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21/507)



〈 21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내가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귀환물 같은 종류에서 보면 꼭 주인공이 대마법사라서 어떤 일에든 만능이거나 아니면 잡일 시킬 수 있는 부하를 데려오거나 둘중 하나더라.

일단 마법쪽은 내가 자질이 안되서 배우지 않았다. 배운다면 어느정도 실력은 쌓았겠지만 그래봐야  수 있는데는 한계가 있다.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출나게 좋은편은 아니라서 기억을 조작한다느니, 마법 도구를 만든다느니 하는건 전혀 못할게 뻔하다.

둘째로 부하인데.......나는 시온처럼 환생을 해도 이어지는 인연의 친구도 있다. 하지만 부하라 부를만한 사람은 없다. 나는 환생자라 앞으로 얼마나 더 환생할지 모르는데 그런 나를 받들어야 한다면 지옥에 떨어진 것도 아닌데 과한 횡포다.


나랑 평생 함께할 사람은 시온이면 족하다. 지금도 솔직히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나도 내 능력으로 그 뒷처리를 할 수 없다는 소리다. 마법을 쓸 수 있던, 아니면 유능한 부하가 있던 사건을 덮을 방법이 없다.

기껏해야 전부 죽여서 입을 막는 것 정도. 만약 그 자리에 히비키만 없었다면 진짜로 죄다 죽이고  막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번 일은 사안이 좀 커서 나중에 들킬게 시간문제니까 앞으로 정체 숨기는건 신경 안쓰기로 했거든.

화재 현장에서 사람을 구해 온 것이랑. 마스터급 유저도 버거운 적성종을 혼자서 죽인 것의 차이는 크다. 이 소식이 들어가면 한국에서도 나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할 것이다.


시온한테 부탁하면 기록이나 데이터는 전부 지워주겠지만 내가 똥쌌는데 마누라한테 치워달라고 하면  좋겠다. 괜히 자존심 세운다고 따지기 이전에 책임의 문제다.

"일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더라........직선으로 가면 그래도 꽤 짧겠지?"

일단 바다로 가야한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지만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로 가서 헤엄쳐서 튀면 그만큼  돌아서 가야 한다.

가장 빠른 방법은 우선 직선으로 일본 열도를 관통해서 동해쪽 방향의 바다로 나간 다음에 헤엄쳐서 한국까지 가면 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아 경치 구경이나 하면서 도쿄에서 나가노 방향으로 이동중일 무렵. 시온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핸드폰은 적성종으로 인해서 EMP에 휘말려 못쓰게 되었지만 시온이 만들어준 아이언 라쿤 슈트에는 통신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짱짱 인공지능 비서 시온입니다.


"앗, 비서라면 역시 사장님 책상 아래에 있어야 하는 직업인데"

-집에 가면 그런 플레이를 원하시는겁니까. 한번 고려는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사이즈에 맞는 정장이 없어서 사야할겁니다.


"아무튼 어쩐 일이야? 아, 피난은 제대로 했어?"


-피난처에서 지금  나왔습니다. 곧바로 귀국하려고 공항으로 왔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해보니 슬쩍 비행기 타고 귀국해도 될것 같은데........"


-이쪽은 경계가 삼엄합니다. 특히나 공항쪽에 포스 유저로 보이는 사람도  배치되어 있어서 출국 심사도 엄격하게 하고 있습니다.

"직접 만나본 사람이 아니면 내가 들킬 가능성도 적지만.......혹시 모를 때를 생각해야겠지"

들키는건 상관 없는데 그러면 그 자리에서 시온이 휘말린다, 내가 칼빵 하나 맞는거랑 시온이 한군데 작게 베이는거랑 둘중 어느거 선택할거냐고 물으면 닥치고 후자다.


-그런데 당신은 왜 공항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겁니까? 배라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겁니까?

"아니, 헤엄쳐서 가려고"


-........


"야, 비행기도 그렇게 검사하는데 배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 아......그러고 보니 분명 내거 입국 기록은 남아 있을텐데"


-제가 지워두면 됩니다.


"내가  일에 네가 힘쓰면 미안해지는데"


-뭘 이런거 가지고 그렇습니까. 아, 방금 지웠습니다.

역시 외계인. 21세기 지구의 컴퓨터는 가뿐히 해킹할 수 있다. 다른 이능이 들어간 컴퓨터가 아니라면 더욱 쉽다.


이로서 나는 한국에서 출국한 기록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나는 전산상으로 아직 한국에 있으면 해외로 나간적 없는 사람이다.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가면 알리바이 빼고 완벽하다. 아니, 애초에 나간적이 없으니 알리바이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의심도 안할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헤엄쳐서 가는겁니까.

"응? 아, 그러고 보니 뛰어서 가도 되겠네. 물 위도 걸을  있으니까 딱히 수영 안해도 되겠구나?"


-그게 아니라 공간을 찢어서 이동해도 되잖습니까.


"......."

나는 빡대가리가 확실하다.

평소에도 나쁘진 않아도 좋은 머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간단한 방법을 두고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진짜 빡대가리가 확실한듯 하다.

-바보 아닙니까.


"나도 휴먼이야, 휴먼! 가끔 잊어버리고 실수  수 있는거지! 세상에 실수 하나 없는 녀석이 있겠냐!"

-아무튼 먼저 한국으로  계십시오. 저는 오늘 비행기라도 타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치만......"


-무슨 일입니까?

"상남자 특) 내뱉은 말은 지킴"

-아니, 편한길 냅두고 진짜 수영해서 한국까지 돌아갈 생각입니까?

"다른 이유도 있어. 내가 여기 있으면, 적어도 그쪽의 감시망은 옅어질테니까"

요컨데 미끼다, 성동격서. 내가 난리피우면 시온이 일본을 빠져나가기 한결 편해진다. 목격 정보만 어느정도 뿌리기만 해도 관심은 내쪽에 집중될테니까. 쫒아오더라도 추적은 못할거다. 레이더가 아무리 좋아도 고속으로 움직이는 사람만한 것을 추적하기 어려울테고. 무엇보다 내가 전파 정도는 교란시킬거니까.


아키하바라에서 도망친지 꽤 됐는데 벌써 추적자가 붙은 기척이 느껴졌다. 거리는 두고 따라오기만 하는게 이쪽 방면의 일을 하는 모양인데........일본이니까 닌자려나? 오오, 나선환 같은거 쓸  있으면 한번 보고 싶다.

추적자가 붙어도 상관 없다. 애초에 따라올 수가 없을테니까.


능력을 이용해서 바닥에 힘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고 전력으로 짖밟은 뒤에 점프. 능력에 육체 강화까지 더해지니까 단숨에 고층 건물 정도는  아래에 보일 정도로 작게 보였다.


주변 배경이 휙 휙 지나가는데 시속으로 따지면 F1그랑프리에서나 나올법한 레이싱카를 끌고와야 내 옆에서 나란히 달릴 수 있을텐데. 하물며 반쯤 하늘을 나는거나 마찬가지인 나를 추적하려면 사람은 커녕 헬기나 전투기가 와야 따라잡을 수 있다.

-지금 막 여권 검사 받고 비행기 탑승했습니다.

"근데 외견상 어린애 혼자 타는걸텐데 뭐라고 안해?"

-어차피 비자 받은 것도 아니고 외견은 서양인이니까  의심은 받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외견도 좀 성장시켜서 바꿨습니다.

"어느 정도로?"


-각선미 쩌는 새끈한 글래머 은발 미녀입니다. 파릇파릇한 20대 초반 모습입니다.


"아, 그거 전에 본적 있었지......."

시온은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서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자주 하는 모습은 있었다. 평소에 하고 다니는 초등학생 외형은 기본 형태고 그 다음으로 자주 하는 모습이 있다면 인간 기준으로 거기서 10년 정도  나이를 먹은듯한 성인 여성의 모습이다.


하도 자주 봐서 내 기억 속에서도 금방 떠올릴 정도로 각인 되어 있었다.


-일본인 특유의 발음으로 영어로 작업 걸어오려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어떤 새끼야?"

-이래서  모습은 하기 싫습니다. 할 때마다 관심이 쏠려서 조용히 돌려보내는게 힘듭니다. 가끔 도를 넘으려는 사람도 있어서.......

"괜찮아? 일본 멸망시켜줄까?"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닌데"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지만 시온이 바란다면 도시를 싸그리 태워서라도 빈대를 잡아줄 생각 있다.

성장폼의 시온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에 입으면 말라보이는 타입의 D컵. 엉덩이는 순산형에 무표정해보일 뿐인 서양 미녀다. 더군다나 초등학생 같아보이는 외견에 가려져 있다 뿐이지 원래 미모가 더 돋보이게 되어서 눈 내린 벌판 같은 곳에 서 있으면 걸작 그림 하나 나올 소재가 된다.


솔직히 여태까지 환생 해오면서 시온보다 예쁜 여자는 몇 본적 없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한다.


이런 마누라랑 결혼하다니 내가 복을 받아도 엄청 받았지.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거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반대라면 해봤는데 구하진 않아서 오히려 의문스럽다.


시온이랑 이런저런 잡담을 떠들다 보니 저 앞에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통화 끊을께. 곧 바다 들어가야 해서 집에서 보자"


-진짜로 수영해서 갈 생각입니까?! 최소한 날아가십시오!

"가다가 참치 보이면 잡아갈께. 참치 좋아하잖아?"

-.......대뱃살은 제겁니다.


시온 특징. 먹을거랑 야한거에 약하다. 아, 야한건 원래 강했었는데 나랑 오래 교제하다 보니까 내성이 떨어졌다. 좀 그런말로 조교되었다고 하려나. 둔감 체질에서 음란 체질로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귀엽고, 예쁘고 외형 바꿀 수 있고, 야하고 돈 많은 어린 아내.

.......뭐지? 완전체인가? 나같은게 시온이랑 결혼해도 됐던걸까? 후회는 없지만 깊은 죄책감이 생겨난다.


풍덩!!


잠깐 사이에 착지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출렁이면서 큰 파문이 일렁였다.


돌아가는 길에 생선 큰놈 하나 있으면 잡아가도록 하자.




* * *  *

내가 물 속에서 가볍게 수영하면서  수 있는 속도는 시속 110킬로미터 정도 된다.

더 낼 수 있지만 애초에 물 속에서  정도 힘을 쓰느니 차라리 물 위를 달리면서 내는게 더 효율적이다. 끝까지 수영하는건 순전히 내 고집이다.


물의 저항이 있다 하더라도 능력을 사용해서 저항을 줄이고 신체를 강화시킨 뒤에 헤엄치면 가볍게  정도는 나온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과 비슷한 속도지만 여긴 바다다. 수심도 좀 있어서 그냥 헤엄치기만 하면 장해물 없이 쭉쭉 나아갈  있어서 속도가 잘 나온다.

빠르게 지나가는 해저 풍경. 해외의 관광으로 유명한 곳에 흔히 보이는 알록달록한 산호초나 열대어는 보이지 않아도 해저 생태계의 모습은 나름 구경할만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풍경을 좋아하는 편이다. 인간이 손대지 않은 환경 자체의 순수함이 좋아서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순수하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풍경도 좋아한다. 인간의 열정이 뭔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해외 유명 건축물을 찾아보기도 한다.

"참치발견!"


수중이지만 마스크 덕분에 숨도 쉴 수 있고 말도  수 있다. 그래봤자 수중이라 마스크 안쪽에서 울리고 말 뿐이지만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이라도 해줘야 심심하지 않다.


딱 맞게 지금 계절도 여름. 참치가 동해 쪽에 올 시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해쪽을 걸쳐서 올라갔다가 가을 되면 다시 내려온다. 그게 참치의 생태계다.

수십마리의 참치가 빠른 속도로 헤엄치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였다. 참치도 고등어 과라서 등푸른 생선 계열이라 햇빛에 반짝이는 겉표면이 예쁘다.


나는 놈들의 옆을 나란히 헤엄치며 견적을 떠보았다. 수십마리의 참치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살이 잘 오른 맛있어 보이는 놈을 찾는다.


참치의 유영 속도까지 따지면 마치  뚫린 8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상황같지만 치이면 장난 아니다. 나야 능력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참치는 몸무게 1톤짜리 주제에 나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헤엄치고 있다. 사람은 커녕 저 조건으로 부딪힌다면 작은 보트 정도는 뒤집어 엎을 수 있을 정도다.


"아, 요놈 살이 투실투실 잘 올랐네"


나는 수십마리의 참치 떼 중에서 가운데 있던 한놈을 콕찝어 헤엄쳐 들어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붙잡아 등 위에 올라탔다.

전생에 드래곤 라이더도 해봤고 그리폰 라이더도 해봤지만 참치 라이더는 이번이 처음이다!


"새끼, 이대로 해운대까지만 가자. 크, 바다 자가용 오졌다"


참치가  말을 들을리는 없지만 생물인 이상 생존 본능은 어쩔 수가 없다. 슬쩍 살기를 흘려내서 방향을 유도하자 그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부려먹은 다음에 먹기까지 한다면 꽤나 양심에 찔리지만 결국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우리 마누라 뱃속으로 들어갈테니까 죽어서 극락왕생하거라. 사실 천국같은건 없지만.

몇시간은 참치를 타고 가고, 몇시간은 내가 헤엄친다. 중간에 어느쪽인진 몰라도 잠수함 같은걸 봤지만 슬쩍 모른척 하고 넘어갔다. 솔직히 이 바닷속에서 참치타고 다니면 아무리 레이더라도 구분할 수 없다.

만약 레이더로 참치를 타고 있는 사람을 구별할  있는 수준의 기술력이 우리 나라에 있었으면 바다에서 우리 나라 이길만한 곳이 없겠다. 사실상 무리다.


일본 쪽에서도 추적할 생각은 못하고 있는듯 하다. 내가 한국으로 가는 경로에  잠수함이나 구축함이 딱 있는것도 아니고 한번 놓친 이상 추적하기 어려운데다가 대충 지금쯤이면 우리나라 영해에 들어서서 섣불리  수는 없을 것이다.


독도에는 시도때도 없이 쳐들어오곤 하지만 거기야 원래 분쟁이 많은 부분이니까 그렇다 쳐도 멀쩡한 영해에 들어오면 그건 한판 뜨자는 뜻이니까 국가간의 문제로 번지게 된다.

옛날 같으면 일본도 그런거는 크게 신경쓰지 않겠지만 지금은 적성종이 출현해서 외부로 군사력을 돌릴 틈이 없다. 해양쪽에 대형 적성종이라도 떴다가 제대로 처리 못하면 누구 모가지 하나 날아가는건 일도 아니니까.......아, 일본은 민주주의가 아니였던가? 총리랑 내각이 다 해먹어서 잘 모르겠네.

"하루 조금 안됐나. 생각보다 빨리 왔네"

참치도 타고 수영도 하고, 진짜로 헤엄쳐서 일본에서 한국까지 왔다. 상남자는 자기가 내뱉은 말은 아무리 병신같아도 지키는 법이다. 아무렴.

시온한테 줄 참치도 잡았겠다. 후딱 올라가자. 이대로 바다를 통해서 동해에서 서해쪽으로  뒤에 인천 방향을 경유해서 가도 되겠지만 지금 계절은 여름이다. 한창 피서객들이 많이 올 시기. 슬쩍 구경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부산 어묵 몇개 사가고 싶다. 흠.......시장 쪽에 가면 고래 고기도 팔던것 같던데. 예전에 먹어보고 누린내가 좀 심했는데 시온 주게 사갈까? 적당히 양념이랑 해서 버무리면 누린내 싹 사라질테고, 시온이라면 고기는 안가리고  먹으니까.


아, 지갑이 있던가? 문득  생각에 옷 속의 주머니를 살펴 보았다.

.........카드야 말리면 쓸 수 있겠지만 지폐는 홀딱 젖어 있었다. 일단 육지로 올라가면 카드부터 말려서 현금이나 뽑아야겠다.


 내 감지 범위에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저쪽이 해운대구만. 사람이 바글바글한게 아주 미어 터지기 직전이다.

"동원아, 위로 올라가자"

나는 동원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준 참치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수면에 가깝게 헤엄쳐서 내 상반신은 물 위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있었다. 기척을 느끼는 것이 아닌 저 멀리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해안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또 눈에 띄일지도 모르니까 슬쩍 구석으로 가서 가면을 벗고 가자. 옷은 젖어 있지만 여기는 바닷가니까 수영복은 아니더라도 옷이 젖어 있어도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KTX 표라도 끊어야겠다. 아, 동원이는 들고 갈 수 없으니 냉동을 하거나 해체해서 맛있는 부분만 들고 가야 하........

쩌적.


"아, 시바"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일본의 견종인 시바견 말하는거 아니다. 욕한거다.

차원진 경보도 울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차원이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이래? 1년 전만 하더라도 차원진 경보는 발생 15분......못해도 10분 전에는 꼬박 울려서 대응은 늦더라도 대피는 확실하게  수 있었다.

하지만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도 그렇고, 일본에서도 그렇고. 차원진 경보 없이 다짜고짜 차원진이 열리는 경우가 이번만 세번째다.


........설마 뭔가 기술이라도 발달해서 차원진 열리는게 빨라지기라도 한건 아니겠지? 애초에  지구에서 발생하는 차원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니까 가능성이 높다.

10분에서 15분 사이의 대피 시간이 주어져도 종종 희생자가 발생하는게 적성종 사고다. 그런데 경보 없이 그냥 쳐들어온다면 희생자가 얼마나 나올지 모른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다.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 때도 무시하고 도망쳤는데 이번이라고 별반 다를바 있을까.


"나름 이미지 관리도  해놔야 할것 같은데. 어차피 나중에 얼굴 까발려질거 우호적인 사람이라도 만들어놔야 편해지지"

일본에서 나서기 전부터 이미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 들킬 생각으로 나선 일이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분명히 정체는 드러난다. 내가 빡쳐서 얼굴을 까발리던, 어쩔 수 없는 경우로 인해 까발려지던 말이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된거 이미지 관리나 해야겠다.

마침 무기로 쓸만한 것도 있고.

나는 동원이(참치)의 지느러미를 툭툭 건드리며 나설 준비를 했다.



* * *   *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여름만 되면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만 수만명이 넘어가는 유명한 해수욕장이다. 여름 한철 방문한 피서객만 하더라도 천만명이 넘어갈 수준이니 한국 제일의 인지도를 가진 해수욕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직 여름의 초입에 들어가는 시점이라고 하지만 한국의 날씨는 벌써부터 폭염이 들이닥쳤다. 태풍도 오지 않아서 식지 않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놀러온 인파는 여느 때 못지 않았다.

".......이토록 무더운 폭염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해수욕장으로 있는데요. 그로 인해서 생기는 한철 장사꾼들의 바가지 물가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창 해수욕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와중에서 본업에 충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 들어갈 수 있을듯한 복장이지만 복장만 그럴뿐 해운대에 도착한지 3시간동안 바다에 들어가 본적 없는 진서희 리포터는 카메라를 내리라는 제스쳐를 취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워서 더는 못해!"


"좀만 더 힘내요. 서희 누나. 찍을것만 다 찍고 남은 시간은  놀다 가면 되잖아요"

"특종 하나 잡았는데도 부산까지 보낼건  뭐람. 사람 김 빠지게. 바닷가는 좋지만 들어가보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대충 몇개만 찍자고요, 어차피 재작년에 찍었던거 비슷하게 촬영하기만 하면 되니까 편하잖아요"

"........그래, 고생하라고 부장님이 법인카드도 줬으니까 저녁은 비싼걸로 먹자"


"막 1인분에  만원짜리 회 세트같은거 먹으면 그것도 뭐라 할텐데요"


"아, 몰라몰라. 됐어. 그런것 보다 지금 시원하게 물회나 먹고 싶다. 살얼음 동동 띄운걸로 동치미 국물 부어서 휘휘 저어서 후루룩 먹으면 몇 만원짜리 회가 대수야?"

"크, 물회 좋죠. 점심에 물회 드실래요?"

촬영을 위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온 진서희 리포터는 카메라맨이 건낸 물을 마시면서 숨을 돌렸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때 아닌 폭염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더라도 땀이 줄줄 흐르게 만든다.

아스팔트 위에 있다면 효과는 두배. 찜통에 들어간 듯한 만두의 기분을  수 있을 정도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해수욕을 하러 온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MBS 방송국 소속인 진서희 리포터와 카메라맨 신정수는 더위 속에서 조금이라도 시원해지기 위해 그늘을 찾았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분량을 만들기 위해 해변을 찍는다.

..........물론 중간중간에 비키니를 입은 매력적인 여성에게 카메라가 줌인 되는건 남자로서 어쩔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찍으면 누군가 신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카메라에 붙여 있는 방송국 마크는 불법도 합법으로 바꾸는 힘이 있었다.

"어라?"

정수는 해변을 찍던 도중에 수평선 너머에 허공이 찢어진듯한 모습을 발견했다. 한순간 폭염으로 인한 아지랑이 때문에 잘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수면 한가운데서 반쯤 잠긴듯한 균열은 불길한 기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수심이 깊기에 안전선을 설치 해서 그곳까지 나간 사람은 없지만 아무도 그 균열을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과 거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며 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벌어진 균열은 이윽고 괴물들을 토해냈다. 꿀렁이면서 수면이 출렁였다. 하얀 포말이 일어났지만 깊은 수심 때문인지 괴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누나. 차원진 균열 본적 있어요? 저는 없어서"

"취재 나갔다가 두어번 정도 본적은 있는데?"

"저거 이거 아니예요?"

정수가 방금 찍은 장면을 돌려 서희에게 보여주었다.

그 순간 서희의 등에 싸늘한 한기가 스쳐지나갔다. 폭염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차디찬 한기였다.

적성종이 사람이 많은 지역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지만 체계가 잡혀서 빠른 민간인의 대피와 포스 유저들의 출동으로 인해서 20년 전에 비하면 사망자의 수는 극히 드물어졌다.

하지만 대피할 시간도 없이, 포스 유저가 출동할 시간도 없이 수만명의 인파가 몰려있는 곳에 적성종이 출현한다면 발생하는 피해는.......20년 전의 대공황에 맞먹는 참사가 벌어진다.

출현하는 적성종의 강하고 약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몰려 있나가 문제다.

지금의 해운대는 그야말로 적성종이 날뛰가 가장 좋은 지역이다.

사람은 급격한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굳어버린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뭘 해야할지 뇌에서 판단을 못하기 때문에, 혹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도망쳐야 하는 순간에도 움직일  없었다.

이윽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수면이 출렁이면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공룡을 보는 듯한 외형이였다. 비슷한 동물을 찾자면 코모도 왕도마뱀을 들 수 있다.

네발로 걷고 긴 꼬리와 파충류 특유의 긴 혀를 낼름거리며 세로로 찢어진 눈을 빛낸다. 금색으로 빛나는 눈은 마치 보석 같았지만 섬뜩한 느낌도 주고 있었다. 물론 여기까지만 한다면 좀 많이 큰 도마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놈의 등에 돋아 있는 이상한 알만 아니였다면 말이다.

사람 한명은 너끈히 들어갈  있을 정도로 큰 알, 아니 고깃덩이라고 표현해도 될만큼 징그러운 무언가는 놈의 심장 박동에 맞춰서 표면의 보라색 핏줄 같은 것이 꿈틀대고 있었다. 희미하게 그 안에는 놈과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비쳐보였다.

"꺄아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해변에 울려퍼졌다. 즐거움에서 비롯된 비명이 아니라 공포에서 비롯된 비명이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헤엄쳐오는 괴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흉측한 괴물. 금속 같은 질감의 외피와 꿈틀거리는 알덩어리를 등에 지고 눈앞의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 무작정 달려들고 있었다.

"씨발 뭐야!!"


"꺅! 아아아아!!!"


"밀지마! 밀지 말라고!"


"으아아아아아아!!!"

입을 벌리는 것만으로 성인 남성 정도는 가볍게 삼킬  있을 정도로 거대한 파충류 적성종은 이윽고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헤엄쳐 오면서 몇명이나 되는 사람을 거친 이빨로 씹어 죽여 바다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렸다.

"크록, 크로오록"


파충류 적성종은 가래가 끓는듯한 울음 소리를 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었지만 정해진 루트로 질서를 지켜 피한다고 한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무질서하게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상황에 정작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인파에 밀려 넘어지고 짓밟혀 오히려 몇명 죽이지 않은 적성종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었다.

적성종이 그런 사람들을 보고 우선 한 행동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보다 '사람들을  많이 죽이기 위한' 행동이였다.


놈의 등에 나 있던 알덩어리들이 터졌다. 찐득한 녹색의 액체가 사방으로 터져나오고 그 안에 있던 새끼 괴수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새끼라고 하기에는 놈들의 덩치가 성인 남성과 비슷했다. 어미와는 다르게 두 다리로 서서 꾸익꾸익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신들이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눈앞의 인간이란 생물들을 죽이는 일이다.


"누나, 도망가야 하지 않아요?"

"어디로?"


주변을 둘러보면 이미 인파가 몰릴대로 모여 막혀 있었다. 인근 차도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차를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 사고가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차량들 때문에 안그래도 비좁은 도로가 더욱 비좁아졌다.


지금 당장 뛴다 하더라도 눈앞의 적성종이 달려들어 자신들의 머리를 으스러트리는게 더 빠르다.


포스 유저가 등장하기 전, 인간의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10초에서 9초대를 기록할 때 적성종은 그 기록을 가볍게 부순다. 인간과 같은 조건의 이족보행형 적성종이라도 마찬가지다.


이윽고 도마뱀 인간 같은 소형 적성종들이 활동을 개시했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녹색 진액을 질질 흘리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 달려든다.


퍼억!!


그 순간 어울리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

무언가 고깃덩어리 같은게 짓이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진서희 리포터가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을 때, 그녀는 햇빛에 비치며 반짝이는 푸른색의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생선이라기엔 너무 거대했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묵직해서 차라리 몽둥이라고 하는편이 나았다.

그건 참치였다.

".........???"

의문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쌓여만 갔다.


그녀는 참치를 잡고 휘두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회색빛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면에 그려진 얼룩 무늬와 형태는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모습이였다.

"너구리?"


"난 라쿤이라고 등신아!"


그녀는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상황이 기시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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