋겠네. 습한 날씨도 좀 가면 시원할텐데. 게다가 가을에는 먹을것도 많고"
이런저런 제철 과일, 생선, 특산물 들은 가을에 먹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전어 같은거.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라는 말도 있고 집나간 며느리도 전어 굽는 냄새에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회나 무침도 좋아하긴 하지만 소금간을 해서 구운 다음에 머리부터 뜯어먹는 맛이 일품이다. 크으, 그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맛에다가 소주 한잔 들어가면 천국이 따로 없더라. 천국 가본적은 없지만.
잠깐 걷고 나니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이 코앞에 있었다. 시온이 원하던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어서오세요"
저녁이라 피곤한지 약간 나른한 인상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인사를 건낸다. 환영하는 눈치는 아니고 그냥 영업용 인사다.
시온은 도도도도! 달려가서 아이스크림 부터 골랐다. 키가 작아서 고르는게 불편해 보이길래 양쪽 겨드랑이 부분을 잡아서 들어올려 보기 편하게 해주었다.
"뭐 살거야?"
"음......이거랑, 이거랑, 이겁니다"
"죄다 초코맛이네. 그럼 난 이걸로"
나는 오렌지 맛이 나는 빙과류 쪽을 골랐다. 과일맛 얼음을 오독오독 씹어먹으면 시원하니까. 게다가 편의점이라서 그런지 마트 보다는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적다. 대부분 맛이 대놓고 달달한 그런 부류의 아이스크림이라서 내 취향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지만.
과자도 몇개 사고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가격은.......흠, 역시 편의점이라서 비싸다. 아이스크림만 해도 몇개 안샀는데 만원이 넘어간다.
요즘 물가가 비싼건지, 편의점이라 더 비싼건지, 둘 다인건지.
편의점 밖으로 나오자 다시금 여름의 습한 공기가 덮쳐왔다. 더위를 타진 않지만 그래도 기분이란게 있는 법이다. 습한 공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올라간다.
"갈증 나기도 한데 저쪽에서 하나 먹고 갈까?"
"찬성입니다"
편의점 근처에 애들 놀라고 만들어놓은 작은 놀이터가 있다. 물론 놀이터라고 해봐야 그네 몇개와 미끄럼틀, 놀이기구 두어개가 있는게 전부지만 쉴 수도 있게 만들어둔 터라 둘이 앉아서 아이스크림 먹기에는 충분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너는 몇개 더 샀잖아. 먹는동안 녹지 않을까?"
"걱정없습니다"
시온이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봉지에서 열에너지를 빼앗았다. 물리법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나도 할 수 있는걸 못할리 없었다. 아마 30분 동안 바깥에 놔둬도 녹지 않을 것이다.
애들 노는 놀이터를 보고 있자니 아기자기한 느낌이 든다. 알록달록한 놀이 기구들은 밤이기에 희미하게 비추는 가로등의 빛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끄럼틀이나 그네 탔던건 꽤나 오래전이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 기억상으로는 없다.
"한번 타보시겠습니까?"
"야, 그네 망가져. 안돼"
"애들이 얼마나 험하게 노는데 성인 남자가 탔다고 망가집니까? 당신이 세명이나 올라타도 괜찮으니까 타도 됩니다"
살다보면 생각없이 살던 어린 동심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나도 가끔은 아무생각없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태까지 온 길이 너무나 길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돌아가지 못할 뿐.
슬쩍 그네 위에 올라타 보았다. 애들용이라 조금 작긴 하지만 그래도 망가지거나 할것 같지는 않았다.
시온은 그런 내 무릎 위에 살포시 앉았다.
"이러려고 그네 타보라고 한거지?"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그네에 타서 시온을 무릎 위에 올리고 슬쩍 움직이니 나름 운치고 있고 좋았다. 밤은 깊고 별은 보이지 않아도 조용한 장소에 두사람만 있으니 분위기가 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 좋지 못한 모습이긴 하다. 인상 더러운 멀쩡한 성인 남자가 초등학생 여자애랑 같이 있는 꼴이니.
문명이 조금만 덜 발달했다면 조혼이니 뭐니 해서 딱히 이상한 모습은 아니였을지 몰라도 치안이 안정된 사회라면 이래저래 오해받기 쉽다.
그래서 저번에 일본 여행 갔을 때 잡혀가기도 했었고.
"평소에도 리스크 없이 성인 폼으로 변신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언제 그러려고? 너네 종족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유토피아도 이제야 겉보기 중학생이잖아. 언제 성장하려고 그래?"
"언젠가 쭉쭉빵빵한 미녀가 되는 날이 올겁니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려나 모르겠다"
환생자지만 나도 끝이 없는건 아니다. 지금이라면 내 스스로의 힘으로도 윤회의 고리를 깨트릴 수 있어서 언제든 안식에 드는게 가능하다.
단지 시온이 있고, 끝을 맺어야 할일과 결정해야 할일들이 있어서 미뤄두는 것 뿐.
"전 당신 없이 못삽니다"
"나도 너 없인 못살아. 너 죽으면 죽인 새끼 죽이고 나도 죽는다"
"저번에 한번 그럴뻔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적이였더라......수백년전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시온은 수명이 없는 종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고적부터 살아온 녀석도 있기에 죽는다면 자살, 혹은 타살밖에 없다.
내가 있는 이상 시온이 자살을 할리 없으니 결과적으로 남은건 타살. 만약 시온이 누군가한테 죽는다면 나는 그놈이 얼마나 쌔던간에 죽이고 죽는다.
"그때는 정말로 죽는줄 알았습니다"
아, 그때 이야기구나.
나는 환생자라서 스스로 윤회의 고리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죽는다. 단, 나보다 상위 초월자의 경우라면 영혼을 직접 소멸시켜서 죽일 수도 있다.
그때는 정말로 개빡돌아서 싸웠다. 상성이 좋아서 이겼지 솔직히 그놈과 동등한 수준의 다른 부류랑 싸우라고 하면 진다.
어지간하면 싸움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 새끼가 시온이 좋다고 빼앗으려고 들어서 죽자 살자 싸웠다.
그때 이후로 본격적으로 대마왕이 되기도 했고.
자고로 NTR하려는 금발 양아치 새끼는 대가리를 후려줘야 하는 법이다. 초월자가 전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오만이다.
"그래서 요즘엔 잘 안싸우잖아"
"라쿤맨은 또 뭡니까 그럼?"
"그건 애들 놀아주는거고"
한명이랑 나라 하나랑 싸우면 그건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만큼 큰 격차가 있다면 부르는 취급도 달리 해야 한다.
나한테 사회는 의미가 없고 마스터 유저라도 아직 한발자국 정도밖에 들이지 않은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전력으로 싸우면 내가 손가락 하나 가지고도 이긴다. 단지 사람의 관계는 존중에서 비롯되니까 어느정도 예의를 갇춰주는거지.
".............."
"왜 그런 눈으로 봐?"
"당신한테 예의라는게 있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어. 매너가 예의랑 같은 말이잖아. 그런거라고"
"처음부터 사람 아닌건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난데없이 존재부정을 하고 있다니! 이거나 먹어라!"
나는 시온의 정수리에 입을 대고 뜨거운 숨을 불었다. 더운데 정수리에 뜨거운 바람이 부니까 시온이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부들부들 떤다.
"가뜩이나 더운데 그건 치사합니다. 앗뜨, 읏!"
"도망 못간다. 끈적한 날씨에 살 맞대고 부비부비거리는 느낌이 어떠냐!"
더위는 타지 않아도 체온은 똑같다. 그에 비해서 시온은 몸 만큼은 나보다 약하니 더위도 타고 추위도 탄다. 그래도 땀도 흘려서 끌어안고 이래저래 비비니 서로 땀 투성이가 된다.
그치만 싫은건 아닌지 시온은 적극적으로 반항하진 않았다.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여자가 있듯이 깨가 쏟아지는 부부에게는 여름의 습하고 더운 날씨도 스킨십을 거부할 장해물이 되지 못한다.
".......오늘 밤에는 서로 땀으로 끈적끈적한 플레이입니까?"
"싫어?"
"전 죠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상어"
시온은 은근히 냄새 패티쉬가 있단 말이야. 가끔 보다 보면 빨래 쌓아논거 앞에서 내 팬티 들고 냄새 맡아보는걸 본적이 꽤 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네를 타고 있을 무렵. 내 기감에 누군가 들어왔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하나를 기감 안에 넣을 수 있지만 평소에 그러고 다니면 내가 빡세서 반경 3미터 정도로 한정하고 다닌다. 작긴 하지만 그 안에서는 나보다 상위 초월자가 아니고서야 내 감각을 속이거나 기습하지 못한다.
장소는 등 뒤. 딱히 기감이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린다. 희미하지만 묵직한 느낌.......보통 사람은 저렇게 걷질 못한다. 그렇다면 포스 유저인가?
내가 뒤를 돌아보는 찰나, 상대가 나를 덮쳤다. 나는 빠르게 시온을 옆으로 밀쳐내고 덤벼오는 남자에 의해 그네에서 떨어져 굴렀다.
"이 새끼! 가만히 있어!"
"아니, 씨발 뭐야?"
상대는 포스 유저다. 내 팔을 잡고 구속하려고 하지만 적의는 있어도 살의는 없었다. 기분은 나빠도 살의가 없다면 이야기는 들어줄 생각이 있다.
그는 내 팔을 잡고 등 뒤로 모으더니 TV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묵직한 느낌의 수갑을 채웠다. 두께도, 강도도 일반적인 수갑과는 비교가 안된다. 흡사 유인원이라 하더라도 풀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물건으로 보인다.
"이봐요, 아저씨. 왜 그러는지 이유좀 압시다"
"닥쳐 새꺄! 넌 묵비권 행사할 자격도 없어!"
"아저씨 경찰이예요?"
수갑의 형태나 재질이 특이하고, 포스 유저에 경찰이라. 기억 한켠에 포스 유저 중에 따로 같은 포스 유저 범죄자를 잡기 위한 전담반이 있다는걸 들은 적이 있었다. 만약 그게 맞다면 포스 유저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수갑이나 상대의 신분도 확인이 가능하다.
"남의 남편한테 무슨 짓입니까?!"
"남편? 아니, 꼬마야, 아저씨가 경찰이거든? 혹시 이 사람한테 이상한 느낌 받거나 위화감이 느껴지거나 그러지 않았니? 포스 유저 중에 가끔 그런 식으로 정신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거든"
"꼬마 아닙니다! 외견은 이렇게 보여도 저 사람보다 두살 연상입니다!"
난데없는 날벼락에 시온도 화가 났는지 평소보다 높은 어조로 남자에게 따졌다.
시온의 말에 남자도 뭔가 오해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내 어께를 누르던 힘이 조금 빠졌다.
"아저씨. 일단 이야기부터 합시다. 일단 내 주머니에 민증이랑 핸드폰 있거든요? 일단 그거 꺼내서 한번 신분 확인하고, 핸드폰에 둘이서 찍은 사진도 있으니까 그거 한번 보세요"
상대가 경찰이라면 함부로 제압했다간 일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뭔가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뿐 상대는 본업에 충실하려고 했다. 겨우 그런걸로 수갑 찼다고 화를 내진 않는다.
다만 시온을 노렸다면 머리통이 날아가는 주먹이 대신 날아갔겠지만.
남자는 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배경 화면에 둘이서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이제 됐습니까?"
시온이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정변화가 적은 시온이 저렇게 반응한다는건 정말로 화났다는 뜻이다.
솔직히 나도 그렇긴 하다.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다짜고짜 범죄자 취급하고 붙잡았으니까.
"크흠, 두분 정말로 부부십니까?"
"저희 집이 이 근처입니다. 그런 오해 자주 받아서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혼인증명서도 안가지고 나왔습니다. 설마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이런 일을 당할지 몰랐습니다"
무표정한 눈으로 노려보는 시온은 묘한 박력이 있었다. 나도 무서운데 저 남자야 오죽할까.
어께를 누르던 힘이 꽤 빠져서 몸을 일으킬 정도는 됐다. 나는 조금 몸을 일으켜 그 자리에 앉았다.
"경찰 아저씨. 일단 자기 소개부터 합시다. 전 요 근처에 사는 최악이라고 합니다. 명동에 작은 치킨집 하나 하고 있어요. 아저씨는요?"
"........서울 중부경찰서 특수강력팀의 이유성 경위입니다"
"특수강력팀? 그거 포스 유저 범죄 잡는 팀 맞죠?"
"네,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범죄자를 잡는 형사과에는 지원팀과 형사팀, 그리고 강력팀이 있다. 하지만 특수 강력팀이라면 마찬가지로 특수한 범죄자를 잡는......즉, 포스 유저 범죄자를 잡는 팀일 것이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희들은 어울리지 않아 보여도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고, 올해 초에 결혼했습니다. 안사람은 옛날에 병 때문에 저런 외견이지만 저보다 두살 많고요. 밤에 아이스크림이 땡겨서 같이 나와서 사서 들어가는 길이였습니다"
또박또박 설명을 하고 이런저런 증거물도 들이대니까 어느정도 오해가 풀린것 같다. 기분은 나쁘지만 아직은 참을만한 수준이다.
"평소에도 이런 오해 많이 받긴 하는데.......수갑까지 찬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일단 왜 체포까지 한건지 납득이 되는 대답 좀 들려주실래요?"
단,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나도 열받는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여기서 이 남자를 파묻어버릴 생각이다.
"죄송합니다. 수사 기밀이라서......"
"뭐요? 지금 사람 범죄자 취급하고 수갑까지 채워놓고 이유를 대라니까 수사 기밀이랍시고 못해준다고? 씨발, 내가 참는데 한계가 있지. 진짜......."
욱하려던 찰나 시온이 옆에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한대 쳐서 죽이고 요 앞에다가 땅 파서 산채로 묻어서 증거 인멸하려고 했는데 내가 주먹을 쥐는것 보다 먼저 그녀가 막았다.
"아까 중부 경찰서 소속이라고 했습니까?"
"아, 네. 맞습니다"
시온은 핸드폰을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번 울리다가 이내 상대가 받았다.
"간만에 연락드립니다, 서장님. 안녕하십니까? 늦게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른게 아니라........"
내가 진심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인맥이 어디까지 있는거야?
시온이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묻다가 이내 이유성 경위에게 넘겼다.
"받으십시오. 그쪽 서장님입니다"
"네?"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시온은 더 이상 아무말 없이 핸드폰을 건냈다.
"네, 이유성 경위입니다"
[야 이 새끼야! 오밤중에 뭔 지랄을 한거야!!!]
"서, 서장님!!!"
스피커폰 상태도 아닌데 큰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너, 그분들한테 사정 설명 해드리고 무릎 꿇어서라도 죄송하다고 사과드려. 아, 뒷골이아. 인원은 제일 적은 주제에 큰 사고는 제일 많이 쳐서는......너, 내일 두고 보자. 잠복수사 좆까고 내일 아침에 당장 서장실로 올라와!]
"예, 알겠습니다. 예, 서장님......죄송합니다. 네, 네"
전화 너머인데도 이유성 경위는 꼬박꼬박 고개숙여 사과했다.
그 모습이 전형적인 쪼임을 받는 직장인의 모습 같아서 나도 모르게 불쌍해졌다.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를 다시 건내오는 그의 얼굴은 10년은 늙어 보였다.
"고생이 많습니다"
".......네"
이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