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라쿤 가면을 쓴 남자가 3미터에 달하는 참치를 통으로 휘두르며 적성종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이 문장에서 말이 되지 않은 부분을 찾으시오(5점).
정답은 빈칸으로 내면 된다. 전부 사실이니까.
"어, 저기 그때 라쿤맨씨 맞죠?"
"기자 아가씨는 왜 여기 있어? 촬영?"
"아, 네........"
"기막힌 우연이네"
동족의 죽음을 파악했는지 사방에서 도마뱀 인간 적성종들이 키익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전부 도망가는 중이고, 그나마 가까운 인간은 지금 자리에 있는 그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거기에 동족의 죽음으로 적대감이 높아져서 죽여야 할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
"그런데 왜 참치?! 왜 참치로 싸워요?!"
"오다 주웠다"
"부산이라고 부산 쿨가이 같이 굴어도 이상하거든요?!"
냉동도 아니고 생 참치. 그것도 통짜. 3미터짜리 거대한 참치다. 지금도 '머임? 대체 머임?'하는 눈빛으로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소리 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눈앞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톱과 이빨을 내세우고 철판을 긁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후우웅!!!
묵직한 참치가 풍압과 함께 휘둘러졌다. 참치의 꼬리 끝 부분의 얇은 부분을 잡았기 때문에 손잡이로서 충분했으며 휘두를 때의 원심력으로 인해서 꼿꼿하게 펴진 참치는 육중한 둔기가 되어 적성종 두마리를 동시에 아작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서희 리포터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황급히 정수의 어께를 두드렸다.
"뭐, 뭐해?! 빨리 찍어! 찍어!"
"특종이기는 한데 여러가지로 특종인데요 누나!"
2톤에 가까운 3미터짜리 참치를 휘두르며 적성종을 격파하는 라쿤 가면을 쓴 남자. 어딜 봐도 특종이 될 거리가 한가득이다.
능력으로 강화한 참치는 그 강도가 같은 무게의 강철 이상의 단단함을 자랑했다. 물리적 충격을 경감, 혹은 무효에 가깝게 무시하는 적성종을 으께고 박살내며 종횡무진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장판파의 장비 같이 홀로 서서 대군을 막아내고 있는 모습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볼법한 액션을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나 크고 아름다운 무기는 예로부터 남자의 로망중 하나였다.
그게 참치라는건 둘째 치더라도.
"예로부터 냉동참치는 고인물의 상징이였죠"
"애초에 저거 냉동이 아니라 생물이잖아. 그런데 어디서 그러든?"
"게임에서요"
"현실은 게임보다 더 판타지 같은데 이거 방송으로 내보내도 믿기나 할까?"
"저희만 찍는것도 아닌데요 뭘"
상황이 너무 현실감이 없으면 도리어 침착해지는 법이다. 두사람은 가벼운 농담을 날리면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뭐, 뭐야?"
"참치? 왜 참치가......"
사람들은 도망치던 와중에 적성종을 차례로 격파하며 호쾌하게 전진하는 라쿤맨을 보고 정신을 차린 사람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그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포스 유저가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TV속에서나 봤지 그들에게는 먼 세계의 일이다. 눈앞에서 그런 장면이 펼쳐진다면 촬영을 하는게 당연하다.
이윽고 소형 적성종은 전부 어디 한군데가 박살나거나 으께서 죽었다. 남은건 아직 포스 유입이 끝나지 않은 대형 적성종 하나 뿐이다.
크기는 일본에서 나타났던 늑대형 적성종 보다 작지만 외피는 훨씬 단단해 보이는 재질로 되어 있었다. 설령 포스 유입이 끝나 포스 유저가 상대하기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펙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외피에 흠집하나 낼 수 없을 것이다.
"너 하나 남았구나. 일본에서 봤던 새끼보다는 방향성이 다르네. 그놈은 전투력은 높아 보이는데 맺집이 약해서 말이지. 니는 삼일 밤낮으로 후려패도 멀쩡할것 같네"
물론 진짜로 삼일 밤낮으로 패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크롹!"
기습적으로 놈이 입에서 무언가를 뿜어냈다. 짙은 푸른색과 녹색이 섞인 꺼림찍한 진액은 그를 향해 뿜어졌다.
한순간의 기습이지만 최악은 몸을 살짝 비틀며 물러나는 것으로 진액을 피해냈다. 바닥에 떨어진 진액은 모래사장의 모래를 녹여버리며 위협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산성액? 야, 침이 산성인건 에일리언 특징 아니냐? 아, 그건 피가 그런거였던가?"
최악이 참치를 휘둘렀다. 원심력과 무게가 더해진 참치는 막대한 물리적 충격을 품고 대형 적성종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후려쳐 올렸다.
콰아아앙!!!
충격음과 함께 미사일에 직격하더라도 데미지 없이 무사할 수 있는 놈은 그 일격에 목이 꺽이며 허공에서 두바퀴 회전했다.
"어........."
"어어......?"
한눈에 봐도 수십톤에 달하는 거대한 생물이 공중 회전을 하는 광경은 지극히 현실감이 없었다. 겨우 몇초 정도였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몇분이나 허공에서 회전하는듯 보였다.
이내 거대한 몸뚱이가 모래사장 위로 떨어졌다. 고운 모래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진동이 땅을 울렸다. 뒤로 엎어진채 일어나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대형 적성종은 입에서 피 같은 보라색 액체를 꾸역꾸역 뱉어냈다.
"한국에 온걸 환영한다 개새끼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놈의 배 위로 올라탄 최악이 참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두유노 강남 스타일? 두유노 김치?"
"꿔어어어어어어!!!"
"모른다고? 그럼 뒤져야지 한알못 새끼야"
그가 참치를 양손으로 잡았다. 흡사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는 전사가 된 듯한 모습이였다. 물론 무기는 참치지만.
목표는 놈의 머리. 압도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상황에 도망쳐야 할지, 인간을 죽여야 할지 모르는 괴물은 마지막으로 뭔가를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쾅!!
참치의 일격이 놈의 오른쪽 눈을 강타했다. 동시에 그 눈깔이 터져나가며 체액을 뿜었다.
쾅!!!
이어서 내려친 공격이 놈의 턱을 후려쳤다. 강철도 씹어먹을 수 있는 악력을 가진 턱이 뜯겨져 날아갔다.
콰앙!!!!
세번째 공격이 놈의 목을 후려쳤다. 단숨에 척추가 으스러져 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콰아아앙!!!!!
마지막 일격이 놈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꽂혀들어갔다. 두개골을 부수고 안에 있는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게 해운대 해수욕장을 공포에 몰어넣은 대형 적성종의 최후였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힘이 빠져서 늘어졌다. 비교적 깔끔하게 죽였지만 엉망이 된 머리에서는 온갖 구멍에서 진액을 꿀럭이며 토해냈다.
후웅!
참치를 한번 휘둘러 털어내고 어께 위에 걸친 최악은 놈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영웅이 귀환하는 모습이였지만 그의 어께 위에 있는 참치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뒤늦게 무슨 일인가 싶어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가 무기로 쓰던것이 참치인것을 알고 경악했다.
최악은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가지 않고 카메라로 찍고 있었던 진서희 리포터 쪽으로 다가왔다.
"기자 아가씨. 혹시 그거 좀 있어?"
"어, 어떤거요?"
그거가 뭘 말하는거지? 담배? 술? 아니면 다른 뭔가?
포스 유저 수십과 군대가 모여서 겨우 죽일 수 있는게 대형 적성종인데 그걸 단신으로, 그것도 참치로 죽인 남자가 별볼일 없는 기자에게 달라고 할만한게 있을까?
"간장이랑 와사비, 혹은 초장 같은거"
".......예?"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상이 이제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멀어지는것을 느꼈다.
* * * *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사장 한가운데서 난데없는 참치 해체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좋은 곳으로 가거라 동원아"
"어.......혹시 그 동원이라는게 참치 이름인가요?"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타고 왔거든. 짧은 시간이였지만 정들어서 이름 붙여줬지"
참치 이름이 동원이면 통조림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드는 이름이다.
최악은 도망간 사람이 놓고간 칼 하나를 들고 빠르게 참치를 해체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뼈를 바르고, 살을 부위별로 잘라내는 작업은 숙련자라도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그는 막힘없이 술술 해내고 있었다.
머리 하나만 하더라도 수십킬로에 달하는데 그것을 한손으로 가볍게 들어 옮기고 뼈에 붙은 살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발라낸다. 2톤에 가까운 참치 한마리가 완전히 해체되어 뼈와 살이 분리되는데는 고작해야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저, 저기! 인터뷰 부탁드려도 될까요, 라쿤맨씨?"
"잠깐 정도면 해도 돼"
"아, 네. 그럼 먼저.......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을 막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라쿤맨씨도 이곳으로 피서를 오신건가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드니까요"
"피서는 아니고, 잠깐 일본에 갔다가 온건데?"
"......일본이요?"
"응, 일본 갔다가 수영해서 해운대까지 온거지. 거리가 좀 있었긴 하지만 하루 정도 걸렸어"
"일본에서 수영해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아마 내일쯤이면 일본 쪽에서도 뭔가 뉴스가 올라올껄?"
부위별로 분리해놓은 참치를 한군데 쌓아두고, 그가 손을 뻗어 살짝 능력을 사용한다.
그가 쓸 수 있는 '간섭'이라는 능력은 깊이는 떨어질지 몰라도 그 범위만큼은 누구보다도 넓다. 설령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계통의 힘이라도 겉핥기 정도면 쓸 수 있다.
한순간 주변의 기온이 내려간듯 서늘하게 식었다. 그와 동시에 잘라놓은 참치가 얼어서 적절하게 냉동 상태가 되었다.
"아! 라쿤맨씨, 이건 포스 특성을 이용한 능력인가요? 동결? 온도 조절? 냉동? 특성이 어떤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간섭'인데?"
"간섭이라면,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포스 특성이 아닌가요?"
포스 유저의 포스 특성은 각자의 성향만큼 많은 수가 존재한다. 본인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특성도 있으며 여러 사람들이 다룰 수 있는 범용적인 특성도 존재한다.
범용적인 특성의 예를 들어보자면 우선적으로 '강화'. 신체를 강화하여 포스 유저가 일반 사람보다 강한 육체능력을 보이는 것이 이 특성 덕분이다. 순수하게 가이아 포스를 운용해서 육체를 강화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강화의 특성을 이용한 육체 강화는 그것보다 한단계 더 효과가 크다.
최악이 말한 간섭도 마찬가지. 어느 방향성으로도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습득시키기 위해 따로 갓 각성한 포스 유저의 교육 과정이 있을 정도로 범용적이다.
"내 능력.......아니, 특성은 두개야. 그중 하나는 그냥 '간섭'이고. 범용적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쓸곳이 많으니까"
"나머지 하나는 뭔가요?"
"그건 패시브 스킬 같은거라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야. 이건 비밀로 할까"
"방금 그건 어떻게 하신건가요? 간섭 특성으로 온도를 낮추는 능력을 쓸 수 있는건가요?"
"그냥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돼"
"대답해주실 마음이 없으신거죠?"
"참치회 한입 드쉴?"
최악이 참치를 냉동시킨 방법의 원리는 분자 활동을 약간 늦춘 것으로 온도를 낮춘 것이다. 기본적인 물리학 지식만 있다면 응용 가능한 기술이다.
비슷한 특성으로 이와 같은 전법을 사용하는 마스터급 포스 유저가 있다. 하지만 포스 유저가 아닌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원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가져온 초장에 미리 빼둔 참치회를 몇점 썰어 찍어먹은 최악은 회 특유의 쫀득한 식감과 참치의 기름진 맛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난 참치회는 그렇게 안좋아 하는데 이건 좋네. 난 연어쪽이 더 좋아서 참치보단 연어를 더 많이 먹거든"
"아, 예.......그러면 라쿤맨씨. 본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단신으로 대형 적성종을 격퇴하시는 실력을 보면 포스 유저 중에서 손꼽힌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그거면 대충 마스터급? 일본에 있던 마스터급 유저도 때려눕혔으니까 그정도는 되겠지"
"예?"
지금 뭐라고 했지? 일본에 있던 마스터급 유저도 때려눕혔다고?
강함의 문제 이전에 이렇게 되면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로 번진다. 애초에 파견이 아닌 이상 해외로 자국의 포스 유저가 빠져나갔다는 것은 큰 문제다.
"........여러가지로 불법적인 일들을 많이 하신것 같은데. 그 정도면 자수하셔야 하지 않나요? 애초에 미등록 포스 유저시죠?"
"뭐 어때. 내가 나쁜 짓도 하긴 했겠지만 좋은 짓도 했는데 뭐. 사람 구하고, 적성종 죽이고. 다른거 다 빼고 오늘 구한 사람만 해도 수만명은 되겠다. 그치?"
"그렇게 말하면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잘한 것과 못한 것은 구분해야죠"
"이거 인터뷰 아니였어?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는거야 기자 아가씨?"
"앗......"
별거 아니라는듯 마이페이스로 이야기 하는 주제에 내뱉는 말마다 펑펑 터지는 그로 인해서 조금 감정적으로 대했다.
그녀는 조금 진정하고 다시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러면 정체를 밝히실 마음이 있으신가요? 가면을 쓰시고 신비주의 히어로같은 일을 하고 계시지만. 얼굴을 드러내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많습니다. 다음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금과 같이 사람들을 위해서 합법적으로 나서시는건 어떤가요?"
우뚝, 하고 최악의 손이 멈췄다.
정체를 드러낸다. 일부러 얼굴을 숨기고 활동했는데 정체를 드러낸다는건 많은 디메리트를 지니게 된다.
우선적으로 그의 정보가 퍼지고 가족에 대한 사실도 알려진다. 호의를 가지고, 적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다.
진서희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으면서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내가 얼굴을 숨기는건"
누군가가 위험해진다는 것 이전에 자신이 영웅이라는 것에 걸맞지 않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얼굴로 영웅이라고 나서지 않는다.
그는 환생자다.
100년 남짓한 인간의 삶을 수십번 반복해 오면서 여러가지에 무감각 해졌다.
자신을 향하는 모욕도 감내할 수 있어졌다.
인간을 좀 더 자비심 있게 볼 수 있어졌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의미가 없어졌다.
많은걸 얻었지만 반대로 많은걸 잃었다.
"내가 영웅이 될 수 없는걸 알고 있어서라서 그래"
"무슨 뜻인가요?"
"원래 내 성격이 워낙 개차반이거든. 그래서 가면을 쓴 동안은 적어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도울 수 있으면 도우려고 그런거야"
"그런거면 가면을 벗고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가면 써서 이 정도지. 가면 벗고 돌아댕기면 아주 그냥 개판에 개판을 벌이고 다닐껄?"
최악은 비닐에 부위대로 잘라놓은 참치를 넣고 두사람에게서 빌린 가방에 다시 넣었다. 적성종을 쓰러트리고 해체하는 것까지 20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슬슬 경찰이던 군대던 뭐던 올 것 같은데 난 이만 빠른 퇴근을 해야지. 요즘 52시간 근무라서 칼퇴근이 의무지?"
"저희는 그런거 없는데요"
"방송국 기자들도 할일이 많아서 힘들겠네. TV에서 나올 때 응원해줄께. 난 집에서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간다"
"잠깐만, 결혼 하셨......?!"
가방을 들고 일어난 그는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듯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멀리 달려가면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참치 몇토막 남겨놨으니까 사이좋게 먹어! 회쳐먹던 구워먹던 맛있을껄!"
두사람은 그가 남기고 간 참치 토막을 보았다.
어디 기준으로 몇토막인지는 몰라도 팔뚝만한 길이에 두툼한 두께를 가진 붉은색 기름진 참치살이 반겨주고 있었다. 최악에게 빌려준 가방이 큰 가방이기는 해도 2톤에 가까운 참치 전부가 들어갈 만큼 크진 않았다.
그래서 남은 참치 대부분이 그들의 몫으로 남았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게 구워 먹어도 좋고 그냥 먹어도 아주 쫀뜩쫀득한 식감의 이미지가 입안에 감돈다. 마침 옆에 간장과 초장도 있었다.
"통은 크네요"
"그러게"
두사람은 일단 생각은 나중에 하고 배터지게 참치부터 먹기로 했다.
* * * *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가는데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인 교통수단은 역시 전철이다. 그것도 KTX. 2시간이면 편도로 도착할 수 있다.
원래 최악도 가지고 있는 카드로 표를 사서 서울까지 올라갈 생각이였지만 그 방법은 쓸 수 없었다.
"아오, 이 씨벌놈의 개새끼는 뭔놈의 EMP가 카드도 망가트리냐"
일본에 나타났던 대형 적성종의 전자기파는 EMP와 비슷한 효과를 내서 전자기기를 망가트렸지만 일반적인 EMP와는 다르게 그 여파가 카드의 마그네틱 부분까지 망가트려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재발급 받으면 되겠지만 그것 또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카드를 발급 받는 것보다 그가 직접 달려서 서울까지 달려가는게 더 빠르다.
지갑에 현금은 있지만 환전을 못해서 일본에서 쓰던 엔화가 대부분이였으며 원화는 기껏해야 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만원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갈아타도 몇번은 갈아타고 시간도 몇시간은 걸릴 것이다.
일본에서 부산까지 수영해서.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달려서.
난데없이 철인 삼종경기라도 벌이는 듯이 몸으로 때우는 행각은 겉보기에는 유쾌했지만 본인이 되면 마음 속에서 깊은 빡침이 올라오고 있었다.
특히나 신혼여행 중에 그런거라서 더욱.
신혼 여행은 신혼여행대로 망치고, 몸은 몸대로 고생하고, 휴대폰이나 카드를 못쓰게 된 것까지 생각하면 참는게 용하다.
"들어가면 차가운 참치회에 맥주 한잔 마시고 시온 끌어안고 자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터져서 뭔짓을 저지를것 같다. 분별력은 있기 때문에 나쁜짓은 안하겠지만 다짜고짜 적성종 박멸한다고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적성종 찢어버리고 올지도 모른다.
바다보다 육지 쪽이 장해물이 더 많아서 달리는데는 불편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육체능력 앞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중간에 만나는 산도 10분도 되지 않아 가볍게 넘어가고 평지에서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과 나란히 달릴 정도로 빠르게 달려서 돌파했다.
중간중간에 그를 목격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선따위 무시했다. 어차피 들키면 들키는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얼마 걸리지 않아 서울까지 도착한 최악은 조심스럽게 가면을 해제했다. 얼굴을 덮었던 라쿤 모양의 가면은 다시 헤드셋으로 돌아가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름이기 때문에 해는 아직 떠 있어서 햇빛을 비추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질 것 같았다. 슬금슬금 퇴근하는 사람들의 인파 사이에 숨어들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아, 먼저 와 있었네?"
"저야 어제 도착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까지 먼것도 아니고 오는데 하루가 넘게 걸릴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다. 아, 참치 가져왔어"
"와!"
그가 묵직한 참치가 든 가방을 건냈다. 안에는 시원하게 냉동된 참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참치 특유의 붉은 살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내가 반가운거야. 참치가 반가운거야?"
"당연히 참치입니다"
"......진짜?"
"당신한테도 큼직한 참치가 있지 않습니까?"
시온의 시선이 그의 다리 사이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최악은 슬쩍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건 나중에 하고 우선 참치부터 먹자. 집에 맥주 있어?"
"맥주랑, 초장이랑, 간장이랑, 전부 준비 해뒀습니다. 김밥으로 해먹으려고 김도 사왔습니다"
"크, 참치 듬뿍 들어간 김밥이라니. 좋지. 아, 참치살을 잘게 썰어서 덮밥으로 해먹어도 좋은데"
"따끈한 밥, 찬밥. 어느쪽이 좋습니까?"
"둘 다 있어? 준비성 한번 철저하네"
두사람은 같이 상을 차리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메인은 역시 참치. 회로 먹을 준비도 하고, 구워 먹을 준비도 하고, 그 외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을 준비해서 오늘밤은 참치로만 배를 채울 생각으로 성대하게 상을 차렸다.
"내가 핸드폰도 안되서 뉴스를 못봤는데. 나에 대한 소식은 나왔어?"
"아직입니다. 일본쪽에서도 조용해서 나오진 않았습니다. 아마 윗선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듯 싶습니다"
"부산 쪽 이야기는?"
"그건 아마 막 뉴스에 나올겁니다"
TV를 키면서 캔맥주를 땄다. 치익,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맥주를 목으로 넘긴다. 갈증이 한번에 해소되는 듯한 청량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차가운 참치회를 와사비를 풀어넣은 간장에 찍어서 크게 한입. 기름진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쫀득한 식감이 다시 술을 부른다.
이제 막 시작하는 뉴스를 보면서 시온이 그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겁니까?"
"글쎄"
솔직히 별다른 계획 같은게 있을리 없었다. 지금까지 한 일들은 대부분 최악이 즉흥적으로, 충동적으로 한 것 뿐이다.
지금 와서 계획을 물어본다고 한들 제대로 된 계획이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그의 성격상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리 없다.
"우선 라쿤맨은 계속 쭉 밀고 나가봐야겠지. 간간히 시간 날 때 적성종이나 때려잡고 다니면 할일은 충분할것 같은데?"
"정체는 언제 드러내실겁니까?"
"내가 때려치고 싶을 때. 영웅이란 놈들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 이름을 지고 가는 놈들이지만 나는 욕 들어처먹으면서 까지 영웅질 할 성격이 아닌거 알잖아. 언젠가 승질나서 가면 내던지고 죄다 때려부수고 다닐 때까진 라쿤맨 하지 뭐"
"지금 당장 카메라 앞에 나가서 자기가 라쿤맨이라고 정체 밝힐줄 알았는데 의외입니다"
"야, 남자가 가오가 있지 어떻게 두어번 나온거 가지고 정체를 드러내는 히어로 같은게 있냐?"
"영웅이 가오가 필요하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무슨 가오가이거입니까"
"사실 가오는 용기였다는 소리여 뭐여"
두사람은 농담과 함께 낄낄거렸다. 이윽고 뉴스가 시작하자 그쪽에 시선을 모았다.
첫번째 뉴스로 최악이 라쿤맨으로서 참치를 들고 적성종을 쓰러트리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