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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32/507)



〈 32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이경진은 10분이 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 본건 눈앞에서 덮쳐오는 회색빛 아지랑이였는데 멀쩡히 살아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정신 차렸냐? 야, 울 마누라 자고 있는거 보는건 하루 종일 봐도 안질리는데 남자 새끼 자는거 보고 있는건 왜 5분이면 질리냐"

"......결혼 했나?"

"올해 했어"

"신혼이군. 한창 좋을 때야"

"아재요. 딱히 신혼 아니더라도 사이 좋은데요.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라. 댁은 결혼 했어?"

"했지. 안사람은 이미 세상을 떴지만"


"어, 음......."

'혹시 집에서는 마누라한테도 그런 말투 써?'하고 물어보려던 최악의 입이 다물렸다. 사별했다는 말을 듣고 그런 말을 한다면 패드립이다.

"충고 하나 하지만.......있을 때 잘하게. 없어지고 나면 후회가 크니까"

"잘 알지, 그런거"

상실감과 후회는 사람을 좀먹어가는 괴물이다. 아주 작은 티끌만 남아 있어도 어느새 몸집을 불려서 자신을 잡아먹는다.

털어내던, 극복하던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사람이 죽고, 적성종만 쳐죽이면서 시간을 보냈지. 자식은 딸 하나 있지만 유학 보냈고.......남은건 나 혼자지"

"기러기 아빠야? 취미라도 만들지 그랬어?"


"취미에 정이 안붙어서"


가족도 없고 취미도 없는 남자가. 적성종만 죽이다 보면 결국에 거기에 열중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강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의 재능과 더불어서 마스터 유저에 이를  있었던 계기다.

"내가 엄청 봐줘도 발렸는데 또 덤빌 생각이야?"

"지금은 무리겠지만 나중에는 해야지"

"다음에 또? 가망 없는거 알잖아"

"가망이 없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지"

이경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한 법이니까"

"누가, 어떻게?"


최악은 가장 기본적인 논제를 끄집어냈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벌을 받는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악같이 아무도 잡을 수 없는 범죄자라면 누가 어떻게 심판할건지가 문제다.


인간에게 슈퍼맨을 심판할 힘과 권리가 있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한도끝도 없이 이야기가 커진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법을 들이대겠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내가, 너를"


"그렇게만 들으면 간지나는 대사같긴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내가 다음엔 당신 죽이면 어쩔려고?"


"그때는 그때겠지"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는거야?"


"큰 이유는 아니야. 그저 법치 주의 사회에서 법을 어기고 다니는 사람이 날뛰고 그걸 방관한다면 사회에 혼란이 오는데 충분한 이유니까"

국가의 신뢰와 치안도가 떨어지고 모방범도 생겨난다. 규율에서 벗어난 존재는 좋든 나쁘던 그 영향이 나타난다.


물론 부정적인 것만 있는게 아니다. 오늘과 같이 인명 피해가 예상되어 있던 일도 막을 수 있었던건 최악 덕분이니까.

"그럼 하나 약속하자. 난 약속하면 먼저 어기는거 아닌 이상 꼭 지키니까 믿어도 돼"


"약속이라고?"

"어차피 그럴 생각이였지만. 이짓도 오래 해먹진 않을것 같거든"

가면 쓰고 영웅짓 하는건 최악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지금이야 하고 있지만 부당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영웅으로서 나아갈 마음은 없다.

하다가 수틀리면 이판사판이다.


"내가 언제 열 뻗쳐서 이 가면 벗어서 정체를 드러내면 반항 안하고 순순히 잡혀가줄께"

".......자네가?"

"약속은 지켜. 어차피 그럴 생각이였고"

최악은 대부분의 문명은 존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 환생을 하더라도 납득하고 받아들이며 그 문명의 사회에 녹아든다.

건들지만 않으면 문제없다. 대형 폭탄이지만 해체하려고 뚜껑을 열면 터지는 트랩이 설치된 폭탄이다.

"나만 건들면 적당히 봐줘. 지금도 봐. 아저씨도 안죽이고 어디 크게 다치지도 않게 쓰러트려줬잖아. 요즘 흉흉한 포스 유저 범죄 보면 이러는 사람이 어디있어?"

"이게 봐준건가?"

이경진은 금이 가고 박살난 콘크리트 바닥을 보며 말했다. 더불어서 공원은 초토화가 되어 운동기구도 전부 뒤집어 엎어져 있었고 인근 도로는 커다란 금이 가서 통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반은 댁 탓이거든?"

"책임은 반반으로 해두지"


"어, 음. 설마  내야 하나?"

돈 이야기가 나오면 최악의 기가 쪼오끔 줄었다. 공원에 도로에 다시 재정비 하려면 돈이  단위로 들어가는건 당연지사다.


최악이 가진 돈은 솔직하게 말해서 시온이 벌어다 주거나 자본금을 준게 대부분이다. 최악이 순수하게 가진 돈이라고 해봤자 군대에서 월급 모아둔 돈 약간이 전부다.


사업하고 취미 생활 하는데 돈 쓰는건 몰라도 이런 일에 큰 돈 들이면 괜히 시온에게 미안해진다.

"이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내 잘못도 있으니 책임도 저야하는 법이니까"

"와, 아저씨 땡큐"

"대신 이건 빚으로 달아두겠네"

"나중에 갚을께"

"나중에  갚는다는 사람 말만큼 믿기 힘든것도 없지"

"내가 안갚는 빚은 보증빚 하나야"

".......서봤나?"

"옛날에 한번"

그때 진 보증빚은 갚는 다신에 사채업자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서 갚았다.

이후로 환생을 하면서 최악은 다시는 보증을 서지 않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아니, 그만큼 친한 친구라면 보증 서달라고 오지 않는다.


"난 갈께. 다음에 언제 시간 되면 보지 뭐"


"연락할 방법은 있나?"


"아저씨 폰 번호좀 알려줘봐"


"밤에만 전화하게. 그때는 그나마 몰래   있을테니까"


"걱정마. 어차피 추적 못해"


시온이 있다면 설령 지구의 문명이 우주 개발을 하고 테라포밍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다 해도 최악의 핸드폰 하나 해킹하지 못한다.


 말에 이경진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라쿤걸이란 사람이 실존해 있었나? 그정도 수준의 과학자라면 전자기기를 해킹하거나 조작을 가하는건 쉬울테니까........"


"아니, 잠깐만. 라쿤 뭐?"


"몰랐나?"

"라쿤걸이라고 했을지는 몰랐지"

최악에게 맞춰서 라쿤걸이라고 한거지만 오히려 상부에서는 라쿤맨보다 라쿤걸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라쿤맨이 모습을 드러낸건 영등포에서, 일본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지금처럼 신도림 쪽에서 네번 모습을 드러낸게 전부지만 라쿤걸은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어도 최신 차원진 감지기 설계도를 작성한걸로 이름값이 단번에 치솟았다.

유능한 포스 유저는 있으면 좋지만 결국 한명 뿐이고 현재 사회 체제로는 출현하는 적성종을 커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급한건 아니다.

하지만 유능한 과학자라면 다르다. 미국의 알리언 박사와 비슷한 예시로 뛰어난 과학자라면 그 효과를 전세계에 끼치는게 가능해진다.

심지어 그 알리언 박사도 만들지 못했던 최신 차원진 감지기는 이전의 차원진 감지기로도 감지할  없던 골머리를 싸매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야, 라쿤걸. 응답해라. 라쿤걸"

[아, 끝났습니까?]

"라쿤걸이라고 해서 저번에 그랬어?"


[딱히 누구라고 적긴 그래서 그랬습니다]

"왜 하필 라쿤걸이야?!"

[당신이 라쿤맨이면 저는 라쿤걸이여야 하잖습니까. 자고로 여성 사이드킥은 그러는 법입니다. 배트맨-배트걸, 김치워리어-고추걸처럼 말입니다.]

"배트맨은 그렇다 쳐도 엿같은 김치워리어는 치워"


[오늘 저녁은 김치찌개입니다]


"그건 내가 끓이면  맛있게 끓일 수 있는데!"

최악이 요리중에서 양보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면 김치찌개다. 가장 많이 요리해봤고 가장 자신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여력이 된다면 겨울에 김장을 담가서 김치부터 만든다. 올해 겨울 오기 시작하면 최악의 집에선 김치 냄새가 진동할거다.

"울 마누라가 집에서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난 먼저 갈께. 처음에는 비호감이였는데 아재 의외로 괜찮네"


"상부에는 져서 놓쳤다는걸로 해두지"


"뭔일 있으면 전화 할께. 근데 기왕이면 다시 안보는게 가장 낫겠지?"

"되도록이면 얼굴 마주할 일은 없는게 낫겠지. 보나마나 서로 싸워야 할일로 만나는게 될테니까"

이경진의 개인 휴대폰 전화번호를 받고 최악은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이경진도 주위를 둘러보고 복귀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제 아무도 없는 공원이지만 멀리서 공원 철망 너머로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시발, 개쩐다"


남자의 손에는 핸드폰이 동영상 촬영 모드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나 왔어"

"당신은 한번 나갔다 오면 이슈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도 있는겁니까?"

"어, 왜?"

"신도림에서  일도 있긴 하지만 방금 뜬것 때문에 묻혔습니다"


"뭐라도 올라왔어?"

집으로 돌아온 최악이 시온의 투정에 핸드폰을 꺼내서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했다.

조금 뒤적거리니 방금 전 있었던 싸움의 영상이 그대로 올라와 있었다.


편집 하나 하지 않았지만 싸웠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아서 기껏해야 20분 남짓한 길이의 영상이였다. 가볍게 싸우기 시작한 것부터 최악의 멸룡과 이경진의 회색공명검이 격돌하는 것 까지 전부 올라왔다.


"아, 근처에 사람 하나 있긴 했었는데........"


"영상으로 찍을걸 예상 못했습니까?"


"생각 했으면 내가 그냥 냅두진 않았지"

거리가 있어서 화질은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대강 생김새 정도는 구별할  있었다. 특히나 최악의 라쿤 형태의 기계식 가면은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

"제가 확인 했을 때는 이미 올라온지 시간이  되서 지울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지금 제가 내리면 오히려 일이 커질겁니다"

"동영상 하나 지운다고 일이 커지진 않을것 같은데?"

"이번건 사안이 컸습니다. 미국에서도 영상 퍼갔습니다"

"앗"


"당신이 저지른 일 중에서 객관적으로 무력을 증명할만한 증거는 부산에서 찍였던  뿐입니다. 그나마 적성종 한마리 잡은건 크게 소란 피울만한 일은 아닙니다"

"근데 이번건 좆됐네"


"일본에서도 같은 짓을 했지만 그때는 영상은 찍을 수 없었던 환경입니다. 부산에서는 영상은 있지만 상대가 적성종이였습니다"


"이번건 상대가 같은 인간이고. 마스터 유저인데다가 쉽게 때려눕혔지"

"원래부터 냄새는 맡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적극적으로 변했을겁니다"


사람은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신뢰를 가진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대로  증거라면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것도 인간이다.


한국의 마스터 유저가 패배하는 동영상이 올라올 때 한국에 메리트는 없다. 기껏해야 라쿤맨이라는 괴인이 강하다는것만 증명될 뿐. 신원도 알 수 없는 사람을 두고 할만한 퍼포먼스는 아니다.


한국에서만 사는걸로 추정될 뿐이지 신원도 모르는 마스터 유저 평균 이상의 포스 유저.


집어가는 사람이 임자.


전 세계에서 국방비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인 미국인 만큼 큰 관심을 가질  밖에 없었다. 미국에도 마스터 유저가 한명 있지만 두명 있는것과 한명 있는건 이야기가 다르다.

한명은 자국에, 한명은 해외에 파견 보내서 얻을 수 있는 국가적 이익, 아낄 수 있는 예산. 그 외 기타 요소들을 합치면 무시못할 액수가 된다.

"이번 일은 좀 사안이 큽니다"


"조까, 시바. 될대로 되라하면 뭐라도 된다고 내 마음의 소리가 그러더라"


"머리를 육각형으로 빚어드립니까?"


"미안"

마누라한테 져주는 남편은 결코 팔불출이 아니다. 그냥 마음씨가 좋은거다.

"어떻게 할겁니까?"

"아 몰라.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시바, 죽기야 하겠어?"

"전 인류가 덤벼들면 어떻게 할겁니까?"

"그니까 죽기야 하겠냐고. 그래도 안죽으니 괜찮아"

농담이 아니다 최악은 일대일의 대인전이 특기지만 일대 다수 전투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사실상 최악에게 다수는 의미가 없다. 최정예나 다름없는 소수만이 유효할 뿐.

"........우리 자가용 우주선에 시동 걸어놓겠습니다"


"아, 잠깐. 그거 이쪽 차원에 끌고왔어? 어디다 뒀어?"


"화성이 파킹 해뒀습니다"


"우주선을 자동차 취급하듯이 말하지마"


한 500년 전쯤에 한대 새로 뽑은 우주선은 현재 화성의 한 산맥에서 주차 중이다. 근처에 패스파인더 화성 탐사선도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주선이 아니라 차원항행함이다. 초월자는 범차원적 존재인 만큼 차원을 넘어가거나 넘어갈  있는 수단 하나쯤은 보유하고 있다.


최악도 차원도 건너갈 수 있지만 시온이 말한 우주선을 타고 갈 때가 많다. 굳이 차 타고 가면 되는데 걸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거함거포 주의자 마누라님. 또 이상한 무기 설치 안했죠?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그냥......최신 설비로 업그레이드만 했습니다"


"뭐 했는데"

".........극소 시공 분쇄탄 몇개 탑재 했을 뿐입니다"

"그런거 없어도 내가 더 쌘데!"


"블랙홀 축퇴로 달린 함대가 덤벼들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이겨"

"그냥 사고 날 때 대비해서 에어백 튼튼한걸로 교체했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에어백을 공간 제어 완충 장비 수준으로 맞춰?"

"접니다!"


"크고 쌘거 좋아해서 좋겠다!"

"딱히 크지 않은것도 좋아합니다"


"어떤거?"


시온이 포옥, 하고 최악의 품에 안겨왔다.


"개인적으로 큰 것 보다 테크닉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치?"

수천년이 지나도 여전이 신혼 분위기를 물씬 풍겨서 주변 사람들의 손발을 오그리토그리로 만들어버릴법한 두사람의 애정 행각은 침대에서 새벽까지 이르고서야 끝을 맺었다.

깨소금과 꿀이 넘쳐흐른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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