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나를 부른 이유는 일손 부족이 주된 이유였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나라에서도 할 수 있지만 문제가 있다면 차원진이 발생하는 곳이 한군데가 아니라 두군데라는 점이다.
[차원진의 동시 발생은 드물지만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접한 거리에서 발생하는 경우라면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위치가 어딘데?"
[하나는 여의도 공원. 하나는 신도림 역 인근입니다]
"버스 타도 길어야 15분 거리인 곳이잖아"
[네, 너무 가까워서 문제입니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앞으로 10분이면 차원진은 일어나는데 인력을 나눈다면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 둘 다 인구 밀집 지역이다.
[여의도 공원 쪽에는 이경진 씨가 가 있습니다. 그쪽은 걱정 없지만 신도림 역 쪽이 문제입니다]
"내가 알기로 신도림 역이라면 거기에 주상복합 아파트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네, 그래서 문제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고 절차가 잘 되어 있어도 안되는건 안되는게 많다. 차원진 주변에 아파트가 있다면 자칫 대형 적성종이라도 뜨면 무너지는건 쉽다.
피하려고 해도 고작해야 10분 사이에 몇백명이나 사는 아파트에서 피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고. 또 노약자 같은 사람들은 빨리 대피하기 힘들다.
[여의도 공원 쪽은 시간이 늦어서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군대로 포위망을 펼치고 몇팀 정도 투입하면 빠른 제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신도림 역 쪽은......]
"여의도 쪽에 마스터 유저가 갔다는데. 사실 반대잖아?"
공원이라 하면 탁 트인 공간이 주되다. 게다가 지금 시간도 해가 지고 나도 슬슬 퇴근 생각하고 있는지 오래다.
이런 밤에 공원에 있는 사람이라면 밤에 운동 하러 나온 사람 외에는 별로 없는게 당연하다. 그런 공원과 주택가 인근. 여의도 공원이라면 인근에 도로랑 빌딩 외에는 없다. 어느쪽이 인명 피해를 더 걱정해야 할지는 안봐도 뻔하다.
근데 여의도로 갔다고?
[윗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포스 유입 현상에 시간도 걸리고, 게다가 인근에 국회의사당도 있으니까 만약 잘못해서 파손되기라도 한다면.......]
"지들 이미지 떨어지고 지지율 떨어질테니까 그 지랄을 떠는 거겠지"
적성종 관련 사안은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 생명이 달려 있으니까.
하지만 고작 이미지 하나 때문에 어디가 더 중요한지도 판단 못한다면 제정신인가 의심부터 들었다.
"우리 나라 국회 의원은 하는 일 보면 개판으로 한단 말이야. 적성종 뜨면 그냥 조지면 되는거지?"
[받아주시는겁니까? 감사합니다!]
"가서 적성종 몇 조지는게 뭐 힘들다고. 거기까지 가는게 더 힘들겠다"
가게 문은 이미 백리가 눈치 까고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는 상시 가지고 다니는 동물귀 모양의 헤드폰을 꺼내 머리에 쓰고 버튼을 눌렀다.
철컥, 하고 금속빛의 가면이 얼굴에 덧씌워졌다.
"형, 또 뭔일 하러 하는거죠?"
"우리나라에 세금 도둑놈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똥 치우러 간다"
"세금 도둑이 갑자기 나온것 처럼 그러네요. 옛날부터 그랬는데"
"제대로 일 안하는 새끼는 목 따버린다고 하면 일 좀 잘하려나. 인성 검사부터 도입한 뒤에 해야하는데 말이야. 그치? 난 이번 일 마쳐야 하니까 넌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
"네, 내일 봐요 형"
시간은 밤. 거리는 아직도 밝지만 빛이 들지 않는 부분도 있는 법이다. 우리 건물 CCTV는 시온이 관리할 수 있으니 찍혀도 언제든 지울 수 있다. 그러니 건물 안에서 찍히는건 문제 없다.
가게 뒷문으로 나와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신도림 역 까지 거리가 조금 있지만 그거야 차 타고 도로 따라서 간다면 그런거고 일직선으로 장해물 없이 뛰어간다면 몇분 내로 도착할 수 있다.
"망토 하나 있었으면 간지나게 펄럭이면서 날아가는건데"
-망토는 절대 안됩니다
"뭐야, 듣고 있었어?"
-라쿤맨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저한테 자연적으로 소식이 온 것 뿐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적성종 떠서 조 팀장한테서 연락 왔어. 그래서 지원 나가는 중"
-어디보자.......마침 한국에서 이 시간에 두군데 차원진 경보가 울렸습니다. 어느 쪽입니까?
"신도림"
-이미 군대도 출동 했고 포스 유저도 60명 정도 파견된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직 민간인 대피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택 내에 대기 시키고 있습니다.
"중형 이상 뜨면 의미 없잖아"
소형이라면 집 안에 숨어 있으면 넘어가는 경우라도 있지만 중형 정도부터는 그냥 들이박으면 건물 하나 무너트리는건 쉽다.
그럴 경우 오히려 자택에 있는게 대참사가 벌어진다. 아, 분명히 옛날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가 크게 사고난게 하나 있었는데.
-예, 그래서 한바탕 또 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도로에 차가 밀려서 교통수단으로 움직이는건 힘들어 보입니다.
시온이 말과 함께 가면 안쪽의 아이가드 역할을 하는 유리 부분에서 이미지 영상이 떠올랐다. 인근 도로의 카메라를 해킹한건지 명절날 고속도로를 보는듯한 꽉막힌 도로가 보였다.
-차원진 발생까지 앞으로 5분 남았습니다.
"충분해"
조금 더 속도를 내면 일 터지기 전에는 확실히 도착할 수 있다. 땅을 박차는 힘을 더해서 먼 거리를 뛸 수 있게 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신도림 역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택가가 몰려있는 만큼 거주하는 인원도 많아서 대피하는데도 오래 걸린다. 만약 시온이 최신 차원진 감지기를 뿌리지 않았더라면 여기서도 대참사가 일어날 뻔 했다.
20년 전 대공황 이후 인구밀집 지역 어디든 군대가 출동하여 대처할 수 있도록 메뉴얼이 짜여져 있다. 안하면 욕을 들어처먹고 지지율이 팍팍 떨어지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손을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덕분에 최전방이 아니라 수도권 부대가 더 빡세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수백의 보병들이 실탄을 지급받은 상태로 차원진 발생 추정 위치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1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 동정심이 일었다.
-앞으로 1분 남았습니다.
"포스 유저도 어느정도 있고.......어지간한 녀석이 아니면 다 잡을만한 수준인데 인명 피해가 걱정이네"
하필이면 주택가의 작은 공원 쪽에서 차원진이 발생할 것 같다. 길이 한정되어 있어서 소형 적성종이 나타난다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그들만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차원진 발생합니다.
시온의 말과 함께 대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공간이 비틀리면서 기묘한 단층을 만들어내고 이내 그걸 비집고 거대한 몸집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는 날이 장날,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나오는 놈이 중형 이상이였다.
사족 보행인 형태인데도 불구하고 키가 아파트 3층까지 닿는 덩치. 외갑은 우둘투둘 돌 덩어리를 보는 듯 했지만 재질은 훨씬 단단해 보였다.
약간은 귀여운 구석이 있어 보여서 어디서 봤나 떠올려 보았는데......
"아르마딜로? 천산갑?"
그 둥굴게 몸을 말아서 천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물 같은 모양새였다. 다만 외갑이 비늘 형태를 하고 있는걸 보면 천산갑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킥! 킥! 키이익!!"
"중형 적성종이다! 소형 화기는 안먹히니까 60mm 가져와!"
"근접 계열 포스 유저는 앞으로! 외피가 단단해 보이니 근접계는 시간을 끌어! 포스 유입 현상이 끝날 때 까지만 버텨!"
나름 협력 관계는 잘 되어 있는지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적성종은 라프 에너지 때문에 물리 공격이 잘 먹히지 않는다. 중형 적성종에게 박격포를 갈겨봤자 시선 끌기 용이다.
물론 그걸 군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철저하게 지원 역할. 절대로 나서지 않고 혹시나 있을 피해를 줄이기 위한 역할이다.
적성종이 주위를 둘러보고 괴성을 지르더니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모습도 닮은 주제에 행동도 비슷한걸 보면 적성종이 넘어오는 쪽은 이쪽과 식생이 비슷한가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르릉!!!
라프 에너지가 유동하면서 둥글게 만 놈의 몸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가이아 포스가 응집되면서 점차 놈을 공략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지만 그때는 늦는다.
포스 유입 현상은 양날의 칼이다. 원래라면 데미지를 줄 수 없는 적성종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게 만드는게 포스 유입 현상이다.
그렇지만 그게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에 포스 유저는 그저 더 잘 싸울 수 있는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만 지나면 잡을 수 있지만. 그거 보려고 온건 아니니까"
적당히 패죽여서 집으로 가자. 시온이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 * *
하늘에서 라쿤이 떨어져 내렸다, 라고 한진성 중위는 나중에 쓸 보고서를 떠올렸다. 그대로 쓴다면 분명히 장난하냐면서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금속 재질 가면에 동물 형태를 한 가면은 얼마 전에도 참치를 휘둘러 적성종을 때려죽인 괴짜 히어로의 모습과 같았다.
"라쿤맨?"
"적성종은 이 라쿤맨이 처리할테니 안심하라고!"
"고마워요 라쿤맨!"
"잠깐만, 어떤 새끼야!"
농담을 받아쳐주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고함을 치는 간부가 있었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였다. 작은 상가 하나쯤은 무너트릴 수 있을법한 덩치로 회전하며 돌진하는 적성종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땅을 울리며 최악에게 달려들었다.
쿠우우웅!!!
최악은 피하지 않았다. 정면에서 받아쳤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몸뚱이를 받아내어 심상치 않은 마찰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십수미터에 이르는 거체를 고작 2미터도 안되는 인간의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크기에 비례해 무게도 엄청날텐데, 가속도까지 받은 그 거체를 받아내고도 최악이 디딘 자리에는 금 하나 가 있지 않았다.
"가장 큰 공을 쓴 운동이 농구밖에 없는데!!!"
한손으로 막아내고 다른 한손으로 주먹을 쥔 후에 힘차게 내질렀다. 묵직한 진동이 울려퍼지면서 적성종의 몸이 회전력을 잃고 밀려났다.
"거 시발 학교 운동장에서 땅파면 보이는 콩벌레 같이 생긴 새끼가 단단하긴 더럽게 단단하네. 코로 콩밥 맥여주랴!"
먹을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악은 웅크린 적성종의 몸뚱이에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쿵! 쿠웅! 쿠우웅!!!
인간의 힘으로 낼 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만한 충격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맞고도 견디고 있는 적성종의 모습 또한 괴물이라고 할만했다.
하지만 타격이 없는건 아니였는지 바둥거리기만 할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약간의 틈이 생기자 최악은 어께를 풀듯이 으쓱이며 잠깐 물러났다.
"거기 중위 아저씨"
"어, 저 말입니까?"
"여기 중위 아저씨가 아저씨 말고 또 있으면 생각해 보겠는데. 없잖아. 아저씨가 책임자 맞지?"
사실 책임자를 따지자면 복잡한 이야기가 된다. 군에서 나온 간부 뿐만이 아니라 KFU에서 나온 팀장까지 넣는다면 위계질서는 꼬인다. 다행히도 군 관계자 중에서 지금 이 자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한진성 중위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야기 하기는 편했다.
"예, 일단은 이 현장의 책임자 중 한명입니다"
"지나가다 잠깐 들렀는데. 저거 어떻게 해줘? 그쪽에서 잡을래. 아니면 잡아줄까?"
"잡아주실겁니까?"
"잡아줘?"
"그래주신다면 저희야 고맙습니다!"
"오케이"
보이지 않는 힘이 적성종을 끌어당겼다. 십수톤에 달하는 거구를 떠오르자 주변에서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포스 유저도 같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여러명이 모여서 간신히 몇초간 시전하는게 전부였다. 최악처럼 혼자서 십수톤이 넘는 무게를 자유자재로 들어올리는건 마스터급 유저라도 힘든 일이다.
허공에 띄운 적성종의 몸뚱아리는 계속해서 둥글게 웅크리고 있었다. 주먹질 몇번으로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파악하고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상태를 취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라프 에너지를 띄지 않아도 박격포 포격 정도에 끄떡도 하지 않을 외피를 두른 적성종은 방어 태세를 갖춘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는 관통 데미지란게 있단다. 자고로 내가중수법이란 이름으로 무협 소설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설정이지"
'간섭'이라는 능력은 생각 외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간단한 염동 능력부터 시작해서 정신계 능력까지도 흉내 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기반은 '간섭'이기 때문에 깊이의 차이가 존재한다.
허나 오래 사용하면 그 얕음도 깊어지는 법이다. 최악이 환생자로서 살아오면서 능력을 몇가지로 특화시킨 분야가 존재한다.
키이잉!!!
최악의 주먹이 기이한 공명음을 띄면서 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온거 환영한다. 온김에 요거 함 무 봐라. 쥑인다!"
진짜로 죽인다.
살기충천(殺氣充天).
살의만천(殺意滿天).
살신합천(殺身合天).
세가지 단계로 살기를 정련하여 응축해 벼려낸다.
그렇게 시간도 공간도 넘어서 심지어 개념조차 관통하여 상대를 죽이는 말 그대로 필살기(必殺技)가 내질러진다.
"흉제붕권(凶帝崩拳)"
쩌어어엉!!!
무언가 깨지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울러퍼졌다. 그리고 한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적성동의 웅크린 몸뚱아리가 풀어졌다. 외상 따위는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생명은 정지하여 숨도 쉬고 있지 않았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멀쩡하게 움직이며 인간을 죽이기 위한 첨병이나 다름없는 적성종이 다른 외상 하나 없이 죽어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기이했다. 그걸 뛰어넘어서 소름이 돋았다.
그저 칼로 베고, 총으로 쏘고, 어떻게든 싸워서 상처입히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건 세상의 기본 이치다.
허나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그대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건 다른걸 넘어서 오싹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때, 쥑이지?"
진짜로 죽였다.
* * * *
최악이 적성종을 일격에 격파한 이후. 남은건 뒷처리를 위한 시간이였다.
적성종을 해부하여 코어를 적출하거나 해체해서 각 부위별로 연구소, 혹은 따로 쓸 곳으로 보내지는게 보통의 수순이다. 다만 이번 경우는 거의 온전하게 사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여러곳에서 원할 것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라쿤맨씨"
"거의 운동 삼아 나온거나 마찬가진데 뭐. 너무 그렇게 고개 숙이면 오히려 이쪽이 부담스러워지니까 냅둬"
바로 자리에서 벗어나도 괜찮지만 최악은 조금 남아서 뒷처리를 구경했다.
거대한 괴수를 해체하는 모습은 그저 보기만 해도 재미 있었다. 최악도 환생을 거듭하면서 인간보다 커다란 생물을 많이 보고 죽이기도 했지만 해체하는걸 보는건 기껏해야 드래곤이 전부였다.
"원래라면 저희들은 라쿤맨씨를 체포해야 하지만......."
"어? 체포?"
"모르셨습니까? 라쿤맨씨에게는 체포 명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혹시나 목격하거든 체포하라고........"
일본에서 저지른 일로 인해 생긴 외교 문제로 인해서 최악에게는 수많은 혐의가 씌여져 있었다.
우선 제일 기본적으로 포스 유저 미등록.
그 다음으로 그런 포스 유저에 대한 추가세 미납.
허가를 받지 않은 포스 유저의 출국 및 외국에서의 기물 파손과 상해 행위까지.
최신 차원 감지기의 설계도를 보내주는걸로 약감은 참작되었다고 하지만 죄가 사라지진 않는다. 명목적으로나마 라쿤맨은 범죄자가 되어 있고 체포해야 할 대상이다.
"솔직히 저희로서는 체포할 여력도 되지 않을테니 상부에는 한소리 듣더라도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어? 진급 누락되면 어쩌려고 중위 아저씨?"
"어차피 저 석달 후에 전역입니다"
"와우, 미리 축하해줄께"
불명예 제대가 아니면 전역은 남자에게 있어서 축하해야할 일이다. 군필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최악도 올해 초까지 군인이였으니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중대장님!"
"김 상병? 왜? 누구한테서 무전 왔어?"
누군가 한 중위를 부르며 달려왔다. 등에 매고 있는 장비를 보아 통신병으로 보이는데 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미르가 온답니다!"
"뭐?"
"미르? 용?"
"그 왜 진도개 같이 군사 용어입니다. 미르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대한민국에서 미르(용)이라고 말할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설령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용을 용이라고 부를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한국 유일의 마스터 포스 유저.
천검(千劍) 이경진.
한국의 수도권 방위를 위해서 언제나 서울에서만 머무르고 있는 포스 유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여의도 공원 쪽의 방위를 위해서 그쪽으로 가 있던 사람이 지금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데 난 일 커지기 전에 튀어야........아 씨발 늦었네"
최악이 고개를 돌려 도로가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여의도 공원에서 신도림 역까지 일직선으로 온다면 기껏해야 몇 킬로미터 정도다. 100미터 달리기를 6초대를 끊을 수 있는게 보통 포스 유저도 되는 일인데 마스터 유저라면 그것도 우습다.
아니, 애초에 그는 달려오거나 하지 않는다.
지금 튀어봤자 추격을 받을 뿐이다. 뿌리칠 수는 있지만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매한가지다.
"남자라면 정면에서 부딪혀야지! 누가 진짜 남자냐!"
"제정신입니까?!"
저 멀리서 섬광처럼 날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의 등 뒤로 수십개의 검이 함께 날아오고 있었다.
검을 발판 삼아서 그 위에 올라타고 날아오는 모습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마치 무림에서나 나올법한 검선(劍仙)과 같았다.
이경진의 별명이 천검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염동 특성에서 한층 발달한 조작 특성으로 수십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호적상으로는 40대 중반이라고 보이지 않을만큼 동안의 남자가 지상에 착지했다. 발판으로 디디고 있었던 검이 자연스럽게 그의 등 뒤로 날아가 허공에 부유했다.
"저쪽 현장 먼저 빨리 끝내고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서 와봤는데"
그는 최악을 보며 내뱉었다.
"생각치도 못한 사람이 있군"
"나도 생각치도 못한 사람을 갑자기 만나서 어쩔까 생각중이시다"
최악은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아, 이거 곱게 넘어가기는 글렀구나.
일본과는 달리 여기는 한국이다. 도망쳐도 해외로 이민가지 않는 이상 갈 곳이 없다.
정체가 드러나고, 일이 복잡하게 꼬인다면 해외로 도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사업 기반도 여기에 있고 신혼집도 아직 반년도 못살았다. 일부러 시온이 돈 들여서 본인이 직접 설계해 지은 집인데 그걸 두고 해외로 나가기에는 미안해진다.
"이경진이다. 그쪽은?"
"라쿤맨이라고 불러"
"이쪽의 적성종은 당신이 처리했나?"
"당신이 높으신 분들 뒤 닦아주러 그쪽에 가 있는 동안 이쪽에 있는 놈은 내가 처리했지"
이경진은 해체중인 적성종을 보았다.
최소 중형. 정확한 등급은 재봐야 알겠지만 우선 크기부터 남다르다. 등급을 논외로 쳐도 중형 적성종은 그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가 크다.
민간이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구 밀집 지역의 경우 더더욱.
최악이 없었다면 이곳의 병력으로는 고작해야 버티는게 전부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몇사람은 반드시 죽어나갔다.
"감사를 표하지. 당신이 없었다면 분명 몇명은 죽었을테니까"
"고맙다면 얌전히 보내주면 안될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슈슈슉!
수십개의 검이 날아와 최악의 주위를 원형으로 포위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 간격으로 원을 만들며 꽂혀진 검을 보면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게 아니라 얼마나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도 볼 수 있었다.
"라쿤맨. 포스 유저 미등록, 그로 인한 특별세 미납. 불법 출국, 그리고 일본에서의 일이랑.......이야기를 들어볼 것까지 더해서 여기서 체포하겠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선처해주지"
"나도 처음부터 반말까고 있어서 뭐라곤 할 수 없는데, 댁 말투 어쩐지 기분 더러워"
상대의 위에 있다는 말투는 남보다 특출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쓸 수 없다.
이경진에게도 나름 자격은 있었다. 마스터 유저는 세계에 단 아홉명 밖에 없었고, 심지어 5년에 한번 바뀌는 대통령보다도 어디서도 통용되는 힘을 가진 그가 더 위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그치만 그게 최악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위에는 위가 있는 법이고. 최악도 자신의 위를 알고 있었다. 전 차원을 통틀어 최상위 0.1퍼센트에 속하는 최악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두단계나 남아 있었다. 그중 한계단 마저도 쉽사리 밟지 못하는 상태다.
"내가 도망치면 어쩌려고?"
"잡으면 그만이다"
"잡을 수나 있고?"
"물론"
최악의 주변에 꽂혀 있던 검들이 기이한 진동을 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댁보다 약하다고 생각해?"
"포스량 자체가 절대적이진 않지만. 그쪽과 나의 포스량의 차이는 클텐데?"
최악이 가진 가이아 포스는 그냥 대충대충 숨쉬면서 끌어모은 것에 불과하다. 가끔가다 육체강화 정도에만 사용하며 그의 능력인 '간섭'을 사용할 때는 다른 포스 유저들과 달리 가이아 포스가 아닌 정신력, 혹은 의지를 사용한다. 더 효율 좋고 더 강한게 있는데 괜히 힘 낭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악이 가진 가이아 포스의 보유량은 기껏해야 숙련된 포스 유저 서너명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만 하더라도 꽤 많은 양이지만 마스터급 유저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다.
"내가 언제 얼굴 까발려져도 상관없긴 한데.......댁한테 잡혀주는건 좆같아서 안되겠거든?"
최악은 중지 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이경진에게 내밀었다.
"조까, 씨뱅아"
"굳이 그러겠다면야 어디 하나 잘라서 데려가도록 하지"
수십자루의 검이 번개처럼 최악을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