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KFU 서울담당 67지부 어쩌구 하는 녀석들이 지나간 뒤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금 내기도 싫고 힘좀 써달라고 양손 비비며 뒤에서는 호박씨나 까려는 안면수심의 인간들하고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 그나마 조용히 있었는데 어디서 걸린 모양이다.
"그걸로 추적해 올줄을 몰랐습니다. 저도 예상 못했던거라 증거 인멸같은건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처리해두겠습니다"
"아, 부탁할께"
이미 뉴스로 나간 라쿤맨은 몰라도 내가 춘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자료들은 CCTV나 방금 방문한 녀석들의 지부 컴퓨터에 자료가 저장되어 있을거다. 시온이 있다면 전자기기는 무력한거나 마찬가지니 해킹은 가뿐하다.
3초 뒤에 시온이 다 끝났는지 말했다.
"자료 삭제 해뒀습니다"
"빠르네?"
"한국의 방화벽 수준은 종잇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우드락 수준입니다"
"별 차이 없네"
힘 쓰는 일은 내가, 머리 쓰는 일은 시온이. 그렇게 분담해서 나누고 있다. 나도 멍청한 수준은 아니지만 시온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다.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서 뇌로 사고하는게 아닌 외계인을 무슨 수로 이겨. 한 천년 뒤에 나올 알파고쯤 되어야 비벼볼만 하겠다.
"앞으로 조금 시끄러울겁니다"
"정 그러면 해외로 뜨면 되겠지. 한국에 미련 없어. 해외에서 치킨집이 먹힐진 모르겠지만 다른걸로 사업해도 되고"
애초에 우리집의 재력은 시온에게서 나와서 딱히 내가 일 안해도 된다. 이대로 그냥 전국 일주 돌면서 해외여행이나 해도 돈이 떨어질 일은 없을거다.
시끄럽게 굴거면 왜 한국에 남아있냐? 다 조까고 불편함 감수해서 해외로 떠서 미국이던 러시아던 가면 되겠지. 러시아는 귀화한 사람 대우가 좋더만.
"그래도 전국적으로 시끄러운 일이 아닌 이상 부르진 않겠지. 나도 따로 할 일이 있고"
"가게 일 말고 다른게 있습니까?"
"백리네 아버지도 만나야 하고. 그 외에 찾아갈 사람도 있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남기는 유언은 되도록이면 이루어줘야 한다. 물론 상대가 쓰레기면 그럴 필요도 없지만 내가 저번에 영등포 백화점에서 만난 그 괴인은 자의로 그런게 아니였다.
혼란스런 와중에 간절하게 바라는 무언가를 찾아서 방황했던것 뿐이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제정신을 차려서 마지막에 바라던걸 유언으로 나에게 건내주었다.
"현대 아파트 102동, 703호. 가족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 이름이 성혜야. 아버지쪽은 포스 유저인것 같고. 한번 찾아봐줄래?"
"급한겁니까?"
"천천히 해도 돼"
"그럼 조사는 해두겠습니다. 필요할 때 말하십시오"
슬쩍, 시온이 나에게 다가와 기댔다. 오래 부부로 살아오니 이쯤 되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플레이가 좋으려나"
"개 귀가 달려있는 머리띠랑 꼬리도 준비 했습니다"
"코스프레 플레이? 잠깐만, 꼬리쪽은 착용하는게 엉덩이로.........."
어쩐지 저번에 일본쪽에서 배송 왔더라.
뒤쪽 준비요? 외계인은 화장실 같은거 안가. 진짜로.
* * * *
장사하는 사람에게 일주일은 금방 간다. 특히나 바쁘게 보내면 더더욱. 요 일주일 사이에 손님이 더 늘은 감도 있어서 가게를 더 키우지 않으면 오는 손님들을 다 대접해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치만 여기서 가게를 더 키울 생각은 없다. 원래 잘되는 가게는 리모델링이니 확장 공사니 한 후에도 장사가 잘 되는 경우가 적다. 나야 자신은 있지만 애초에 돈 많이 버려고 장사하는 것도 아니다. 여차하면 때려쳐도 된다.
"그러고 보니 백리야. 너 포스 유저쪽 일은 어떻게 됬어?"
"아......사실 그쪽으로 나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국가직 포스 유저나 기업계 포스 유저가 돈은 많이 벌잖아요. 동생 학비 보태려면 그렇게라도 일 해야죠. 그렇다고 제가 안하면 세금 더 나오고"
"포스 유저는 국민도 아니란건가. 아니, 국민은 맞는데 더 호구란건지. 포스 유저 부과 세금 그거 도대체 누가 만든거야?"
멀쩡한 알바생 하나 잃게 생겼다. 백리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자식 둘이 둘 다 포스 유저인거니까 세금도 더 내야 한다. 소방관 업무에 세금까지. 없는 사람만 죽어나가는게 현실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반대하세요. 형, 이번에 아버지 만날 때 설득 좀 해주실 수 있어요?"
"뭘로? 너 KFU에서 활동하는거 허락해 달라고?"
"네"
"아서라. 뒈지는거 한순간이다. 특히나 너같은 순딩이는 초전에 썰릴껄"
"그치만 그게 더 돈을 잘벌잖아요. 일단 공무원직이고"
"사람 구하는 일이라도 다 좋은 시선으로 보는건 아닌거 알지? 너네 아버지도 소방관이시니까 더 잘알거 아냐"
"........네"
마스터급 포스 유저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 이하의 포스 유저들은 동네북의 대상이다. 왜 늦게 왔냐, 우리집이 박살 났다, 보상은 어떻게 할거냐, 우리 가족 살려내, 구해준 사람에게 보따리 내놓으란 식으로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망을 쏟아낼 곳이 필요하겠지만 대상이 틀려도 한참 잘못 됬다.
그 원망은 비틀리고 비틀려서 혐오에 이른다. 윤리와 도덕심이 동반되지 않은 혐오는 그저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위한 미친놈의 지껄임이자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하다.
"그래도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일단 나랑 너네 아버지랑 만나서 이야기 좀 하고 하자. 괜찮겠지?"
"네, 괜찮아요"
백리가 다 이야기 했으니 백리네 아버지도 내가 라쿤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거다. 백리 성격 보면 심성은 좋은 사람일테니 입막음은 필요 없겠지.
이윽고 약속했던 토요일이 되었다. 나는 단정하게 꾸려입고 백리가 알려준 집주소를 따라 향했다.
백리와 그의 가족들이 사는 곳은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외벽 칠은 새로 해서 겉보기에는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시설들이 조금 오래된 느낌이 있었다. 아마 지은지 20년은 가까히 되어 보인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깐 기다린다. 그리고 인터폰을 받았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신가요?]
"백리가 일하는 치킨집 사장인 최악이라고 합니다"
[아,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들어오세요]
중년 여성의 목소리. 아마도 백리의 어머니인듯 하다. 문이 열리자 곱게 나이가 드신 백리의 부모님이 맞이해 주셨다.
"안녕하십니까. 최악이라고 합니다"
"아, 어서 오세요. 하정욱이라고 합니다. 저희 백리가 신세 많이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외견상 나이는 내가 더 어린데도 무시하는 기색 없이 악수를 청해온다. 가볍게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건냈다.
백리는 집에 없는듯 조용했다. 여동생쪽도 마찬가지인듯 기척이 없었다. 고3이라고 했으니 학원이라도 간것 같다. 아니면 도서관이던가.
"백리 엄마. 커피는 내가 탈테니까 나중에 루리 먹을 야식이나 사오는게 좋지 않아? 다녀오면 배고플테니까"
"손님이 오셨는데 커피 말고 뭐라도 대접해 드려야죠"
"아뇨,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니까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백리의 여동생 이름은 들은 적이 없었다. 이제야 알게 되는데, 이름이 하루리인가. 이름 참 특이하네. 어쩐지 기시감도 느껴지고.
환생을 격다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만나는건 드문일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자주 있었다. 루리라는 이름도 옛날에 가까운 사람의 이름이였다. 추억돋네.
백리 어머니가 잠깐 장보러 나가시고 남은건 나와 백리네 아버지, 하정욱씨 밖에 없었다.
"우선 그때 사고 현장에서 저와 백리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연세가 있으신데요"
"서로 존대하는건 서로간의 존중이 있다는 뜻이지요. 저는 오히려 이게 편합니다"
내가 어지간해서 평대하라고는 안하는데 일단 소방관 직종이면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 환생자라고 해도 외견 나이는 어쩔 수 없으니 하는 부분도 있지만 개념 없는 꼰대나 인성 상실한 쓰레기들에게는 나이가 얼마가 됬던간에 반말부터 깐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혹시 그때 현장에 이상한 남자가 있지 않았었습니까?"
"있기는 있었죠"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다, 라고 대놓고 말하기에는 상대가 나쁘다. 나는 나같이 나쁜 쓰레기들에게는 강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선한 쪽에 가까운 사람에게는 약한 편이다. 강한 놈에게는 더 강하게, 약한 사람에게는 더 약하게 대한다.
"적당히 상대해서 제압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괴이하게 변하면서 혼자 자폭했습니다"
"그렇, 군요......."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눈에 비친다. 자신이 다쳤던 원인이, 그리고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에게도 손을 뻗어주지 못했다는 마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함이였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 없는 쓰레기지만 그래도 동경이나 경외라는걸 안다.
"제가 보기에도 가망없는 사람이였습니다. 이미 이성도 잃어버려서 그렇게 간게 차마 다행일겁니다"
"네,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정욱씨는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건냈다. 마음 깊이 두진 말아야 할텐데 말이지.
"그건 넘어가고. 백리 일로 좀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
"아, 저도 그렇습니다. 그쪽에 관해서 조언을 듣고 싶어서 그런것도 있고요"
소방관이란 직업은 고된 업무에 비해 수입은 짜다. 지원도 잘 안해주는 주제에 월급까지 짜니 하겠다고 지원하는 사람이 적을 정도다.
거기에 막내가 포스 유저인데 시민으로서 살겠다고 하니 그 세금과, 이번에 백리가 포스 유저로 각성했으니 그 문제가 더해진다.
백리도 평범하게 살게 두면 세금이 문제인데. 백리도 이제 성인이긴 하니 본인이 벌어서 살 수 있다. 다만 멀쩡하게 다른 기업 취직할 생각은 버려야 한다.
포스 유저는 걸어다니는 흉기다. 맨손으로 사람 목도 으스러트릴 수 있어서 그쪽 기업이 아니고서야 취직하기는 힘들다. 애초에 그런 자리는 사람이 많아서 더 쟁쟁하고.
돈을 벌라면 할 수 있다. 오히려 노동 직종에서는 포스 유저가 환영받으니까. 가장 약한 포스 유저도 보통사람 열명분의 일은 가뿐하게 해낸다.
단, 장기적으로 보면 안되는 부분이다. 수입도, 안정된 직장도 아닌걸 언제까지 하려고. 평생 상하차만 해서 먹고 살거 아니면 안된다. 그리고 결혼 한 뒤에 자식 가정 조사란에 아빠 직업을 상하차로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걸 하는건 저로 충분해요. 백리나 루리에게 그런 일은 버거울겁니다. 더군다나 포스 유저들은 목숨 걸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런 험악한 일은 부모로서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딸도 올해 고3이라고 들었고. 내년 대학 등록금을 생각하면 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실텐데요?"
"저도, 안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빚 내서라도 키워야죠"
이런게 부모 마음이다. 어떻게 해서 자식 만큼은 좀 더 잘 키우고 싶은 것. 그게 엇나간 부모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바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던데 죄다 개소리다. 그럴 하늘이였으면 진작에 썩어빠진 새끼들에게 벼락이나 떨궜겠지. 세상이 돕지 않으니 나라도 도와야지.
"그럼 이게 어떨까요? 백리를 저희 집 정식 직원으로 들이겠습니다. 뭐, 치킨집이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맞게 챙겨줄거고요"
"네?"
"단순한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저희 집 노하우도 전수해주고 하면 되겠죠. 제가 없을 때 가게 볼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포스 유저가 아니면 힘든 부분도 있어서요. 돈은 벌리고 안정적인데다가 목숨걸고 싸울 필요 없는 직업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최악씨는........"
"저야 신혼이라서요. 가게 건물도 어차피 마누라 건물인데 직업도 없이 있기는 뭐해서 심심풀이 삼아 가게나 연겁니다. 임대료 얼마 안받아도 상관 없고요"
세상 사는데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건 아니다.
그 왜 10억 받고 고자되기 같은것도 있잖아. 물론 그렇다고 성욕이 더 중요하다는건 아니고..........아, 매일 시온이랑 떡치는 내가 할말은 아니군.
"가게를 백리한테 맡기면 마누라랑 같이 못간 신혼 여행이나 가보면 좋겠죠"
"........이렇게 까지 신경 써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솔직히, 마구 퍼주는 호의는 받는 쪽도 거북하다. 어떤 속셈이 있는지. 어떤 목적이 숨겨져 있는지 두렵기 때문이다.
나도 솔직하게 흑심이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그 흑심은 순수하게 백리같이 요즘 보기 드문 애를 곁에 두겠다는 마음이다.
몇번의 환생을 거듭하면서 확실하게 깨달은건 언제까지고 나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환생 중에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적이 없었을 정도로 나는 쓰레기다. 그래서 선량한 자들을, 영웅 같은 사람들을 동경한다.
아무리 중년의 나이에 들었다고 해도 내가 일평생을 몇번을 반복해서 깨달은 답을 이해할 수 있을리 없다. 비유하자면 감옥 속에서 철창 바깥의 태양을 보며 자유를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아, 씨 이러니까 중2병 같잖아.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해도 오히려 납득하지 않을테지. 약간 거짓말을 섞자.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리랑 같이 일하면서 성실한 애라는걸 알았습니다. 아마 부모님 교육 방침 덕분이겠죠. 착해서 오히려 남한테 속고 살것 같은 애는 요즘 세상에 드무니까요. 그런 애라면 제가 없을 때 가게를 잘 운영해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요. 적어도 노력과 심성은 인정해 줘야죠"
초등학생조차 급식충이니 뭐니 하면서 정신적인 성숙이 오는 시대다. 과도한 정보가 그들의 정신을 망치고 있다. 2000년대 이전의 초등학생들은 머리 한쪽을 노란색으로 염색하거나 매직키드 마수리 목걸이 같은걸 하고 다니면 요즘 애들은 학교 끝나면 PC방 가서 고급시계나 롤을 돌리더라. 그러면 부모님 안부 물어보는건 다반사고.
문명의 발전이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과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한국처럼 막장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훗날.......만약에 한 100년 뒤쯤? 그때 사회가 극소수의 기업들에 의해서 대다수의 부가 착취 당하고 국민들이 힘을 잃어 그저 기업의 부속품으로 전락해서 정말로 자유도 뭐도 없는 막장 상황이 된다면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진 모르겠지만 카운트 다운 하나 먹여줄 생각이다.
참고로 야구처럼 삼진이면 아웃이다. 뭐가 아웃인지는 나중을 위해서 아껴두는걸로.
"요즘 젊은 사람들과는 다르시군요"
"젊으니까 꿈을 찾는거죠"
아무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대강 마무리 되었다. 저녁을 먹고 갈 생각은 없으니 일찍 돌아가도록 하자. 집에서 시온이 기다린다.
"그럼 다음에 언제 또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백리 어머님께서 인사 전해 주십시오"
"오히려 폐를 끼친건 아닌가 죄송합니다"
"아뇨, 온 보람은 있었어요"
좋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건 어느 나라 법도냐. 그게 당연시 되는 순간 사회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나는 그런 대우를 해준것 뿐이다.
* * * *
내가 찾아갈 곳은 백리네 집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있었다.
전에 시온에게 조사를 부탁했던 것. 그러니까 영등포 백화점의 방화 괴인의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그 정보를 토대로 나온 결과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채정혁. KFU 소속의 유저급 포스 유저였습니다]
"과거형?"
[기록상으로는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득 그가 마지막으로 했었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살아 있어'라고. 거기까지 연관점이 밝혀지자 내 직감이 썩은내를 맡았다. 아주 짙은 썩은내를.
동족은 동족을 알아보는 법이다. 쓰레기도 쓰레기를 알아보는 법이고. 내가 사람을 죽이는데 죄책감이 없는 비틀린 윤리관의 쓰레기라면 저쪽도 마찬가지로 어딘가 뒤틀린 윤리관의 쓰레기 새끼, 아니 여럿일테니 쓰레기 새끼들이다.
[사성로 104번길에 있는 현대 아파트입니다. 철산 1동 동사무소를 찾아가는게 빠릅니다]
"그 사람이 죽은건 언제야?"
[작년 말입니다]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반년 정도 되었을 뿐이다.
내가 포스 유저를 나누는 등급이 마스터, 익스퍼트, 유저, 워커. 이 넷만 있다는걸 알지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 괴인, 채정혁이 보여준 힘이 고작 유저 수준의 힘이였다면 세계의 있는 마스터급 유저들은 단신으로 국가도 상대가 가능한 초월자 반열에 발을 걸친 수준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그럴리가 없겠지.
미국이나 그런 좀 먼 곳은 몰라도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의 포스 유저들의 수준은 파악해 두었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했냐고? 내 능력은 국 끓여 먹으라고 있는게 아니다. 두개를 같이 사용하면 시너지 덕분에 광범위 탐색도 가능하다.
[현재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채정혁의 부인인 진서애씨. 그리고 딸 채성혜, 단 둘입니다]
"다른 가족 사항은? 시댁이나 친가나"
[둘 다 없습니다. 20년전 대공황 때 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랑 같은 케이스......아니, 나이를 본다면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은게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 잃은 쪽이 맞을 것이다. 가끔 내 지금 몸뚱이 나이가 20대인걸 잊어버리곤 한다.
채정혁을 죽인건 나다. 그리고 이루어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유언을 들었다. 그도 자의로 죽고 싶었던건 아니다. 그저 타의로 죽은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포스 유저였지만 적성종들이 가지고 있는 라프 에너지 또한 깃들어 있었다. 그게 자연적일리 없으니 인위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개자식들이 한건진 모르겠지만 대가를 치루게 해줘야지.
주소대로 도착한 곳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잠깐 기다렸다. 인터폰에서 여린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세요?]
"어, 혹시 여기 채정혁씨 댁인가요?"
[아빠 이름이긴 한데. 누구세요?]
"음.......너네 아빠 지인이거든. 혹시 집에 어머니 계시니?"
[엄마!]
목소리로 들어보아 대충 10살 가량 되어 보인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가.
이윽고 어른 여성으로 목소리가 바뀌었다.
[누구신가요?]
"채정혁씨 댁이죠? 채정혁씨 지인 되는 사람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들어오세요]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마도 이 아이가 채성혜인것 같다. 채정혁이 끝까지 부르짖었던 딸이 바로 이 아이다.
집안의 가장은 죽을 때도 가족이 떠오르는게 당연하다. 그게 미련으로 남으면 죽어서도 편하게 못간다.
약간 동안으로 보여서 나이 보다는 젊게 보인다. 10살짜리 아이가 있다면 일찍 결혼 했어도 30대 중반은 될텐데 어림 짐작으로 대충 40대 초반으로 생각하더라도 꽤 미인이시다. 남편이 돈 벌어다 좋은거 많이 먹인듯 하다. 가족 사랑 좋으시네.
"최악이라고 합니다. 채정혁씨 부인 되시는 진서애씨 맞으시죠?"
"네, 진서애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슬쩍 한쪽 손으로는 핸드폰을 뒤로 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 내 눈매 더러워서 인상 나쁜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심하네.
"예전에 채정혁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입니다. 뒤늦게 찾아 뵈려고 했지만 늦어서요. 죄송합니다"
내가 채정혁과 연관이 있는건 그때 영등포 백화점에서 만난것 뿐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말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신뢰를 받기는 커녕 경찰에 당장 신고가 갈지도 모른다.
"5년 전쯤에 보라매 공원에서 죽을 뻔 했을 때 남편분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그 뒤로 형편이 나아져서 이렇게나마 찾아뵈려고 왔습니다"
"........네?"
어정쩡하고 믿기 힘든 변명이지만 연관성을 찾으려면 이런것 밖에 없다. 사실 5년 전에 보라매 공원에 있었던 사건 때 자리에 있었던건 사실이다.
끼어들기 싫어서 진작에 대피했지만 말이다.
"채정혁씨의 부고 소식도 들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부조금입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슬쩍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시온이 돈칠이랑 기름칠이랑 다를게 없다고 돈 싫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 적당히 써먹으라고 준 돈이다.
얇지만 안에는 큰거 한장 들어 있다. 아, 그렇다고 1억은 아니고 1천만원짜리 수표다.
"이런건 받을 수 없어요"
"아이 키우시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실텐데 받아 두세요. 채정혁씨가 지나가다 딸자랑 하는것도 들은적이 있거든요"
몇번 실랑이 끝에 겨우 주었다. 애 키우는데 돈은 얼마가 있어도 모자라다. 특히나 딸이면 남자애보다 돈이 더 들어간다. 여아용품이 솔직히 더 비싸.
나중에 학원 몇개 보내려면 꽤나 힘들테니 그거에나 보태쓰라고 주는 돈이다.
"아이 키우는건 힘드시지 않으신가요?"
"괜찮아요. 이제 익숙하니까요. 편모 가정으로 키우는게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나중에 가면 아이도 학원이다 대학이다 뭐다 하면서 돈 들어가실 일이 많을텐데. 실례지만 가계 사정을 물어봐도 될까요?"
"괜찮아요. 보험금 받은게 있으니까요"
보험금?
분명 일반적인 보험은 못들거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치아 보험도 나오긴 한다지만 국가직 포스 유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다. 사망률이 높은 직업의 보험은 그만큼 보험금이 높거나 제한이 많을거다.
근데 난 TV에서 광고 하거나 그런건 본적이 없단 말이지. 그런 보험이라면 진작에 대대적으로 광고 내서 홍보라도 했을텐데 말이야.
"애 아빠가 들어놓은 보험이라서요. 장기기증이랑 비슷한 거라........그래서 아이 아빠 장례식도 빈 관으로 치뤘어요"
"아, 그런가요"
슬쩍 실마리를 잡았다. 포스 유저 보험을 기억해두고 적당히 넘어갔다.
"그래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진 모르니까 돈은 많을수록 좋지 않나요? 정기적인 수입도 있는게 좋고. 아직 직업은 없으시죠?"
"........네"
"제가 치킨집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일해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백리를 주방에 맡기면 손이 부족해진다. 알바생을 하나 더 고용해도 되겠지만 기왕이면 더 나은 쪽으로 인력을 보충하고 싶다.
치킨집 수익에서 인건비가 더 빠지겠지만 사실 그렇게 나쁜편은 아니다. 애초에 임대료도 없고 두명 일하는데 그중 한명은 나니까 인건비도 한명분이였다. 내가 빠지고 두명으로 늘어난다고 해도 상관없다.
"치킨집이요?"
"네, 명동의 [닭쳐줄까?]라고. 요즘 꽤 유명해진 집인데요"
"아, 그 집......"
알고 있는지 진서애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우리집,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생각 있으시다면 연락처를 알려드릴테니 전화 주세요"
이쪽도 볼일은 끝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요즘 초등학생들은 급식충이니 뭐니 하면서 순수한 모습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천연기념물 같이 남은 아이도 있는 모양이다. 공손하게 인사 하는 모습이 귀엽네.
꾸벅,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나는 주머니에서 5만원짜리 한장 꺼내서 용돈으로 주었다.
"엄마한테 주고 그 돈으로 과자 사달라고 하렴"
"와아! 감사합니다!"
나중에 나도 이런 딸 하나 낳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