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27/507)



〈 2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난데없는 국가 비상 사태가 걸렸다. [From.라쿤걸]이라는 요상한 제목과 함께 각 국가 부서에 보내진 메일이 담고 있던 용량은 기껏해야 몇십 메가바이트 정도였지만 내용물의 무게는 천금보다도 더한 가치가 있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차원진이였다.


적성종은 아직 격퇴할 수 있다. 그 수준이 높아지긴 했어도 아직까지 쓰러트리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20년 전의 대공황 시절과 달리 지금의 포스 유저들중 상당수는 그때를 겪어온 베테랑들이다.

그러나 차원진이 문제였다.

현대 사회의 적성종에 대한 연구의 상당수는 알리언 박사의 작품이다. 그중에서 차원진 감지기는 현대 사회가 유지되는데 큰 기여를 한 물건이다.

이 별, 지구가 존재하는 차원이 아닌 타차원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차원진을 감지하여 미리 경보를 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사람들은 미리 피난하고 포스 유저들은 출동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들어 차원진은 보다 은밀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차원진 감지기로는 감지할 수 없는 차원진은 그 피해가 막심했다.


언론에는 그저 차원진 감지기의 고장으로 인한 사고라고 해뒀지만 밝혀지는데는 시간 문제였다. 제작자인 알리언 박사도  이상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못해도 반년 이상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사람들이 불안감에 휩쌓이면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결국에는 파국에 이른다. 만약 차원진 감지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사회가 있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 다른 곳도 아니고 오로지 한국에서만 최신 차원진 감지기의 설계도가 손에 들어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다행히도 메일이 보내진 곳은 전부 국가 소속이기 때문에 입막음은 쉬웠습니다. 해외로 유출하려는 자들은 긴급하게 채포하긴 했지만........"


"그게 아니라 그 설계도, 신빙성은 있느냐를 묻는겁니다"


"예. 전혀 문제가 없는 설계도입니다. 여러 자문을 구해본 결과 설계도대로 제작할 경우 표기된 성능이 나올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후우........"


이 기술은 한세대 이상의 기술이다.


애초에 지금 세계는 차원진을 통해 넘어오는 적성종에 대해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 많다. 다른 차원이라는 존재부터가 터무니 없는데 그에 대한 기술을 개발하라면 공상과학 소설 한편을 쓰는게 훨씬 빠를 정도다.


차원진 감지기조차 알리언 박사가 만들어내서 겨우 원리만 파악했지 더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메일은 역추적이 가능합니까?"


"........죄송합니다. 그건 파악이 어려울것 같습니다"


비서관의 말에 남자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과의 마찰로 인해서 골머리를 싸매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난데없는 횡재를 겪고 있었다.

유일, 독점이라는 메리트는 어디에서나 이득을 볼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에서만 한세대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으로 인해 발생할 이득이 책정하기 어렵다.

"어떻게 할까요?"

"........."

남자는 조심스레 고민했다.


그리고 메일에 쓰여 있던 한 문장에 주목했다.



[비영리를 목적으로 오로지 한국에만 설계도를 배포하니 한시라도 빨리 양산하여 적성종으로 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 해주길 바랍니다]

이것을 보낸 사람은 돈이나 명성을 바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였다.

그리고 큰것을 혼자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우선 지금 시끄러운건 일본이니까 공동 연구를 통해서 달래도록 합시다. 그리고 감지기의 양산부터. 어차피 완성품이 뿌려지면 구조를 파악하는건 쉬울겁니다. 지금은 먼저 사람을 생각합시다. 이득은 둘째로 생각하고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설비로 장난을 치면 사람 목숨 가지고 흔든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돈 보다는 명예를 추구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같이 작은 나라에서 보물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나라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가지고 있다가 쓰지도 못하고 털리느니 차라리 뿌리면서 적당한 이득을 취하는 편이 낫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비서관이 고개를 숙이며 방에서 나갔다.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이남석은 한숨을 쉬었다.


 *  *  *

신메뉴의 판매량을 살펴보니 된장 치킨이나 간장 치킨은  팔리는데 코코뱅 치킨은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라 나름 팔리는 것 같다.

어차피 제일 손이 덜 가는 메뉴라서 덤이라는 느낌이 있다.


"오늘도 수고 하셨어요"


"그래, 내일 보자"

청소 마무리까지 하고 정리를 한 뒤에 가게 셔터를 닫았다. 오늘도 열심히 일했으니 집에 가서 시온이랑 꽁냥거려야겠다.


라쿤맨으로 저지른 일은 위에서 조용조용 넘어가려는건지, 아니면 시온이 보낸 최신 차원진 감지기 일 때문에 묻힌건지 몰라도 언론에서도 조용해져서 나도 한시름 놨다.


힘든 일 있으면 부르라고 했던 조인형 팀장도 아직 연락이 없는걸 보면 눈에 띄게 강한 적성종도 나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가게를 닫고 집으로 돌아가던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어? 누구지?"


생각해보면 내 인간 관계가 너무 뜸한  같기는 했다. 적어도 친구 몇명 정도는 있었는데 죄다 대학 갔거나 군대 갔다 보니 연락이 뜸해진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저번에 일본에서 조졌던 적성종의 EMP 공격 때문에 핸드폰 주소록이 죄다 날아가서 새로 산 핸드폰에 주소라고는 우리 집이랑 시온 핸드폰, 우리 가게, 백리랑 진서애씨 전화 번호 정도인데 안그래도  빈약했던 주소록이 팍 줄어들었다.

아는 사람 번호라도 등록이 안되어 있어서 누구 전화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전화번호가 어디서 본 번호이긴 한데 받아봐야 알것 같다.

"여보세요?"


[야, 새꺄. 전역 했으면 연락을 해야지 미친놈아!]


"이 새끼 다짜고짜 놈놈 거리네. 니는 한창 군대에서 조뺑이 치고 있을거 아니냐. 나보다 군대 늦게간 놈이"


[새끼 몇달 빨리 간것 가지고 좆부심 부리네]

"야, 너랑 나랑 군번이 7달 차이가 나요 븅신아. 니가 훈련소에서 각개 전투 하고 있을 때 난 자대에서 일병 달고 있었단다 우쭈쭈"

[동반 입대 하자니까 새끼가 혼자 모집병 지원해서는]


"넌 대학 갔잖아. 난 갈 형편이 안됐고"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지 알것 같다. 야, 이거 반갑네!

나는 20년전 적성종이 처음 출현한 대공황 시절에 부모님 두분이 전부 돌아가시고 맡겨질 친척도 따로 없어서 시설에서 학교를 다녔다.


일단 당시에는 큰 일이였기도 하고 죽은 사람도 워낙 많아서 나처럼 혈혈단신 고아가 된 애들이 많아서 복지 시스템이 어느정도 갖추어져서 의무 교육까지는 크게 불편한 것 없이 다녔다.

다만 학교에서 은연중의 차별은 있었다. 시설에서 자란다는 것 자체가 부모가 없다는 뜻이고, 그건 또래 애들에게 그리 좋은 취급을 받을 일이 아니다.


가끔 괴롭히는 일진 새끼들도 있었는데. 도를 넘지 않으면 대충 넘어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귄 친구도 몇명 있었다.

그중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거의 10년간 알고지낸 친구가 있는데 그게 지금 전화를 건 강형식이다.


참고로 나보다 군대 늦게 가서 아마 이제야 슬슬 전역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쩐 일이냐? 아직 말년 되려면 조금 남지 않았어? 설마 말년휴가 포기하고 나왔냐?"

[그냥 잠깐 좀 나왔다. 혹시 좀 볼 수 있냐?]


"술 한잔 까게?"


[우리 자주 갔던 삼겹살집 있지? 거기서 보자]


"알았어"

생각해보니까 요즘 몇달동안 시온이랑 꽁냥거리면서 가게에서 장사만 하다보니까 그 틀에서 벗어나는 일은 해본적이 없다. 워커홀릭도 아니고 항상 루트가 집, 가게, 집, 가게, 가끔 가다 시온이랑 밖에서 외식. 대충 그런 형식이라서 단조로웠다.

가끔은 밖에서 친구랑 술 마시면서 고기 구워먹고 그랬어야 했는데. 하다못해 백리랑 다른데서 한잔 하기라도 했었는데......생각이 짧았네.

"나 잠깐 친구 만나서 밥 먹고 들어갈거니까. 저녁은 먼저 먹어"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밥 미리 차려놨으면 그냥 둬. 들어가서 데워 먹어도 되니까 차린 김에 그냥 한끼  먹지 뭐"

시온한테는 미리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를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성인이 되고 나서 술 마시러 애들이랑 자주 갔었던 삼겹살 집은 내가 살던 시설이랑 가까워서 낯익은 도로를 지나가는 기분이 꽤 즐거웠다.

부모 없이 시설에서 자란 것이 남들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태어나면서 부모님이 없던게 한두번도 아니고 어지간한 출생은 크게 감흥 없었다.


조금 오래 되어보이는 숯불구이 집. 삼겹살 말고 여러 부속고기도 팔고 있어서 술 한잔 걸치기 좋은 집이다. 시간도 적당한 때라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야, 여기야, 여기"

"군인 새끼가 머리 그렇게 길러도 되냐?"


"말년이잖냐. 옆머리만 밀고 전투모 쓰면 안걸려"

"주문은?"


"일단 삼겹살 둘에 돼지 껍데기 하나 시켰다. 아, 이모! 여기 소주 한병에 잔 두개만 갔다 주세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화로에 숯불이 들어와 있어서 뜨끈뜨끈 했다.


주문했던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가 나오고 바로 불판 위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너 뭐하고 지내냐 요즘?"

"그냥 저냥 장사 하나 하고 있어"

"올, 너 요리 잘하니까 그걸로 나갈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쪽이냐?"

"요식업인건 맞지"


치킨도 먹는거니까 치킨집고 요식업 맞다.

소주의 병뚜껑을 까득! 하고 따서 서로의 잔에 따른다. 가볍게 건배를 나누고 원샷. 소주 특유의 알콜 냄새가 올라온다.

"크으, 술 먹어본지 꽤 됐는데 소주가 달다"

"님 허세 노노. 군대가 사람을 이렇게 망쳐두네"

"뭐 임마. 니도 몇달 전까진 군인이였으면서 뭘 그러냐"

"난 짬내  빠졌다. 예비군 1년차랑 현직 군인이랑 같냐?"

"개새꺄!"

"어허, 씁, 못써"


지글지글,  구워진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쌈장을 위에 대충 바르고 마찬가지로 구운 마늘을 위에다 올려서 겉절이 하나 올리고 싸먹는다.

고기에 마늘 까지는 기본이지만 겉절이는 선택 사항. 하지만 이집 겉절이는 맛있어서 이렇게 먹는다.

"다른 애들은? 상철이나 종수는 연락 했어?"

"두 새끼 다 지금 꽐라가 되서 전화 하다가 끊었어"


"아주 그냥 캠퍼스 생활 오지게 잘 하고 있나보다. 대학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너도 가지 그랬냐"


"내가 돈이 있어 뭐가 있어. 그래서 안갔지"


사실 시온이 있으니 지금 가라고 한다면 갈 수 있다. 성적이 안되고 시온이라면 도서관 하나 새로 지어주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학은 가고 싶지 않다.

어차피 가봤자 내가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건 많이 없다. 애초에 난 문과다 문과. 이과로 간다면 1학기 다니다가 진도 못따라가서 자퇴할 것이다.

대충 감으로 느끼는건 할  있는데 이론은 머리가 안되서 못하겠더라. 애초에 나는 재능이 없는걸 시간과 경험으로 때운거라 마찬가지로 뭔가를 배우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몇년 배운걸로 어림도 없을껄.

"상철이랑 종수 왔으면 좋았을텐데. 딱 학교 다닐   멤버 아니냐"


"모여서 학교 도서관 컴퓨터로  돌리다가 걸려서 출입 금지 먹기도 했었지. 기억 나?"


"아 시바 그때 내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종수가 부추긴거 아냐"


"옆에서 조용히 책 보던 난 뭐였는데 그럼?"


"개뿔이, 삼국지 만화책 보던 놈이 무슨"

"만화책도 책이야"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한다. 고기가 익고 안주가 생기니 점차 술을 마시는 속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옛날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때를 떠올리며 추억을 되새겨본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대학생 정도의 나이지만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항상 같다.

"야,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던 일진 새끼들 기억나?"

"당근빠따지 시발. 내가 자잘하게 기분 상한건 금방 잊어먹지만 나한테 패드립친 새끼들은 다 기억나지"


반에 한두명씩은 있다던 일진. 우리 고등학교 때도 있었다.

 성격이라면 그런 일진 새끼들 조지고도 남았지만 그때 나는 부모도 없는 시설 출신의 고아다. 내가 '직접' 조졌다가는 망하는건  인생 뿐이다.


그때는 시온을 만날지 모르고 있었던 때니까 최소한 내 인생 살길은 만들고 싶어서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

지금? 시온이 있는데 내 인생이 알바냐!!

"너 말고 시설 사는 애들 몇명 더 있었는데. 그 새끼들 인성 빻아서 그 애들한테도 패드립치고 다녔잖아"

시설 다니는 부모 없는 애들은 돈이 없는걸 아니까 삥 뜯진 못해도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고 다녔다. 침을 뱉는다거나, 빵셔틀을 시킨다거나, 그런 식으로.

게다가 요즘 일진들은 그냥 폭력만 휘두르는게 아니라 공부도 잘해서 교사의 신임도 얻고 있는 부류다. 그때 일진 새끼들은 4명이였는데 그중 한명의 부모가 어디 기업 사장인가 그랬을거다.

개념도 없지, 빽이 있어서 처벌도 힘들지, 선생님은 그놈들 편이지. 아주 그냥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 놈들의 공화국 시절이 딱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나와 형식이는 다른 반이였다. 같은 반이였던 애는 상철이 쪽이였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형식이가 놀러와서 수다 떨고 놀곤 했는데 다른반 애가 오니까 형식이가 타겟이 된 날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개빡친다니까. 그 새끼들 그 꼴이 된거 존나 후련해. 어떻게 죽지도 않고 딱 그렇게 됐냐. 그치?"

"........그러게"

나는 슬쩍 웃었다. 모르는 척 연기하는게 쉽지가 않다.

내가 당하는건 무시하면 그만인데  주변 사람이 당하는건 예외다. 내가 직접 패면 결국 내가 피해를 보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별건 아니고 그 새끼들이 밤에  마시고 어디서 난건진 몰라도 오토바이 타고 달릴 때 바퀴에 능력을 써서 급정지 시켜줬다.

미성년에 음주운전, 무면허. 트리플 크라운, 삼관왕을 달성하고도 모자라서 안전장비 미착용으로 헬멧도 안썼다.


오토바이 한대에 두놈씩 타고 있었는데 급정지한 오토바이에서 사출된 놈들이 땅을 구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후에 어떻게 됐냐고?


죽진 않았다. 죽지는. 두놈은 식물 인간이 되서 병원에 누워 있고 한놈은 반신 불수가 되서 평생 휠체어 신세에 한놈은 다리 하나랑  하나를 절단했다.

뇌사면 몰라도 식물인간은 아직 살아있으니까 세이프. 한놈도 죽은 녀석은 없다.

"원래 세상은 착하게 살면 복이 내리고 나쁘게 살면 벌이 내리는거야"

"뭐야, 너 그런거 믿었냐?"


"그런 그 새끼들 그렇게 된건 어떻게 설명해?"

"하긴 그러네. 자, 건배"

쨍, 하고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이 사건 빼면 학창 시절에 능력을 쓴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가 죽지도 않았으니 살인도 아니고 경찰도 무면허에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난 놈들을 크게 조사할 필요성도 없었으며 놈들도 평생 고통받을 것이기에 당사자 빼고는 전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나저나 한가지 의문이 있는건, 형식이가 왜 나를 불렀냐는 것이다.

"니는 말년에 부대 없을거라고 휴가 쟁여놓는다 하고서는 아직 한달 넘게 남았을텐데 벌써 나오냐? 이번은 몇박 몇일이야?"

"4박 5일 나왔어"

"연가 쓴거야? 짧게 나왔네? 너 입대하고 신병 휴가 빼고 나온적 없었지 않냐?"


보통 군인에게 주는 휴가는 30일 정도에 개인 포상까지 합치면 개인차는 있어도 어지간히 고문관이 아닌 이상 며칠 정도는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상점 제도가 있어서 휴가를  두달 가까히 나가봤다.


얘도 태권도 포상이니 보일러병 포상이니 뭐니 받아서 40일은 넘게 있을텐데 말년 생각해도 4박 5일은 좀 짧다.

"나한테  할말 있냐?"


"........."


정곡이구만.


하지만 쉽게 말하지 않는걸 보니까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인  같았다.

"아냐, 됐어.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별일 아닌데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말년병장이 난데없이 계획 없는 휴가를 나오냐? 상철이랑 종수도 불러다가 멍석말이 하기 전에 불어"

"진짜 아니라니까. 너한테 하기 힘들기도 하고........"

"일단 뭔지 말부터 해봐, 생각은 그 다음에 하는거고. 걱정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 그러더라. 내가 도와줄 수 있는거면 도와줄테니까"

"........"


형식이는 한숨을 쉬고 안주도 먹지 않고 소주만 몇잔을 들이켰다.

술김이라도 빌리려는건지, 나는 진득하게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취기가 올라올 무렵. 형식이가 말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아저씨가?"

내가 형식이랑 불알친구가 된 이유 중 하나는 형식이네 가족 덕분도 있었다.

형식이네 집은 부모님이랑 형식이 할머니까지 해서 네명이 사는 집인데 나도 종종 놀러가고 거기서 자주 밥도 먹은데다 나도 자식처럼 대해주셔서 반쯤 그집 가족이나 다름 없었다.

방학 때, 할일 없이 시설에서나 지내야  무렵. 나를 데리고 나와서 같이 바다로 여행도 갔었다. 형식이네 집이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좋은 가정이였다.


"간암이래. 다행히 이식만 하면 살 확률이 높아서 수술 하면 된데"

"간은 누구거 쓰고?"


"내거 쓰면 돼. 그거 검사 때문에 이번에 휴가 나온거야"

 이식은 보통 가족이 확률이 높다. 피가 섞였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듯이 이식 수술의 경우에는 가족의 것이 가장 거부 반응이 적다.


간은 원래 재생력이 높은 장기니까 이식만 하면 회복도 빠르고 직계 가족의 간이라면 거부 반응도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문제가 있다.

"돈 필요하구나"


"......응"


결국에는 돈이다. 어지간한 병원 다인실 입원비도 병원마다 차이가 있지만 하루 몇만원에서 몇십만원이 되기도 한다. 1인실로 넘어가면 하루 몇백만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수술비. 간은 형식이 것을 쓴다 하더라도 수술비만 수천만원은 나올거다.

자본주의 사회인만큼 돈이 있으면 편하지만, 없으면 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결국에는 인간이 정한 가변적 가치일 뿐인데 말이다.

"아저씨 쓰러진지 얼마나 됐어?"

"한 일주일 쯤 됐어"

"시발, 그걸 나한테 왜 진작 말 안했냐?"


"니는 전역한거 나한테  왜 안했냐?"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가족처럼 대했지만 집안의 우환을 나한테 알리지 않은 형식이나 가족처럼 생각했지만 더 소중한 가족과 함께 있느라 소홀히 했던 나나 둘다 병신 새끼는 병신 새끼다.

"아저씨는 지금 입원해 있어? 어디 병원이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거기야"

"나중에 병문안 가자"


일단  문제부터 해결 해보고.

 계좌에는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번 돈이 들어 있지만 기껏해야 몇달동안 번 돈이라  단위로 있는건 아니다.


게다가 형식이네 집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수술비 마련하려면 집 팔고 뭐 팔고 그래야 할 판이다. 가장인 아저씨가 쓰러졌으니 수입도 없을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봐"

일단 집에 전화부터 걸었다.


첫번째 착신음이 끊어지기도 전에 시온이 전화를 받았다.


[어쩐 일입니까?]


"미안한데  계좌로  좀 보내줄 수 있어?"


[무슨 일 있습니까? 깽깞 물어야 하는거라면 저희 김 변호사님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듣긴 했는데 만나본 적이 없네 그 사람. 아, 그게 아니고 돈 필요해서 그래"

[얼마 정도 필요합니까?]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할것 같으니까........1억  있어야 하려나"


수술비랑 입원비. 그리고 생활비를 생각하면 1억에 내 통장 잔액 정도 더해서 1억 5천 정도 있다. 그거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거다.


[10억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째째하게 그게 뭡니까. 어디가서 제 남자가 쪼잔하게 돈 쓰는 꼴 못봅니다. 블랙 카드 팍팍 긁고 현찰 박치기 팍팍 하십시오. 덕질만 하면 되서 돈 달라 소리 안하던 당신이니까 이번 기회에 돈 좀 쓰십시오]

 즉시 내 핸드폰에 계좌로 10억이 입금됐다는 메세지가 떴다. 전산 계통 관련해서 초고속인 우리 마누라 최고다!


"고마워. 나중에 들어가서 이야기 할께"

[그  다 쓰기 전까진 각방 쓸겁니다]


"농담이지?"


[진담입니다]


이 돈 그냥 형식이  줘야 하나 심각한 심각한 고민이 생겼다.


전화를 끊자 형식이가 얼떨떨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 누구야?"


"우리 마누라"


"뭐 시발?!"


아, 맞다. 결혼 했다는 이야기 안했었지. 그러고 보면 내가 결혼 했다는 이야기는 내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한적이 없었다.

시온의 외견이 그래서 결혼식도 못올리기 때문에 초청도 힘들고 서류만 내서 결혼한 터라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결혼 했다고?! 언제?"

"아, 전역하고 나서 거의 바로"

"시발, 너 여친 없었잖아! 사귀던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결혼 했어?"


"옛날에 알던 사람이 있어서. 인연이 되서 결혼 했어"


"결혼식은?"


"안올렸어. 사정이 있어서"


"아오,  개새끼. 결혼 했는데 부랄 친구한테 말도 안하냐. 십새끼, 그렇게 안봤는데. 와, 배신감 느끼네"

"아무튼 우리 마누라가 부자라서 돈  융통 했거든. 지금 보내준  다 쓰기 전까지는 각방 쓴다고 하니까 오늘 이거 나랑 같이 다 써야 된다, 너?"

"얼마나 들어왔는데?"

나는 말보다 보는걸 추천 해주었다. 핸드폰에 내 계좌로 10억이 들어왔다는 문자 메세지를 보여주었다.


0의 갯수를 새보던 형식이의 안색이 하얘졌다.  때문에 붉었던 안색이 희게 변하는걸 보면 사람도 카멜레온이 될 수 있는 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앗, 다윈, 당신은 도덕책.

"10억? 진짜, 10억?! 너네 제수씨 뭐 하시는데?"


"그냥 주식 투자에 땅도 있는 건물주야. 나도 건물 빌려서 치킨 장사 하고 있고. 근데 이 새끼가 어디서 제수씨야.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제수씨"


"팍씨!"


나이는 같아도 생일은 내가  빠르다. 내 생일은 10월이지만 형식이는 11월이다. 한달 차이긴 해도 일단 내가  빨리 태어났다.


애초에 환생자 나이로 따지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기껏해야 같은 초월자 수준이 아니면 없을거다.


"아저씨 수술비는 걱정마 임마. 자, 그냥 아예 내 카드 줄께 이거 가져가"

"야......."


"수술비만 몇천 나올텐데 나한테는 기껏해야 1,2백 빌리러 왔겠지. 그나마도 미안해서  못꺼낸거고. 내가 니 성격 다 안다. 10년지기 친군데 그것도 눈치 못채겠냐"

내가 넉넉한 형편이 아니였어도 뭔짓을 해서도 돈을 줬을 것이다. 설령 포스 유저로 국가 소속이 되어 뛴다 하더라도 말이다.


"시설 밥 맛없는거 알고 너네 아저씨가 밤에 몰래 치킨 사다 준거 나 아직도 기억 난다. 밤에는 외부인 출입 통제니까  너머에서 치킨 받았는데"


동정이라도 좋다.  동정 하나 품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품지 못할 사회로 변하고 있기도 하다.


팍팍한 사회에서 남에게 배풀 수 있다면 마음만은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질적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보다 중요한건 정신적인 것이다.

"설날 때는 너네 할머니가  떡국 한그릇 먹여야 한다면서 데리고 왔던거 기억 나냐? 떡국보다 그때 해주셨던 갈비찜을 더 많이 먹었었어"


형식이는 상철이나 종수와 달리 10년지기 친구다.


그리고  10년 동안 그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까지 좋은 기억만 남아 있다.


"학교에서 소풍 갈  너희 어머니가 내 김밥까지 싸준 것도 있었어. 시설에서는 그냥 꼴랑 3000원 챙겨줬는데 말이야"


10억이 대수냐. 시온이 없었어도 장기 팔아서 돈 마련 해줬을거다.

"가서 아저씨 수술비랑 입원비 일시불로 긁어. 아, 아저씨 병실은 1인실로 바꾸고. 생활비도 필요할테니까 필요하면 빼다 써. 너도 이식 수술 하면 당분간 요양해야 하니까  많이 필요할거야. 돈 모자라면 나한테 다시 연락 하고"

"야......씨발......고맙다......"

"사람이 착하게 살면 복 받아야지. 너네 집은 복 받을만 해"


문명의 발전과 사람의 인심은 반비례한다. 물질주의 사회가 되어갈수록 이기주의적인 성향만 강해진다. 물질이 풍족하면 마음이 가난하고, 물질이 가난하면 마음이 풍족하다.

그런 와중에도 착한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 있다. 황무지에 싹 하나가 새파랗게 나 있다면 나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거, 내가 막노동 해서라도 갚을께"

"야, 친구 사이에 돈 문제는 끼워넣는거 아니라고 했다. 괜히 마음 상하는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냥 준걸로 하자"

"야!"


"내가 돈은 버려도 친구는 안버려. 우리가 얼마나 알고 지냈는데 그  하나 못주겠냐. 내가 넉넉한 형편이 아니였어도 장기 팔아서 돈 마련해 줬다. 사람이 받은만큼 돌려줘야지. 안그러냐?"


"시발 새끼.......존나 고맙다. 씨발......아, 욕 밖에 안나오네. 진짜......."


형식이는 울면서 내가 준 카드를 받았다.


내가 돈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즉석해서 몇천만원을 빌릴 수 있는 일이 흔하진 않을거다.

.........어? 생각해보니 참치 한마리에 몇억 하지 않나?

문득 아직도 냉장고에 잔뜩 남아 있는 동원이의 대뱃살을 떠올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냥 참치 잡이 어선 타는게 돈 버는건 빠르지 않을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