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35/507)



〈 35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다음날 출근하니까 백리가 얼굴이 퉁퉁 부어서 출근했다.

"아니, 어디가서 얻어 맞았어? 어떤 새끼가 그랬냐? 변호사 불러줄까?"


"루리가요"

"남매끼리 싸워서 그거면 괜찮은 편이네. 찬장에 멍든데 좋은 연고 있으니까 그거 바르고 일해라"

"태세전환이 너무 빠른거 아니예요?"

"남매끼리 싸운게 대수냐. 집안일이라면 끼어들지 않는게 제일 좋아"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었다가 피본게 한두번이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방관주의. 건들지만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남자다.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딱히 21세기의 지구 같은 문명 사회가 아니라 법과 윤리가 멀고 주먹이 가까운 판타지 중세 세계라도 언쟁이 오갔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말로 하는 편이지.

근데 말로 해도 안듣는 새끼들은 우선 팬다. 패도 안들으면 죽인다. 요컨데 선만 안넘으면 돼. 선만.


이 세상에서 내 선을 넘은 사람은  없다. 기억나는 사람만 떠올리자면 옛날에 나한테 패드립친 일진 새끼들 정도.


"아, 맞다.  오후에 마누라랑 같이 지인 병문안 가려고 하거든. 12시 쯤에 나가서 3시 전에는 들어올거야"

"그때는 손님도 그리 많진 않으니까 저랑 진 아주머니랑 같이 가게 보고 있을께요. 그런데 병문안이면 저번에 가셨던 그분이요?"

"응, 거의 형제같은 친구놈 아버지인데. 걔는 지금 말년병장이라 아직은 군대에 있거든. 수술 전에 전역해도 지금 당장은 곁에 아들이 없으니까 나라도 가야지. 그리고 우리 마누라도 얼굴 좀 비춰야 하고"

형식이네 가족이면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고아인 나를 이렇게 신경써준 사람은 그들밖에 없으니 20년 전 대공황 때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셔서 혈혈단신 고아가 된 나에게는  안되는 정 붙일 곳이다.


원래라면 결혼 하고나서 연락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시온이랑 만나고 신혼생활을 보내다 보니까 정신이 팔려서 못했다.


결혼식이라도 했으면 청첩장이라도 보냈을텐데, 아니 오히려 나는 몰라도 진짜 아무도 없는 시온에게 시아버지 역할로서 결혼식에 초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안해서 그렇다.

"야, 근데 너 맞긴 엄청 맞았나보다. 아주 그냥 두루치기마냥 골고루 멍이 들었네. 애가 장래성이 있어"

"잘려고 누워도 멍든데가 욱신거리거든요?! 어떻게 멍든데보다 안든데를 찾는게 더 쉽지?"

"아프니까 청춘이다"


"개소리 하지 마요"

"아, 솔직히 개소리는 맞지, 아무튼 나 없을 때 잘 부탁한다"

재료 준비를 하고 오전 영업을 조금 돕고 나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이대로 가도 좋겠지만 기왕이면 시온이랑 같이 가는게 좋고, 또 일하는데 입던 옷이라 기름 냄새가 나서 한번 씻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는 편이 나을것 같다.


저번처럼 편하게 가기에는 이번 자리는 시온을 소개하려는 자리였다. 후줄근하게 입고 가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비슷한 예시로 들자면 이번 자리는 상견례나 다름없다.

"오, 람보르기니다"


우리  앞에 떡 하니 슈퍼카 한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티 하나 묻지 않은 검은색의 외형과 슬림하게 잘 빠진 모습, 일반적인 차량과는 다르게 뭔가 미래지향적인 느낌의 외형은 자동차에 별 애착 없는 나도 두근거리게 만드는 멋이 있었다.


천년만년이 지나도 남자는  똑같다. 변신, 거대 로봇, 합체, 슈퍼카, 드릴 등등, 여러가지 로망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근데 왜 하필 우리집 앞에다 주차해놓고 지랄이야. 견인차 불러다가 견인해버릴까"

요 근처 동네가 땅값이 좀 있어서 죄다 돈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이 살곤 하지만 슈퍼카처럼 대놓고 삐까뻔쩍한 차는 본적 없다.


물론  번지르르한 직장을 다니는 만큼 비싼 차를 타더라도 어느정도 점잖은 느낌의 차를 타지 람보르기니 시리즈 같은 슈퍼카는 과한 느낌이 없지 않다.


생각해봐라. 신입 사원이 회사에서 쓰는 자기 의자를 회장님이나 쓸법한 고풍스러운걸로 쓰면 눈치보이지 않는가.


"아, 오셨습니까"


"응, 준비하고 있었어?"


"저는 다 됐습니다. 당신 입을 옷은 미리 골라뒀으니까 씻고 입으면 됩니다"

"정장으로 골라둔건 아니지?"

"상견례 같아도 가는 곳이 병원인데 너무 딱딱하지 않습니까. 검은색 계통이면 또 별롭니다"

"병원에 검은색 정장 입고 들어가면 나이 드신 분들이 데리러 왔냐고 물어볼지도 몰라"

씻으러 들어가려던 찰나, 집 앞에 세워져 있던 람보르기니가 생각나 시온에게 말했다.

"아, 그런데 우리집 앞에 람보르기니 하나 세워져 있더라. 길이 좀 넓어서 오가는게 불편한건 아닌데 그래도 불법 주차는 좀 아니니까 경찰이던 견인차던 신고하자"

"저거 우리 차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냥 람보르기니가 아니라 람보르기니 센테나리오 로드스터입니다"

"........."

분명히 나 전역하던날 샀던 차는 적성종 때문에 꽤 많이 박살나서 AS받을거 그냥 폐차시켰던걸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오래된게 아니라 반년전 이야기다.

그런데 차를  샀다고?


"얼마짜리야 저거?"


"한정판이라 60억 정도 들었습니다, 돈만으로는 못사서 인맥 조금 동원하고 한정판에다 해외에서 사온거라 좀 더 들었습니다"

"그냥 적당한 차 사도 되는데 굳이 저런걸........"


"자고로 남자의 자존심은 차나 다름없습니다. 과시용이니까 나중에 사람들 만나러 갈때 타고 다니시면 됩니다"


"저런거 살거면 나한테 말좀 하지 그랬어. 더 좋은 차도 있.......아"


람보르기니보다 더 좋은 차라고 하면 솔직히 나도 생각나는게 없다.

나한테 물질적인건 그냥 있으면 있는대로 사는거고 없으면 없는데로 사는거라 만약 있어야 한다면 멋보다 실용적인 것을 고른다.

"당신한테 말했다면 분명 연비 좋고 사람 많이 탈 수 있는 차 같은걸 골랐을겁니다"

"그치, 분명 스타렉스 같은걸 끌고 다녔을거야"


"그리고 양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분들을 뵈러 가는데 최소한 '이렇게  살고 있다'같은걸 보여드려야 안심시켜드리지 않겠습니까?"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갈 때 편하게 가도록 짐이랑 사람을 많이 태울 수 있는 차를 사서 아주  써먹었을 것이다.

람보르기니라고 해도 연비는 별로고 겨우 2인승짜리다. 친구들끼리 몇명이나 모여서 타려면 부족하다. 음, 그럼 그냥 시온이랑 둘이서만 타고다녀야지.


"그리고 교통사고 한번 나면 분명 당신 성격상 큰일날게 분명하니까 상대쪽에서 굽신거리며 들어올 수 있는 차를 산겁니다"


"저거 범퍼 하나만 깨져도 수리비가 얼마야. 십억은 가볍게 넘겠네"


"본사로 보내서 수리 받고 다시 오는 비용 다 합치면 그럴겁니다"


오히려 내가 무서워서 어디 끌고나가질 못하겠다. 한번 긁히면 십수억이라니. 흠집 하나가 누군가의 평생 벌 돈보다 가치가 높은건 이상하다.


생각은 접어두고 일단 씻기로 했다. 머리 감고 세수하고 이빨 닦는데 5분쯤 걸리고 10분동안 멍때리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한 후에 나오니 기분은 개운해졌다.


시간을 보니까 슬슬 12시 30분이였다. 지금 출발하면 대충 1시쯤 되려나.


"빨리 가자. 가게에는 백리한테  해뒀으니까 나중에 전화 하면 좀 늦게 들어가도 되긴 하는데 그래도 기왕이면 3시 전에는 들어가고 싶어"


"시간 빠듯하게 잡은거 아닙니까?"

"그런가? 혹시 모르니까 문자라도 보내둘까"

드라이기를 쓰는것 보다 능력으로 머리카락의 수분을 털어내는게  빠르다. 단숨에 뽀송뽀송하게 마르자 몇번 빗질 하고 밖으로 나왔다.

"키는 여기 있습니다"


"이런 차는 영 나하곤 안맞는데"

"어디가서 꿇리지 말고 자존심 세우라고 샀는데 자꾸 그렇게 불평하면 못씁니다"

"미안, 이상하게 차는  두명 타면 괜시리 불안해서 그래"

북적북적한걸 좋아해서 그런가? 아무튼 시동을 걸자 묵직한 느낌의 엔진음이 느껴졌다. 바깥에서는 요란하게 들릴 스포츠카 스포츠카 특유의 엔진음이 차 내부에서는 희미하게 들렸다. 진동도 내 감각으로 느껴도 엄청 적고 비싼건 그만큼 비싼 값을 하는게 보인다.


"탑승감 죽이네. 이대로 고속도로 가서  시속 200까지 밟으면 쩔겠다"

"좋아하는걸 보니 저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속도감이다. 이런 차로 한계까지 액셀을 밟으면 아스라다에 탄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아, 요즘 애들은 아스라다 모르려나?

창문을 열어놓으니 요란한 엔진음이 그대로 들린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앞에 방지턱 있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속도 좀 내다가 방지턱 있다는 소리에 식겁했다. 워낙 차체가 낮아서 잘못하면 방지턱 넘다가 긁힐 수 있다.


"시승하자마자 수리하러 보낼 뻔 했네. 능력으로 코팅하고 다녀야 하나?"


"그러다가 사고나면 상대 차만 박살나서 더 큰일나는거 아닙니까"

이런거 자주 몰고 다니면 오히려  심장만 벌렁벌렁거린다. 오래 살아도 이런거에 익숙해지지 않는거 보면 워낙 천성인듯 싶다. 배고프면 그냥 집에서 남은 반찬에 나물 몇개 넣어서 고추장에 참기름, 계란까지 해서 쓱쓱 비벼먹는 스타일인 나한테 수십억짜리 자동차는 가깝지만 먼 느낌이였다.


"이거면 그래도 출퇴근은 나쁘지 않겠네.......주차가 문제지만"


"근처에 상가 건물 있으니까 거기 주차장에다 주차 하십시오"

"언제 또 사뒀어"

"주차장 필요해서 어제 샀습니다"


"으아아아아"


내가 시온이랑 수천년 넘게 같이 살았지만 그래도 가끔 우리 마누라는 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아, 그건 시온도 마찬가지려나.

내가 돈 가지고 있어봤자 투자는 개뿔 그냥 은행에다가 적금 들어놓고 조금씩 모으는게 전부지 돈을 크게 불릴 생각을 안한다. 애초에 먹고 사는것만 되면 큰돈 생각 안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야, 내가 큰돈 바랬으면 5년 전에 비트코인 사뒀지.


"이제 김 변호사님한테 차 얻어타지 않아도 되겠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같이 나갔을 때 뭐 했어?"

"회사 하나 만들었습니다"


"무슨 회사?"

"모바일 게임 제작 회삽니다"


"........너 내가 영웅서기 하고 싶다고 아예 처음부터 만드려고 회사 차린거야?"


"돈은 쓰라고 있는겁니다. 어차피 돈은 썩어 넘쳐날 정도로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얼마나 있는거야"

"당신이 이름은 들어본 회사 주식은 전부 있을겁니다"


문명 사회에서는 우리 마누라의 영향력이 더 크다. 그래서 가끔 기둥서방처럼 느껴지고는 하지만 반대로 중세쯤만 되도 내가 더 영향력이 크다.


시온도 물리적으로 강하긴 하지만 상대가 좋은 사람이던 나쁜 사람이던 손대는걸 내키지 않는다. 수틀리면 쭉쭉 잡아 죽이는 내가  영향력이 있을수 밖에.


"다다음주에 본격적으로 회사 창설입니다. 그때 나와서 잠깐 인사하시면 될겁니다"


"내가 왜?"

"주식회사로서 지분은 제가 다 가지고 있지만. 사장 자리는 당신 이름으로 올려뒀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장님이야?! 야, 명함 하나 맞춰야겠네"


"이미 맞춰뒀습니다"

"울 마누라 못하는게 대체 뭘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운전을 하고 있자니 주변에서 시선이 몰리는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한번씩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고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은 좋았다.

운전하고 있으면 길에서도 슬금슬금 비켜주면서 안전거리 유지하는 느낌도 있었고......야, 운전하기 되게 편하네! 스치면 님 인생 노예요!


한창 즐기면서 드라이브 하다보니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부터 경비 아저씨의 시선이 쏠렸지만 무시하고 주차권을 뽑았다.

"30분에 2000원.......요새 주차요금 너무 비싸"


"돈도 많으면서 무슨 투정입니까"

"돈이 많은거하고 비싼거하고는 별개지"

지상 쪽에는 자리가 없어서(있긴 했는데 비좁았다. 주차 하라면 할 수 있는데 옆에 주차한 사람이 미안해서) 지하 쪽으로 들어가서 양  사이드가 빈 자리 한가운데 들어가 세워뒀다.


"스치면 인생 노예인 차인데 주차 매너는 해줘야지"

"잘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도 우리 차 옆에 주차할 생각은 못할껄. 안전 운전경력 30년인 사람도  떨어져서 못온다.


형식이네 아저씨가 입원한 병실은 저번에 온적 있어서 기억하니 찾아가는건 수월했다. 단지 엘레베이터의 층수가 올라갈수록 걱정이 늘어갔다.

"왜 그러십니까?"

"모르는 사람이 로리콘 새끼라고 욕하는건 딱히 신경 안쓰는데 아는 사람이 그러면 정신적인 타격이 좀 커서"

"성장폼 씁니까?"

"됐어. 평생  모습으로 살 것도 아니잖아"

이내 엘레베이터가 도착했다. 나는 시온을 사랑하는거지 시온의 몸을 사랑하는게 아니다. 그녀도 환생할 때마다 모습이 변하는 나를 사랑하는데 그런 나도 어떤 모습으로든 바꿀 수 있는 그녀를 사랑해야 옳지 않겠는가.


"아저씨, 저 왔어요"


"어이쿠, 일 한다는 녀석이 뭘 이렇게 자주 와?"

"알바생한테 가게 맡기고 왔어요. 그래도 나중에 다시 가야 하니까 오래는 못 있을것 같아요. 아......병문안 선물 깜빡했네"

"네가 저번에 가져온 과일 세트 아직도 남아 있으니 됐어. 어서 앉아라. 그리고 옆에 있는 애는......."


형식이 아저씨는 시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손하게 시온이 인사하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시온이라고 합니다"

"어, 음........"

"제 마누라예요"


"흠"


역시 생각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시온을 아내라고 소개하면 반응은 세가지로 갈린다.


첫번째는 장난으로 생각하는 사람, 두번째는 더러운 소아성애자로 보는 사람. 마지막 세번째로 뭔가 생각하는 사람.


여기서 첫번째는 장난이 아니란걸 알면 두번째 경우로 넘어가는 케이스가 다수였다. 셋중에서 가장 적은 케이스는 마지막,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아가씨, 미성년은 아니죠?"

"네, 올해 스물 넷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네, 한창 신혼입니다"

"그럼 됐어요. 크게 문제 없으면 축하해 줄 일이지 이상하게 볼 일은 아니니까요"

형식이 아저씨는 시온에게 몇가질 물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가끔 가다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더 적게,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네 성격에 평범한 여자랑 결혼할거라고는 생각 안했다. 서로 좋아한다면 상대가 뭐가 있던 무슨 상관이냐?"

"제 성격이 뭐 어때서요?"

"형식이랑 놀던 애들중에 네 성격이 제일 이상했어. 평소에는 제일 조용하지만 한번 돌아가면 보이는게 없잖니"

욱하는 성격 있는건 환생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천성인지, 영혼의 형질이 그렇게 생겨먹은건지. 아무튼 욱하는 성격 때문에 사고친게 한두번이 아니다.


사람을 죽인적은 없지만 경찰서로 갈뻔한 일도 몇번 있었다.


생각나는걸로는 고아 새끼라고 내뱉던 꼰대 학생 주임한테 개기다가 몇대 맞았던 일이 있다. 아프진 않았는데 고아라고 뭐라  사람 없으니까 학생을 때리더라. 아니, 세상이 무슨 시대인데.


"내려가서 마실것좀 사와라. 병원 지하에 카페 같은게 있던데 거기서 사오고. 나는 아가씨랑 이야기  나누고 있을테니까"

"무슨 이야길 하시려고 저까지 내보내려고 해요?"

"별 이야긴 아니야. 아, 나는 녹차 종류로 부탁한다"


듣고자 한다면  들을건 없다. 병원 하나 감지 범위에 넣는건 일도 아니고 지하에서 지상 십수층 높이의 병실 하나의 소리만 핀포인트로 듣는건 쉽다.


그렇지만 안할거다. 아저씨가 뭔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이야기는 아닐테니까.

나는 무난하게 아메리카노 시키고, 아저씨는 녹차 라떼 시키면 되려나.

 마누라는 한결같이 카라멜 마키아토에 샷 추가해서 휘핑 크림 얹은거겠지. 딴건 몰라도 울 마누라 달달한거 취향은 꿰고 있다.

*   *  *   *

강형식의 아버지, 강진수는 시온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는데 힘들진 않았어요? 보니까 요 앞에서 뭔일 있는지 막히는것 같던데"

"아, 괜찮았습니다. 별로 막히진 않았습니다"

"편하게 대해요. 저희  아들놈은 아직 결혼은 커녕 여자 친구도 없어서 형식이나, 최악이나 둘 다 평생 결혼 못하는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아가씨 덕분에 악이 쪽은 한시름 덜었네요"

최악은 시설에서 자랐지만 강진수의 집안에서 강형식과 같이 형제 비슷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을 나왔고 그의 집에 자주 놀러가서 놀곤 하니 집안 사람들도 최악을 형식이의 형제처럼 여겼다.

부모를 잃고 시설에서 국가 지원금으로 지내도 어두운 기색 하나 없었던 최악은 역린만 건들지 않으면 사교성이 좋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명절이나 휴일에는 같이 쉬고, 어디론가 같이 휴가를 떠나기도 했었다. 호적만 다를 뿐이지 반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저 아이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한눈에 알아봤어요. 저 아이는 우리랑 거리를 두고 있구나, 하고"


"........."


"부모 잃고 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니까, 어느정도 경계심 같은건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까히 다가오지 않거나 하는게 아니였어요. 오히려 무관심이였죠. 형식이랑 놀 때도, 치킨 시켜줘서 먹일 때도 한결같이 무관심 했죠. 아니, 고작 막 초등학교 입학한 아이가  때도, 치킨 먹을 때도 아무런 감흥 없다는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냥 그러려니, 하는 눈으로 적당히 맞장구 쳐주는 느낌이라서 '아, 얘는 혼자 두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든거예요"


"그럴만도 할겁니다"


최악은 환생자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국에는 죽는다. 그걸 수십번.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더라도 영혼의 강함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만 먹는다면 지구를 지배하는것도 가능하다.

판타지 세계에 환생해서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에 올라?


그래봤자 뭐하나, 어차피 죽고 다시 환생하면 맨손 맨몸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중세 시대에 태어나 시민 혁명을 일으켜서 역사를 바꿔?

그러면 뭐하나, 어차피 죽으면 결국 신분은 의미 없는데.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나라도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어봐?

공수레 공수거란 말도 모르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법이다.

최악에게 있어서 물질적인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만드는 감정의 부산물들이다.

"관심을 가져주고, 자주 챙겨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마음을 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같은 성격이 됐지만......종종 생각하는데 과연 진짜로 그 아이가 마음을 열었을까, 떠오르곤 해요. 좋아하는걸 표현 안하고, 흐르는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행복해질  있을까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 아이가 결혼까지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데려온걸 보면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것 같아서 안심이예요. 그런면에서 정말 고마워요 아가씨. 한시름 놨어요"

"........."

시온은 강진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도 표현만 안했을 뿐이지 아버님이랑 가족분들을 좋아했을겁니다. 그이는 사랑하는건 익숙하지만 사랑받는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겁니다"

최악의 환생은 언제나 그렇다.


지금처럼 부모가 어릴때 죽어서 고아로 자랐던 경우.


부모는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서 부모가 제대로 그 역할을 못하는 경우.

여태껏 모든 환생이 그러했다. 최악은 스스로가 가장이 되어 가족을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랑을 받아도 그게 민폐가 되는건 아닐까, 걱정시키는게 아닐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최악에게 있어 사랑은 주기만 하는거지 받는건 익숙하지 않았다.

"그치만 제가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외부 부착형 양심 회로인 제가 있으니까 최소한 어디 가서 이상하단 소린 듣지 않을겁니다"

"그 아이가 좋은 사람이랑 결혼했네요........아, 아가씨. 몸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건가요?"

"아, 지병 때문에 약을 독하게 쓰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머리카락도  때문에 탈색된겁니다"


정해놓은 설정, 레파토리다. 당연하게도 다짜고짜 '저는 외계인입니다. 이 모습은 종족상 디폴트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하고 자기 소개를 할 수는 없으니까.


최악은 기업 경영의 재능이나 마법같은 머리 쓰는 분야의 재능은 없지만 사람 보는 재능만큼은 탁월했다. 그 덕분에 시온도 최악이 소개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치료 다 받고 퇴원하시면 나중에 가족분들이랑 같이 모여서 저녁 식사라도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그러려면 빨리 퇴원해야겠는걸요. 기대하고 있을께요, 아가씨"

강진수는 사소한 부분에서도 그녀를 존중해주고 있었다. 외견이 초등학생, 거기에 외국인인데 어린애가 아니라 한사람의 성인으로서 봐주고 있다.


호칭도 '아가씨'로 부르고 있었는데, 최악과 강진수가 부자지간처럼 대한다 하더라도 시온의 입장에서는 피도 통하지 않는 남남이다. 초면부터 며느리가 아니라 아가씨라고 불러주면서 존중해주는건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올바름을 알려준다.

그런 별것도 아닌걸로 사람을 판단하냐, 라고 묻는다면. 세상에는 그런 사소한 존중조차 못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


"마실거 사왔어요. 이야긴 끝났어요?"

"아, 마침  끝났다. 내거는?"

"여기 녹차 라떼. 근데 사오고 나서 뒤늦게 생각난건데 환자가 찬거 먹어도 되는건지 모르겠네"

"뭘, 앉아서 온갖 호강을 다 누리고 있는데 찬것 정도야 뭐 어때서"

"무슨 이야기 했었어요? 보나마나 호구 조사 같은거인게 뻔하지만"

"다른 이야기 했어. 그래도 네가 고른 사람이니 안봐도 좋은 사람일게 뻔하지"


"아니,  눈을 뭘 믿고 그렇게 신뢰해도 되는거예요?"


"예전에 네가 나하고 사업 같이 하자는 사람보고 사기꾼같은 인상이라고 했던거 기억 나지? 그  듣고 찜찜해서 투자 안했는데 그 녀석, 그 뒤로 투자 받은 돈 들고 해외로 튀었더라고. 그 뒤로 믿고 있지"

"아니, 그 아저씬 딱 봐도 사기꾼이였더만 뭘요"

"그놈 내 10년지기 친구였어"

"아, 고걸 몰랐네. 그리고 투자나 보증은 친구 사이에도 쉽게 서주는거 아니예요. 난 형식이가 보증 서달라고 하면 엉덩이 차서 쫒아내겠구만"

최악은 다른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알아줄만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교적 불량한 사람만 알아보는 눈이 있다.

살면서 온갖 인간군상들을 봐온터라 사람을 마주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감으로 온다. 촉이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름 괜찮은 사람 부류라는 뜻이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하게 써먹는 특기다.

"수술 받고 퇴원 하시면 형식이도 같이 모여서 밥 한번 먹어요. 제가 좋은데 알아볼테니까요"

"그거 좋겠구나. 아, 난 소고기 좋아하는거 알지?"


"수술 하고 난 뒤에는 당근빠따 영양보충으로 고기죠. 암요"


시온은 조용히 강진수와 이야기 하는 최악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최악은 점차 감정을 드러내는게 적어졌다. 성격이 감정을 숨기는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무덤덤한 태도를 취한다. 평소에는 시온이 있으니 감정적이지만 그녀가 없을 경우 지극히 무욕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작게나마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별거아닌 사소함이지만 시온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카라멜 아키아토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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