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다음날 출근한 최악은 또 백리에게서 눈총어린 시선을 받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몰라서 물어요?"
"응, 몰라"
"우리나라 마스터 유저 때려눕혀놓고 반응이 평소랑 같은걸보면 무덤덤한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건지 모르겠다니까요"
"정답은 후자다"
"아무 생각이 없는게 자랑은 아니거든요?"
"될대로 되라하면 뭐라도 된댔다"
"그러다 잘못 되면요?"
"잘못된만큼 내 책임이니까 어떻게든 해봐야지. 나중에 형 감옥가면 면회 와서 사식 좀 넣어주라"
"......진짜요?"
"응, 진짜"
슬기로운 깜빵 생활! 최악이 감옥 생활을 안해본건 아니지만 거의 힘으로 해결해서 안가거나 못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둘중 어느게 낫냐면 안가는 경우가 낫다. 그건 그나마 최악이 가기 싫다고 땡깡 부리는 정도니까.
못가는 경우는 감옥이 제 역할을 못할 경우다. 요컨데 나라가 망하던 해서 사회가 붕괴하여 가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영상 보니까 막 필살기 같은거 쓰던데 그거 쩔던데요"
"필살기는 반드시 죽이니까 필살기지. 안죽였으면 필살기 아냐"
"뭔 기준이 그래요?"
"좌측 선두 기준!"
"하나! 아......군대 드립 치지 마요!"
"새끼 아직 짬이 덜 빠졌군"
그렇게 따지자면 최악도 아직 올해 초에 전역했다.
가끔, 전산 오류가 나서 군대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
"마스터 유저랑 싸워서 이긴 기술이면 개쩔거 같은데, 그거 배울 수 있어요?"
"테스트 해볼래? 잠깐 양손 모아봐"
최악의 말에 백리가 양손을 모아 펼쳐들었다. 공손하게 뭐좀 달라고 조르는 모양새였지만 행동도 비슷하긴 했다.
"손에 가이아 포스 좀 둘러봐. 기왕이면 손 위에 둥글게 뭉치는 형식으로"
"아, 네"
가이아 포스를 각성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무형의 에너지가 백리의 손바닥 위에서 구체 형태로 두둥실 떠올랐다.
최악은 그 구체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회색빛 아지랑이가 아주 극미량 뿜어졌다. 그러자 마치 기름에 성냥불을 떨어트린것 마냥 아지랑이가 번져가며 백리가 뭉쳐놓은 가이아 포스를 불태웠다.
"어?! 어어?!"
"야, 움직이지 마. 정신 집중해"
백리가 예상외의 상황에 놀랐지만 회색빛 아지랑이는 게걸스럽게 그의 가이아 포스를 먹어치웠다. 아니, 침식해 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우선 침식하고, 죽이고, 그 다음에 흐트러트린다.
둘 다 이능력이라 별 피해가 없지만 만약 사람의 몸에 닿았다면 시체를 처리할 수고를 덜 수 있을법한 힘이였다. 고작 손가락으로 조금 흘려넣었을 뿐인데도 이 정도 수준이다.
백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색빛 아지랑이는 이내 꺼져버렸다. 그도 꺼트리지 않기 위해 가이아 포스를 계속 주입했지만 주입하는 속도보다 불타는 속도가 더 빨라서 유지하는 시간이 조금 늘어났을 뿐이다.
"이야, 의외네. 넌 이거 못배우겠다"
"이런걸로 판별할 수 있어요? 난 또 유리잔에 물 담아놓고 정신 집중이라도 하라 할줄 알았는데"
"그건 딴거 판별하는 방식이고. 최저 조건도 못맞추니 배울 수가 없어"
"뭐가 부족해서 그런건가요?"
"증오, 미움, 분노, 대충 그런거"
"으엑, 찝찝하게 뭐예요 그게"
"어쩌겠어. 만든놈이 그렇게 만든건데 까라면 까야지"
멸룡(滅龍)의 기반은 증오와 분노에 두고 있다. 드래곤에 대한 끝없는 부정적인 감정을 토대로 힘을 부여해 만든 이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증오나 분노가 옅은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
"같은 가이아 포스라도 사람의 체내에 있다보면 성분이 조금씩 변하거든. 네 안에 있던 포스에는 네 의지가 있으니까 증오나 분노 같은게 깊숙히 있었다면 그걸 양식으로 더 활활 탔겠지. 근데 넌 착해서 그런거 없다는데 어쩌겠어?"
"음, 그래도 좋은거라서 다행이네요. 오히려 못쓰는 편이 더 낫겠어요"
"자꾸 강한거, 이상한 것만 배울 생각 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을 해. 더 좋은건 실전을 해보는거지"
"실전을못하니까 그렇죠........"
"나도 너보고 다짜고짜 적성종이랑 치고박고 누구 죽을 때까지 싸워보란거 아니야. 너랑 싸워볼만한 사람 하나 있잖아"
"........루리요?"
"걔가 너보다 쌔다. 우선 여동생부터 이기고 오렴"
"오빠가 여동생한테 맞는것도, 때리는 것도 아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원래 남매는 서로 죽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미친소리 하지 마세요"
"미친 세상에서 살다 보면 정상인 사람이 미친거란다"
"여긴 정상적인 세상이거든요?!"
"너 같으면 괴물 튀어나오고 사람이 칼 들고 싸우는 세상이 정상으로 보이니?"
백리가 할말이 없어졌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로 언제나 이런 세상이였지만 정상은 아니다.
"세상 살다 보면 온갖 븅신 새끼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목 따야할 일이 너무 많지"
".......얼마나 해봤어요? 그런거"
"기억 안나"
최악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재미있어서 짓는 웃음이 아니라 자조적인 웃음이였다.
"너는 나 같은 녀석은 되지 마라. 100년 정도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고. 그러다가 늙어서 병이던 노환이든 가족한테 둘러 쌓여서 조용히 죽는게 가장 행복한거야"
"와닿진 않아요. 그래도.......알겠어요"
사람은 이미 손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소중한걸 깨닫는다. 이미 없어진 후에야 후회를 하고 잊어버린 뒤에야 찾지만 늦는다.
최악은 평범한 삶은 살지 못한다. 본인이 조용히 살고 싶어도 세상의 부조리함을 견디기에는 가진 힘과 성격이 맞지 않는다.
"존나 큰 힘에는 존나 큰 책임이 따르던가 존나 큰 무책임이 따르던가 그래. 그러니까 아무런 힘도 없으면 애초에 책임 어쩌고 할 일도 없으니까 강해지는건 때려치고 치킨 튀기는 법이나 연습해"
"평생 치킨 튀기며 살것도 아니잖아요?!"
"한 10년 뒤에 가게 통째로 너 줄께"
"여기에 뼈를 묻을께요. 튀김 옷 부터 만들면 되죠?"
백리도 나름 자신의 비전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기에는 최악이 제시한 액수가 너무 컸다.
적성종 출현 이후 조금 땅값이 떨어졌어도 결국에는 한국에서 가장 붐비는 지역의 노른자 건물의 장사 잘 되는 치킨집. 미래를 생각하면 더 오를 가능성도 있다.
"아, 서애 씨 온다. 오늘 가게 열 준비는 다 됐냐?"
"네, 다 해놨어요"
오늘도 명동 치킨집 [닭쳐줄까?]는 평소와 같이 문을 열었다.
* * * *
평소와 별 다른일 없이 장사를 하지만 오늘은 색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YBS 방송국의 VJ 특공부대의 PD인 진창식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내밀며 찾아온 사람은 최악도 금요일마다 챙겨보는 프로그램의 PD였다. [닭쳐줄까?]는 매주 토요일이 휴무이기에 금요일 저녁에는 매주 불금이 찾아와서 휴일 전날 보는 마지막 TV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아, 나 그 프로 잘 보는데. 근데 어쩐일이세요?"
"이 가게 사장님 되시나요? 다른게 아니라 이번 저희 맛집 컨셉이 치킨 맛집이거든요. 혹시 출연 의사가 있으신가 해서 찾아왔습니다"
"어이쿠, 전화로 해도 되는거"
"이 집은 전화번호가 따로 없더라고요"
최악의 가게는 따로 배달 주문을 받지도 않고 예약 주문도 받지 않는다. 오로지 직접 와서 주문을 하고 받아가거나 가게 안에서 먹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게 전화의 필요성이 없어서 딱히 홍보를 하지도 않았다. 유명해진건 대부분 입소문 덕분이다.
"저희 쪽에서는 소정의 출연료와 가게의 광고 효과 정도만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예산이 조금 빠듯해서......."
"경기 안좋은건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니까요. 고생 많습니다"
20년이나 이어진 장수 프로그램이지만 지금은 비슷한 프로그램들이나 더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들이 많다. 대세는 먹방이기 때문에 그쪽의 방송이 많이 늘었고 그 틈새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오래 되었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얼마나 인기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촬영은 언제죠?"
"아, 허락 하시는겁니까?"
"옛날부터 자주 본 프로그램이라서 정도 들었는데. 거기 출연한다고 하면 해야죠"
"재료 준비는 보통 언제부터 시작하시죠? 그 때부터 찍어야 하거든요"
"그날 가게 끝나면 저녁에 하죠. 저희 가게는 일찍 끝나서요"
"오늘은 무리고, 모레 저녁에 뵙겠습니다. 저녁에 재료 손질 부터 찍어서 조리 장면이랑 손님들 반응을 찍으면.......어느정도 분량이 나올겁니다"
하루 종일 찍고 방송해봐야 10분 정도의 분량이 나올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내용은 충분히 알차게 담을 수 있다.
최악은 PD의 명함을 건내받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냥 돌려보내기는 뭐해서 남은 닭 한마리를 튀겨서 주었다.
"아, 이거 잘 먹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사고 안나게 잘 들어가세요"
진 PD가 돌아가고 다시 가게에 최악과 백리만 남았다. 진서애씨는 아이 때문에 항상 일찍 돌려보내는 터라 언제나 두사람이 재료 준비를 하곤 한다.
"와, 이제야 방송 타네요"
"방송 나가면 평소보다 재료 많이 준비해둬야 할것 같은데. 적어도 한두달은 더 빡세질껄"
"그 뒤에는요?"
"인기 빠지면 줄어들긴 하는데 단골이 생기면 그만큼 손님이 더 느는거지 뭐"
호기심에 한번 방문했다가 단골이 되는 케이스다.
"우리 가게는 홍보 하나 제대로 안했는데 소문 참 빠르네"
"요즘은 인스타나 페북 같은걸로 잘 퍼지니까요. 저도 가끔 하는데 꽤 유명하더라고요"
"자리 좋고 맛도 좋으면 안유명해지는게 이상한거야"
음식점이 맛있고, 싸고, 위치도 좋다면 유명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가게가 배달을 하지 않아서 시간이 걸렸을 분이지 평소에도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었다.
"내가 다른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서 먹을거 장사 할 때 만큼은 신경을 쓰거든. 닭도 큰거 쓰고. 밑간도 확실히 하고. 건물도 마누라거겠다 보증금도 없으니 단가도 확 낮춰서 싸게 팔 수도 있고"
"방송 나오면 저도 얼굴 정도는 비출 수 있겠죠?"
"우리 가게 개업공신이 안나오면 섭하겠지. 나중에 니 친구들한테 TV 나온다고 자랑 좀 해라"
오늘 하루도 가게를 마무리 하고 집으로 귀가한다. 평소랑 같이 시온이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고?"
"별일 없었습니다. 그쪽은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방송 제의 들어왔더라. 그 왜 VJ 특공부대에서. 우리 금요일 저녁마다 보는거 있잖아"
"아, 그 프로그램 말입니까"
두사람은 저녁을 먹으면서 방송 제의가 들어온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송 출현이라. 당신이 평범하게 TV에 나오는건 몇년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왠만하면 나와도 평범하게 나오고 싶어"
"가장 최근이였던게 건물 하나 박살내고 팬티만 입은채로 '빠요엔이다 십새끼들아!'하고 돌아다닐 때였습니다"
"........그게 언제적이였지?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모르는척 하지 마십시오"
환생자는 어떻게 기억 할까? 보통 사람의 기억을 담당하는 두뇌는 영혼이 되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뿐인데 어떻게 자신을 자각할 수 있는걸까?
답은 영혼에 있다. 형태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악의 모든 기억은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다. 확고한 자아에 대한 자각과 영혼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 순간부터 망각이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막 비법 공개 같은거 할겁니까?"
"할게 뭐가 있어? 그냥 재료 다듬고 그러는게 좀 힘들 뿐이지. 보면 비법 공개하는 집들은 죄다 힘들어서 따라하지 못해서 그런거구만"
최악이 시온을 무릎 위에 앉혀서 끌어안고TV를 보고 있을 때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에 떠 있는 이름은 조인형 팀장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조 팀장입니다. 저녁 늦게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나도 지은 죄가 있으니까 별말은 못하지. 뭔데?"
[어쩌자고 그런짓을 한겁니까?!]
조 팀장은 기본적으로 최악에게 어느정도 예의를 지켜서 말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사안이 컸기 때문에 말이 험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적성종을 때려잡고 사람들을 구하는건 좋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대통령보다도 나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마스터 유저를 때려눕힌건 이야기가 달랐다.
"핑계이긴 한데. 그쪽에 날 보낸건 당신이야. 난 가서 적성종 때려 잡았다가 시비 턴 녀석 때린 죄 밖에 없어. 박수도 양손이 맞아야 하는거라고"
[최악씨가 피했어도 되는거지 않습니까?]
"그럼 한주먹에 기절시켜서 튀었어야 했다고? 그게 오히려 더 위신 상할것 같은데?"
마스터 유저간의 대결. 이루어질리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더욱 큰 화재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단 일곱. 아니, 이번 일로 최악까지 포함하여 단 여덞.
국가의 위신이 걸려있는 만큼 해외 파견 문제로 나간다 하더라도 서로 겨루는 일은 없다. 설령 겨루더라도 자료로 남기지 않는다. 유출이라도 된다면 그 나라의 이미지가 실추하게 되니까.
마스터 유저들은 항상 궁금해 한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얼마나 강한지, 자신의 한계가 어느정도나 되는지.
이미 세계의 마스터 유저들은 그 동영상을 보고 각자 다름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윗선에서도 시끄러워졌습니다. 동영상은 족족 내리고 있지만, 인터넷이라는 특성상 지우기는 어렵고. 해외 사이트로 나간 동영상은 또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최악씨가 한국인으로 추정되서 국가적으로는 나쁜 인상은 없습니다]
이경진이 해외의 다른 마스터 유저와 싸워서 졌다면 몰라도 라쿤맨은 가장 처음 등장했던 나라도 한국이다. 한국인으로 추정됐기 때문에 자국의 마스터 유저끼리 싸운게 되어서 국내 문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마스터 유저의 실력을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포스 유저가 출연하는 방송이 없는건 아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싸우는 영상은 없으니까요]
"그런것만 들으면 좋은건데 뭐가 문제야?"
[이번 사건으로 라쿤맨 대책팀이 만들어졌습니다]
"뭐하는 곳이여"
[요컨데 당신 잡으라는 소립니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이제는 그걸 봐줄수 없는 모양이다.
최악은 썩은 표정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