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나와 시온은 결혼식을 올린적이 없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그 다음인 신혼 여행도 간적이 없다. 일단 결혼식은 시온 외견이 그렇고 초대한다고 하더라도 딱히 초대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신혼 여행은 가보고 싶다.
예전에 간적은 있더라도 이 몸으로는 처음이니까. 게다가 부부끼리 여행간다는데 태클 걸 사람이 어디있냐.
"요즘 뉴스에서 차원진 발생 때문에 시끄럽네"
"작년보다 늘어난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은것 같은데 나중에 큰일 나는거 아냐?"
아침 뉴스에서 오늘도 차원진 발생으로 인한 적성종들이 출현했다고 알려주었다. 위치는 우리 나라가 아니라 인근.......그러니까 중국이나 일본 쪽이다.
우리 나라도 그저께 하나 출현 했으니 빈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적성종이 왜 출현하는건진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신혼 여행은 미뤄야 하나......."
"딱히 걱정은 없지 않습니까. 뭐가 나와도 쓰러트리면 그만이고"
"그건 되는데 그 이후가 문제지. 해외에서 그러면 여러가지로 문제가 생겨"
포스 유저가 외국으로 나가는건 절차가 복잡하다. 말하자면 걸어다니는 병기같은게 출국하는 것이니까 어느 국가에서도 엄격하게 검사한다. 외부로 파견 나가는게 아니면 나갈 방법이 없을껄?
하지만 난 일단 표면상 일반인이고 눈앞에 적성종같은게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상 직접 손을 쓸 생각은 없다.
"빈도가 늘어난다는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입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해외 여행이 꺼려질 정도로 차원진이 자주 발생할겁니다"
"그러면 지금이 적기라는거지?"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나가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볼까......."
한달 정도 지나니 백리도, 서애씨도 가게 일에 익숙해졌다. 백리는 포스로 육체강화 하는것에 익숙해져서 일할 때 피로 회복이나 근력 보충용으로 사용하곤 한다.
맛도 철저하게 가르쳐서 그런지 괜찮아졌다. 내가 없을 때 가게도 봐줄 수 있을만큼 좋아져서 안심하고 신혼 여행을 갈 수 있을것 같다.
"이번 코미케 참가는 어때?"
"사고 싶은 동인지라도 있는겁니까?"
"사실 요오망한 파란색 거유녀가 나오는 동인지를 사고 싶었어. 관뒀지만"
"저도 관심은 있습니다만. 요즘 혐한이니 뭐니 시끄럽지 않습니까?"
일본은 아직도 혐한주의를 내세우면서 평소와 같은 지랄을 떨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마치 가끔 북한이 도발하는거랑 같은 느낌이다.
지겹지도 않은건가. 후쿠시마 방사능같은 일본 내부 문제들을 쉬쉬하기 위해서 일부러 바깥으로, 그중에서 가장 시선 돌리기에 좋은 한국을 끼워서 눈감고 아웅식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장담하는데 앞으로 2,30년 뒤에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방사능 문제부터 해결 못하면 일본은 큰 위기를 겪을거다.
"방사능 중화 물질이라도 만들어서 팔아봅니까?"
"냅둬. 200년쯤 지나면 지들도 개발하겠지"
아, 순수 과학 기술이 아니라 포스를 사용한 복합 기술이라면 더 빠를 수도 있다. 원래 과학과 이능이 합쳐져서 발전하면 폭발적인 성과를 이루어내기 마련이다.
"저야 외견은 동양인이 아니니 괜찮지만 당신은 가서 조센징 소리 들을지도 모릅니다"
"상관 없어. 지들이 덤비면 패주면 그만이지"
"그러다 잡혀갑니다"
"몰래 패면 돼. 들키지만 않으면 되고"
그러면 일본으로 해볼까. 시온도 사실 코미케 같은데 관심이 많은 편이고. 방사능은 나나 시온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깝기도 하고 나도 일본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잘 하니까 언어 걱정은 없다.
여행사를 찾아보기 보다는 직접 가서 돌아다니는 편이 좋겠지. 근데 일본 지하철은 던전 수준인데.
여권이랑 짐을 챙겨둬야겠다.
"비자는.......아, 일본은 단기 방문은 무비자로 됬었구나"
"짐은 제가 챙겨두겠습니다. 날짜는 언제로 하실겁니까?"
"다음주나 그 다음주로 해두자. 가게에도 말 해둘께"
신혼 여행 가겠다고 말 해뒀으니 언제 갈지만 말해두고 가게를 맡기면 된다. 이번달은 보너스 조금 챙겨둘까.
"그것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간다로 전화 해두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누구?"
"KFU의 조팀장인지 하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아, 일 있으면 불러달라고 했었으니 국외로 나가는 경우에는 말은 해줘야 할 것 같다.
나는 즉석해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온이 일부러 추적 불가능한 회선을 만들어줘서 연결은 되어 있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이걸로 내 위치를 찾는건 불가능하다.
[아, 네! 조인형 팀장입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전데요. 이번에 신혼 여행을 가려고 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신혼 여행도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가려고요. 일본으로"
[.......예? 일본이요? 해외로 가는겁니까?]
"네"
[포스 유저는 해외로 나가는 일에 절차가 복잡합니다. 특히나 마스터급 포스 유저라면 더욱........아, 일단 일반인이셨죠]
"딱히 나가도 문제는 없으니까요"
[대신 해외에서 라쿤맨으로서 활동은 하지 마셔야 합니다. 국내의 포스 유저가 몰래 해외에 나타나 활동하면 그걸로 밀입국으로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데요. 차원진 경보 들리면 일단 튀는데, 오히려 저번 같은 경우가 드문겁니다"
그때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의 휴게소라서 경보도 울리지 않았던거지 도시같은 일정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곳에는 경보기가 달려 있다. 그거 듣고 튀면 딱히 할 일은 없다.
[그렇지만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차원진 발생 숫자도. 적성종의 수준도 갑작스럽게 상승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러니까 지금 가야죠. 더 큰일 나면 당신이 날 부를텐데 그때 가면 시간이 날지 어떻게 알아요?"
[적어도 지금 상황이 진정 되고 나면 가시는게 어떻습니까? 일본 보다 국내 여행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야"
이게 어디서 지 입맛대로 써먹으려고 지랄이냐.
일부러 전화까지 해서 알려줬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빡치지 않는게 용한거다.
"내가 우리 마누라랑 못간 신혼 여행 지금 가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어디 중동으로 간다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옆 나라로 가겠다는데 댁이 무슨 권리로 막아? 내가 존댓말도 써주고 괜찮게 대해주니까 만만하게 보이든?"
옛날 어디 교회처럼 포교 하겠답시고 저어기 치안 안좋은 나라로 가는것도 아니고 바로 옆나라, 거기에 마스터급 포스 유저가 있는 치안좋은 나라로 해외 여행을 가겠다는데 지가 무슨 상관이냐.
내가 일반인이라고 알고 있었으면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 잘 다녀오거나 방사능 조심하라고나 했겠지 말리진 않았을거다.
오지랖도 오지랖이여야 받아들이지 신혼 여행 가겠다는걸 막는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끊는다"
이제 존댓말 해줄 의미 따위 없었다. 아, 진짜, 여행 전에 기분 팍 상했네.
전화를 끊자 시온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전 국내 여행도 나쁘진 않습니다"
"휴향지마다 바가지 요금 처먹이고 불법으로 설치한 시설로 돈받는 곳은 가기 싫어"
"가끔 당신이 한국 싫어하는거 보면 원래 싫어해서 무작정 싫어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라고 다 싫어하는건 아니야. 인터넷 빠르고 치안 좋지. 돈만 있으면 이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있다고 그래?"
"그렇긴 합니다. 총기 소지 불법으로 치안이 좋은게 어디입니까"
해외에서는, 특히나 미국에서는 적성종 때문에 혹시나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총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늘어났다고 한다. 총기 회사만 신났지. 사실 일반인의 총기로는 적성종에게 데미지 하나 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총기 소지자가 많아진 덕분에 총기 사건도 늘어서 총기 소지가 불법인 한국에서는 해외에 비하면 치안이 좋다.
"옷이랑........뭐, 대충 그렇게만 사가면 되겠지. 혹시 모르니까 지갑은 두둑히 챙겨 가야지"
"파워 블랙 카드!"
"아, 그거 하나면 끝이긴 하네. 그래도 현금은 있어야지"
여행 준비는 기분이 좋다. 챙길게 많긴 하지만 그래도 여행 가는 것이 기분 나쁠리가 없었다.
비행기 표도 얼른 예약 해야겠다.
* * * *
여행 준비는 순조롭게 되었다. 가게에 백리와 서애씨에게 말해 두어서 당분간 가게를 비워도 된다.
여행 기간은 일주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선택한거다.
호텔도 좋은 곳으로 알아 두었고 비행기 표 예약도 끝내 놓았다. 남은건 캐리어 들고 공항으로 가기면 하면 된다.
[네, 형. 가게는 걱정 말고 다녀 오세요]
"그동안 맡길게. 서애씨도 안부 전해 드리고. 가게 망치지 마라?"
[신혼 여행 가서 알콩달콩 깨나 쏟으세요. 올때 선물도 사오고요]
"일본 방사능이 무서워서 뭐 사다주진 못하겠다. 대신 이번달 보너스 챙겨줄께"
[형이야 그렇다 쳐도 형수님은요? 방사능 그거 사람 가리는건 아닐텐데]
"능력 쓰고 다니면 되겠지. 곁에 있는 사람 24시간 내내 보호하는건 일도 아니거든"
사실 시온에게 방사능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숨기도록 하자.
[그럼 잘 다녀오세요. 다음 주에 봐요]
백리에게 마저 인사를 하고 끝냈다. 이제 내일이면 바로 출발이 가능하다.
"필요한건 다 챙겼지?"
"전부 챙겨 뒀습니다. 빠진건 없으니 걱정 안해도 됩니다"
"나는 가끔 건망증이 있어서 깜빡하고 뭐 하나 안들고 갈 때도 있단 말이야......그래도 네가 챙겼다니 다행이겠네"
환생자에 초월자라도 만능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에 불완전해서 망각도 있고 실수도 한다.
필요한 물건 깜빡하고 챙기지 않은 적도 한번쯤은 있다.
"오늘은 그냥 자자"
"내일은 신혼 여행 첫날이라고 준비하는겁니까?"
"많이 먹고 정력이나 보충 해야겠다......일본 본고장 장어 덮밥이나 먹으러 갈까"
아마 코미케 가고 아키하바라 가고 하면 남은건 먹거리 여행 정도나 될것 같다. 아, 거기 한번 가볼까? 사이타마 현의 동물원.
"타-노시한 훔볼트 팽귄을 보러 가는겁니까?"
"그것도 좋겠지. 기념품도 몇개 사고"
생각해 보니까 먹을거는 몰라도 기념품은 선물로 줄 수 있을 것 같다. 방사능 묻어 있으면 제거하면 그만이고. 생각이 짧았다. 기념품 하면 꼭 먹을것만 생각나서 일어난 폐해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다주면 되겠지. 별거 아닌거라도 선물은 받으면 기분 좋으니 쓸만한거나 사봐야겠다.
내일 있을 여행을 기대하며 시온이랑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잠깐 눈 감았다 뜨니까 다음날이였다.
거 참 시간 빠르군.
"챙길거 다 챙겼으니까 바로 가자. 인천 공항이지?"
"10시 30분 짜리 티켓입니다. 그런데 좌석은 그냥 평범한 이코노미 석으로 해도 좋은겁니까? 마음만 먹으면 비지니스 석 정도가 아니라 퍼스트 클래스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 낭비 해서 뭐해. 하루 종일 걸리면 또 몰라도 겨우 두어시간 탈건데 굳이 비싼 자리로 고를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이코노미 석이 좀 더 가까히 붙어 있을 수 있다. 아, 이건 개인적인 욕망이다.
바로 옆나라인 일본까지는 생각보다 많이 걸리지 않는다. 인천에서 도쿄까지 길어야 2시간 가량이라서 잠깐 앉았다가 기다리면 도착한다. 기내식도 안나온다.
우리 짐이 들어 있는 캐리어와 지갑, 그리고 여권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 돌아올테니 문은 잘 잠가두자.
"경비 시스템을 활성화 했으니 걱정 없습니다"
"뭔데? 세콤?"
"별건 아니고 침입자를 이 세상에서 분자 단위로 지워버릴 뿐입니다"
"야, 그거 무섭다. 무슨 경비 시스템에 그런걸 달아놔?"
"농담입니다"
뭐, 알람이라던가 그런거나 설치 해뒀겠지. 시온이 했다니 걱정은 없겠다.
공항 까지는 별일 없이 갈 수 있었다. 공항까지 바로 가는 리무진 버스 타고 가니 금방이다. 한창 날도 휴가철이고 여행을 가려는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이 중에서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으 몇이나 되려나.......
시간을 보니 9시 30분이였다. 비행기 시간까지는 1시간 정도 남아서 아침도 안먹고 나왔으니 배나 채우려고 공항 내부의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메뉴는 무난하게 분식집 같은 곳에서 김치찌개로 골랐다.
"아, 그러고 보니 나중에 김치 찌개 한번 끓여야겠다"
"당신 김치 찌개는 엄청 맛있긴 했었습니다. 일본에서 여행 하고 돌아온 뒤에 해주십시오"
"좋아, 오랜만에 실력 발휘 해야지"
내가 환생을 거듭하면서 쌓은 기술 중에서 누구 죽이는거 빼고 잘하는걸 꼽으라면 역시 요리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취미 삼아서 한거다. 그 중에서 가장 잘하는 메뉴는 김치 찌개다. 가끔 환생한 세계중에 김치가 없는 곳에서는 만든 적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잘하는 메뉴다. 먹는 사람 누구에게나 좋은 평가를 받아서 치킨집을 안했다면 분식집을 했을 정도다.
공항 식당의 분식집은 그냥저냥 먹을만 했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굉장한 맛을 기대하진 않았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서 바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시온의 외견에 표를 확인하는 스튜어디스의 시선이 쏠렸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성인인 것을 알고는 놀란 모습을 보였다.
이번 생에서 처음 타는 해외 여행은 지루한 대기 시간도 즐겁게 느껴졌다. 옆에 시온이랑 꽁냥거리고 있으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면 점심 시간일 것 같은데 뭐 먹을래? 호텔은 신주쿠에 있으니 가는 시간 생각하면 먹는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음.......일본 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초밥이나 회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시내에서 먹을만한게 있겠습니까?"
"정 그러면 좀 늦게 호텔에서 먹던가, 아니면 근처에서 야키니쿠나........앗, 그러고 보니 고독한 미식가에서 나온 가게들 순회 해보는거 어때?"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일단 어딘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니 곧 비행기도 이륙할 준비를 시작했다. 안내 방송과 함께 안전 벨트를 착용하고 조금 기다리자 이윽고 희미한 압력이 느껴짐과 동시에 창밖에 아래로 지나가는 활주로가 보였다.
2시간은 긴것 같지만 의외로 짧다.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해서 음료수를 마시거나 시온이랑 일본에서 뭘 할지 좀 더 세세한 계획을 짜다 보니까 착륙까지 15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시간 지나는게 내 첫 신병 위로 휴가 때와 같았다. 휴가 출발날 피던 담배를 화단에 꽂아놓고 휴가를 다녀왔더니 아직 담배가 타고 있더라, 하는 이야기 같이 빠르게 간다. 군생활도 그렇게 빨리 갔었으면 참 좋았겠다.
[승객 여러분. 본 항공기는 곧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자리에 앉아 안전 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들리자 주섬주섬 내릴 준비를 했다. 캐리어 하나만, 그것도 짐칸에 넣어서 딱히 챙길건 없었지만 여권 같은건 입국 심사대에서 써야 하니까 있나 확인해 보았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조금 기다리자 다른 안내 방송과 함께 다들 내리기 위해 부산스럽게 일어났다.
"다음은 입국 심사대입니까?"
"응? 너 이런데 익숙하지 않아?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에서 있던 기간은 다 합치면 나보다 길것 같은데"
"저는 외계인으로서 지구에 방문한 적이 많아서 특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평범한 정식 절차를 받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그럼 이쪽에서는 내가 위겠네. 해외 여행은 물릴 정도로 다녀봤으니까"
일본은 그냥 관광 목적이면 비자가 필요 없다. 괜히 한국 옆나라가 아니다.
나와 시온은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말이 입국 심사대지 사실 형식상 확인하는 곳에 불과하다. 약간의 질문과 함께 그냥 통과하기 마련이니까.
"안녕하세요.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셨나요?"
심사원이 약간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한국인 치고는 약간 어색한 발음. 일본 공항 직원이니 일본인인게 당연하다.
나는 시온의 여권까지 한번에 건내며 말했다.
"관광이요"
"주로 어딜 방문하실 생각이신가요?"
"일단 제일 큰 목적은 코미케요"
코미케라는 소리에 심사원도 납득한듯 보였다.
"일행분과는 무슨 사이시죠?"
"부부요"
"...........?"
슬쩍, 시온이 혼인 증명서를 꺼냈다. 여권에는 나이가 적혀 있을테니 나이는 괜찮지만 혼인 증명서는 필요하다.
한국의 입국 심사를 맡는 사람이니 한국어는 읽을 수 있을테고 혼인 증명서를 읽자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보여도 성인입니다"
시온이 자기 여권의 인적사항 부분을 보라고 손짓하자 마음으로는 납득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표면상 문제는 없다.
"여행사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오신것 같은데 통역은 어쩌실건가요?"
"저, 일본어 잘해서요. 문제 없어요"
그에 심사원이 일본어로 물어왔다.
"[어디서 머무실 생각이산가요?]"
"[신주쿠의 세를리안 타워 도큐 호텔이요. 예약도 해뒀습니다]"
조금 놀란듯 심사원이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일본어를 잘하시군요. 가끔 하시는 분도 있었지만 발음이 어색하고는 했었는데 같은 일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네요"
"적어도 애니로 배운건 아니라서"
옛날에 일본인으로 환생한 적도 있었다. 원어민 수준의 일본어는 그때 익혔다.
덕분에 듣기랑 말하기는 문제 없고 읽기와 쓰기도 된다.
"어서오세요. 일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심사원이 체류 허가 스티커를 여권에 붙여주었다. 그대로 통과다.
나와 시온은 그것을 끝으로 본격적으로 일본에 발을 딛을 수 있게 되었다.
* * * *
사실 나는 일본에 대한 감정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우호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무분별하게 그냥 옛날에 한국을 침공했던 전범국이니까, 극우들의 행태가 짜증나니까, 그런 이유로 싫어했었는데 우연히 만났던 시위 하나로 인식이 바뀌었다.
이상한 시위는 아니였고, 일본인들이 어색한 한국어로 '친하게 지내요'하면서 돌아다니는 시위였다. 옛날 일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반극우 시위나 친한 시위였을 것이다.
그걸 계기로 좀 더 크게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다. 그때의 나는 무작정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걸 미워했었지 깊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먼저 일부분을 보고 전체적으로 본 뒤 판단하기로 했다.
여러 경험을 격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은 대부분 좆같은건 정부라는 것이다. 극우주의 정책을 내세우는 것도, 꼴통 짓을 저지르는 것도 정부가 하는 일이다.
그런 발언을 하는 정치인이 그때마다 지지율이 올라가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 중에서는 오히려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 왜 우리도 일본 싫어하면서 하반신으로는 친일하는 녀석들이 있잖아.
"사이타마 현으로 간다면 그쪽에 짱구 작가가 살았던 카스카베 시가 있는데 거길 가보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건 몰랐었네. 짱구하면 추억 돋아서 지금도 가끔 보고는 하는데"
동물원이나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쪽에 카스카베시가 있다니 가는게 좋을것 같다.
앗, 지브리 스튜디오 같은게 갑자기 생각 났어. 역시 여행 계획은 짜고 난 후에 생각나는게 더 많다.
밥은 공항에서 나와서 바로 근처의 오타 구에 있는 티티라는 가게에서 먹었다. 여기 고독한 미식가에 나왔던 새우 생춘권을 파는 가게다. 춘권 맛있더라.
신주쿠에 있는 호텔까지는 전철을 타고 가도 꽤 멀었다. 차 하나 렌탈해야 하나 생각중이다.
아니, 그냥 택시를 타야겠다. 이러나 저러나 돈도, 시간도 많이 들면 차라리 편한 택시가 낫겠다.
그리고 호텔에 도착,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세를리안 타워 도큐 호텔이다.
"왜 여길 잡았는지 알 것 같은데"
"설비는 괜찮습니다"
"그게 아니라 호텔 이름이........."
"이름도 타-노시하지 않습니까?"
"걘 프렌즈가 아니잖아"
시설이 괜찮은 고급 호텔이다. 그래서 저녁은 호텔에서 먹기로 했다. 이런 곳 레스토랑은 그럭저럭 보장받는 맛이지. 가끔 뷔페로 하는 호텔도 있는데 그래도 먹기에는 나쁘지 않고. 뷔페는 항상 옳다.
신주쿠 시내라도 돌아다녀 볼까 싶었지만 구경할게 별로 없다. 대부분 유흥가나 회사 건물 같은게 많아서.......하지만 야경은 예쁘다. 저녁을 먹고 시온이랑 같이 방에서 창밖으로 비치는 야경을 구경했다.
룸 서비스로 와인을 시켰다. 난 가리는 술은 없지만 시온은 단걸 좋아해서 디저트 와인 쪽으로 주문했다.
분위기 있게 야경이나 보면서 와인잔으로 건배를 하며 나눠 마시자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도 겉으로 무표정하게 보여도 미미하게 즐거워 하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다. 참고로 이걸 알아볼 수 있는건 나 밖에 없다. 쟤 사촌 오빠도 못알아보는 표정 변화다.
"야경 예쁘지?"
"네, 그렇습니다. 한국은 야경의 불빛이 야근의 폐해 같아서 조금 그랬는데 여기는 느낌이 다릅니다"
"야, 일본도 만만치 않은 블랙 기업들 투성이야. 아마 저 중에서도 야근하는 사람들 빛이 대부분일껄?"
"인간의 피와 땀의 결실이 바로 이 야경이라니. 어쩐지 가련한 느낌이 듭니다"
"나도 네가 안왔으면 어디서 일이나 하고 있었을거야. 막노동 판에서 일이나 해서 밑천 벌어서 작은 푸드 트럭이나 했을지도 모르고"
"남편 내조는 부인의 의무입니다"
"솔직히 내조 수준이 아니라 내가 기둥 서방이 된 기분이야"
그래서 좀 미안한 느낌도 있다. 내 경제력은 내 것이 아니라 시온의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합법적으로 해도 엄청 간단한 일이라 하더라도 계속 신세지는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머리 쓰는 일은 제가. 힘 쓰는 일은 당신이. 그렇게 나뉘어서 서로 지지해 주는게 부부 사이 아닙니까?"
"순수 파괴력으로 따지만 나보다 강하면서"
슬쩍 시온이 주먹을 쥐자 나는 고개를 돌려 야경을 보면서 딴청을 피웠다.
시온이랑 나랑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물으면 내가 이긴다. 하지만 순수하게 다수, 그리고 범위의 파괴력을 따지만 시온이 위다.
나는 보스 레이드용 캐릭터지 공성전 캐릭터가 아니야. 요컨데 난 전사, 시온은 마법사다.
그냥 같이 앉아서 잡담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딱히 돈이 없었어도 시온만 있었더라면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시궁창에 굴러도, 팔다리가 날아가도 그녀만 있어주면 된다.
"아, 술이......."
서로 술이 세다 보니까, 그리고 디저트 와인이라 단맛이 강하지 도수가 강한건 아니라서 쭉쭉 넘기다 보니 벌써 병에 와인이 떨어졌다.
탈탈 털었는데도 한두방울 떨어지고 끝이였다.
"제거는 좀 남았습니다. 한모금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냥 더 시켜도 되는.......데"
시온은 자신의 잔에 담긴 와인을 넘겨주는 척 하다가 자신이 마셨다. 넘기지는 않고 입안에 가볍게 머금었다.
그리고는 씨익, 웃는다. 그 모습에 나는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이거 신혼 여행이다. 그리고 신혼여행 첫날에는 하는게 있지.
"그렇게 말하면 한모금 마셔볼까?"
무드를 내가 아니라 시온 쪽에서 하다니. 아직도 나는 멀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