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인생 뭐 있나, 그냥 사는대로 사는거지]
영등포 역에 위치한 백화점이 불길에 휩쌓였다. 간간히 계속해서 들려오는 폭음과 더불어서 떨어지는 파편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였다. 경찰들은 교통과 시민들의 통제를, 그리고 소방관들은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를 위해 장비를 착용하고 돌입할 준비를 한다.
"아직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을거다. 영화관쪽은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것 같으니 그쪽으로 부상자들을 옮겨라, 알았지?"
하정욱 소방위가 후배들에게 말했다. 직급은 팀장 정도지만 이중에서 그를 무시하는 소방대원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 화재가 난 곳은 백화점 본관 쪽이였다. 건물 옆에 위치한 영화관 쪽 건물은 비교적 무사하고 불길도 닿지 않았기에 본관과 연결된 곳을 따라서 안전하게 투입될 수 있었다.
곳곳에 불에 타거나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보인다. 조금이나마 가망이 보인다면 그들도 구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전신이 숯처럼 타버린 몸은 살 가망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화재 장비를, 그중에서 공기 호흡기를 착용한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퍼져 흐르는 사람의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를 맡아야 했을테니까.
"염병, 스프링쿨러는 왜 작동 안해?"
"소방배관이 맛이 갔나봅니다"
"점검 제대로 안했나보네. 시벌, 그래도 무너진 삼풍 백화점에 비하면 양반이지"
이윽고 팀을 나누어 그들은 돌입했다. 사람이 많이 있었을거라고 추정되는 곳을 우선적으로 살피고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폭발에 긴장하며 생존자들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여기 부상자가 있습니다!"
"부상 확인하고 옮겨! 머리쪽에 부상이 있으면 옮길 때 조심 하고!"
조금씩, 조금씩. 대피했다고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백화점과 영등포 소방서는 걸어서도 10분이 채 걸리지도 않는 가까운 거리이기에 출동이 빨라서 매서운 매연 속에서도 생존자들이 있었다.
"괜찮으세요? 서실 수 있겠어요?"
"으, 으......사, 살려주세요........"
그나마 설 수 있는 부상자는 부축해서 빠르게 현장에서 구출했다. 운신이 불가능한 사람은 들것을 이용해 구출했다.
"여기 깔린 사람이 있습니다!"
"사, 살려주세요! 다리! 내 다리!"
"단순히 파편에 깔린거야! 빠루로 들어서 빼내!"
무너진 곳도 있었다. 화염이 이글거리며 그들을 불태우려고 했지만 그들의 의지는 화염보다 강했다.
하정욱 팀장은 쓰러져 있는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 파편에 스친건지 팔에서는 출혈이 있었다. 상처의 크기와 흘린 시간을 생각하면 빠른 치료가 시급했다.
"아주머니, 정신이 들어요? 아주머니!"
"아, 아........."
머리에 상흔은 없기에 몸을 흔들어 의식을 확인했다. 약간이지만 신음성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소한 의식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조금 안심한 그는 들것에 그녀를 옮겼다.
"팀장님! 불길이 거세서 더 못 나갈것 같습니다!"
"펌프로 어떻게 못할것 같아?"
"호스 길이가 부족해요! 중간에 연장해야 합니다!"
하정욱 팀장은 바짝 마른 입에 침을 삼켰다. 더 구하려고 해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지금은 우선 한번 빠진 다음에 좀 더 준비를 하고, 다른 곳에서 오는 지원을 받고 다시 투입하는 것이 좋다. 지금쯤이면 다른 소방서에서도 출동하고도 도착했을 것이다.
"혜, 혜미......저희 혜미 좀 찾아주세요"
들것에 실려 나가는 아까 전의 중년 여성이 중얼거렸다. 딸과 같이 왔던 모양인지 애원하는 목소리로 소방관의 옷깃을 잡았다.
몸도 성치 않았지만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 그녀는 단단히 붙잡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발 저희 혜미 좀 찾아주세요. 우리 혜미, 혜미야.......부탁할께요, 제발 저희 혜미 좀........"
간절한 어머니의 소원이였다. 바람이였다. 그것을 본 하정욱 팀장은 불길 너머를 보았다.
"..........그리 먼데 있진 않을거야"
"팀장님?!"
"잠깐 둘러보고 올테니까 걱정마! 근처에 있을테니까 빨리 찾아서 나올께! 너희들은 먼저 내려가서 지원 받아서 올라와!"
근처에 비치된 소화기를 잡아 핀을 뽑고 불길에 뿌린다. 잠깐이지만 불길이 사그라들고 그 사이에 안으로 돌입한다.
한명만 더.
이번 한명만 더.
그는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히어로라고 묻는다면 맞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슈퍼 파워 따위는 없다. 포스 유저도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으로서 바란다면 열명이던 백명이던 구하는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한명만 더라도 구할 수 있기를.
백화점에 같이 온 아이와 엄마가 그나마 떨어질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미아?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드문 경우다. 가장 평범하고 간단한 이유를 찾는다면........화장실이다.
엄마가 쇼핑 중이고 아이가 조금 컸다면 화장실 혼자 가는 것 정도는 허락했을 것이다. 하정욱 팀장은 이 층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마지막 칸이 닫혀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꼬마야? 안에 있니? 아저씨는 소방관 아저씨야! 구해주러 왔으니까 문 좀 열어주렴!"
조금 기다리자 끼릭, 하고 잠금쇠를 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안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있었다.
"엄마아........."
"네가 혜미니? 네 어머니는 먼저 발견해서 구출했으니까 걱정 마렴"
아이를 품에 안고 자신이 쓰던 공기 호흡기를 대주었다. 몸을 낮추어도 들이 마시게 되는 화재 매연은 성인 남성인 자신보다도 어린 여자애인 혜미에게 더 치명적이다.
들고 있던 빠루로 세면대의 수전을 후려쳤다. 수전이 박살나면서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바깥은 아직도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나갔다가는 방화복을 입은 자신은 몰라도 혜미는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이라도 뿌린다면 그걸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가자 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불길을 넘고 매연을 뚫어 최대한 빨리 탈출하기 위해 달렸다.
"..........?"
그리고 그 도중에 그는 화재 한가운데서 달달 떨며 서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부상의 흔적은 없었지만 제자리에서 떠는것 이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한명만 더.
"아저씨! 이쪽으로 오세요!"
눈에 띄는 부상도 없고 서 있으니 걷거나 달리는것도 할 수 있을거다. 이 매연속에서 어떻게 그러는지는 몰라도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아저씨!"
몸이라도 흔들기 위해 다가가자 그제서야 그는 반응했다.
탁한 붉은색 눈동자. 매연과 뒤섞인 불길과도 같은 색이였다.
"오지.......마!!!"
콰아앙!!!
다시 한번 폭음이 일었다.
* * * *
영등포 백화점 인근은 화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과 더불어서 그것을 통제하는 경찰들로 분주해졌다. 백화점 화재라는 특종을 찍기 위해서 몰려든 기자들은 물론 각자 촬영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아빠......."
지하철이나 버스가 아니라 택시를 잡아서 최대한 빨리 도착한 백리는 불타는 백화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재가 크다. 죽는 사람은 물론이고 다치는 사람까지 합치면 얼마나 되는 수가 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 하정욱도 저 현장에 투입되어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부상자들을 이끌고 나왔다. 방화복과 얼굴에 숯검댕이를 묻히고 겨우 들이쉬는 바깥 공기에 작은 자유를 느낀다.
"현석 아저씨!"
"어? 백리냐?"
"아빠, 아빠는요?"
백리는 그중에서 알고 지내던 소방관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을 찾아 봐도 그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소방관들이 공기 호흡기를 벗어 얼굴이 보이자 둘러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팀장님은 조금만 더 찾고 나오신다고 하셨어. 아마 조금만 있으면 나오실.........."
콰아앙!!!
그의 말이 무색하게 폭발이 일어났다. 건물의 외벽마저 부서져 안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강렬한 폭발. 그 모습에 백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손이 덜덜 떨렸다.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옛날에 적성종과 조우했던 그 때 처럼. 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줘야 할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는 다행히도 포스 유저로 각성한 동생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죽는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다.
여동생이 위험할 때 오빠로서 아무것도 못했다는 감정은 평생 깊게 남았다. 자신보다 여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생각해 아르바이트를 했던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게나마 속죄하고 싶었으니까.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않을건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듯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점차 그의 몸에 뭔가 조금씩 깃들여지는듯한 느낌이 들더니 몸이 가뿐해졌다.
".........어?"
자신의 몸의 변화를 느끼고 백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평소보다도 강한 힘이. 사람들을 막는 임시 펜스 정도는 우그러트릴 수 있는 힘이 느껴진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흰색의 에너지가 주변에서 모이면서 그의 몸으로 흘러들어가는게 보이기 시작했다.
"포스 각성?"
포스 유저들은 다수가 위기 상황에서 각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기 상황에서 절박해진 감정이 포스 각성을 불러 일으킨다. 가까운 예로 적성종에게 쫒기다 각성한 백리의 여동생이 있었다.
힘이 생긴 백리에게 더 이상 뒤를 걱정할 시간은 없었다.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자 단숨에 사람들과 펜스를 뛰어넘었다.
"뭐야?! 포스 유저?"
"와, 방금 그거 봤냐. 쩐다!"
경찰들이 황급히 나섰지만 잡을 수 없었다. 막 각성한 포스 유저라도 일반인 수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만약 포스량의 한계가 없었다면 포스 유저들은 국가에 소속되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 국가를 움직이는 큰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백리는 화재 현장으로 들어갔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매연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스를 다루는 법도 모르고 깨우친 특성 하나 없지만 그저 활성화된 육체 하나만으로도 수백킬로에 달하는 건물 파편들을 밀어내고 화마에도 그을리지 않았다.
"아빠! 아빠! 어디있어요, 아빠!!!"
백리는 아버지를 찾아 돌아다녔다. 폭발이 일어났던 층. 바깥에서도 보았으니 몇층인지는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가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그 안에 대고 소리쳤다.
"아빠? 거기 있어요? 아빠?!"
대답소리 대신에 울먹이는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아아.........."
찾던 사람은 아니지만 백리는 조금 망설이다 건물 잔해들을 치웠다. 일반인은 들기는 커녕 밀 수 조차 없는 무게였지만 포스 유저로 각성한 백리에게는 큰 장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간 파해치자 안에서 방화복을 입은 소방관 한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몸을 숙여서 최대한 보호하는 자세로. 덕분에 아이는 큰 상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공기 호흡기조차 아이에게 주었기에 검댕이가 묻은 얼굴이 보였다. 백리는 그의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흔들어 깨웠다.
"아빠, 아빠?! 정신 차려요. 아빠?!"
"으........"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머리를 조금 부딪힌건지 의식이 희미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정욱은 물었다.
"아,이는 무사 하냐.......?"
".........네, 무사해요. 아빠가 지켜줘서 무사해요"
그런 사람들이다.
백리는 예전부터 봐온만큼 잘 알고 있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저런 부모 아래에서 자란 백리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아들이 눈앞에 있는걸 보고 놀랐다. 이곳은 화재 현장이다. 자신의 아들이 있어야 하지 말아야 할 장소다.
"백리야? 네가 왜 여기에........?"
"지금은 빨리 여기서 나가요. 얼른요!"
"소방 장비가 무거워서........."
"괜찮아요!"
백리가 등에는 아이를 업고 한손으로 하정욱을 들어올려 옆구리에 끼듯이 들었다. 수십킬로가 나가는 소방 장비 정도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막내처럼 포스 유저가 된거냐?"
대답은 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폭발이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니 탈출하는게 우선이다.
나가려는 와중에 백리는 앞에서 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눈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저, 저기요! 거기 괜찮아요? 얼른 그쪽도 탈출 하세요!"
".........으"
"저기요?"
한발 늦게 하정욱이 반응했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은.........
"안돼! 백리야!"
저 남자가 불꽃을 뿜어 폭발을 일으키는 장면이였다.
"나에게, 다가 오지마!!!"
콰아아아앙!!!
전보다 한층 더 격렬한 폭발. 포스 유저로 각성하면서 포스를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된 백리는 알 수 있었다. 저 능력은 자신과 같은 포스 유저로서의 능력이다. 하지만 흰색으로 보이는 가이아 포스와 달리 이질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강화된 백리의 반사신경은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폭발에 반응해 몸을 움직였다. 완전히 피하진 못했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건물이 더 무너지고 이제는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까와 같은 폭발이 몇번만 더 일어난다면 충격이 쌓인 백화점은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백화점의 하중을 지지하는 주기둥들은 무사한 것이 드물었고 그나마 멀쩡한 것이 금이 가 있는 상태였다.
"컥?! 뭐야, 으으......."
백리는 공포를 느꼈다. 만야 그것을 정통으로 맞았다면 운이 좋아야 즉사만 면했겠지 죽는건 다를게 없었을 것이다.
팔 한쪽에는 짙은 화상 자국이 남았다. 뒤늦게 고통이 올라온다. 불타는 고통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에서도 순위를 다투는 것이다. 백리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토했다.
"성혜야, 성혜야아.......난, 나는 왜, 으아아! 아아아아!!!"
탁한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걸까. 상태가 악화된듯 경련이 일어난듯 몸을 떨면서 그에 호응하듯이 남자의 몸에서 불길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백리는 포스 유저로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생이 포스 유저기에 간단한 것 몇가지는 알 수 있었다.
포스 유저는 각자의 재능에 맞는 특성이 있다. 어떤 사람은 손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는 염력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육체를 강화해서 맨손으로 건물을 철거할 수 있는 자질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자질들이 개화된 것을 '특성'이라고 부른다.
남자의 특성은 보아하니 발화와 폭발, 두가지. 다른게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시야에서, 벗어나야......."
감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발화나 염동 계열의 특성은 시야 내로 발현 범위가 한정된다. 그나마 최대로 잡았을 때 그 정도고 더 좁은 범위를 가진 사람도 있다.
하정욱과 여자애를 다시 추스르고 움직였다. 팔에서 느껴지는 화상의 고통이 자꾸 그를 힘들게 하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으아앙......엄마, 아빠아......!"
아이가 울었다. 여태까지 울지 않은게 잘했을 정도로 이런 상황에도 울지 않다가 이제서야 울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남자가 반응했다.
"성혜야?"
우뚝, 남자의 경련이 멈췄다. 마치 드디어 찾던걸 발견이라도 한듯이 탁한 시선이 백리가 업고 있는 여자아이를 향했다.
"성혜야, 거기 있니? 성혜야, 아빠야, 아빠라고. 아빠가 돌아왔어.......응? 약속 지키러 왔어, 엄마랑 같이 소풍 가자고 했었지? 응? 성혜야아......."
눈물을 흘리며, 촛점도 맞지 않는 탁한 눈으로 어디를, 아니 무엇을 보고 있는걸까. 그제서야 백리는 남자가 미쳤다는걸 알았다. 자고로 미친놈과는 상종 안하는게 답이다.
하지만 남자의 관심은 백리가 업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쏟아졌다. 이제 와서 도망치려고 해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다.
"성혜야, 어디 가니? 성혜야?! 성혜야! 아빠 여기 있어! 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쾅! 쾅! 쾅! 쾅! 콰아앙!!
폭발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아까와 같은 큰 폭발은 아니였지만 곳곳에 쌓여진 건물 잔해나 기둥들을 단숨에 박살낼 정도로 위협적인 폭발이였다.
"윽?!"
백리의 신체 능력이 뛰어난건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그 폭발 속에서도 백리와 아이, 그리고 하정욱은 무사했다. 하지만 불길과 무너진 건물 잔해들 때문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졌다.
"성혜야......아빠 한테 오렴......"
비척이는 걸음으로 점차 남자가 백리에게 다가왔다. 아니, 백리가 업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남자에게 여자애를 넘겨줄 수는 없다. 백리는 적어도 싸울 준비를 했다.
뒤로 물러나서 건물 잔해 속에서 손에 잡힐만한 크기의 돌을 잡았다. 시야에 의존하는 타입의 포스 유저라면 그 눈을 못쓰게 만들면 그만이다.
멀지 않은 거리였고 신체 능력도 좋아졌다. 백리가 던진 돌은 그대로 남자의 안면에 처박혔다. 우득,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악! 아아아! 성혜야! 성혜야아!!!"
콰앙!! 쾅! 콰앙!!
눈을 못쓰게 되었으니 함부로 포스 능력도 못쓰겠지 싶었지만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큰 기대였다. 자포자기로 능력을 써대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폭발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바로 앞에서 빛이 번쩍였다.
"앗........?!"
반응하기에는 한발 늦었다.
바로 앞에서 죽음이 들이닥쳐 온다. 도망갈 시간도, 숨을 틈도 주지 않았다.
"짜식,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구만. 이런 세상에 너같이 착해 빠진 녀석은 보기 드물지"
폭발이 마치 굴절된 듯이 꺽여나갔다. 백리를 중심으로 눈앞에 V자 형의 벽이 생긴듯 화염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혀, 형?!"
"그래, 형 왔다."
최악이 왔다.