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17/507)



〈 17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일본에서 가장 강하면서 동아시아권 TOP 3위 안에 드는 수준의 무력을 가진 사람. 그런 조건이라면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건 아니다.

내가 포스 유저에는 별로 관심 없다고 하지만 유명한 사람은 그럭저럭 알고 있다. TV에도 자주 방송한적 있어서 얼굴은 본적이 있으니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의 매장으로 올라온 우리들은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입니까?"


"쟤"


내가 대충 턱으로 컴퓨터 매장 쪽에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키가 180cm이 넘는 장신인 사람이 많은 시대라고는 하지만 키가 190cm이 넘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건 아니다. 더군다나 옆에 있으면 좀 부담스러울 듯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라면 더욱.

"뭡니까. 보디빌더입니까"

"보디빌더 치고는 근육이 실전형이야"

"무슨 지상최강의 사나이도 아니고 전투로 단련된 실전 근육이라는 겁니까. 역시 일본. 현실을 얕보지 마라 판타지! 하고 외칠 수 있을  같습니다"

약간 갈색이 섞인 흑발에 외모는 남자답게 선이 굵은 스타일이였다. 아무리 동양인을 나란히 두면 같은 동양인도 구별 못한다고 하지만 저걸 보면 일본인은 확실히 아니라고 생각 될 만큼 우락부락한 인상이였다. 더군다나 드러나 있는 팔뚝에는 수많은 흉터가 가득하다. 어떻게 보면 야쿠자로 오해 받을 수 있다.

유전자가  일본인급이구만. 부모님이 열일하셨네.


아무튼 그런 190cm넘는 근육 우락부락남이 컴퓨터 매장을 서성이며 둘러보고 있자 매장 직원도 기겁해서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서비스 직종이라도 저런 사람이라면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만약 팔뚝에 용이라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면 일단 경찰부터 부르고 봤을 정도니 말 다했지.

"어라?"


"왜 그러십니까?"

"아니, 어디서   같은 사람이라서"

"일본에서 제일 쌘 포스 유저라면 TV에도 자주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때 본거 아닙니까?"


"외모에 한정한거 말고. 내면이"

어디 한 분야에 통달하면  보면 견적이 나오듯이 나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닮은 부분을 떠올릴 수 있다.


얼굴을 본적은 있다지만 예전에 어디선가 만나본 적 있는 느낌에 조금 기억을 뒤적거리다가 귀찮아서 그냥 더 안쪽을 보기로 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혼을. 사람마다 지문이 다 다르듯, 쌍둥이라도 겪어온 삶에 따라서 영혼의 형태가 다르다. 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전생에 한번 본적 있을테고 영혼을 보면 누구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여기서 이렇게 만나냐. 게다가 별명도 꼭 지 같은거 달아서는"


".......?"

"넌 모르는 사람일테니까 냅둬. 그냥 옛날 생각나서 그래"

영혼은 윤회를 거듭한다. 윤회사상이라고 해도 되는데 그 영혼은 기억과 업은 제로가 되어 다시 태어나더라도 고정된 영혼은 남는다.

초월자가 되어 영혼의 격이 높은 녀석은 다음 생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사람의 영혼은 내가 아는 어떤 사람과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디까지나 기억이니까.

몇번의 환생을 거듭한 내가 당장 그 기억을 잃어버리면 내가 아니듯이 기억은 사람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환생해서 다른 기억이 죄다 리셋된 사람이 영혼이 같다고 같은 사람 취급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카메라나  보자고. 코미케에서 사진 찍으려고 온건데 얼른 골라봐야지"

"무조건 성능 좋은거! 무조건 예쁜거!"

"예쁘면서 좋은데 비싼건?"


"열려라 지갑의 문!"

카메라 같은 물건은 생각외로 비싸다. 일회용 카메라라면 가격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가 살건 앞으로 종종 사용할 물건이니까 좋은걸 사고 싶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스마트 폰이라는 문명기기 때문에 카메라 같은 물건은 자주 안쓰는게 되어버렸다. 물론 쓰는 사람이 많지만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를 찾는 것과 스마트폰을 찾는 세대간의 차이는 크다.


.........요즘 덕질하는 애들은 하루히도 모르더라. 나중에 자식 생기면 좆 쩌는 이야기 해줄 수 있겠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시온이 하나 골랐다. 종류는 잘 모르고 회사는 소니꺼. 시온이 고른거니 가장 좋거나 가격대비 좋은 물건인것 같다.

"이걸로 결정했습니다"


"왜 소니야?"


"고인이 되어버린 소닉을 기리기 위하여........"


"걘 소니가 아니라 세가잖아. 회사가 틀린데?"


"소니나 소닉이나 자음 하나 차이에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말장난 한번 해봤습니다"


"똑같이 소니의 닉네임은 소닉이냐 그럼"


"........아, 아재, 서십니까?"


"너 오늘 죽었어"

주로 밤일적인 의미로 보내주마. 한창 성욕이 폭발할 시기에 결혼한 남자의 성욕이 얼마나 굉장한지 보여줘야겠다.

계산을 하고 이제 볼일은 다 끝났으니 내려갈 일만 남았던 터라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가던 중에 아까 보았던 남자를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매장 앞에 전시 해놓은 컴퓨터, 그중에서 세일하는 것들을 보고 고민하고 있었다.

딱히 견적 보고 온건 아닌듯 직접 와서 오래 쇼핑하는걸 보면 뭘 살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거보단 옆에 있는게 좋습니다"

"오, 이거 말인가?"

지나가면서 슬쩍 내뱉은 시온을 내가 말렸다. 일부러 간섭하지 말라고 말까지 해줬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저쪽과 나쁜 인연이 있었기는 커녕 반대라면 몰라도 강한 녀석들은 인연이 생기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마련이다.


"솔직히 별것도 아닌거 도와줘도 되지 않습니까?"

"너 임마........"


-주말마다 친구도 안만나고 집에만 있는 것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노는데 친구한테서 전화 온걸 본적이 없습니다. 친구 좀 사귀십시오. 친구 좀.

시온이 슬쩍 의지로 몰래 의사를 전달해 온다.


아니! 나도 친구 있거든! 죄다 군대 가서 나보다 늦게 전역하는 터라 지금은 만나기 어려울 뿐이지! 진짜 친구라고 부를법한 녀석도 두,세명 정도 있다.


운 좋은 놈들이라 대부분 후방으로 빠져서 면회라도 하루만에 만나러 다녀오는게 힘들어서 안만나는  뿐이지 친구는 있다. 누굴 사교성 제로라고 생각하고 있어!

"알려줘서 고마워. 꼬마 아가씨. 컴퓨터는 잘 몰라서 뭘 사야 좋을지 몰랐거든"

"조사라도 해보지 그랬어? 요즘은 인터넷에 견적 내달라고 하면 다 알려주는데"

"인터넷 같은건  성미에 안맞아. 게임도 안하는 성격이라서 한문장 타자 치는데도 5분이나 걸린다고"


"남자가 컴퓨터 안하면 평소에 뭘 하는데?"

"술, 아니면 몸 쓰는거"


 새끼 정말로 내가 아는 그 사람 아니지? 어째 환생해도 술고래인건 변함이 없는것 같을까?

물론 영혼이 같으니 어느정도 유사점은 생기겠지.

처음부터 반말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그게 당연한듯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니 위화감이 사라졌다. 애초에 저런 성격이였기도 하고........아니, 기억 없어서 딴 사람이라니까 왜 자꾸 겹쳐보는거지. 고정관념인가?


"히에이 히비키(比叡 響)다. 올해 35살이지. 직업은 뭐.......몸 쓰는 일 하고 있다만"


"아저씨구만. 최악이야. 22살이고. 이쪽은 내 마누라"


"시온이라고 합니다"

"........마누라?"


"거 이상한 눈은 좀 치워. 얘 나보다 연상이야"


"민증이랑 결혼 증명서랑 여권을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판사님!"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시온을 보던 그는 여권에도 출생일이 2000년대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되어 있자 그런대로 납득하는 눈치다.


"동안......은 좀 많이 동안이군. 아무튼 히비키라고 불러라.  편이 익숙하니까"


"초면부터 요비스테(호칭 없이 이름으로만 부름)는  그렇지 않냐"

"딱딱하게 격식 차리는 것 보다 낫지. 만약 정말로 싫어하는 눈치였으면 그러지 않았어. 처음에 반말로 말 걸었을 때도 불편했다면 바꿨을거라고"

"흠"

.........이 자식 정말로 기억 없는거 맞지? 내 얼굴 보고 이름 듣고 모르는 것 봐서는 진짜 기억 없는것 같은데 성격이 전생이랑 너무 똑같다.

"기왕 이렇게 된거 컴퓨터 고르는 것 좀 도와주지 않겠나? 아는 사람 선물해주고 싶은데 잘 몰라서 좀 헤메고 있었거든. 직원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좀 바쁜 것 같고"

슬쩍 보니까 히에이 히비키가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딴청 피우고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하지 않아도 되는 청소를 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손님을 접대하는  한다거나.


"그냥 아까 추천 해주는거 사는건?"

"생일 선물로 사는거야. 돈은 상관 없으니까 최대한 좋은걸로 주고 싶어"

"누구한테 주는건데?"


"우리 팀......그러니까 직장 막내한테 주려는거야. 컴퓨터 오래됐다고 투덜거려서 이번에 생일 축하 하는 김에 주려고 하거든"

슬쩍 시온에게 눈치를 주니 이미 머릿속으로 견적을 다 뽑은 뒤였다.

"가격은 비싼데 성능은 좋은 것과,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적당한 것이 있는데 어떤게 좋습니까?"

"가격은 상관없어. 돈이야 어차피 썩어 넘치고 쓸데는  마실  밖에 없으니까. 그 술도 주로 회식비라 직장에서 내줘서 사실 그렇게 쓸 곳도 없는데 이번 기회에  쓰지 뭐. 컴퓨터 그거 비싸봐야 얼마나 비싸다고?"


"컴퓨터 무시하지 마라. 부품 하나가 수십만원.......그러니까 수만엔 정도 나가는 물건도 있고 하나 제대로 맞추려면 수십만엔도 생각해봐야 하는게 컴퓨터라고"


"얼마 안하는구만"

이 새끼 연봉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네. 잘되는 치킨집 하나보단 돈 잘벌긴 할 것 같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위험수당은 챙겨주겠지.


"근데 말이야. 댁 같은 사람이면  사람 시켜도 되잖아. 그럴만한 위치가 될텐데?"


"오, 이미 알고 있었냐? 한국인이라서 잘 모를줄 알았는데"


"한국인이라서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어. 댁도 우리나라 마스터 유저 얼굴 모르진 않으면서 뭘"

중국의 용화정.

한국의 이경진.


그리고 일본의 히에이 히비키.


이렇게 셋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마스터 포스 유저다. 간간히 TV에서 얼굴을 비치고 있어서 잘 찾아보면 알 수 있다. 그래도 가끔가다 나오는 수준이라 알려고 하지 않으면 모를 수준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마스터 포스 유저의 수가 9명이던가? 그중 한명이 바로 지금 앞에 있는 히에이 히비키다. 참고로 별명은.......[슈텐도지(酒呑童子)]

나한테는 좀 익숙한 이름이고. 이 남자한테는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이름이다.


"꺼려지진 않나? 포스 유저라고 하면 여러가지로 무서워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게다가 일본이랑 한국은 사이가 좋은 관계는 아니지 않나"

"그게 나랑 뭔 상관이라고. 우리가 지금 국가 대 국가 대표로 만났냐. 걍 관광객 부부랑 현지인이랑 만났는데 그런거 따져야 해?"


"짜식, 시원해서 좋구만"


정확히 말하면 나랑 나라를 따로 보는거다. 국적은 나한테 있어서 의미가 없는데 서로 쌓인 감정을 드러내는게 나한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거지.


"돈 신경 쓰지 않는다면 최대한의 성능이 나오는 쪽으로 맞춰보았습니다. 종이에 적어드릴테니 이대로 배달해 달라고 하면 됩니다"

"오, 고마워. 어떻게 사야하나 막막해서 그냥 비싼걸로 죄다 사버릴까 생각도 해봤거든"

"비싼건 적어도 비싼 값은 하겠지만  모르면 바가지 씌일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싼 것만 맞춘다고 해서 좋은게 아닙니다"

시온이 견적을 낸 종이를 히비키에게 건냈다. 나도 가끔 들어본 회사의 제품들이 몇 적혀 있는게 의견대로 돈은 신경쓰지 않고 옵션만 보고 맞춘것 같다.

"조립은 일본에도 가게가 있을테니 조립해달라고 하십시오. 아, 여기서도 조립 정도는 해줄겁니다"


"고마워,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신세를 졌군"

"그러면 나중에 싸인 한장 부탁드립니다. 유명한 사람 싸인 받는게 제 취미입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주지........그러면 이대로 사면 되겠고. 저녁에 시간 있나?"


히비키가 가볍게 웃으면서 검지와 엄지로 작은 잔을 들어올리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한잔 하자는 표시다.

"좋은 가게를 알고 있거든. 신세도 졌으니 저녁은 내가 사지. 둘 다 술은 마시나?"

"술 좋지. 우리 마누라도 몸은 이래도 잘 마시거든"


"걱정해야 할건 저를 미성년 취급할 가게와 그 가게에 남은 술 재고 뿐입니다"


"자신만만해서 좋구만!"

환생을 하면서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영혼이 같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 생각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법이겠지.



*  * *  *



히비키가 추천한 가게는 꽤 알아주는 철판 요리집이였다. 예약 없으면 받아주지 않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가게 주인이 신세 진게 있어서 언제나 예약상태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십 하고도 몇년 전이였나. 그때 한창 대공황의 여파 때문에 일본 전역을 날아다니고 있었거든. 그때의 여파로 가게가 무너졌던 여기 주인장하고 인연이 있어서 약간 지원 해줬을 뿐이야"


"댁이 지금 35살이랬나........대공황이 20년 전이니까 15살  부터? 소년병은 연합법 위반 아니였냐"

"애초에 우리 나란 군대를 조직할 수 없잖냐. 기껏해야 자위대 정도지. 그때도 적성종 처리에 급급한 나머지 특수 창설 조직으로 소년병이 아니라 공무원 식으로 넘어갔다고"

"우리 나라랑 비슷하긴 하네"

"그나마 취급은 한국보다 낫지만........거기서 거기지. 그나마 포스 유저들 대우가 좋은 곳은 러시아나 미국 정도인거 알고 있지?"

"미국이야 뭐, 영웅 좋아하는 곳이니까 마블이나 DC에서 주식 올라간거 보면 알고 러시아는 귀화 한 사람한테도 대우가 후하니까"

상당히 오래된 가게였다. 적어도 십년 이상은 된듯한 가게라서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미 전화를 해둔건지 입구에서부터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연륜이 있는 중년 남성인데 손에 굳은 살이 박힌걸 보니 직접 일을 하는, 가게 오너이자 주방장인  같다.

"오셨습니까, 히에이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자리로 안내 받았다.

후끈하게 데워진 철판이 반겨준다. 철판 요리는  퍼포먼스로도 볼게 있지만 잘 하면 맛도 좋다. 뭐든 구워서 손해볼건 없다.


"간만에 오셨군요. 이쪽은 친구분이십니까?"

"오늘 사귀었지. 좋은 녀석들이야"


"그러면 실력 발휘 해드려야겠군요. 가리시는 종류라도 있으십니까?"

"딱히"

"다리 달린건 의자도 먹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녀석이 그런말 하지 마라.

시온의 대답에 오너는 살짝 웃으면서 재료를 확인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할까요?"

"기왕이면 야채나 해물부터. 고기는 그 다음으로 부탁할께요"


"왜 고기는 나중입니까?"

"초장부터 무거운거 먹을래? 그리고 고기는 맛이 무거워서 먼저 먹으면 나중에  느끼기 힘들어"

"술은 어떤걸로 드릴까요?"

"일본 술은 기억 나는게 별로 없는데........히비키, 그쪽이 시켜"

"흠, 그러면 가볍게 맥주랑, 다 마시면 저번에 보틀 킵 해뒀던 소주로"


"보틀 킵 해둔 술이 있어? 생각보다 단골인 모양인데"

"자주 오시니까요. 원래 저희 가게는 그런 서비스는 안해드리는 곳이지만 히에이님은 예외입니다. 아, 그러면 먼저 랍스타는 어떻습니까? 이번에 들어온게 싱싱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랍스타면 고기는 뭐가 나온다는 거야.........."


"저희 가게의 와규는 마츠사카와 요네자와,  종류가 있는데 어떤게 좋으십니까?"


"전 둘 다입니다"

"너 임마 먹성 봐라. 집에서는 왜 그렇게 안먹었는데? 돈 없는 것도 아니고"

"원래 여행지에서는 평소보다 많이 먹는 법입니다"


그건 인정한다. 먹는게 남는거라는 말이 있듯이 사진이랑 먹는거, 둘 다 여행지에서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다. 아니, 사실 두개가 대부분이다.


주문했던 맥주가 나오고, 500cc짜리를 한번에 들이켜 금새 절반을 비워버리는 시온을 보며 여러가지 의미로 놀라는 오너의 모습도 구경하고 랍스타를 구우면서 보여주는 요리 실력도 보았다.


맥주는 그냥 물이나 다름없이 갈증 해소용으로 마시는거고 본격적인건 소주 부터다. 일본 소주는 기억이 희미해서 잊어버렸는데 그래도 좋은 물건인지  넘어가는 느낌이 좋다.


"크으, 좋군. 다른 날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을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댁은 포스 유저잖아. 이렇게 나와 있어도 돼?"


"팀에서 정한 숙소에서 일정 이상만 벗어나지 않으면 돼. 이번에는 이 근처로 숙소를 잡았거든. 게다가 우리들이라고 자유 시간이 없는것도 아니고"

"우리 나라는 24시간 대기하던데. 언제 적성종 나올지 모른다고"

"거기 사람 사는 곳 맞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하면 의욕 떨어져"

일단 한국이나 일본이나 국가 소속의 포스 유저는 공무원 취급이긴 해도 어느쪽 공무원이냐가 갈린다. 일본은 진짜 정시퇴근하는 자유가 좀 없는 공무원에 가깝고, 한국은 군인에 가깝다.


주말에도 명목상 대기지 쉬는 날인 것 처럼 말이다. 시벌, 당직 사관 새끼들 쉬는 날에는 냅두면  안되냐.

"그래도 돈 있으면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도 없지"

"반대로  없으면 살기 힘든 나라라는 소리 아니냐"


"일본은 뭐가 많아서 살기 힘들잖아. 포스 유저는 그나마 무난해도 일반인들은 어쩌게"

"나도 방사능은 면역이 아니라.......그런데 그런거 신경 쓰면서 용케 일본으로 왔군"

"방사능보다 내가 더 강해"

"짜식, 패기로워서 좋구만"

농담이라고 생각하는것 같지만 사실인데........방사능 같은 물리적인게 초월자에게 들어먹을리 없잖아. 상위 개념을 때려박아도 안죽는 놈들이 다수인데.

우리 마누라요? 어께 결린다고 잠깐 태양에 찜질  하러 당일치기로 갔다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인 녀석한테 방사능? 퍽이나.


"이야기도 좋지만 고기도 좀 드십시오. 저만 먹고 있지 않습니까"

"너도 술 다른거 마실래? 소주 말고 다른거  있나........"

사장님의 솜씨가 좋은건지 내 입맛에도 그런대로 합격점이였다. 철판 요리를 오로지 맛으로 평가하려면 무엇보다 굽는 사람의 솜씨가 중요한데 그런걸 보면 여기 단골인 것도 납득은 간다.

마시고 먹고, 마시고 먹고. 그리고 떠들고.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도  취했다. 원래는 알콜 같은거 바로 해독 해버리는데 오늘 같은 날은 일부러 취하고 싶어서 내버려 두었다.


몸이  뜬듯한 취기가 오른다.

"신혼 여행? 그냥 여행인줄 알았는데 신혼 여행이라고?"

"어, 결혼식도 안하고 좀 안정된 다음에 온거거든. 그래서 신혼 여행인데도 늦었어"

"부럽구만. 나도 슬슬 결혼 생각할 나이라 걱정인데"

"여자친구도 없어?"

"여자 친구, 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사람은 한명 있다"

"같은 직장?"

"그렇지 뭐"

"너 혼자 헛다리 짚는건 아니지? 너만 호감 있고 저쪽은 별 감정 없는 그런 관계 같은건 확실하고?"

"내가 썸도 구별 못할 남자라고 생각하냐. 적어도 십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야"


"친구라도 오래 사귀었구만. 그 정도면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네. 뭐가 될지는 본인 선택이고. 결혼 할거면 지금부터 확실하게 해둬. 좀 더 가서 보면 늦는다?"


"아직 30대야"


"중반이잖아. 늙는거 한순간이야"

"거 한번 인생 살아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한번이 아니라 열댓번이 넘어간다. 생각외로 시간은 빠르다. 물론 지나고 나면.


어영부영하면서 보냈다가는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금방 과거가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서 전역 같은거. 입대할 때는 도대체 전역이 오긴 하는건가 생각했는데 나도 벌써 전역한지 몇달이 지났다. 군필자에게는 이해가 팍팍 가는 예시다.

"근데 예쁘냐? 그 여자?"

"예쁘지"

"잠깐, 저 놔두고 여자 이야기입니까"

"응, 그래. 너도 예뻐.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입에 바른 말 같지만 봐주겠습니다"

시온도 좀 취한 모양이다. 일단 몸은 평범한 여자애 수준으로 맞추고 있어서 대부분의 신진대사는 기능하니까 알콜이 들어가면 취한다.


"달달 해서 보기 좋군. 신혼이라 그런가?"

"아마 천년이 지나도 신혼일껄"


"결혼 한 녀석들은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신혼 생활만 수백년째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호르몬 작용은 몇년 안간다고 하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애정은 평생 가는 법이다.

"아무튼 그 예쁘다는 썸녀 이야기 좀 해봐라. 어떻게 만났어?"

"나이는 나보다 한살 연상이지만. 후배야. 대공황 후에 만났지. 처음으로 들어온 여자 팀원이라서 여러가지로 챙겨주다 보니까......."

"대충 15년을 잡아도 20대를 함께 보냈다는 소리 아니냐.  정도면 반은 여친이네"

"고백 같은 말은 한적 없지만"

"용기가 없냐?"


"그건 아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불안해서 그럴 뿐이야. 만약 고백해서 사귀기라도 한다면 서로 위험한 곳에 있는걸 탐탁치 않아 하겠지"

"둘중 한사람은 나가야 할텐데. 너는 무리고 말이야"

"그건 그거대로 문제야. 성격상 얌전하게 집에 있을 녀석도 아니고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리게 두는 것도 싫어"

"답은 은퇴다!"

"못해. 아직 30대라고 열심히 굴리는게 정부인데 어떻게 은퇴를 해?  말고 다른 마스터 유저가 있으면 몰라도 후임도 없이 막 은퇴하는건 아니지"

"마스터 유저가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게 보면 한국은 좋아.  누구였더라? 라쿤맨?"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모르는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모르는 일인 마냥 자연스럽게 넘긴다.


"아, 그 백화점 화재 때?"


"젊어 보였는데 실력은 대단하더군. 능력은 뭔가에 간섭하는 형태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육체 강화 능력도 엑스퍼트 이상이지. 제대로 배운다면 마스터는 확실하게 오를 수 있을것 같아 보였어"


미안, 사실 마스터는 뻥뻥 찰 정도로 쌔다.

"그 라쿤맨인지 뭔지가 있으면 한국은 적어도 이경진의 후임이 있는거니까 부러워"


"그런데 뭔 이야기 하다가 라쿤맨으로 빠졌지.......아, 여친 이야기였나. 그러면 둘이 사이좋게 사귀다가 은퇴하라고. 남자가 장년이면 결혼 생각 해봐야 하고, 늦어도 중년에는 해야할텐데 생각보다 시간 없어. 최소한 연애라도 해봐야지"

"연애라.......해보고 싶긴 한데. 어떻게 보면 사내 연애도 되겠고"


"새끼, 그러면 오늘 나랑 주량 대결 해서 지면 고백하기다? 만약에 내가 지면......아, 오늘 산 컴퓨터 비용 내가 대신 대줄께"


"승패가 뭐가 걸렸던 간에 오는 싸움 거절하지 않는게 도리지! 와라!"

서로 아예 소주를 한병씩 까서(그것도 병이 큰 일본식 소주다) 원샷 들어갔다. 속에서 알콜 냄새가 훅 올라온다.


시온은 옆에서 조용히  구워진 와규 스테이크를 잘라 먹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다 바보입니다"

시끄러워, 냅둬!!


그 뒤로 가게 안의 모든 술은 물론 인근 편의점의 술까지 사와서 대작을 하고 나서야 결판이 났다.


"이겼드아아아아아아!!!"


"졌.....다......"

각양각색 수십병의 술병이 바닥까지 놓여져 있고 히비키는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패배를 시인한 뒤에 정신을 놓았다.

나도  많이 마셨는지 정신이 희미하게 알딸딸하다. 기분 좋게 취했는데 바로 해독 해버리기도 싫다.


"아, 맞다아. 물주가 쓰러져서 계산하기가  그렇네에에......."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가게 오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히에이님이 깨어나시면 계산하실테니 걱정마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이번에는 저희가 계산하겠습니다. 저희야 다음에 얻어 먹으면 됩니다"

시온이 시원스럽게 블랙 카드를 꺼내 단숨에 계산했다. 엄청 많이 먹고 마셨는데도 카드 한방으로  되는걸 보니 역시 자본주의 만만세다.

히에이는 지역 대기 문제로 우리가 데려갈 수가 없어서 가게에 잠깐 두고 같은 팀원이 데리러 오게 하기로 하고 연락처를 남겨준 다음에 가게를 나왔다.


"얼른 가자.......아, 호텔은 지금 막차도 막혀서 못가려나. 근처에서 따로 잡아야겠네에"

"당신 입벌리지 마십시오. 술냄새 많이 납니다"


"오랜만에 실컷 마셔서 그래. 친구 놈들이랑 퍼마셔도 이렇게 먹진 않았는데"

시간은 늦어서 자정이 넘었다. 일본도 밤 거리는 밝다. 주로 야근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렇다. 씨발, 밤에도 좀 어두우면 덧나냐.......

일본이나 한국이나 사람 사는건 똑같다. 어떤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거지.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라고 한국이나 일본이나 또라이는 존재한다.

아,   이러지. 진짜 너무 많이 마셨나.


"........오늘은 안할겁니다"


"아니, 왜!"

"당신 입에서 술 냄새 엄청 납니다. 적당히 마시고 분위기 있으면 넘어가겠는데  정도라면 저도 싫습니다"


"손만 잡고 잘께"


"퍽이나 그렇겠습니다"

밝긴 하지만 그래도 자정이 넘어서 인기척이 뜸한 거리를 시온이랑 걸었다. 그나마 이러니 분위기 있고 좋다.


"손 잡아주라"

"왜 갑자기 때쟁이가 됐습니까?"

"추워서 그래"

"지금은 밤이라도 여름 날씨입니다. 후덥지근한 공기도 파악 못할정도로 취했습니까?"


"뭐 어때, 손 잡자. 손. 아이구 우리 마누라 귀여워"


"정말로 취하긴 취한  같습니다"


손을 잡고 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대로 끌어안고 테이크 아웃 해서 호텔까지 가고 싶네.


그런데 남이 보기에는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였나보다.


"저기, 잠시 괜찮을까요?"


야간 순찰 돌던 경찰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철컹철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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